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원 언론활동

[시론] 은혜 이후의 사회

2026.05.04 조회수 40 커뮤니케이션팀

공정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이유

[봉원영 신학과 교수]

봄은 왔는데 마음은 왜 여전히 겨울인가

4월이 되면 도시는 조금 다른 얼굴을 갖는다. 바람은 누그러지고, 사람들은 옷차림을 가볍게 한다. 학교에는 새 학기의 생기가 흐르고, 누군가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서류를 정리하고 책상 위를 정돈한다. 그렇게 4월은 적어도 달력 위에서는 새로움이 가장 설득력 있게 읽히는 계절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계절이 바뀌면 마음도 함께 바뀌어야 할 것 같은데 우리의 마음은 그리 쉽게 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히려 더 쉽게 예민해지고, 더 자주 피로하며, 작은 말에도 마음이 흔들린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이런 말을 한다. “다들 너무 팍팍해졌어.” “요즘은 정이 없어.”

그 팍팍함의 원인은 무엇일까? 한 가지 분명한 단서가 있다. 우리는 지금 공정이라는 단어를 거의 신앙처럼 반복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공정은 옳다. 그리고 필요하다. 그런데 왜 공정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될수록 우리는 더 차가워지는 것처럼 느끼는가? 이 질문은 공정의 시대가 낳은 인간의 표정에 대한 결코 가볍지 않은 진단이다.

공정의 미덕과 공정의 그림자

공정은 사회의 토대다. 권력이나 인맥 혹은 보이지 않는 편파가 삶을 좌우하던 시대를 통과한 사람들에게 공정은 정의의 다른 이름처럼 들린다. 공정은 상처의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응답이고, ‘이제는 적어도 납득 가능한 방식으로 결정하자’는 사회적 약속이다. 그래서 공정이 무너지는 순간, 가장 먼저 쓰러지는 이들은 늘 약자들이다.

그러나 공정에는 한계가 있다. 공정은 기준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기준은 유익하지만 동시에 어떤 삶들을 밖으로 밀어낸다. 기준이 생기는 순간, 기준에 맞지 않는 삶들도 함께 생겨난다. 문제는 사회가 너무 오래 기준만으로 운영될 때 발생한다. 그때 사람은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평가 가능한 대상으로 호출된다. 우리는 인간을 얼마나 기여했는지, 얼마나 유능하고 성실했는지 또 얼마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는지 등의 질문으로 분해한다. 이 질문들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들만 남을 때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점수의 합계가 되고 만다.

공정은 사회를 유지한다. 하지만 공정만으로 사회를 살릴 수는 없다. 유지란 무너지지 않도록 버티는 것이고, 살림이란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느끼는 사회의 차가움은 바로 이 간극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성과·평가의 사회가 만든 새로운 잔인함

요즘의 잔인함은 거칠지 않다. 오히려 아주 정중하다. 노골적인 차별의 언어는 점점 사라지고, 대신 절차와 규정이 말을 한다. “규정상 어렵습니다.” “형평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예외를 두면 불공정합니다.” 이 문장들은 논리적으로 옳다. 그래서 더 무섭다. 논리적으로 옳은 말은 때로 사람의 눈물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과와 평가가 사회의 중심이 될수록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설명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왜 내가 뒤처졌는지, 왜 지금 도움이 필요한지, 왜 나에게 예외가 적용되어야 하는지. 그러나 삶에는 분명 납득 가능한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병, 상실, 돌봄, 우울, 관계의 붕괴, 예기치 않은 사고 등.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 공정이란 같은 조건의 사람들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지만 문제는 인간이 결코 같은 조건으로 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사회가 동일한 출발선의 환상을 품을 때 그 환상은 늘 누군가에게 상처가 된다.

은혜, 규칙의 바깥이 아니라 관계의 중심에서

이 지점에서 은혜라는 단어를 다시 꺼내는 일은 시대착오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현실적이다. 은혜는 개인적인 미담이나 종교적 감상에 머물기에는 너무 강한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흔히 은혜는 공짜처럼 오해되지만 은혜는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은혜는 인간을 끝까지 사람으로 대하려는 결단이기 때문이다.

공정이 사회의 뼈대라면 은혜는 사회의 살과 피다. 뼈대가 없으면 사회는 서지 못하고, 살과 피가 없으면 사회는 살아 있지 못한다. 은혜는 공정을 폐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정이 놓치는 영역을 품는다. 원칙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은혜는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은혜의 사회적 기능이 여기에 있다. 은혜는 예외를 남발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사람을 포기하지 않도록 붙드는 힘이다. 은혜는 규칙을 깨는 특혜가 아니라 규칙이 포착하지 못한 고통을 알아보는 눈이다. 그 기억이 쌓일 때 공동체는 인간다움을 유지한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공공성을 가진다. 신앙은 교회 안에서만 따뜻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구조적으로 차가운 세상 속에서 사람은 숫자 이상이라고 말하는 용기를 요청한다. 은혜는 신앙의 장식을 넘어 신앙의 핵심이며 동시에 사회를 향한 책임이다.

4월의 사회가 다시 숨 쉬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

4월은 생명이 자라는 달이다. 그러나 생명은 자동으로 자라지 않는다. 햇빛과 바람 그리고 보이지 않는 돌봄이 필요하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공정은 사회의 구조를 단단히 할 수 있지만 사회가 숨 쉬게 하려면 은혜라는 공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다시 은혜를 말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은혜는 누군가를 무조건 봐주기 위한 감정이 아니다. 은혜는 공동체가 사람을 끝까지 품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성숙한 윤리다. 넘어졌던 사람에게 다시 일어설 시간을 주는 용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람을 성급히 단정하지 않는 인내 그리고 “당신은 여기 있어도 됩니다.”라고 말해 주는 환대, 이것이 은혜다.

4월의 사회가 더 공정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공정이 차가운 계산으로 굳어지지 않기를 더 간절히 바란다. 공정은 사회의 지붕일 수 있다. 하지만 지붕만 있는 집에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은혜는 창문과 같다. 창문이 있어야 빛과 바람이 들어오고, 사람은 숨을 쉰다.

은혜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성품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받은 선물이다. 그래서 은혜를 말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를 자랑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살려 내셨는가를 기억하는 일이다. 이 기억이 사라질 때 우리는 공정의 이름으로 서로를 재단할 수는 있어도 서로를 살릴 수는 없다.

이 봄, 우리 사회가 다시 은혜를 배우면 좋겠다. 판단을 조금 늦추는 마음, 사정을 설명으로만 요구하지 않는 태도, 넘어짐을 실패로만 규정하지 않는 시선. 그렇게 은혜가 스며들 때 공정은 차가운 기준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질서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4월은 달력 위의 계절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계절이 될 것이다.

월간 <시조>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