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기억] ⑧ 삼육교육의 젖줄 ‘유가공실습장’
목장 개척부터 대학우유까지… 50년 삼육낙농史

1906년 평안남도 순안에서 태동한 삼육 교육 이념은 1948년 이곳 삼육동에 터를 잡으며 비로소 꽃을 피웠습니다. 개교 120주년을 맞아 브랜드전략본부 커뮤니케이션팀과 박물관이 공동 기획한 [삼육 120년 : 공간의 기억]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캠퍼스 곳곳에 숨겨진 건물의 역사를 발굴하고, 낡은 도면과 빛바랜 사진 속에 잠들어 있던 우리 대학의 뿌리를 다시 깨워 기록하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삼육대 캠퍼스 내 최대 규모 건축물인 ‘다니엘-요한관’이 서 있는 자리는 과거 ‘유가공실습장(우유처리장)’이 있던 곳이다. 1980~90년대 대학 발전의 절대적인 원동력이자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던 유가공실습장의 역사적 맥락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육동 시대 초기 척박한 땅에서 시작된 ‘목장’의 역사부터 먼저 짚어보아야 한다.
젖소 7마리로 연 삼육동 낙농업의 여명
삼육동 낙농업의 역사는 대학이 터를 잡은 직후인 1948년, 이주복 장로가 젖소 7마리와 말 2마리를 이끌고 시작한 작은 목장에서 출발했다. 초기에는 판잣집 형태의 임시 건물에서 젖을 짜고, 말 두 마리가 끄는 역마차로 시내 주택가까지 우유를 배달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젖소들을 몰고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전후 복구기인 1953년, 현재 학생회관 동편에 35평 규모의 콘크리트 목장 건물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우유 생산이 본격화됐다. 이어 1955년 10월에는 1층 91평, 2층 45평 규모의 철근 블록 건물을 추가로 건립하며 낙농업의 기틀을 다졌다.
1963년에 목장 옆에 세워진 사일로(Silo, 목초 저장용 원탑형 창고)는 이 시기 목장의 흔적을 증명하는 유일한 건축물로 현재까지 캠퍼스에 남아 있다. 1993년 목장이 철거될 때에도 옛터의 의미를 간직하기 위해 홀로 보존됐다. 한때 동아리방이나 아트앤디자인학과 학생작품 전시장으로 쓰였으나, 현재는 비어있다.




젖소와 함께 태평양을 건너온 선교사
미미했던 목장 사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1960년 실업부 책임자로 부임한 조지 S. 헤일리(George S. Haley, 한국이름 하정식) 선교사에 의해서였다. 주한미군 제1의무단 소속 병사로 한국에 왔던 그는 전역 후 삼육동에 남아 낙농산업의 기반을 닦았다.
삼육동 우유가 청정 제품으로 입소문을 타며 수요가 급증하자, 헤일리 교수는 시설 확충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1963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머물던 때 직접 모금한 자금으로 20마리의 젖소를 구입해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전국에 젖소가 고작 2천 마리밖에 없던 시기였다. 미국의 유명 식품기업으로부터 우유 처리 기계를 무상으로 지원받기도 했다.
1970년대 초 한국 정부의 유제품 소비 촉진 정책은 사업 확장의 큰 호재였다. 헤일리 선생은 이 흐름을 놓치지 않고 1973년 미국에서 60마리의 젖소를 더 들여왔다. 이어 1974년부터 미국 전역에서 ‘삼육대를 위한 젖소 보내기 캠페인’을 시작했고, 큰 호응을 얻어 상당한 기부금을 모금했다. 이 기금을 바탕으로 1977년에는 120마리의 젖소를 추가로 구입해 두 차례에 걸쳐 항공편으로 한국에 들여왔다.




철저한 위생 관리로 생산된 우유는 미국 대사관 직원 가족과 시내 유지들에게 납품될 만큼 최고급으로 인정받았다. 일일 우유 생산량은 1960년대 초 300쿼트(약 350리터)에서 1980년대 초 5만kg에 육박할 정도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 같은 공로로 1978년 헤일리 선생은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포장을 수훈했다.
대학 성장의 젖줄 ‘유가공실습장’
우유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이를 수용할 대규모 첨단 공장이 절실해졌다. 이에 대학은 선교70주년기념관(대강당)과 도서관 등 핵심 시설을 건립한 직후, 강의동 신축보다 먼저 유가공 공장 건립에 착수했다. 우유공장 시설을 확충한 후 더 많은 수익을 얻어 대학 확장에 필요한 각종 시설들을 설치하고자 했던 것이다. 1984년, 총공사비 3억8천여만원을 투입해 연면적 1천779㎡(약 538평) 규모의 철근 콘크리트조 건물인 ‘유가공실습장’을 완공했다.



이곳은 낙농과(현 동물자원과학과) 학생들의 실험실습장이자 대학의 재정을 책임지는 핵심 공장이었다. 우유뿐만 아니라 다양한 유제품, 아이스크림 등을 생산했다. 유가공실습장에서 창출된 막대한 수익금은 1980년대 삼육대의 주요 교육 시설들을 확장하고 종합대학 체제를 구축하는 절대적인 자양분이 됐다.
사업 규모가 비대해지자 삼육대학우유는 1987년 실업부에서 분리되어 ‘대학식품’이라는 별도 사업체로 개편됐다. 1989년에는 강원도 홍천에 22만평 규모의 제3농장을 매입하며 최전성기를 누렸다. 1993년에 이르러서는 연 매출 80억원, 직원 100여명을 거느린 완전한 독립 전문기관으로 거듭났다.
대학우유, 역사의 뒤안길로
그러나 전성기는 영원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 파스퇴르우유 등 신생 업체의 등장으로 시장 경쟁이 치열해졌고, 당시 사회 전반에 확산된 새로운 건강 식생활 신드롬이 유제품 기피 현상으로 이어지며 타격을 입었다.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경영난은 가중됐고, 1998년 다시 대학 부속기관으로 귀속시켜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단행했으나 누적되는 적자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2004년 2월 26일, 종무예배를 끝으로 생산 라인 가동을 전면 중단하며 대학식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남대극 당시 총장이 “반세기 동안 대학 재정을 크게 돕던 기관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데 눈물을 머금고 폐업을 결정했다”고 술회할 만큼 대학 전체에 뼈아픈 결정이었다.
가동을 멈춘 유가공실습장 건물은 리모델링을 거쳐 2005년 3월부터 ‘다니엘관’으로 명명됐다. 관학 협력 사업인 ‘노원 어린이 영어교실’의 전용 강의실이자 재학생들의 실용영어(현 글로컬영어) 교육 장소로 활용되며 새로운 교육의 산실로 기능했다.
이후 대학의 종합 교육연구단지 조성 사업에 따라 다니엘관(구 유가공실습장)은 철거 수순을 밟았다. 그리고 그 터 위에는 삼육대 역사상 최대 규모(연면적 1만5천724㎡)의 건축물인 ‘미래관(현 다니엘-요한관)’이 2012년에 새롭게 지어지며 캠퍼스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50여 년 전 젖소 7마리로 출발해 캠퍼스 확장의 절대적인 자양분을 공급했던 목장과 유가공실습장. 비록 그 물리적 형체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사라졌지만, 척박한 대학의 자립을 이끌어낸 역사만큼은 오늘날 삼육동의 번영을 떠받치는 ‘공간의 기억’으로 간직돼 있다.
글·구성 하홍준(삼육대 브랜드전략본부 커뮤니케이션팀)
기획·자료 최환철(삼육대 박물관)
ⓒ 삼육대학교 브랜드전략본부 커뮤니케이션팀 supr@syu.ac.kr
[시리즈 연재]
[공간의 기억] ① 삼육동 최초의 건물 ‘실업관’
[공간의 기억] ② 삼육동의 심장 ‘선교70주년기념관(대강당)’
[공간의 기억] ③ 폐철근으로 세운 자립의 뼈대 ‘엘리야관’
[공간의 기억] ④ 개척자들의 첫 보금자리 ‘사택’
[공간의 기억] ⑤ 제임스 리 선교사의 유산 ‘제명호’
[공간의 기억] ⑥ 확장의 신호탄 ‘사무엘관’
[공간의 기억] ⑦ 영성과 문화의 요람 ‘소강당’
[공간의 기억] ⑧ 삼육교육의 젖줄 ‘유가공실습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