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글로컬대학으로 가는 길

[이국헌 신학과 교수]

2023년 고등교육 현장의 핫 이슈 중 하나는 ‘글로컬대학 30’이다. 이 프로젝트가 발표된 것은 지난 4월 18일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대학의 글로벌 경쟁력, 국가균형발전에서 지방 대학의 역할 및 국가적인 재정 지원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했다. 정부는 무한경쟁 체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 동안 대학이 창의적 혁신을 통해 지역 기반의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대학당 향후 5년간 1000억 원 규모의 예산을 지원하기로 했다.

지난 5월 31일에 마감된 이 글로컬대학 지원 사업에 108개 대학이 지원했고, 그 중 27개교는 통합을 전제로 신청서를 접수했다. 지금 대부분의 대학들은 이 사업에 어떻게 선정될 것인가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정책적 차원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이 사업이 실제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 여부다.

이 프로젝트가 내세운 글로컬대학이란 글로벌 역량을 갖춘 지방 대학을 의미한다. 이 명칭에는 두 가지 목표가 제시되어 있다. 그 첫째 목표는 대학이 지역 기반의 관산학 협력을 통해 지역 균형 발전의 허브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과감한 혁신을 추구하는 것이며, 둘째 목표는 그런 변화를 통해 글로벌 수준의 대학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과제가 요구된다.

첫째, 대학의 혁신이다. 지역의 대학들이 글로컬대학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과감한 혁신을 추진해야 한다. 혁신의 대상에는 학사 구조, 교과과정, 교수 및 학습 방법, 교육 성과 관리와 같은 내용은 기본이고, 글로컬대학으로서의 새로운 발전 전략 및 특성화 계획을 포함한 대학 경영 및 거버넌스 전체가 포함된다. 이러한 혁신 과제를 몇 개월 안에 계획해 추진하면서 대학 구성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다.

둘째, 예산이다. 대학이 관산학 협력을 통해 지역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핵심 연구 기술을 창출하며, 창업 등의 혁신 방안을 통해 지역 경제의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획이 필요하다. 게다가 기획을 구현할 막대한 재정도 요구된다. 정부는 이 같은 예산을 지원하기 위해 1차년도에 50억 원, 2차년도에 100억 원씩 5년간 지원한다는 방침이지만 이 예산만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지역 대학으로서 도약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글로컬대학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 각 대학들은 정부의 재정 지원 이외에 특별 재정을 확보해 이 일을 추진해야만 할 것이다.

새천년 이후 정부는 다양한 재정지원 사업(CK, CK-II, ACE, ACE+, LINC, LINC+)을 통해 대학의 혁신과 발전을 주도해왔다. 이 사업들이 대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어느 정도 대학 혁신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재정 지원 사업들이 대부분의 대학들을 글로벌 수준의 대학으로까지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재정 지원 사업 이후에 여러 대학들은 추가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대학마다 추진한 혁신 사업들을 고도화시키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다. 이런 경험에 비춰볼 때 글로컬대학 사업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조만간 이 사업에 참여할 예비 대학들이 지정될 것이며, 해당 대학들은 위의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할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그 대학들이 글로컬 대학으로 가는 길은 녹록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고등교육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길에 들어서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왕에 나선 길이라면, 글로컬대학 사업이 요구하는 과감한 혁신과 개혁에 주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그 혁신에는 진정한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사랑이 없는 혁신은 잔인하고, 혁신이 없는 사랑은 진부하다. 글로컬대학으로 가는 길은 민주적 절차와 방식에 따른 과감한 혁신이 요구되는 정교한 길이어야 한다.

한국대학신문 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48289

[헤럴드광장] 인간과 동양하루살이의 공존

[김동건 스미스학부대학 교수 / 생태학]

최근 들어 한강과 인접한 지역에서 동양하루살이가 대거 출몰한다는 언론 보도를 자주 접하게 된다. 빛에 모여드는 동양하루살이의 습성으로 시민이 야간에 일상생활의 불편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다.

일부에서는 동양하루살이의 대량 출현을 기후변화에 따라 생태계 균형이 깨지면서 생겨난 미증유의 자연재해로 여기는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대중의 통상적인 인상과 달리 동양하루살이는 해마다 전국의 강과 하천의 특정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출몰했다. 동양하루살이는 유충시기에 물에 서식하는 곤충이다. 중·하류지역 하천 바닥에 굴을 파고 서식하는 특성이 있다. 한강도 동양하루살이 유충의 최적 서식지 중 하나다. 팔당댐 하류지역인 남양주시와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서울 성동구뿐만 아니라 탄천이나 안양천과 같은 지류 하천에서도 많은 개체군이 서식하고 있다. 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2000년대 초반부터 강동구, 성동구, 광진구, 남양주시 등에서 동양하루살이의 대량 출몰이 지속해서 문제돼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앞으로도 기후위기와 무관하게 동양하루살이가 해마다 우리 생활권역에 출몰해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동양하루살이는 과연 박멸해야 할 해충일까?

동양하루살이는 성충이 돼 물 밖에 나오는 순간 빛에 몰려드는 특성으로 야간에 주민과 상인에게 혐오감을 주고 이로 인해 이들의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고 있다. 그 점에서만 보자면 해충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성충이 된 동양하루살이는 입이 퇴화돼 있어 먹이를 먹거나 사람을 물 수 없기에 질병을 옮기는 위생해충으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동양하루살이의 유충이 물속에서 유기물질을 섭식하며 수질을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익충으로 분류할 여지가 크다.

동양하루살이 대량 출몰지역의 지자체들은 다양한 방제대책을 모색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다만 동양하루살이의 유충과 성충을 무분별하게 방제하게 되면 수생태계와 육상생태계의 영양 단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생물이 사라지게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현세 인류가 존재하기 전에 완성된 동양하루살이의 생태적 특성이 인간의 일상생활에 불편을 초래한다고 곧바로 해충으로 분류해 성급하게 박멸 대상으로 보는 것은 지극히 단선적인 사고다. 이는 생태계의 불균형으로 이어져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설령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방제에 나선다 하더라도 동양하루살이의 박멸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가령 대표적인 해충인 모기의 방제에 대한 연구와 그 시행이 오래전부터 전 지구적으로 수행되고 있음에도 모기의 완전한 박멸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서울시가 시행하고 있는 모기예보제와 같이 동양하루살이의 발생시기와 개체량을 예측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단계별 행동수칙과 적절한 방제법 등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아가 ‘인간이 동양하루살이 서식 영역에 난입해 서식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와 같은 코페르니쿠스적 사고 전환에 바탕을 둬 양한 공생 방안을 도출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헤럴드경제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6/0002150395?sid=102

[시론] 삶의 터전이 흔들릴 때

[김은배 신학과 교수 / 대학교회 담임목사]

지난 2월 6일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규모 7.8의 강진이 발생한 지 3개월이 지났지만, 그 강진의 여파는 언제 아물지 알 수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고, 삶의 터전을 잃었다. 모든 잔해들을 걷어내고 파괴된 시설들을 복구하고 지진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인다.

이번 강진은 21세기 들어 일어난 자연재해 중 다섯 번째로 많은 인명 피해를 낳은 최악의 지진이었다. 이런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아지곤 하지만, 크고 작은 재난들은 언제나 우리의 삶을 위협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계속적인 전쟁 상태는 언제 끝날지 모르고, 이로 인한 국제 정세는 불안하고 우리나라의 형편 역시 경제는 고물가와 경기침체의 국면에서 그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안정은 요원하고, 남북관계는 불투명하고, 개인의 가계는 불안하기만 하다. 모든 삶의 기초가 속절없이 흔들리는 시대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삶의 터전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데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강진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코로나 펜데믹 같은 사태는 언제고 우리 앞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류가 계속해서 마주할 현상 중 하나일 뿐이다. 오히려 이보다 더한 현실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을 구약 성경의 예언자 이사야의 놀라운 선언을 통하여 예측할 수 있다.

“두려운 소리를 인하여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땅이 깨어지고 깨어지며 땅이 갈라지고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침망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지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사 24:18-20)는 예언자가 전하는 놀라운 선언이 마치 철퇴를 내리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전에는 이러한 말을 들을 때 깊은 감명도 이해도 없이 그저 먼 옛날의 이야기로 흘려듣고 말았지만, 이제 그러한 시대는 다 지나가고 오늘 이 말씀은 이미 현실적인 가능성이 되었고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예언자가 눈앞에 보는 듯이 그려놓은 대지의 기초가 흔들린다는 이 사실을 이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머지않아서 온 인류가 싫증이 날 만큼 경험하게 될 일이다.

언젠가 우리의 삶에도 어두운 시간, 위기의 시간, 고난의 시간이 찾아온다. 우리의 삶의 터전이 흔들릴 때가 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기반이 취약하다’, ‘종말이 있다’라는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우리의 종교적 기반이며 신앙의 이유이다. 어떤 사람은 신앙의 이유를 자신의 인생에 이런 위기가 없도록 예방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신앙의 이유는 오히려 이런 위기를 대비하고 준비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대지의 기초를 마련하시던 때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이 대지의 모든 기초가 흔들린다는 사실과 이 세계의 붕괴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지와 인간, 금수와 초목은 피할 수 없는 종국적 위험에 직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로 할 수 없는 불안이 이미 우리 속에 그 본색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이러한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세속적으로는 인간의 과학이며,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번영신학이다.

산을 흔들고 바다를 녹이는 진동하는 대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과소평가하고 과학적 발견과 업적을 통해서 인간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며 이 세상에 대한 낙관적 미래를 이야기하는 그 같은 거짓 예언들이 우리들 주변에 만연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혼동하고 이 땅이 흔들리며 대지의 기초가 떨리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오늘날 세상의 과학은, 세상의 철학은, 번영신학은 평화를 노래하며 이 세상은 점점 더 좋아진다고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기초이며, 토대라는 사실에 대하여 냉소적이다. 종교에 대하여 냉소적이고, 교회에 대하여 냉소적이고, 신앙에 대하여 냉소적이다. 교회에서 전해주는 진리의 말씀에 대하여 냉소적이다. 그저 콧방귀 한번 뀌고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든 삶의 기초가 진동하는 것에 대해서만은 냉소적일 수가 없다.

짧지 않은 목회 생활을 통해서 냉소적인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해도 우습게 생각하며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냉소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무너져 내릴 때, 그들의 얼굴에 드리운 영력한 당황과 절망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내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릴 때, 삶의 모든 기초가 허물어지기 시작할 때, 냉소주의도 그것과 함께 붕괴되는 것이다.

종말의 순간에 어디 죽음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냉소적일 수가 있는가? 생존의 기반이라고 생각하는 건강을 잃었을 때, 거기 어디 냉소주의가 차지할 자리가 있는가?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했던 좋은 직장을 잃어버렸을 때, 거기 어디 냉소주의가 존재할 수 있는가? 그 동안 쌓아왔던 모든 재산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날아가 버릴 때, 거기 어디 냉소주의가 존재할 수가 있는가? 가정이 깨어지고 사회가 혼란해 지고 국가의 안위가 위협을 받을 때, 어디 거기에 냉소주의가 자리할 데가 있는가?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의 터전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너무나도 어이없이 흔들리며 붕괴되고 있는 모습들을 보고 있다. 이런 순간에 인간에게는 단 두 개의 선택의 길이 남는다. 하나는 절망이다.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릴 때, 그 속에서 주저앉고 마는 것이다. 영원한 파괴의 확실성을 경험하며 두려워 떨며 절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선택의 길은 신앙이다. 그 참담한 현실 속에서 그 현실을 뛰어넘는 우리의 생존의 기반이 믿었던 재산이나 재물이나 사회적인 지휘나 명예나 가정이나 건강이나 인간관계가 아니라, 나를 생존케 하는 나를 존재케 하는 내 삶의 터전이 하나님 되심을 발견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선택의 분기점에 서있는 사람들로서 도처에서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하며 살고 있다. 바로 이 선택의 분기점에 서있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그 신앙을 다른 말로 종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발을 딛고 서있는 이 시대의 종교적인 의의이다. 우리는 이 파멸의 영역에서 피안의 구원의 영역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흔들리는 삶의 터전과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면서 두려워하기 보다는 영원한 반석과 구원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어야한다.

월간 <시조> 5월호

[명지원의 명명백백] 디지털 기억상실증

[명지원 교직과 교수]

제레미 리프킨은 <엔트로피>에서 지식과 정보가 늘어나고 쓰레기 정보에 의해 정신질환자의 증가로 정신과 의사의 수요가 높아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40여년이 흐른 오늘날 ‘디지털 기억상실증’(digital amnesia)은 리프킨의 예언에 대한 지구촌 시민사회에 나타나는 거대한 전조현상이다. 젊은이를 뜻하는 영(young)과 알츠하이머의 합성어인 ‘영츠하이머’도 이러한 종류의 하나이다.

디지털시대의 총아는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정보를 바로 검색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다. 지식을 기억하던 뇌의 공간을 더 유용한 지식으로 채울 수 있다는 ‘희망’과는 다르게 전문가들은 스마트폰 사용 습관과 사진과 영상 촬영이 기억력 저하를 말하는 ‘디지털 기억상실증’에 영향을 끼친다고 경고한다. 디지털 기억상실증’의 주요 원인은 집중력과 초점을 맞추는 능력의 상실이다. 초점이 계속 바뀌면 방금 했던 것을 기억하기 어렵다.

토론토대학 인지신경과학자 Morgan Barrense는 폰 카메라의 문제점을 “사진을 찍었으니 기억하는데 집중하지 않는 것”이라며 나중에 보지도 않을 무분별한 사진 촬영에 대해 비판한다. 사진 촬영의 일반적 기법인 조명, 색에 대한 관찰, 사람의 감정과 몸짓, 장소, 전체 구도 등의 종합적 동작의 경험에 가깝게 하고자 하는 HiippoCamera 앱도 등장했다. 뇌 기능의 일반 원칙은 “사용하지 않으면 잃게 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는 검색이든 사진이나 영상 촬영이든 ‘의도를 가지고 의지를 발휘하여 행동’하라고 조언한다. 또한 꼭 필요한 정보 알림 기능 외의 모든 알림 기능을 끄고 정보 선택 방법을 단순화하라고 조언한다. 개인마다 가정마다 ‘디지털 기억상실증’을 예방할 수 있도록 스마트폰에 대한 확실한 활용 기준을 가지고 사용하자.

※ 명지원 교수가 <토론토 중앙일보>에 연재하는 칼럼명 ‘명명백백(明鳴絔?)’은 한자성어 ‘명명백백(明明白白)’의 음가를 차용해 그가 직접 만든 조어다. ‘明(밝을 명)’과 ‘鳴(울릴 명)’, 떨어지거나 해어진 곳을 꿰맨다는 뜻의 ‘絔(깁다 백)’,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부는 바람을 뜻하는 ‘?(동남풍 백)’을 썼다. 즉, ‘밝게 울려 떨어지거나 해어진 곳을 꿰매어, 동남쪽(우리나라)에서 서쪽(서구 문명)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다.

토론토 중앙일보 https://www.cktimes.net/opinion/%EB%94%94%EC%A7%80%ED%84%B8-%EA%B8%B0%EC%96%B5%EC%83%81%EC%8B%A4%EC%A6%9D/?sfl=tags&stx=%EB%AA%85%EC%A7%80%EC%9B%90

[기고] 차별 없는 돌봄서비스가 시급하다

[김일옥 간호대학 교수 / 대한간호협회 이사]

현재 국회 본회의에 부의된 간호법 조정안의 제1조 목적에 명시된 ‘지역사회’가 간호사 단독 개원의 근거가 되므로 ‘의료기관 및 지역사회’를 ‘의료기관’으로 변경하고 ‘지역사회’를 삭제해 달라는 당정의 요구가 있었다. 총칙 조항에서 ‘지역사회’를 삭제하라는 요구는 의료기관에 근무하는 간호사만을 인정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2020년 기준 활동 간호사는 28만5097명이며, 이 중 의료기관 근무 간호사가 21만6408명(75.9%), 지역사회인 비의료기관 근무 간호사가 6만8689명(24.1%)이다. 간호사가 있는 현장의 존재를 표현한 총칙의 성격에 지역사회를 포함하면 안 된다는 것인가?

현재 90여개 관련법에 따라 간호사는 지역사회 내 보건소, 학교 보건실, 교정시설, 어린이집, 산업 현장 등에서 일하고 있다. 또 단독 개원과 불법 진료의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는 대한의사협회 주장은 의료법 제33조에 따라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조산사만 의료기관 개설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다. 의료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간호사는 의료기관 개설이 절대 불가해 개설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도 의협 등은 국민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불법 진료’라는 자극적 용어를 써서 반대하고 있다.

의협은 고령 만성질환자, 의료 소외 지역, 거동 불편 환자, 조기 퇴원 환자의 입장을 얼마나 고민해 보았는가. 또한 의료기관 중심의 의료·돌봄서비스가 국민의 불편을 간과하지는 않았는지도 묻고 싶다. 의료 선진국을 자부하는 우리나라가 유례없이 빠른 고령화에 충분한 대비를 하고 있는지도 정부에 묻고 싶다.

인구 구조와 질병 패턴이 바뀌면 의료·돌봄서비스도 미리 대비하고 보조를 맞춰가야 한다. 우리는 도시에 있는 자녀가 의료 소외 지역에 홀로 계신 부모님의 병원 방문을 위해 연가를 받아야 하는 불편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간호사가 부모님의 건강 상태를 정기적·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건강 악화 시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받도록 하는 ‘의사와 간호사의 협업 시스템 도입’을 의사들이 극구 반대하는 것이 진정으로 국민을 생각하는 것인가.

개원의들은 신도시 등 인구 밀집 지역을 선호한다.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지역에서 개업하면 환자들도 많고 돈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 구조가 바뀌면서 소외된 농어촌, 벽오지 주민들은 거의 노인들로 이뤄져 있고, 의료기관들은 소위 수지가 맞지 않아 폐업하거나 도시로 이전한다. 돌봄을 받아야 할 우리 부모들은 의료 공백 상태에서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 모든 국민이 평등한 의료서비스를 누리고, 특히 산업화에 이바지한 세대의 의료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 지역 통합 돌봄서비스가 시급하다. 진정한 의료 선진국은 발전된 의료기술도 포함되겠지만 국민이 어느 곳에 있든, 몸 상태가 어떠하든, 최소한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나라다.

국민일보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5/0001604296?sid=110

[대학通] ‘생성형 AI’가 이끄는 대학 교육의 미래

[김기석 교육혁신원 원격교육지원센터 팀장 / 콘텐츠학 박사]

챗GPT(ChatGPT)가 만드는 놀라운 기술의 진보가 이뤄지고 있다. 최근 오픈AI에서 개발한 전문 인공지능 챗봇인 챗GPT는 공개 5일 만에 하루 이용자가 100만 명을 돌파하며 세계의 산업 생태계를 뒤흔들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블로그에서 윈도우 핵심 기술인 GUI 이후 가장 충격적인 기술적 진보라며 챗GPT를 극찬했다. 동시에 AI 기술이 특정 기득권이나 자본가 계층에 독점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챗GPT는 대화를 전문으로 하는 인공지능 기술이다. 사용자가 대화창에 텍스트를 입력하면 그에 맞춰 대화를 나누는 서비스로 질문에 대한 답변부터 작사, 작곡, 코딩, 글 작성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이번에 개발된 챗GPT-4는 기존 AI와는 차별화된 점으로 더 똑똑해진 대규모 언어모델(LLM)이라는 특징이 있다. 특히 언어에 특화된 인공지능 GPT는 인간과 비슷한 수준의 대화를 생성하고 있는데,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로 사전 훈련된 대량 생성 변환기를 사용한다. 이를 통해 인간과 자연스럽게 대화가 가능하고 고도의 어려운 질문에도 답변할 수 있다. 단순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사고를 요구하는 까다로운 질문이나 창의적인 아이디어에도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기존의 AI와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렇다면 챗GPT가 대학에서는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 챗GPT는 교육 업계의 가장 뜨거운 감자로 주목받고 있다. 국내 대학에서도 챗GPT를 과제나 시험에 실제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날 전망이다. 다만 대화와 문서 작성이 가능한 챗GPT 기술은 대학가에서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은 기술이다. 그 이유는 AI를 활용한 대필이 가능해져 과제나 시험에서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대학 당국에서도 아무런 대책이 준비돼 있지 않아 악용 사례는 늘어날 수 있다. 최근 서울대가 교내 AI 연구원과 함께 챗GPT를 활용한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툴을 개발하기도 했다. 대안을 찾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지만 안타깝게도 다수의 국내 대학은 부작용에 맞는 대응책이나 프로그램 구축을 이제 막 시작하거나 건드리지도 못했다.

챗GPT 인공기술 개발의 발전은 끝이 없다. 앞으로 더 진화된 생성 AI가 개발될 것이고 교육계에서도 이러한 변혁을 마냥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교육의 방법과 교육 내용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교육이 문제의 ‘답’을 찾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질문’을 잘해야 한다. 그야말로 잘 질문하는 것이 곧 답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해지는 시기가 올 것이다. 정답은 무수히 방대한 인공지능 데이터베이스가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대화의 숨은 맥락이나 의도를 이해하고, 이전의 질문 내용이나 대화까지 기억해 답변에 활용하는 인공지능 AI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구글에서 개발한 ‘바드’, 중국 바이두의 ‘어니봇’, 한국 네이버의 ‘서치GPT’ 등 생성 AI는 초거대 AI를 적용한 사례로 올해 상반기 산업 생태계를 뒤흔들 전망이다. 이들의 주요 특징은 대화형 AI 챗봇으로 챗GPT의 새로운 대항마로 꼽힌다. 앞으로 AI는 인간이 행하는 일이나 교육, 의료, 여행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될 것이다.

교육 산업에서도 생성형 AI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구체적인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 동시에 인공지능 기술이 교육의 불평등 문제를 야기하지 않도록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미 챗GPT는 스스로 언어를 만들어 추론하는 능력을 가졌고 다양한 논문과 과제를 고차원으로 작성할 수 있어서다. 이에 AI 기술 활용 능력에 따른 교육 불평등이 야기되지 않도록 범정부 차원 및 대학 자체적으로 교육적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의 변화를 유연하게 대처하는 태도다. 무작정 AI의 도입을 막기보다 인공지능을 더욱 현명하게 활용할 수 있는 공존법을 배워야 한다.

한국대학신문 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44404

[문학 속 가정 이야기] 좋은 파수꾼이 된다는 것

《호밀밭의 파수꾼》

[노동욱 스미스학부대학 교수]

‘금서(禁書)’란 말 그대로 ‘금지된 책’을 뜻한다. 국어사전에서는 금서를 “출판이나 판매 또는 독서를 법적으로 금지한 책”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세계 문학사에서 금서의 목록을 살펴보면 고개가 갸웃해질 때가 있다. 지금은 ‘세계 명작’으로 읽히고 있는 책들이 금서의 목록에 올라가 있는 경우가 종종 눈에 띄기 때문이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 《허클베리 핀의 모험》 《주홍 글자》 《베니스의 상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이 그러하다. 이들은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로, 우리나라에서도 세계 문학 전집에 포함되어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이러한 책들을 “위대한 금서”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 책들은 왜 한때 금서의 목록에 올랐을까? 이는 폴란드에서 《곰돌이 푸우》가 금서의 목록에 올랐던 연유를 살펴보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 놀랍게도 《곰돌이 푸우》는 한때 금서였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캐릭터, 곰돌이 푸우가 말이다. 《곰돌이 푸우》가 폴란드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던 이유는, 푸우가 하의(下衣)를 입고 있지 않아 외설적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유에서였다.

금서를 규정하는 기준은 주로 아이들에게 읽히기에 유해하다는 어른들의 판단에서 기인한다. 문제는 어른들이 만들어낸 기준이 잘못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의를 입지 않은 푸우를 외설적이라고 비판하는 어른들의 기준이 문제적인 것이지, 하의를 입지 않은 푸우가 문제적인 것은 아니다. 과연 푸우를 보면서 ‘하반신을 노출하고 있어 외설적’이라는 생각을 하는 아이가 몇이나 있을까?

《곰돌이 푸우》를 금서로 규정한 것은 다름 아닌 어른들의 타락한 시선이다. 어른들은 《곰돌이 푸우》를 금서로 지정함으로써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옛 속담을 스스로 입증하고 말았다. “세상이 부도덕하다고 부르는 책들은 사실 세상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책들”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한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말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이 글에서 소개할 J. D. 샐린저(J. D. Salinger)의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은 ‘위대한 금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금서 중 하나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금서로 지정되었던 이유는 이 책을 읽어보면 금세 짐작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홀든은 ‘반항아’로서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술과 담배를 하며, 가출까지 감행한다. 이러한 홀든의 모습이 청소년들에게 미칠 수 있는 악영향 때문에, 이 책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홀든은 문제아다. 하지만 홀든의 일탈 이면에는 어른 사회의 위선이 자리하고 있다. 샐린저는 사회에 만연한 위선에 대해 “세상은 인간인 척 하는 배우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여느 아이들에 비해 조숙한 홀든은 어른 사회의 위선을 지켜보면서 실망한다. 아니, 절망한다. 홀든이 사회에 제대로 발붙이지 못하는 이유는 어른다운 어른의 부재, 신뢰하고 의지할만한, 존경할만한 어른의 부재 때문이다. ‘신뢰’, ‘의지’, ‘존경’ 등의 거창한 표현을 차치하더라도, 홀든은 그저 대화가 통하는 어른조차 찾기 힘들었다.

홀든은 겨울이 되어 호수가 얼면 호수에서 헤엄치던 오리들은 어디로 갈까 궁금해 한다. 홀든은 추운 겨울 호수가 얼어 갈 곳이 없어진 외로운 오리들에게 자신을 이입한다. 한낱 ‘오리 따위’의 행방과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이 드물 듯이, 몸과 마음 한곳 발붙일 데 없는 ‘문제아’ 홀든의 행방과 안위를 걱정하는 어른은 드물다. 일탈하는 책이 ‘금서’로 낙인찍히듯, 일탈하는 아이도 ‘문제아’로 낙인찍힌다. 어른들의 눈에는 그 아이가 ‘왜’ 일탈을 선택했는지 보다, 그 아이가 일탈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어른다운 어른이 부재한 사회에서 홀든은 급기야 자신이 스스로 ‘호밀밭의 파수꾼’을 자처한다. 홀든은 아이들이 호밀밭에서 뛰어놀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려고 하면 아이들을 붙잡아주는, 아이들을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실 파수꾼을 가장 필요로 하는 존재는 바로 홀든 자신이었다. ‘일탈’이라는 홀든의 선택은 역설적으로 ‘나를 붙잡아 달라’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단순히 일탈하는 아이를 붙잡아주는 것만이 ‘호밀밭의 파수꾼’의 역할이라고 단정 짓지 않는다. 홀든은 어느 날 거리에서 한 가족을 보게 된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여섯 살 가량 되는 어린 아이였다. 그 어린 아이는 ‘호밀밭을 걸어오는 사람을 붙잡는다면’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인도와 차도를 경계 짓는” 곳을 걷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어린 아이가 인도와 차도의 ‘경계’를 걷는 동안 차들이 씽씽 소리를 내며 곁을 지나가지만, 부모가 어린 아이를 붙잡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저 어린 아이 곁에서 함께 걸을 뿐이다.

홀든이 인상 깊게 본 이 장면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여기서 인도와 차도의 ‘경계’는 한 아이가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통과의례처럼 필연적으로 지나게 되는, ‘순수’와 ‘경험’의 세계 사이의 ‘경계’를 상징한다. 아이는 성장하여 언젠가 차들이 씽씽 달리는 것으로 형상화 된 험난한 현실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될 것이다. 이때 부모의 역할은 단순히 아이를 위험하지 않게 꽉 붙잡아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부모의 역할은 경계를 걷는 아이가 위험에 처할 때면 언제든 붙잡아줄 수 있도록 곁에서 함께 걸으며, 아이가 스스로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걸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때 부모와 아이 사이에 형성된 신뢰감은 아이의 발걸음에 확신을 심어주는 동시에, 그것이 자유롭고 창조적인 발걸음이 되도록 한다. 이는 아이가 첫 걸음마를 뗄 때 부모가 처음에는 아이를 꽉 붙잡아주지만, 종국에는 아이가 홀로 걸을 수 있도록 놓아주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이는 아이가 처음 자전거를 탈 때 부모가 처음에는 꽉 붙잡아주지만, 종국에는 잡은 손을 슬며시 놓은 채 뒤에서 아이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조용히 지켜봐주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된다는 것은……바로 이런 것이다.

월간 <가정과 건강>

[칼럼] 새해 결심을 성공으로 이끄는 마음 건강

[정성진 상담심리학과 교수]

2023년을 시작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분기가 지나갔다. 새해를 맞이하며 결심한 것을 지금도 실천하고 있는가? ‘꾸준히 운동할 거야’, ‘올해엔 반드시 금연하고 말거야’… 이렇게 좋은 결심을 했건만 몇 번 실천하다 도루묵이 되지는 않았는가? 새 학기가 시작된 지도 한 달이 지나갔다. 새 학기에는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결심했지만, 혹시 작심삼일이 되지는 않았는가?

이렇게 결심을 이어가지 못하면 자책하게 된다. ‘내가 그렇지 뭐’, ‘난 의지가 너무 약해.’ 어떨 때는 자기 합리화도 한다.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 ‘과장님이 같이 피우자고 해서…’ 결심을 실천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과 강연은 늘 인기가 있다. ‘실행력을 키워야 한다’, ‘동기부여를 잘 해야 한다’, ‘루틴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책을 읽거나 강연을 들으면 당장이라도 결심을 다 이룰 것만 같다. 그러나 막상 다음날이 되면 변하지 않고 똑같은 나를 발견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왜 그럴까?

변화의 원리

사람은 변하기도 하고 변하지 않기도 한다. 날로 성장하는 아기를 보면 변하는 존재인 것 같은데, 나이 들어도 변하지 않는 성격을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필자가 사람들을 가르치고 상담하면서 발견한 것은 변화의 자물쇠를 여는 열쇠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변화하고 싶다면, 새해 결심을 이어가고 싶다면 나를 변화시키는 열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변화하려면 지식이 필요하다. 공부법, 운동의 유익, 흡연의 해로움 등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는 것을 실천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한다. 열정이 느껴지고 의지가 불타올라야 한다. 그러나 지식이 많아지고 동기부여가 되어 결심하더라도 이내 큰 저항에 부딪힌다. 사람의 몸과 마음은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려는 항상성이 있어서 변화에 저항한다. 이불 속에 10분만 더 있고 싶고, 게임 한 판만 더 하고 싶고, 딱 한 개피만 더 피우고 싶은 것이다. 귀찮거나 피곤해서 실행하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실망해서 아예 결심을 내려놓고 만다.

욕구를 활용하라

결심을 실천하는 원리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동기를 높이고 저항을 줄이는 한 가지 원리만 설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욕구를 활용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다양한 욕구가 있지만, 심리학자 윌리엄 글래서(Willaim Glasser)는 이를 사랑과 소속의 욕구, 힘과 성취의 욕구, 즐거움의 욕구, 자유의 욕구, 생존의 욕구라는 다섯 가지 기본 욕구로 정리했다. 누구에게나 이 다섯 가지 욕구가 있지만, 각자마다 특히 강한 욕구가 1~2개씩 있게 마련이다. 이 강한 욕구를 활용하면 동기를 높이고 저항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다.

나에게 가장 강한 욕구는 무엇일까? 만약 모임에 참석하여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데 관심 많다면 사랑과 소속의 욕구가 강한 것이다. 앞장서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에게 충고나 지시를 잘 하며 성공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크다면 힘과 성취의 욕구가 강한 것이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배우는 것을 즐기고 취미가 다양하다면 즐거움의 욕구가 강한 것이다. 개방적이고 구속이나 강요를 싫어하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자유의 욕구가 강한 것이다. 모험을 피하고 건강정보에 관심이 많고 절약하는 경향이 강하다면 생존의 욕구가 강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강한 욕구를 어떻게 활용하여 결심을 이어갈 수 있을까? 사랑과 소속의 욕구가 강한 사람은 같은 결심을 실천하려는 사람들로 이뤄진 모임에 가입하면 좋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운동하고 공부하면 동기가 강화되고 변화에 대한 저항을 줄일 수 있다. 힘과 성취의 욕구가 강한 사람은 성공하기 위해 결심을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 또는 같은 결심을 실천하는 모임을 결성해서 리더를 맡는다면 모범이 되어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결심을 실천하게 된다.

즐거움의 욕구가 강한 사람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결심이라면 쉽게 실행하지만, 재미없게 반복해야 하는 결심은 이어가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반복연습 후에는 재미있는 것을 할 수 있는 보상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요령이 필요하다. 자유의 욕구가 강한 사람은 의무감을 싫어하기 때문에 반복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결심한 대로 실천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 가령 향상된 실력, 강화된 체력, 향상된 건강 등이 더 큰 자유를 더 오랫동안 보장해준다는 깨달음을 얻는다면 실행력을 높일 수 있다.

생존의 욕구가 강한 사람은 건강하게 장수하기 위해서, 돈을 더 벌어 안락하게 살기 위해서 결심을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동기가 강화되고 변화에 대한 저항을 줄일 수 있다.

4할이면 전설이 된다

한 가지만 더 기억하자. 프로야구 타율왕을 보면 대체로 3할 5푼 정도의 타율로 1등을 한다. 타율이 4할이면 전설의 타자가 된다. 우리의 결심도 30~40%만 실행해도 대단한 것이다. 100% 실행은 불가능하다. 완벽을 기하려는 열정과 노력은 일의 완성도를 높이지만, 30~40%만 실천해도 성공이라는 유연한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또한 ‘실패하면 어떡하지’라고 지레 겁먹지 말고, 자전거 타기를 배우듯이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지 뭐’, ‘문제가 생기면 부딪혀 보는 거야’, ‘이건 실패가 아니라 배우는 과정이야’라고 생각하자.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부터 목표로 삼자. 낙수가 바위를 뚫듯이 작은 실천과 성공들을 누적하다 보면 큰 성공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누가복음 16장 10절). 자신의 강한 욕구를 파악하여 원동력으로 삼고 작은 성공을 누적하여 새해 결심을 이어가는 한 해를 보내시길 기원한다.

─ 월간 <가정과 건강> 2023년 4월호

[문학 속 가정 이야기] ‘티튜바’를 위한 애가(哀歌)

마녀사냥의 메커니즘

[노동욱 스미스학부대학 교수]

“물건을 훔쳐낸다는 의심을 받던 일꾼이 한 명 있었다. 매일 저녁, 일꾼이 공장을 나설 때면 그가 밀고 가는 손수레는 샅샅이 검사를 받았다. 경비원들은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손수레는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결국 진상이 밝혀졌다. 일꾼이 훔친 것은 다름 아닌 손수레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것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 저서 ‘폭력'(Violence)의 서두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화로서, 폭력에 대한 성찰에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우리는 때로 눈앞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을 좇다 보면, 보이지 않는 ‘거시적’인 것을 놓치기 마련이다. 마치 훔친 물건이 있는지 샅샅이 검사하느라, 손수레를 통째로 훔친 사실을 놓치고 마는 이 일화에서처럼 말이다. 이는 ‘폭력’이라는 주제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유혈이 낭자하는 ‘가시적’인 폭력만을 주목할 때, 우리는 ‘거시적’인 구조적 폭력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지젝의 말마따나, 우리 대부분은 버튼 하나를 눌러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총으로 누군가를 직접 겨냥해 쏘는 일에 대해 더 큰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살펴볼 마녀사냥의 폭력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거시적인 관점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마녀사냥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흔히 ‘광기’라는 표현이 뒤따른다. 그러나 마녀사냥의 ‘광기’만을 주목할 때, 이 광기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너무나도 냉철하고 이성적인 마녀사냥의 메커니즘을 간과하기 쉽다. 따라서 마녀사냥의 광기 이면의 사회질서에 내재한 구조적인 폭력을 주목해야만, 마녀사냥의 메커니즘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크루서블'(The Crucible)은 마녀사냥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크루서블’에 나타난 폭력은 어느 날 밤 세일럼의 한 숲 속에서 패리스 목사의 딸 베티를 비롯해, 아비게일, 티튜바 등의 마을 소녀들이 춤을 추면서 악령을 불러내는 모습이 패리스 목사에게 발각되는 사건이 발단이 된다. 베티와 당황한 아이들은 정신을 잃고 앓아눕게 되고, 마을 사람들은 소녀들에게 마술 같은 사악한 기운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한다. 마을 사람들 중에 마녀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소녀들은 자신들이 금지된 놀이를 한 것에 대해 처벌 받을 것이 두려워, 마을의 무고한 사람들, 평소에 따돌림을 받던 사람들, 자신들과 원한이 있던 사람들을 마녀로 몰기 시작한다. 마녀재판이 열리자 고발의 힘은 더욱 강해지고, 결국 스무 명 가량의 마을 사람들이 마녀로 몰려 사형을 당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마녀사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광기’로 인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이성적이고 적법한 절차에 의해 진행된다는 점이다. 마녀사냥의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점은 그 동력이 광기가 아니라 이성에 있다는 것이다. ‘크루서블’의 세일럼 사회의 폭력은 놀라우리만치 ‘적법한’ 절차에 의해 진행된다. 마녀라고 고발을 당한 사람들은 증인의 증언에 따라 ‘적법’하게 소환되고, ‘적법’하게 재판을 받는다. 또한 ‘적법’하게 정해진 법에 따라 고백을 하면 석방이 되고, 고백을 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해진다. 다시 말해, 지젝의 손수레의 일화를 적용해본다면 ‘크루서블’에서 재현되는 폭력은 다름 아닌 마녀사냥의 열기로 뜨거운 세일럼 사회 그 자체의 작동원리라 할 수 있다.

일례로, 유럽에서 마녀사냥의 불길이 가장 거세게 타오른 시기였던 1487년에 출간된 ‘마녀 잡는 망치'(Malleus Maleficarum)는 마녀사냥을 뒷받침하는 논리와 이념뿐 아니라 마녀를 가려내는 법과 심문하는 방법, 사법적 절차까지 자세하게 담고 있다. 마녀사냥에 대한 여러 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악명 높은 책이 광기가 아닌 이성으로 쓰였다는 점은 마녀사냥의 메커니즘이 무엇이었는지를 예증한다.

우리가 마녀사냥의 주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마녀사냥이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녀사냥은 지금도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더군다나 우리가 ‘크루서블’에서 목격했던 적법한 절차에 의해 행해지는 마녀사냥의 유산도 여전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작금의 시대에도 자신이 미워하는 ‘마녀’를 찍어내기 위해 ‘규정집’부터 들여다보며, 그 ‘마녀’가 규정을 위반한 것은 없는지 샅샅이 들여다보면서 감시하기도 한다. 이처럼 ‘적법한’ 절차에 의해 마녀를 제거하는 일은 직장을 비롯한 조직문화에서 비일비재하다. 슬픈 역사는 반복된다. 마녀사냥은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마녀는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적으로 핍박을 받았던 존재들이었지만, 사실 종교적으로 가장 보호받아야 마땅한, 가장 유약한 처지의 사람들이 많았다. ‘크루서블’은 특히 젠더·인종·계급적 타자일 경우 집단적 폭력에 더 노출되기 쉽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이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가장 먼저 고발되는 사람이 흑인 여자 노예 티튜바라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 청교도들로 구성된 세일럼 사회에서 바베이도스 출신인 티튜바는 완전한 ‘외부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녀 사건에서 티튜바가 가장 먼저 고발당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흑인 여자 노예’라는 신분으로 인해 이중, 삼중의 억압을 겪어온 티튜바는 세일럼에서 가장 먼저 조정되어야 하는 주변적 대상으로 호명되었던 것이다. 즉, 마녀는 티튜바처럼 종교의 이름으로 가장 보호받아야 할 ‘외부인’이자 ‘주변인’이었는데, 이러한 존재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은 슬픈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티튜바와 같은 약자이자, 외부인이자, 주변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마녀’라는 이름의 약자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극단적인 모순적 행위를 반복해서 범할 수 있다. 기억하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망각한다면, 마녀사냥은 언제고 고개를 들고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월간 가정과 건강

[명지원의 명명백백] 희망의 인문학 ‘현대 원주민의 이해’

[명지원 교직과 교수]

지난주 토론토교육청은 고교 교육과정에서 4학점 배정 과목인 English course의 1학점 수업인 11학년 English course 과목명을 <현대 원주민의 이해>(Understanding Contemporary First Nations, Métis and Inuit Voices)로 바꾸었다. 셰익스피어와 디킨슨 같은 서양 작가의 작품중심에서 원주민 작가의 작품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 것이다.

원주민 문학이 다루는 원주민 억압과 파괴의 역사 그리고 그 후유증은 현대 사회의 지배문화인 억압과 불평등의 원인과 그 맥을 같이한다. 이번 교과과정 개편은 학생들이 캐나다의 현 이슈에 대한 비판적 사고 능력, 시민이 갖춰야 할 인문적 소양 그리고 문제해결 역량을 기르기 위한 용기 있는 결정이다.

<현대 원주민의 이해> 교과 목표에 적합한 작품으로 Richard Wagamese의 <INDIAN HORSE>(2012)와 Tanya Talaga의 <All OUR RELATIONS : Finding the Path Forward>(2018)가 있다. 영화로도 제작된 <INDIAN HORSE>는 ‘성 제롬의 집’에서 신부와 수녀에 의해서 온갖 학대와 착취를 경험하며 생긴 트라우마를 지니고 살아가는 원주민 청년 Saul의 치유를 위한 처절한 삶의 여정을 그렸다. Tanya Talaga는 <All OUR RELATIONS : Finding the Path Forward>(2018)에서 캐나다 원주민의 구조적인 인종차별주의, 죽음, 청소년 자살 증가에 대한 경고등을 켜며 사회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한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의 피해를 입은 모든 식민지 국가의 공통점은 관계 자체를 파괴하는 사회적으로 만연한 ‘분리(分離)’ 현상이다. 원주민 문학은 원주민 문화의 메시지인 연대, 진실, 포용의 메시지를 담은 희망의 인문학이다. 자라나는 세대의 교육과정 개편에서 다문화국가 캐나다의 사회통합과 미래의 ‘희망’을 본다.

※ 명지원 교수가 <토론토 중앙일보>에 연재하는 칼럼명 ‘명명백백(明鳴絔?)’은 한자성어 ‘명명백백(明明白白)’의 음가를 차용해 그가 직접 만든 조어다. ‘明(밝을 명)’과 ‘鳴(울릴 명)’, 떨어지거나 해어진 곳을 꿰맨다는 뜻의 ‘絔(깁다 백)’,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부는 바람을 뜻하는 ‘?(동남풍 백)’을 썼다. 즉, ‘밝게 울려 떨어지거나 해어진 곳을 꿰매어, 동남쪽(우리나라)에서 서쪽(서구 문명)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다.

토론토 중앙일보 https://www.cktimes.net/opinion/%EB%AA%85%EC%A7%80%EC%9B%90%EC%9D%98-%EB%AA%85%EB%AA%85%EB%B0%B1%EB%B0%B1-%ED%9D%AC%EB%A7%9D%EC%9D%98-%EC%9D%B8%EB%AC%B8%ED%95%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