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원 언론활동

[문학 속 가정 이야기] 군주제와 노키즈존

2026.04.01 조회수 453 커뮤니케이션팀

[노동욱 창의융합자유전공학부 교수]

‘동물의 왕국’과 같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 대부분의 동물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걷거나 헤엄치며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행동을 스스로 익힌다. 반면 인간은 걷는 법조차 배우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그전까지는 부모의 보호와 돌봄 없이는 생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무력한 상태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유난히 길게 지속된다는 점은 인간 존재의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는 이렇게 말했다. “아기는 험악한 파도에 휩쓸리는 선원처럼 발가벗은 채 누워 있다. 말도 하지 못하고 살아남기 위해 온갖 도움이 필요한 상태로, 자연의 힘으로 수축된 어미의 자궁에서 빛의 나라로 내던져졌다. 그 상황이 평생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아기의 애절한 울음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이런 맥락에서 아기의 애절한 울음은 극단적인 무력 상태에서 아기가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절박한 생존의 몸짓이라 할 수 있다.

군주에서 민주적인 주체로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무력함과 의존성을 두고,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인간의 삶이 민주주의가 아니라 ‘군주제(Monarchy)’로 시작한다고 보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유아기의 인간은 생존을 위해 양육자의 관심과 헌신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매우 연약한 존재다. 루소에 따르면 아기는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타인과 상호적인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애절한 울음을 통해 양육자의 돌봄과 사랑을 끌어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아기에게 울음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양육자를 ‘통치’하는 유일한 수단에 가깝다. 너무나도 연약한 아기의 울음은 사실 역설적으로 양육자를 움직이게 만드는 ‘군주적’ 권력의 표현인 셈이다. 실제로 부모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배가 고픈 것은 아닌지,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온 신경을 아기에게 집중한다. 그렇게 부모는 자기 앞에 놓인 작고 귀여운 ‘군주’를 정성껏 모시게 된다.

▲ AI 생성 이미지

그래서였을까. 루소는 다섯 명의 자녀(다섯 명의 군주)를 모두 고아원에 보냈다. 교육학 분야에서는 물론 자녀 양육에 관한 고전으로 평가받으며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는 『에밀(Émile, ou De l’éducation)』을 쓴 루소가 정작 자기 자녀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남아 있다.

루소의 관점에 따라 유아기의 인간을 ‘군주’로 본다면 교육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은 군주로 출발한 아기를 민주적인 주체로 교육하고 성장시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배고프면 밥 달라고, 잠이 오면 재워 달라고, 배설하면 기저귀 갈아 달라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울어 대는 인간을,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민주 사회의 일원으로 길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초품아’는 좋지만, 초딩 소음은 싫어!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노키즈존(No Kids Zone)은 ‘아이’라는 정체성을 이유로 아이들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반인권적이고 차별적인 제도일 뿐 아니라 이러한 윤리적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아이들의 사회적 학습과 민주 시민으로서의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카페와 같은 공공장소는 단순히 소비와 휴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니라 아이들이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자연스럽게 사회적 규범을 학습하는 중요한 교육의 장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와 같은 규범은 교실 안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하며 체득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아이들은 자신이 공동체의 일원임을 인식하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 나간다. 요컨대 공공장소는 자신의 욕구를 중심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군주적’ 아이들에게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능력”을 길러 주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데, 노키즈존은 이러한 교육의 가능성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린다.

오늘날 출생률 세계 최하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노키즈존의 확산은 더욱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한편에서는 출생률을 끌어 올리기 위해 수백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며 각종 정책을 쏟아 내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노키즈존을 만들어 아이들의 출입 자체를 제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아이를 낳으라고 권하면서도 정작 아이들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 환영받는 공간은 줄어들고 있는 셈이다.

또한 이른바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가 큰 인기를 끌며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지만 정작 그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시끄럽다’는 이유로 인근 주민들의 민원에 시달리며 1년에 한 번 열리는 운동회조차 마음 놓고 치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뉴스 보도에 따르면 한 초등학교에서는 운동회를 시작하기 앞서 학생들이 먼저 주민들에게 “죄송합니다! 오늘 저희들 조금만 놀게요!”라고 사과부터 하고 행사를 진행한다는 씁쓸한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고 응원하는 소리가 ‘문제’가 되는 사회에서 과연 우리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이를 ‘군주’에서 민주적 주체로 키워야 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의 불편함 앞에서는 누구보다 완고한 ‘군주’가 되어 버리는 어른들. 어쩌면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아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능력”을 다시 배우는 ‘어른들을 위한 키즈존’일지도 모른다.

월간 <가정과 건강>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