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뷰

[삼육人] 대상에서 주체로

2026.09.14 조회수 125 커뮤니케이션팀

강단에 선 ‘뇌병변장애 당사자’ 안형진 박사
대학원 사회복지·디지털통합돌봄학과 정규 교과목 담당

“저는 장애인을 서비스를 받는 대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장애인도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권리의 주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수업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가장 듣고 싶은 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9월 초, 삼육대 일반대학원 사회복지·디지털통합돌봄학과 ‘장애인복지연구’ 첫 수업. 강단에 선 강사의 첫인사는 육성이 아닌 AI 음성이었다. 중증 뇌병변장애로 의사소통에 물리적 제약이 있는 안형진 박사가 정규 학위과정의 교단에 선 것이다. 강사가 사전에 입력한 텍스트를 AI 어플리케이션이 음성으로 변환해 전달하는 낯선 방식이었지만,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그의 철학은 그 어떤 육성보다 뚜렷하고 단단했다.

혹여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생길 상황을 대비해 오랜 시간 함께 공부해 온 박제성 강사가 팀티칭으로 보조를 맞췄다. 처음에는 박 강사의 통역을 거쳤으나, 이내 학생들이 소통 방식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즉각적이고 활발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대학 강단이라는 낯선 환경, 첫 수업을 마친 안 박사의 소감은 담담했다. “대학 강단은 지식을 전달하는 자리라 긴장을 많이 했습니다. 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학생들이 잘 적응해 주어 다행입니다.”

영문학도에서 거리의 활동가로, 그리고 연구자로

안 박사는 자신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현장, 연구, 권리, 교육’ 네 가지를 꼽았다. 그의 이력은 이 단어들을 그대로 관통한다.

처음부터 사회복지를 전공한 것은 아니었다. 한양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한신대 대학원에서 사회정책 석사, 삼육대 대학원 사회복지학 박사를 거쳐 현재 고려대 대학원 행정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전공은 달라졌지만 그가 파고든 질문은 늘 같았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서는 사회와 제도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2002년부터 서울DPI, 마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동문장애인복지관 등을 거치며 활동가로 뛰었다. 이후 5년간 삼육대 사람중심실천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했고, 현재는 한국장애인인권포럼 장애인정책모니터링센터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현장과 연구를 쉼 없이 오가며 그가 내린 결론은 명확했다.

“장애인복지는 전문가들이 책상에서 만든 것만으로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당사자들이 거리에서 목소리를 내고 권리를 요구하며 변화해 왔죠. 그래서 제도를 공부할 때는 ‘누가, 왜 요구했는지’를 반드시 함께 알아야 합니다.”

안 박사가 2020년 삼육대에서 취득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 논문 역시 이러한 당사자주의의 산물이었다. 그는 자립적 삶만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시민성’에 근거한 현행 활동지원제도를 비판하고, 인간의 본질은 의존이라는 ‘능동적 시민성’의 관점에서 대안을 제시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자기주도지원… 핵심은 ‘경청과 겸손’

이번 학기 그가 맡은 ‘장애인복지연구’ 과목은 장애 개념과 모델, 재활 및 자립생활 패러다임, 자기주도 개인예산제 등 현장의 최신 이슈를 다룬다. 그가 교단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현실감’이다.

”그간 장애인복지 학문은 당사자의 삶과 동떨어진 지식이라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환경과 정책에 대한 문제보다 치료나 서비스의 전문성만을 강조한 면이 컸죠. 저는 당사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문제들을 이론과 접목하고자 합니다.“

특히 그가 교편을 잡은 삼육대 사회복지·디지털통합돌봄학과는 국내 대학 중 유일하게 ‘자기주도지원(SDS, Self-Directed Support)’ 전문 사회복지사 석사과정을 운영하는 곳이다. 자기주도지원은 돌봄과 복지 서비스 이용자가 자신의 필요에 맞는 서비스를 스스로 설계하고 선택하는 자기주도형 지원 모델이다. 최근 영국, 호주 등 복지 선진국을 중심으로 제도화가 활발히 이뤄지며 복지 패러다임의 새로운 흐름으로 주목받고 있다.

안 박사는 실무가 아닌 학문의 영역에서 이 개념을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쥐여주고 싶은 태도는 ‘경청과 겸손’이라고 했다. ”핵심은 서비스나 지원에 사람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선호와 욕구에 서비스를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얄팍한 지식보다 장애 당사자의 말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귀 기울이는 태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삶은 어떻게든 살아진다

안 박사의 임용 소식이 알려진 직후,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을 비롯한 국내 12개 주요 장애인 단체는 일제히 환영 논평을 냈다. 단순한 배려 차원의 강단 서기가 아니라, 중증 뇌병변장애인이 지식을 생산하고 전달하는 고등교육의 주체로 인정받았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안 박사 역시 이 논평들을 관통하는 핵심으로 ”대상에서 주체로“를 꼽았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은 늘 치료, 서비스, 교육의 ‘대상’이었습니다. 대상이라는 말은 곧 그들의 의견이 반영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이번 임용은 언어장애가 심한 당사자가 고등교육의 주체가 될 수 있으며, 당사자의 실제 삶이 장애인복지 학문에 오롯이 녹아들어야 한다는 사회적 메시지라고 봅니다.”

시련과 마주한 이들을 향한 조언을 구하자, 그는 신앙을 바탕으로 한 꾸밈없는 답변을 내놨다. ”예수님의 정신 중 중요한 것은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장애인 역시 우리 사회에서 억눌린 자들 중 하나입니다. 삶은 어떻게든 살아집니다. 생명은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이니 절대로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 안 박사의 목표는 거창한 타이틀이 아니다. ”그저 실력 있는 교수가 되고 싶습니다. 당사자로서 깨달은 것을 이론과 접목해 장애인에게 꼭 필요한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 그리고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소박하고 충실하게, 제가 할 수 있는 연구를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대하는 인식 역시 담백해지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냥 ‘그 사람’으로 봐주었으면 합니다. 착하고 유능하면 인정받고, 나쁘고 무능하면 그 자체로 평가받으면 됩니다. 장애를 떠나 비장애인과 동등한 조건에서 살아갈 수 있는 지원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글 하홍준 hahj@syu.ac.kr

ⓒ 삼육대학교 브랜드전략본부 커뮤니케이션팀 supr@sy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