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공간의 기억] ⑦ 영성과 문화의 요람 ‘소강당’

2026.07.03 조회수 110 커뮤니케이션팀

전후 척박한 캠퍼스에 세워진 첫 집회 공간

▲ 1955년 건립돼 1993년 철거 전까지 대학 영성과 문화의 요람이었던 소강당 전경. 전후 척박했던 캠퍼스에 세워진 첫 대형 집회 공간이다. 왼쪽 뒤로 보이는 사무엘관 우측 날개 앞부분에 자리했다.

1906년 평안남도 순안에서 태동한 삼육 교육 이념은 1948년 이곳 삼육동에 터를 잡으며 비로소 꽃을 피웠습니다. 개교 120주년을 맞아 브랜드전략본부 커뮤니케이션팀과 박물관이 공동 기획한 [삼육 120년 : 공간의 기억]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캠퍼스 곳곳에 숨겨진 건물의 역사를 발굴하고, 낡은 도면과 빛바랜 사진 속에 잠들어 있던 우리 대학의 뿌리를 다시 깨워 기록하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1950년대 중반, 삼육신학원은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1954년 7월 20일 문교부로부터 4년제 각종학교 인가를 획득하며 본격적인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당시 인가 조건에는 2년 이내에 교사, 실습지, 공장, 기숙사 등 교육 시설을 완비해야 한다는 규정이 명시돼 있었다. 대학의 근대화를 이끌던 도널드 리(Donald S. Lee, 한국이름 이단열) 교장은 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본격적인 삼육동 건설 사업에 착수했다.

이 시기 캠퍼스의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는 전체 구성원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집회 공간의 확보였다. 한국전쟁 직후 척박한 삼육동으로 돌아온 학생과 교직원들은 파괴된 실업관 서편의 목공장을 임시 예배당 겸 강당으로 수리해 사용하고 있었다. 대학 규모가 점차 성장함에 따라, 보다 체계적이고 온전한 형태의 강당 건축이 추진됐다.

1955년 10월 준공된 강당(훗날 소강당)은 삼육동의 여느 초기 건물과 마찬가지로 당시 실업부 책임자였던 미첼(Kenneth L. Mitchell, 한국이름 민제일) 선교사가 설계하고, 이주복, 박수산 등 직원이 시공을 맡았다. 연건평 94평(310㎡) 규모의 목조 슬레이트 단층 건물로, 훗날 세워진 사무엘관 우측 날개 앞부분을 가리는 위치에 자리했다. 최종 완공을 앞둔 1955년 7월, 이 신축 강당에서 졸업식이 먼저 치러지기도 했다.

▲ 소강당 전면부 입구의 변천사. (위) 정면 중앙 창문을 중심으로 양옆에 나무 벽을 세웠던 초창기 외관. (아래) 훗날 이 전면부에 돌을 덧붙여 세 줄의 긴 창문 형상으로 개축한 모습. 지·영·체(智·靈·體) 삼육 교육 이념을 상징한 설계다.

건축 초창기 강당 외관은 정면 중앙 창문을 중심으로 양옆에 나무 벽을 세운 형태였다. 이는 지·영·체(智·靈·體) 삼육(三育) 교육 이념을 상징적으로 담아낸 설계였다. 훗날 이 전면부에 돌을 덧붙여 창문이 세 줄로 길게 이어지는 형상을 띠게 되면서, 시각적으로도 보다 웅장한 외관을 갖추게 됐다. 내부 바닥은 시멘트로 마감됐고, 미군이 기증한 철제 접이식 의자가 놓였다. 특히 강당 건물 뒤편 한 칸을 막아 복도를 내고 도서관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현재 삼육대 도서관의 효시가 됐다.

강당 입구 왼편에는 높이 5m의 목조 ‘종각’이 세워져 있었다. 명칭과 달리 실제 종은 없었고, 상단에 서치라이트와 대형 스피커가 설치된 형태였다. 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은 캠퍼스의 정서를 풍요롭게 했고, 서치라이트 불빛이 켜진 강당 앞 잔디밭은 야간 명상과 소모임, 각종 종교행사에서 유용하게 활용됐다. 종각은 1977년경 철거됐다.

▲ 소강당 입구 왼편에 세워졌던 높이 5m의 목조 종각. 실제 종 대신 상단에 스피커와 서치라이트가 설치됐다. 야간 명상과 소모임, 각종 종교행사에서 유용하게 활용되다 1977년경 철거됐다.

강당은 1972년 엘리야관이 지어지기 전까지 대학 영성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1958년부터 11년간 신학과 교수로 재직한 존스턴(Robert M. Johnston) 목사는 회고록에서 “당시 200~300명의 학생과 교직원들은 매주 몇 번씩 캠퍼스 내 가장 큰 건물이었던 강당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강한 영적 분위기 속에서 공동의 이상과 문화, 생활방식을 나누었다”고 회고했다.

이곳에서는 예배뿐만 아니라 입학식, 졸업식, 축제, 환영회, 송별회, 그리고 결혼식까지 캠퍼스의 주요 행사가 끊임없이 열렸다. 1961년 5월 8일에는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사상 최초로 학생회장단을 선출하는 투표를 진행하기도 했다.

1980년 선교70주년기념관(대강당)이 완공되면서, 이 건물은 ‘소강당’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며 그 역할을 일부 넘겨주게 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소강당은 각종 세미나와 강좌, 소규모 집회 장소로 활용되며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켰다.

▲ 1960년대 강당 내부에서 열린 집회 모습. 1980년 선교70주년기념관(대강당) 완공 전까지 이곳은 대학 영성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두 사진 모두 저해상도 원본을 AI툴로 업스케일링했다.

1993년 선교90주년기념관(다목적관)과 대학교회 신축이 추진되면서 소강당은 철거 수순을 밟았다. 철거 당시 건물에 깃든 역사성과 동문들의 향수를 고려해, 캠퍼스 내 다른 공간으로 원형 그대로 이전 복원하자는 계획이 구체적으로 추진되기도 했다. 비록 끝내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으나, 이러한 기록은 소강당이라는 공간이 당시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각별한 의미를 지녔는지 짐작게 한다.

물리적 공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전후 척박했던 삼육동에 굳건한 영적 구심점이 되어준 소강당의 기억은 여전히 오랜 동문들의 마음속에 잔잔하게 남아있다.

글·자료 최환철(박물관)
기획·편집 하홍준(브랜드전략본부 커뮤니케이션팀)

ⓒ 삼육대학교 브랜드전략본부 커뮤니케이션팀 supr@syu.ac.kr

[시리즈 연재]
[공간의 기억] ① 삼육동 최초의 건물 ‘실업관’
[공간의 기억] ② 삼육동의 심장 ‘선교70주년기념관(대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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