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기억] ④ 개척자들의 첫 보금자리 ‘사택’
전쟁의 상흔 속에서 온기 나누던 공동체

1906년 평안남도 순안에서 태동한 삼육 교육 이념은 1948년 이곳 삼육동에 터를 잡으며 비로소 꽃을 피웠습니다. 개교 120주년을 맞아 브랜드전략본부 커뮤니케이션팀과 박물관이 공동 기획한 [삼육 120년 : 공간의 기억]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캠퍼스 곳곳에 숨겨진 건물의 역사를 발굴하고, 낡은 도면과 빛바랜 사진 속에 잠들어 있던 우리 대학의 뿌리를 다시 깨워 기록하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삼육동 캠퍼스에 첫 번째로 세워진 건물이 학생들을 위한 ‘실업관’이었다면, 두 번째로 지어진 건물은 학교의 기틀을 다진 이들의 보금자리인 ‘사택’이었다. 초창기 사택들은 현재의 선교70주년기념관 뒤편과 후문 쪽 태강삼육초 인근에 자리했다.
이후 대학이 확장되면서 캠퍼스 내 사택의 규모도 꾸준히 늘어났다. 1950년대 초반 13채 남짓이던 사택은 1985년 건축물대장에는 37동까지 증가했다. 세월이 흐르며 초창기 사택들이 언제 철거됐는지 정확한 멸실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캠퍼스의 태동기를 함께한 첫 보금자리의 기억은 여전히 묵직한 의미를 지닌다. 이번 편에서는 삼육동 시대 ‘초창기 사택’에 한정해 그 시절의 공간을 되짚어 본다.
개척자들의 첫 보금자리
초창기 사택은 크게 교직원 사택과 선교사 사택으로 나뉘었다. 1948년 착공해 이듬해 준공된 교직원 사택은 1호부터 10호까지 총 10채가 비슷한 구조로 지어졌다. 약 17평 규모의 흙 블록 목조 건물에 기와를 얹은 소박한 단층집이었다.
사택의 첫 입주자들은 김성수(실업부 책임자), 정택혁(재무), 조돈하(국어), 이응준(성경교사 겸 남사감), 김영도(화학), 임병의(총무), 이여식(신학교), 최명환(수학), 김기방(미술), 손재목(실업부 부책임자) 등 초기 삼육 교육을 이끈 주역들이었다.

이어서 세 번째 건물로 1949년에 완공된 선교사 사택 1~3호는 교직원 사택보다 규모가 컸다. 목조 시멘트 기와지붕의 2층 형태였으며, 가옥대장에는 1층 38평, 2층 27평 등 총 63평 규모로 기록돼 있다.
첫 입주자인 제임스 리(James Milton Lee, 이제명) 교장과 케네스 미첼(Kenneth Leland Mitchell, 민제일) 선교사는 캠퍼스 부지를 확보하고 초기 건축을 이끌며 본격적인 삼육동 시대를 연 인물들이다.
마지막 선교사 사택 3호에는 재림교회 한국연합회 출판부 총무로서 문서전도 사업을 수행한 세실 윌리엄스(Cecil Arthur Williams, 위리암) 선교사 부부가 거주했다. 당시 이 사택들은 모범적인 가옥으로 호평받으며 외부에서 견학을 올 정도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러나 평화로웠던 보금자리는 6.25 전쟁과 함께 깊은 상흔을 입었다. 북한군에 점령당한 삼육동은 1천여 명의 신병을 수용하는 의용병 훈련소가 되었고, 선교사 사택은 부대 본부와 야전 병원으로 징발됐다.
피난을 떠나지 못한 교직원과 학생 76명은 사택과 불암동 주변에 숨어 지내야 했다. 서울 탈환 직전에는, 사택을 지키던 학생 몇 명이 인민군 패잔병에게 발각돼 총살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다행히 영어교사 김기춘 선생이 진격해 오던 미군 병사에게 다급히 상황을 알렸고, 미군이 선교사 사택 쪽으로 달려가 학생들을 극적으로 구출해 냈다.
1951년 11월, 학교가 서울로 복귀해 ‘삼육신학원’으로 다시 문을 열었지만 교정은 온통 파괴돼 어수선했다. 여학생들은 화마를 피한 선교사 2호 사택을 수리해 기숙사로 사용했다. 교직원 6호 사택에 마련된 임시 식당에서는 남학생들이 주워 온 솔가지와 나무들로 불을 피워, 식당 직원과 여학생들이 지은 밥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1953년 3월 7일 안식일에는 이곳 여학생 기숙사로 사용되던 사택에서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기숙사 마루에 피워둔 난로가 과열돼 이불에 불이 옮겨붙은 것이다. 그날따라 예배가 길어져 12시 30분경에야 마쳤는데, 돌아온 학생들이 문을 열자마자 산소가 유입되며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았다. 훗날 사람들은 “당시 고(故) 박원실 목사님의 설교가 정시에만 끝났어도 훨씬 덜 탔을 것”이라는 농담 섞인 후문을 전하기도 했다.

총탄 자국 메운 공동체의 온기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사택에서의 삶은 척박했지만, 그곳엔 이웃의 온기가 교차했다. 1952년 처음 부임한 고(故) 임정혁 교수에게 사택은 낯설고 두려운 공간이었다. 그가 배정받은 4호 사택은 벽마다 총탄 구멍이 뚫려 있었고 간간이 총소리가 들려왔다.
정붙이기 힘들었던 그를 품어준 것은 사람이었다. 옆집에 살던 영선부 책임자 박수산 장로는 미소와 함께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이후 1주일간 직원들과 함께 직접 방 수리를 해줬다. 수리가 끝날 때까지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내어주기도 했다.
임 교수는 회고록에서 “구들장을 몽땅 들어내고 고래 사이를 깨끗이 긁어내면서 ‘이렇게 해야 불길이 굴뚝으로 빨리 들어가서 방이 골고루 덥고 연기도 안 납니다’라고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며 그날의 따뜻했던 풍경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명절이면 이북에서 온 외롭고 궁핍한 고학생들을 초대해 푸짐한 밥상을 내어주던 곳 역시 사택의 선생님들이었다. 초창기 삼육동의 사택은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전쟁의 흉터를 서로 보듬고 온기를 나누던 가장 굳건하고 따뜻한 공동체 그 자체였다.
글·자료 최환철(박물관)
기획·편집 하홍준(브랜드전략본부 커뮤니케이션팀)
ⓒ 삼육대학교 브랜드전략본부 커뮤니케이션팀 supr@syu.ac.kr
[시리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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