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 가정 이야기] 숨바꼭질의 역설

[노동욱 창의융합자유전공학부 교수]
나에게는 두 아이가 있다. 아직 어린 두 아이들은 나를 찾아와 종종 숨바꼭질을 하자고 조른다. 나는 이 놀이를 은근히 즐긴다. 아이들이 숨어 있는 동안 비록 짧지만 잠시나마 육아에서 해방되어 숨을 고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짧은 휴식의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내가 오랫동안 아이들을 찾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이들은 분명 불안해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숨바꼭질의 묘한 역설이 있다. 아이들은 술래가 자신을 찾지 못하게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보일세라 “꼭꼭” 숨지만, 그 숨바꼭질에는 사실 술래가 나를 찾아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잠재해 있다. 숨바꼭질은 숨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숨은 사람을 발견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완결되고 완성되는 놀이다.
그런데 이러한 숨바꼭질의 역설은 비단 아이들의 놀이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어른들 또한 때로는 삶에 지쳐 어딘가로 숨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된다면, 그러니까 혼자 숨어 있는 동안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면, 마음이 어떨까?
인간은 때로 그 속박과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어 공동체로부터 거리를 두려 하지만, 막상 그 바깥에 서게 되면 그 안에서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진다. 우리의 내면에는 숨고 싶은 욕망과 동시에 발견되고 싶은 욕망이 양가적으로 얽힌 채로 교차해 있다. 어느 노래 가사에서 “도망가자”고 애절하게 속삭이다가 끝에는 “돌아오자”고 되뇌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세상의 중심이라는 착각
여기 숨바꼭질을 하는 어른이 하나 있다.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단편 소설 ‘웨이크필드(Wakefield)’에 대한 얘기다. 웨이크필드는 여행을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집을 나선 뒤, 정작 멀리 떠나지 않고 자기 집이 내려다보이는 가까운 곳에 숙소를 정한다. 그리고 아내와 지인들에게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은 채, ‘자기 추방’의 이유조차 분명히 밝히지 않은 채, 20년이 넘는 긴 세월을 혼자 살아간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매일같이 자신의 집을 바라보고, 고독하게 살아가는 아내의 모습 또한 멀리서 지켜본다. 그러다 20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마치 하루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온다.
이 괴팍한 기행(奇行)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겠다. 웨이크필드는 홀연히 집을 떠나 자기 집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자신이 부재한 며칠 동안 집안이 어떻게 돌아갈지, 아내는 자기 없이 어떻게 견디며 살아갈지 궁금해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자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그 영역의 사람들과 상황들이 자기가 사라질 때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가를 자신이 알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러니까 그 괴팍한 기행의 저변에는 “어떤 병적인 허영심”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자기가 세상의 중심에 서 있으며, 자기가 없으면 모든 것이 무너질 거라는 생각은 대부분 착각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실제로 웨이크필드가 부재한 20년 동안 그의 가정은 그럭저럭 잘 굴러간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독자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그럭저럭 잘 돌아간다’는 것. 바로 그때 인간의 오만함은 사그라지고 그 자리에 겸허함이 스며든다. 이 작품은 인간이 흔히 빠지기 쉬운 자기중심적 착각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의 관점을 전복시킨다. 우리는 흔히 ‘내가 가정을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정이 나를 지탱하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내가 가정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사랑이 나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아이를 안아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이가 부모를 안아주고 있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메타인지
그렇다면 웨이크필드는 자신의 집을 내려다볼 때 대체 무엇을 보았으며 어떤 생각을 했던 걸까? 그는 집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의 가정을 관찰하지만, 그 과정은 단순한 물리적인 외부 관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부재한 공간을 바라보며, 그동안 그 공간 속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였고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를 되묻게 된다. 다시 말해, 그는 집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상 ‘집 속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흔히 ‘메타인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메타인지란 ‘자신을 한 발 떨어진 위치에서 바라보는 인식’으로, ‘거리 두기’를 통해 자신을 대상화하는 능력이다. 자신을 1인칭으로 바라볼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자신을 3인칭의 시선으로 객관화하여 바라보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많다. 이를 쉬운 말로 표현하면 일종의 ‘주제파악’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 식으로 표현하면, “너 자신을 알라!”다.
웨이크필드가 집 바깥에서 20년간 거주하며 자신의 집을 바라보았던 것은 주제파악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제파악하는 데 20년이나 걸리는가? 그렇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평생을 주제파악하고자 애써야 하며, 그 과정은 20년도 충분치 않다.
최근 방영중인 TV 프로그램 ‘이혼숙려캠프’에 등장하는 연극치료는 참여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제3자의 시선에서 다시 바라보도록 만든다. 그동안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행동이 타인의 몸을 통해 재현될 때, 비로소 그 행동의 문제가 또렷하게 드러난다. 1인칭의 시선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 한 발짝 떨어져 3인칭의 시선에서 관찰하는 순간 선명해지는 것이다. 이때 발생하는 통렬한 자각이 바로 메타인지의 힘이다. 완고하게 자기주장만을 고집하며 극단으로 치닫던 부부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민낯을 처음으로 마주하고 자아의 완고함을 내려놓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웨이크필드의 행동은 단순한 기행이 아니라 일종의 극단적 메타인지 실험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한 발 물러나 ‘관찰자’의 위치를 점함으로써,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와 그 안의 자신을 동시에 낯설게 바라보게 된다. 그 낯섦은 결국,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미처 보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웨이크필드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과연 자신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가정 속의, 세상 속의 나의 모습을 온전하게 바라보고 있는가?
월간 <가정과 건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