기획특집

[공간의 기억] ⑩ ‘백주년기념관’ 세 축이 교차하는 제2세기 상징

2026.09.30 조회수 47 커뮤니케이션팀

돌과 유리로 두 세기를 담다

▲ 개교 100주년을 맞아 삼육의 제2세기를 선언하며 세워진 백주년기념관 전면 전경. 과거의 권위를 담은 석조 열주와 미래를 향한 유리 박스가 공존하는 이 건축물의 안팎에는, 치열했던 외관 조율과 땅 밑 수맥을 극복한 공학적 사투가 숨어 있다. 현재 건물 옥상 양쪽에 통신 안테나가 설치돼 있으나, 설계자가 의도했던 순수한 신고전주의 비례와 단정한 지붕선(코니스)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그래픽 작업을 통해 이를 걷어냈다.

1906년 평안남도 순안에서 태동한 삼육 교육 이념은 1948년 이곳 삼육동에 터를 잡으며 비로소 꽃을 피웠습니다. 개교 120주년을 맞아 브랜드전략본부 커뮤니케이션팀과 박물관이 공동 기획한 [삼육 120년 : 공간의 기억]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캠퍼스 곳곳에 숨겨진 건물의 역사를 발굴하고, 낡은 도면과 빛바랜 사진 속에 잠들어 있던 우리 대학의 뿌리를 다시 깨워 기록하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대학의 역사가 한 세기를 넘어서는 2006년, 삼육대는 삼육의명대와의 통합 시너지를 극대화하고, ‘건학 제2세기’를 향한 도약의 상징으로 ‘백주년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다. 터로 낙점된 곳은 1970년대 대학 자립의 뼈대였던 옛 엘리야관 자리였다.

2006년 7월, 엘리야관이 영예롭게 소임을 마치고 철거되면서 터 닦기가 시작됐다. 그해 개교 100주년 기념식 전날인 10월 9일 기공예배를 드렸다. 총 88억원이 투입된 건물은 착공 1년여 만인 2007년 10월 22일 준공돼 위용을 드러냈다.

2천평의 매스

백주년기념관은 흔히 단일 건물로 알려졌지만, 실은 백주년기념관과 국제교육관 두 건물을 이어 붙인 형태다. 건축물대장에도 두 건물은 따로 등재돼 있다. 당초 인가된 규모는 백주년기념관 1천500평, 국제교육관 500평이었다. 개별 건물로는 개교 100주년의 상징성을 담아내기에 다소 왜소한 규모였다. 설계를 총괄한 건축학과 이태은 교수(현 명예교수)는 나란히 들어설 두 건물을 하나의 외관으로 잇는 안을 관철했다. 그렇게 2천평(6415.34㎡)에 가까운 하나의 거대한 매스가 만들어졌다.

▲ 백주년기념관 측면 전경. 단일 건물처럼 보이지만 좌측의 백주년기념관과 우측의 국제교육관이 3층 연결 통로로 맞닿아 있는 구조다. 각기 다른 두 건물을 하나의 열주 파사드로 묶어내 2천평에 달하는 거대한 매스를 구현했다.

건물이 들어설 부지는 캠퍼스의 지형적 맥락에서 매우 까다로운 위치였다. 이 교수는 삼육동 캠퍼스를 세 개의 ‘축(Axis)’이 교차하는 땅으로 읽었다. 사무엘관과 대학교회를 관통하는 초기 삼육동의 ‘옛 축(Old Axis)’, 1980년대 이후 선교70주년기념관(대강당)과 중앙도서관, 아트앤디자인관을 따라 형성된 ‘새 축(New Axis)’, 그리고 정문 소나무 길을 따라 곧게 뻗은 ‘진입축’이다.

이 엇갈린 세 개의 축을 아우르기 위해 설계자는 건물의 평면을 일(一)자나 미음(ㅁ)자가 아닌, 변형된 디귿(ㄷ)자 형태로 비틀어 앉혔다. 오늘날 중앙도서관(새 축)이나 신학관(옛 축), 정문 진입로(진입축) 등 캠퍼스 어느 방향에서 시선을 던져도, 육중한 매스가 겉돌지 않고 주변 풍경과 나란히 정렬된 것은 치밀하게 계산된 공간 배치의 결과다.

▲ 이태은 교수가 제공한 삼육동 캠퍼스 3대 축과 백주년기념관 배치 콘셉트. 사무엘관과 대학교회를 관통하는 옛 축(SUB AXIS)과 대강당·중앙도서관을 잇는 새 축(MAIN AXIS), 그리고 정문 진입로를 따라 들어오는 진입축(노란 화살표)이 교차하는 지점에 변형된 디귿(ㄷ)자 형태의 백주년기념관이 대지 위에 안착해 있다.
▲ 드론으로 수직 촬영한 백주년기념관의 평면 구조. 사진 하단이 정문 진입로를 마주하는 전면 파사드다. 일(一)자나 미음(ㅁ)자 형태를 탈피해 캠퍼스의 복잡한 축들을 흡수하도록 비틀어낸 변형된 디귿(ㄷ)자 평면이 뚜렷이 확인된다.
▲ 정문 소나무 길(진입축)에서 바라본 백주년기념관. 곧게 뻗은 아스팔트 도로와 울창한 소나무 숲이 빚어내는 프레임 너머로 장중한 석조 열주와 뒤편 불암산 봉우리가 단단한 시각적 정렬을 이루고 있다.
▲ 중앙도서관(오른쪽)과 백주년기념관(왼쪽) 사이로 곧게 뻗은 ‘새 축(New Axis)’ 전경. 두 건물이 축선을 따라 나란히 면을 맞대며 반듯하게 정렬해 있는 모습이다.

돌의 역사와 유리의 미래

외관을 결정하는 과정은 치열했다. 대학 구성원들은 개교 100주년의 권위를 대변할 웅장한 서양식 석조 건물을 열망했다. 하지만 설계자는 시대정신을 담은 현대건축을 지향했다. 거듭된 논의 끝에,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묵직한 ‘돌(Stone)’의 박스와 미래 비전을 상징하는 메탈릭 실버 섀시의 ‘유리(Glass)’ 박스를 결합하는 콘셉트가 확정됐다.

특히 전면부 돌 박스는 철저한 고전주의 양식을 따른다. 영국 식민지풍(Colonial)의 이중 열주와 독일 신고전주의 건축가 싱켈(Schinkel)의 비례를 차용한 상단 코니스(Cornice, 처마 돌림띠)를 얹어 장중함을 극대화했다. 이 웅장한 외관은 오늘날 삼육대 정문을 들어서는 이들에게 강렬한 첫인상을 각인하는 랜드마크가 됐다.

시공 과정 역시 엄격했다. 가장 순백에 가까운 색감을 내기 위해 설계자가 직접 중국 칭다오까지 건너가 설화석과 화강석을 검수했다. 기둥의 시공 오차를 없애기 위해 800kg/cm²의 고강도 콘크리트로 일체 타설한 1층~4층 관통 열주는 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빈틈없는 위용을 자랑한다.

▲ 백주년기념관 전면 파사드. 영국 식민지풍 이중 열주와 상단 코니스(처마 돌림띠)로 구축한 신고전주의 ‘돌 박스’ 안쪽으로, 메탈릭 실버 섀시의 현대적 ‘유리 박스’가 중첩된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1층부터 4층까지 오차 없이 일체 타설된 고강도 콘크리트 기둥과 순백의 석재 마감이 장중한 비례를 완성하고 있다.

영구배수공법

보이지 않는 땅 밑의 사정도 녹록지 않았다. 터 아래를 가로지르던 옛 수맥 탓에 여름이면 지하수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파 내려간 지하 7m 공간 중 6m 높이까지 물이 차오르며 건물을 통째로 밀어 올리는 양압력(부력)이 발생했다. 막대한 구조 보강 비용을 쏟는 대신 선택한 것은 ‘영구배수공법(Dewatering)’이었다. 지하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펌프로 물을 빼내 수압을 통제하는 이 기술 덕분에, 건물은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균열 하나 없이 견고하게 서 있다.

이 거대한 상징물에는 동문의 헌신이 스며 있다. 1958년 졸업 후 도미해 평생 의료인으로 살아온 장근청 박사는 “삶의 나침반이 되어준 모교에 보답하고 싶다”며 100만 달러의 발전기금을 쾌척했다. 대학은 그의 뜻을 기려 건물 3층에 동시통역 시설을 갖춘 대규모 국제회의실을 ‘장근청홀’로 명명했다.

준공식에서 서광수 당시 총장은 “백주년기념관은 지나간 100년의 가치와 영광을 돌아보게 한다”며 “새로운 100년의 희망과 비전을 열어가게 될 상징적인 건물”이라고 했다. 돌아보는 100년과 열어갈 100년, 백주년기념관이 품고 있는 ‘돌의 상자’와 ‘유리의 상자’에 정확히 포개진다.

세월이 흐를수록 고색을 머금도록 고른 흰 돌 위에 어느덧 20년의 시간이 쌓였다. 무거운 돌기둥은 지나온 100년의 지반을 지탱하고, 투명한 유리는 뻗어나갈 미래를 반사하며 백주년기념관은 오늘도 캠퍼스의 중심축을 지키고 있다.

취재·글 하홍준(브랜드전략본부 커뮤니케이션팀)
공동기획 최환철(박물관)

ⓒ 삼육대학교 브랜드전략본부 커뮤니케이션팀 supr@syu.ac.kr

[시리즈 연재]
[공간의 기억] ① 삼육동 최초의 건물 ‘실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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