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공간의 기억] ③ 폐철근으로 세운 자립의 뼈대 ‘엘리야관’

2026.04.22 조회수 644 커뮤니케이션팀

험난했던 두 번의 낙성식… 삼육동 최초의 콘크리트 건축물

▲ 1972년 준공된 엘리야관 전경. 현재 백주년기념관 자리에 있었던 이 건물은 현존하는 사무엘관과 형제처럼 닮아 있다. 두 건물 모두 미국 앤드류스대 행정관을 모티브로 설계됐기 때문이다. 3층 규모의 사무엘관과 달리 엘리야관은 2층의 아담한 대칭미를 갖춘 것이 특징이다.

1906년 평안남도 순안에서 태동한 삼육 교육 이념은 1948년 이곳 삼육동에 터를 잡으며 비로소 꽃을 피웠습니다. 개교 120주년을 맞아 브랜드전략본부 커뮤니케이션팀과 박물관이 공동 기획한 [삼육 120년 : 공간의 기억]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캠퍼스 곳곳에 숨겨진 건물의 역사를 발굴하고, 낡은 도면과 빛바랜 사진 속에 잠들어 있던 우리 대학의 뿌리를 다시 깨워 기록하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과거 우리 대학의 본관(행정관) 역할을 했던 ‘엘리야관’은 현재 백주년기념관이 세워진 자리에 위치해 삼육의 70년대를 이끌었던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1967년 교명이 ‘삼육신학대학’에서 ‘삼육대학’으로 변경되고 학과가 4개(신학과, 가정교육과, 농업교육과, 영어영문학과)로 증설되면서, 대학의 확장된 규모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공간이 절실해졌다. 엘리야관은 바로 이러한 도약의 시기를 배경으로 탄생했다.

미군부대 폐철근으로 세운 뼈대

건축의 첫 삽은 삼육대학 시대를 연 클라임스(Rudolf E. Klimes, 구인서) 학장 시절에 떠졌다. 1967년, 클라임스 학장은 새 강의실을 짓기 위해 부평 미군부대에서 폐철근을 직접 구했고, 이를 기반으로 200평 규모의 2층 본관 신축 계획을 세웠다.

1968년 9월 20일 기공식을 거행하며 미군부대에서 얻어온 철근을 잘라 건물 우측의 골격을 세웠으나, 공사는 곧 난관에 부딪혔다.

당시 대학은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재림교회 원동지회(현 북아태지회)의 지원금 4천 달러와 대학 실업부 수익금만으로는 건축을 지속하기 역부족이었다. 결국 철골 구조물만 세워둔 채 공사가 중단됐고, 클라임스 학장은 완공을 보지 못한 채 1969년 9월 일본 삼육학원대학장으로 이임했다.

건축의 막중한 책임은 후임인 김종화 학장에게 돌아갔다. 한국인 최초로 학장에 취임한 그는 외국인 선교사 중심에서 벗어나 대학 운영의 ‘본방인 시대’를 개척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김 학장은 서무과장 김홍량 교수와 함께 실업부 사업을 독려하며 필사적으로 재정을 확보했고, 마침내 1970년 7월 공사를 재개했다.

이는 외부의 도움을 최소화하고 대학 스스로의 힘으로 공사를 완수해 나가는, 자립 기반 마련의 중대한 첫걸음이었다. 경제적 악조건 속에서도 교직원과 학생들의 간절한 헌신이 모여 공사는 다시 활기를 띠었다.

두 번의 낙성

▲ 1971년 9월 1차 낙성식 이후와 1972년 7월 최종 완공 사이, 엘리야관이 우측 날개만 갖춘 ‘미완의 상태’로 운영되던 시기의 모습. 사진 속 인물과 구체적인 행사명은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미상이나, 건물의 분절된 공정 과정을 생생하게 증명한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희귀 자료다. 사진은 저해상도 원본을 AI 툴을 활용해 고해상도로 업스케일링 했다.

엘리야관의 완공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1971년 9월 1일, 중앙 부분과 우편 날개만을 간신히 완성한 채 ‘미완의 낙성식’을 먼저 거행해야 했을 만큼 그 과정은 고단하고 험난했다. 이듬해인 1972년 7월 10일에 이르러서야 남은 왼편 건물을 마저 올리며 비로소 양 날개를 갖춘 엘리야관의 온전한 모습이 세상에 드러났다.

본교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슬라브 건축물이었던 엘리야관은 2층 규모, 총면적 1천308.76㎡(395.89평)로 지어졌다. 미국 앤드류스대의 행정관을 모티브로 삼아 설계됐는데, 중앙 입구를 기준으로 좌우가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구조였다. 현재 남아있는 사무엘관(1978년 12월 14일 준공) 역시 동일하게 앤드류스대 행정관을 본떠 건축되었기에, 당시 엘리야관과 매우 흡사한 외관을 띠었다.

건물 내부는 강의실, 교수실, 위생실을 비롯해 후일 어학실습실과 전산교육실로 활용되며 당시 삼육동에서 가장 현대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특히 건물 앞쪽으로 넓게 조성된 잔디밭은 주변 환경과 수려한 조화를 이루며, 기존 소강당에 머물러 있던 대학 문화의 중심을 엘리야관 광장으로 옮겨오는 역할을 했다.

▲ 엘리야관 앞 잔디밭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학생들. 건물 앞쪽으로 넓은 광장을 조성해, 기존 소강당 중심이었던 대학 문화를 캠퍼스 심장부로 옮겨오는 역할을 했다.

30년 역사 품고 ‘공간의 기억’으로

한때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혔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엘리야관의 건축적 완성도와 미감은 뛰어났다. 비록 정확한 선정 기관이나 연도 등 세부 출처는 미상으로 남아있지만, 당시 캠퍼스 내에서 이 건물이 지녔던 위상과 상징성을 충분히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본방인 행정자들의 헌신과 대학의 자립 의지가 빚어낸 엘리야관은 삼육대학의 교육 여건을 혁신적으로 개선하며 캠퍼스의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렇게 30여 년간 대학의 역사를 묵묵히 이끌어 온 엘리야관은 개교 100주년을 맞은 2006년 7월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백주년기념관 건립 과정에서 철거되며 영예롭게 그 소임을 다했다. 물리적 형체는 자취를 감추었으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스스로 일어서고자 했던 70년대 삼육의 자립 정신은 엘리야관이라는 이름과 함께 ‘공간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 엘리야관 전경

글·자료 최환철(박물관)
기획·편집 하홍준(브랜드전략본부 커뮤니케이션팀)

ⓒ 삼육대학교 브랜드전략본부 커뮤니케이션팀 supr@sy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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