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 가정 이야기] 공부란 무엇인가?

[노동욱 창의융합자유전공학부 교수]
공부란 무엇인가? 청소년기 아이들을 둔 대부분의 가정에서, 공부는 부모와 자녀 간의 갈등의 주요 원인이다. 공부란 대체 무엇이기에 가족 간의 갈등까지 불러오는 것일까? 공부하라는 부모의 ‘공격’과 안 하려는 자녀의 ‘방어’는 일상 속에서 마치 전쟁처럼 되풀이된다. 부모는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지만, 정작 공부란 무엇이고 왜 해야 하는지 제시해 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아이들 또한 공부의 의미나 이유를 알지 못하니 동기부여가 되기 어렵고, 어린 나이에 스스로 공부의 의미를 깨닫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래서 공부란 무엇인지, 나의 생각을 소박하게나마 제시해 보고자 한다.
공부가 ‘점수’로 줄어든 순간
우리에게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공부란 무엇인가? 성적이자 입시다. 수능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지상과제다. 높은 점수를 받아 남들 위에 올라서는 것, 남들보다 더 좋은 직업을 갖고, 더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이 공부의 목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홈스쿨링으로 미네르바대학에 입학한 임하영은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한다. 그가 명절 때 할머니를 만나면 항상 듣는 질문이 있었다고 한다. “하영이, 요즘 공부 열심히 하나?” “네, 그런대로요.” “그래서, 1등 했냐?” ‘공부 열심히 하나’라는 질문은 결국 ‘그래서, 1등 했냐?’라는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임하영은 친구들을 만나도, 가족들을 만나도 늘 반복되는 질문은 “공부는 잘해?” “몇등이야?” “대학은 어떻게 할 거니?” “인 서울? 아니면 지방대?” 등의 질문뿐이며, 이런 질문들이 계속 당연시된다면 “탐욕스러운 저질의 엘리트들이 탄생하는 비극”은 언제든 되풀이될 것이라고 통렬하게 지적한다.
이런 맥락에서, 수능시험은 우리나라에서 안타깝게도 공부의 시작점이 아니라 종착점이 된지 오래다. 국가적 연례행사로 자리 잡은 수능시험 날에는 해마다 진풍경이 연출된다. 시험 시간에 늦은 학생들을 위해 경찰차가 출동하여 시험장까지 늦지 않게 호송해 주는 것이다. 교육적 측면에서 우리가 크게 간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시험장에 늦지 않도록 일찍 일어나서 마음을 정돈하고 제 시간에 도착하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한 교육의 한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일 년에 한번 있는 중요한 시험 날, 제 시간에 시험장에 도착도 못하는 학생이 진정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학생이 설령 시험 점수를 잘 받는다한들 그게 무슨 소용일까? 수능시험 날 경찰차로 수험생을 호송해 주는 것은 단순한 해프닝도 아니고, 따뜻하고 훈훈한 미담은 더더욱 아니다. 이는 교육의 본질을 흩뜨리는 것이자,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결과우선주의를 부추기는 것이다. 경찰들도 ‘우리가 콜택시냐?’며 자조 섞인 하소연을 하고 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풍경은 사라져야 한다.
경찰차로 수험생을 호송해 주는 것은 공부를 단순히 점수 얻기의 일환으로 보는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점수 얻기가 교육의 모든 것이 될 수 있을까? 단순히 높은 점수를 받아 좋은 직업을 갖는 것이 나의 공부의 궁극적 목표가 되어도 좋은 것일까? 이러한 맥락에서, 김영민 교수는 ‘공부란 무엇인가’에서 “젊은 날 입시와 취업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공부를 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그 화려한 시간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한다.

예속되지 않는 자유
그렇다면 왜 공부를 해야 할까? 나는 ‘예속되지 않는 자유’ 때문이라 말하고 싶다. 미국 노예제의 역사를 살펴보면 채찍질로 대표되는 물리적 억압이 두드러졌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큰 의미에서의 진정한 억압은 교육의 억압에 있었다. 채찍질은 잠시나마 흑인 노예들을 굴복시킬 수 있을지언정, 항구히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교육의 억압은 백인 노예주들이 원했던 ‘순종적’인 노예를 길러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노예제 시스템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백인 노예주들은 무엇보다 흑인 노예들의 교육을 억압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퓰리처상 수상자인 미국의 소설가 콜슨 화이트헤드(Colson Whitehead)는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The Underground Railroad)에서 총을 든 흑인보다 책을 든 흑인이 더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백인 노예주의 입장에서 책을 든 흑인은 정신이 깨어 있기에 언제라도 억압과 차별에 의문을 제기하고 저항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흑인 노예였던 프레드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는 왜 백인 노예주들이 공부를 못하게 할까, 의문을 갖는다. 그는 몰래 혼자 글을 깨우친 뒤 비로소 ‘자유’의 의미를 깨닫고 노예제의 굴레에서 탈출하여 다른 노예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애쓰는 흑인 지도자가 된다.
거리를 방황하던 부랑아 말콤 엑스(Malcome X)는 감옥에 갇혀 무수히 많은 책을 읽고 ‘자유’의 의미를 깨달은 뒤 흑인 지도자로 성장한다. 그는 자신의 모교(alma mater)를 ‘책’이라고 칭하는데, 이러한 사례들은 공부의 필요성이 ‘예속되지 않는 자유’임을 역설한다. 요컨대, 교육은 깨어 있는 ‘위험한’ 존재가 되기 위함이며,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다.
노예제는 이미 폐지된 지 오래인데 왜 이 시대에 노예제를 다시 거론하느냐고 누군가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노예제는 폐지되었지만 새로운 모습의 노예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일례로, 요즘 스마트폰의 노예가 아닌 사람이 드물다. 앉으나 서나, 걸어가면서도, 수업 시간에도, 집에 가서도 널브러져 스마트폰만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다름아닌 스마트폰의 노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마트폰 혁명을 이끈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정작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아이폰과 아이패드 같은 IT 기기를 전혀 주지 않고 집에서 IT 기기를 철저하게 금했다고 한다. 스마트폰 프로그램 개발자들이나 게임 개발자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도파민을 방출시켜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않게 하여 이윤을 창출할 것인지 연구한다. 우리는 그 전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스마트폰의 자발적 노예가 되어 가고 있는데, 정작 우리를 중독에 빠지게 한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종이 책을 읽히고 토론 교육, 글쓰기 교육을 시켜 가며 사고력을 확장시키고 있다. 뭔가 억울하지 않은가?
스마트폰은 알고리즘을 통해 내가 관심 있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만 추천해 준다. 그럴수록 나의 사고방식은 확증편향적이 되어 가고, 반쪽짜리가 되고 만다. 그 결과, 독재자나 사이비 종교인을 추종하는 자발적 노예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공부에는 나이가 없다. 노예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는 곧 자유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는 말도 있지 않은가. 자, 그렇다면 당신은 왜 공부를 할 것인가?
월간 <가정과 건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