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 칼럼] 질병과 회복탄력성

[정성진 상담심리학과 교수]

생로병사의 비밀

우리 인생을 네 글자로 요약한다면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나서 늙어 가다가 병들어 죽는다고? 성장기도 있으니 생(生) 다음에 장(長)을 넣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생(生)은 ‘태어나다’라는 뜻도 있고 ‘살다’라는 뜻도 있으니 성장이 포함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더욱이 성장이 멈추면 노화가 시작되기 때문에 표시는 잘 나지 않지만 25세부터 노화가 시작된다고 하니 인생을 생로병사라고 요약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장수 TV 프로그램인 ‘생로병사의 비밀’은 2002년 10월부터 지금까지 20년 넘게 제작되어 방영되고 있다. 기획 의도는 “건강지수와 행복지수를 동시에 높일 수 있는 건강한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유익한 건강 정보를 제공하는 양질의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건강 정보 말고 생로병사에는 ‘비밀’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생로병사 중 그 어느 것도 본질상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우리는 태어났고 늙어 가고 병에 걸리고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래서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난 것을 두고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표현하는 이도 있고,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실존적 불안을 느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노화를 막고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건강에 좋은 습관을 실천하는 것은 좋지만 인위적인 노화 방지에는 한계가 있고 가족력이나 환경 요인 때문에 질병을 피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질병과 회복탄력성

회복탄력성은 “역경을 경험했거나 경험하면서도 이전의 적응 수준으로 돌아오고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다시 말하면 오뚝이나 갈대처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능력이다. 회복탄력성은 사는 내내 중요한 능력이지만 생로병사라는 단어만 놓고 보면 회복탄력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병(病)’뿐이다. 신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태어난 다음에는 다시 탄생 이전 수준으로 돌아갈 수 없고, 죽은 다음에는 다시 사망 이전 수준으로 돌아갈 수 없다. 노화를 늦출 수는 있지만 노화되기 이전 수준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오직 질병만이 잘 치료받고 회복된다면 발병 이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래서 질병 치료와 회복탄력성의 관계를 탐구하는 학자가 많다.

환자의 태도는 질병의 진행 방향에 큰 영향을 끼친다.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살고자 하는 욕구를 보이는 사람은 이러한 태도 덕분에 면역 체계가 강해지고 질병에 더 잘 저항한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관심을 가지고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고 치료될 것이라는 희망이 강한 환자가 질병을 극복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사람은 회복탄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심각한 질병을 진단받았을 때 회복탄력성이 부족하다면 환자는 두려움과 불안과 부정적인 걱정으로 가득 차게 되어 저항력이 약화되고 질병이 악화될 수도 있다.

질병에 대처하는 방법

그렇다면 의학적인 치료를 잘 받는 것 외에 어떻게 질병에 대처하는 것이 회복탄력성과 치료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가? 우선 질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중요하다. 진단받은 환자들 가운데는 현실을 부인하거나, 두려움에 압도되거나, 격분하며 삶과 신을 저주하거나, 벌받은 것이라며 죄책감에 빠지는 이들이 있다. 가장 좋은 태도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포기하고 운명에 자신을 맡긴다는 뜻이 아니라 질병이라는 도전에 응하되 피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는 의미이다.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질병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므로 가능하다면 전문가에게 질병의 특성과 치료에 대해서 자세히 들어 이해하고, 투병도 성숙과 인내를 훈련하는 배움의 과정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둘째, 마음이 명랑해지도록 연습하면 좋다. 여전히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기관과 장기로 인해 감사하며 내가 완치 혹은 생존 확률에 해당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해 보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과 주변 사람을 돌아보지 못했다면 선량한 마음을 품기 위해 노력하고, 건강에 좋고 활력 넘치는 장소를 방문하며, 명랑한 사람들과 친분을 맺고, 부정적인 생각이나 절망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마음을 관리하고, 감사한 사람과 일에 대해 표현하거나 기록할 필요가 있다.

셋째, 희망을 품되 현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질병을 극복할 것이라는 희망과 확신은 매우 중요하다. 회복을 꿈꾼다면 건강 상태가 향상될 것이다. “사람의 심령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잠 18:14). 하지만 완전한 회복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이해하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삶을 괜찮게 누릴 정도로 회복되면 좋겠다고 기대를 조정하는 것이 좋다.

넷째, 사랑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족과 친구의 지지가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최고의 비법이라고 생각하는 전문가가 많다. 그러므로 당신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이어 가고, 그들과 함께 활동하며, 질병과 통증, 두려운 감정, 회복의 희망에 관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큰 힘이 된다.

다섯째, 적절한 활동을 유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예외가 있긴 하지만 아픈 사람이라도 대부분은 계속 사회에 기여할 수 있고 유용한 일을 할 수 있다. 독서, 글짓기, 가사, 산책, 봉사 등 체력에 적합한 활동을 찾을 수 있다. 본인이 여전히 성장하고 있고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자각은 치료 촉진에 도움이 된다.

치유하시는 하나님

생로병사에는 또 다른 비밀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는 원래 노화와 질병과 사망이 없었지만 인간이 타락함으로 이 세 가지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원래 상태로 회복시키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목적과 소명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며, 죽음을 경험할 수 있지만 부활과 영생을 선물로 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늙고 병들 수도 있지만 그럴수록 더욱 곁에서 사랑하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

“치료하는 여호와”(출 15:26)이신 하나님에게 치유와 회복을 기도로 요청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회복탄력성 증진과 질병 회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생로병사의 비밀을 만드시고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신 것을 잊지 말도록 하자.

월간 <가정과 건강> 9월호

[시론] 집으로 가자

[송창호 신학대학장]

‘집으로, 집으로’

해가 뉘엿뉘엿 불암산으로 넘어가고 있다. 불암산 정상이 정면으로 보이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오늘의 임무를 마친 불그스름한 해를 보며 알 수 없는 만족과 평안을 느낀다. 왠지 나도 오늘 하루 주어진 모든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처럼. 그러나 그 감흥도 잠시, 은은한 햇볕을 가리는 녹색 버스들과 각양각색의 승용차들이 달리는 모습이 순간의 평안을 깨 버린다.

붉은 태양에 고정되었던 내 시선은 길을 달리는 차들로 끌려간다. 차선을 채운 붉은 불빛들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그들의 목적지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을까? 아마도 그들도 집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퇴근 시간이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일 아침이면 다시 출발하여 이 동일한 길로 돌아올 것인데, 집에는 무엇이 있길래, 누가 있길래 어둠이 밀려오는 시간, 복잡한 길을 거슬러 집으로 돌아가는 걸까?

‘영끌족, 빚투족’

‘영끌족’은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과도한 대출로 집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주로 2030세대의 젊은 사람들이 주요 구성원이다. 집값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어서 지금 집을 구입하지 않으면 미래에는 더 비싸게 구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영끌족이 되어 가고 있다. ‘빚투족’이라는 비슷한 표현도 있는데 이들의 행동을 ‘묻지 마 투자’라는 용어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는 집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를 보여 주는 현상이다.

실제로 거주하기 위해 집을 구입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집을 부의 표식으로 활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갭투자’라고 불리는 방식을 통해 수백 채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집을 주거 공간뿐 아니라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부동산을 통해 수입을 올리는 것이 많은 사람의 바람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표현이 있을까.

‘집이 되려면’

올해 초,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이미 아버지, 장인, 장모님은 예전에 우리 곁을 떠나셨고,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남아 계시다가 결국 세월의 흐름에 겨워하시며 인생의 막을 내리셨다. 올해 5월 8일, 네 분의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첫 어버이날을 맞이했다. 가야 할 곳이 없다. 아이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전부다. 더 이상 안면도에 가지 않는다. 장모님이 거기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청주에 가지 않는다. 아직도 집은 거기에 있지만 무조건 나의 편이던 어머니가 거기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교사인 아내가 2박 3일 수학여행을 떠났다. 운동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사람들도 만나고 늦게 집에 들어와도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는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 불을 켜는 것은 참 쓸쓸한 일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을 우리는 ‘집’이라 부르지 않고 ‘폐가(廢家)’라고 한다. 집은 물리적인 건물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일부이다. 집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소속감을 느끼고, 서로 돕는 곳이다. 집은 어둠의 시간을 같이 보내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집을 세우자’

2022년 통계청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결혼 건수는 작년 대비 0.4% 감소한 19만 2천 건이었다. 하지만 이혼 건수는 전년 대비 1.7%(2,100건) 증가한 13만 3천 건이었다. 우리는 물리적인 건물로서의 집을 사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 삶의 공동체로서의 집을 세우기 위한 노력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고 있는 것 같다. 국가는 젊은이들을 위한 주택을 지원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공동체로서의 집을 세우는 데 필요한 노력은 미흡한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집을 세워야 한다. 이 집은 단순히 물리적인 구조물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부로서의 집이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이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며, 정부와 사회는 아파트를 지으려는 노력과 더불어 공동체로서의 집이 튼튼해지도록 정책을 세우고 재정을 투자해야 한다.

‘내 삶에 석양이 비칠 때’

버스 정류장에서 바라본 붉은 석양과 자동차의 무수한 빨간 후미등이 나에게 돌직구를 던졌다. “너의 삶에 석양이 질 때 너는 돌아갈 집이 있니?”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선배들은 자신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서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갔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집)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집)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확언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어떻게 그곳에 갈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을 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알려 주셨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는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말했듯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날 때와 죽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삶은 언젠가 완전히 사라질 순간을 경험한다.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며 에너지를 얻듯이 인생의 석양이 다가왔을 때를 대비하여 집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천상병 시인이 읊조린 ‘귀천(歸天)’의 마지막 시구가 우리의 것이 되면 좋겠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월간 <시조> 8월호

[대학通] 지역사회와 협력하는 대학의 새 역할

[김기석 교육혁신원 원격교육지원센터 팀장 / 콘텐츠학 박사]

최근 대학들은 여러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학령인구의 가파른 감소로 문을 닫는 대학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공주대, 군산대 등 비수도권 대학 13곳이 교명에 ‘국립’ 이름을 넣는 등 신입생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이처럼 정부가 교육 개혁을 강조하면서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대학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지속되고 있다. 뜨거운 감자인 챗GPT의 개발과 보급, 학령인구 감소, 초고령화로 인한 평생교육의 수요 증가 등 사회 전반적으로 교육에 관한 다양한 변화가 이뤄지며 새로운 대학 교육의 패러다임이 제시되고 있다.

우선 학령인구 감소로 폐교 위기에 처한 대학들이 가장 시급한 문제다. 현실적 대안은 100세 시대를 맞이한 우리에게 필요한 평생교육, 평생학습 기관으로 대학의 교육을 탈바꿈하는 것이다. 한국의 초고령화 속도는 세계 1위로 2045년이면 일본을 넘어 가장 늙은 나라가 된다. 통계청은 2020년 대학교 학령인구가 241만 명, 2030년엔 187만 명으로 10년 뒤 더 큰 폭으로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미 한국의 대학들은 재정 마련 및 대학의 존립을 위한 새로운 대안이 절실한 상황이다. 남아있는 대학들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평생교육’으로의 전환이다. 고령화 사회가 도래하면서 평생학습에 대한 수요는 더욱 커졌다. 개인의 자아실현과 제2의 삶, 앙코르 커리어를 위한 새로운 직업교육, 평생교육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해외 대학의 경우 다양한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지역사회와 연계된 학습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는 대학의 안정적인 재정 마련에 기여하고 주민에겐 새로운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2가지 이점이 있다. 미국 시카고 대학은 1892년부터 ‘Graham School’로 불리는 평생교육 과정을 운영 중이다. 성인 학습자 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고 성인 맞춤형 강의를 100년 넘게 운영하며 평생교육 시대의 새로운 대학 교육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이다.

이외에도 미시간주립대의 MSUE는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평생교육을 운영하며 비학위, 비학점 과정으로 자유로운 교육서비스를 제공한다. 지역사회의 요구에 맞춘 교육을 실시하는 커뮤니티 기반의 접근이라는 점에서 지역과의 결속력을 다지고 지자체와의 교육적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효과가 있다.

무엇보다 현재 교육계가 처한 시대적 변화를 예의주시해야 한다.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을 통해 인공지능, 증강현실 등 각종 신기술이 교육에 적용되고 있다. 스마트러닝과 대학 교육의 패러다임 변화로 사회가 요구하는 대학의 모습이 단순한 청년 대상 교육이 아닌 평생교육의 장으로 바뀌고 있다. 전문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는 유능한 강사를 초빙해 최신 교육 트렌드와 정보, 교육을 제공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AI 시대에서 필요한 교육은 ‘인간 중심의 교육’이다. 교수의 강의로 이뤄진 전통적인 교육과 달리 미래의 교육은 스마트 인공지능 기술과 각종 첨단 교구를 사용한 방식으로 전환될 것이다. 자동 채점, 적응형 학습, 교육용 게임 및 시뮬레이션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교육이 이뤄질 경우 대학 강의실의 모습도 색다른 형태로 변화할 것이다. 집단 강의로 이뤄진 현재의 형태가 아니라 학생 개인의 데이터를 분석 활용한 맞춤형 교수학습이 주가 될 가능성이 크다. 마찬가지로 개별화 학습을 통해 교육의 질을 높이고 수요에 따른 새로운 교육 시스템이 개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아직 정착되지 않은 새로운 교육 제도와 학습의 변화는 머지않아 전 교육계에 적용될 것이다. 대학 역시 변화하는 세태에 따라 낡은 교육 제도와 방식을 점검하고 수요자의 요구에 따른 적절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결국 대학의 존폐 위기는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한국 사회의 필연적 요구와 맞닿아있다. 중장년기 평생교육의 니즈(needs)가 높아지는 중장년층 대상 평생교육과 평화로운 노후를 대비하는 노인 대상 교육을 활성화해 지역사회의 거점 평생교육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 대학의 존립은 곧 시대적 요구와 흐름에 빠르게 적응하고 변화를 먼저 수용하는 자세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대학신문 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51296

[문학 속 가정 이야기] 맞춤형 아기와 서브웨이 샌드위치

가타카 Gattaca

[노동욱 스미스학부대학 교수, 문학사상 편집기획위원]

영화 《가타카 Gattaca》(1997)는 부모가 배아를 선별하여 아기의 성별, 키, 질병에 대한 면역력 등을 선택할 수 있는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가타카》는 유전자 편집 맞춤형 아기가 상용화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지적하는 디스토피아 영화다. 주인공 빈센트는 부모님의 성적 결합을 통한 ‘자연 임신’으로 태어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는 자연 임신이 일반적인 일이지만, 《가타카》가 그려내고 있는 상상의 미래 세계에서 그것은 희소한 일이다. 《가타카》의 세계는 인공 수정으로 유전자 편집을 한 맞춤형 아기가 일반화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빈센트와는 달리 동생인 안톤은 유전자 편집 맞춤형 아기다. 안톤이 탄생하는 과정은 자못 흥미롭다. 부부가 병원에 도착하자 의사는 인공 수정에 성공한 4개의 수정체를 보여준다. 그리고는 부모에게 아들을 원하는지 딸을 원하는지 묻는다. 부부는 빈센트와 같이 놀 수 있는 아들을 원한다고 말한다. 안톤의 성별은 그 순간 결정된다. 의사는 안톤이 갈색 눈, 검은 머리, 좋은 피부를 갖게 될 것이며, 나쁜 인자들, 예컨대 질병을 비롯하여 조기 탈모, 근시, 비만, 폭력 성향뿐만 아니라 알코올 및 약물 중독 가능성까지 모두 제거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오히려 부부가 의사에게 가벼운 질병 가능성 몇 개 정도는 남겨놓아도 괜찮지 않겠냐며 사치(?)를 부릴 정도다. 안톤은 부모의 좋은 점만을 닮은 아기로 ‘제작’된다. 의사는 설명을 마치며, 자연 임신을 천 번 한다고 해도 이런 아기는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안톤은 이렇게 태어난다.

《가타카》의 세계에서는 아기의 성별도 우연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그곳에서는 앞으로 태어날 아기가 아들일지 딸일지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 특히 남아 선호 사상이 강했던 우리나라에서 《가타카》의 세계는 유토피아였으리라. 심지어 아기의 질병 가능성도 선택의 문제가 된다. 아기가 앞으로 어떤 질병을 앓게 될지 걱정할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이 계획에 따라 완벽하게 진행될 뿐이다.

자연 임신을 통해 태어났기에 여러 가지 우연적 요소가 작용하여 ‘불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빈센트와는 달리, 인공 수정 맞춤형 아기로 태어난 안톤은 필연적으로 ‘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간다. 《가타카》 사회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자연 임신으로 태어난 빈센트와 같은 사람들은 사회에서 평생 극심한 차별에 시달린다. 《가타카》 사회에는 이력서가 딱히 필요하지 않다. 유전자 검사 한 번이면 그 사람이 얼마나 특출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지 판별해낼 수 있다. 《가타카》 사회에서는 부여 받은 유전자가 곧 이력서인 것이다. 빈센트의 꿈은 우주비행사가 되는 것이지만, 불완전한 유전자 때문에 그의 기회는 원천 차단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순 노동으로 제한되어 있다. 《가타카》 사회에서 그가 꿈을 이룰 길은 없어 보인다.

▲ 영화 《가타카》 스틸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에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본질’은 이후 정의된다. 즉, 인간이 세상에 나타나서, 자신과 맞닥뜨리고, 그 다음에 스스로를 정의한다는 것이다. 돌멩이나 책상 등의 사물과는 달리, 인간은 그 본질이 결정된 존재가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자기 스스로 그 본질을 만들어 간다. 돌멩이는 평생 돌멩이고 책상은 평생 책상이지만, 인간은 무언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 그 자체이다. 그러나 《가타카》 사회에서 인간이란 그 본질이 처음부터 정해지고 제한되고 규정된 한낱 돌멩이나 책상과도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유전학 지식이 더욱 발전하면, 착상 전 유전자 진단을 통해 키, 몸무게, 피부색 등의 측면에서 원치 않는 유전 특질을 지닌 배아를 추려내는 것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고 전망한다. 마치 영화 《가타카》에서 그려낸 상상의 미래 세계에서처럼 말이다.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은 《완벽에 대한 반론The Case against Perfection》에서 이러한 세계의 문제점은 ‘부모 됨’의 가치의 타락이라고 통찰력 있게 지적한다. 샌델은 ‘부모 됨’의 가치에 대해 신학자 윌리엄 F. 메이(William F. May)의 말을 빌려 “우리가…원하는 대로 자녀를 고를 수 없다는 사실은 예상치 못한 것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부모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샌델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겸손을 배울 수 있는 학교를 만나는 것”과도 같다고 말한다. 샌델에 따르면, 유전자 편집 사회에서 “진짜 문제는 자녀를 설계하려는 부모의 오만함, 그리고 생명 탄생의 신비로움을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욕구”다. 요컨대, 유전자 편집 사회에서 탄생은, 아기는, 그리고 삶은 더 이상 우리에게 주어지는 신비로운 ‘선물’이 아니다.

영화 《가타카》를 본 뒤, ‘서브웨이’ 샌드위치 가게에 들러 주문을 하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에그마요로 주세요. 빵은 위트로 데워서 주시고, 치즈는 모짜렐라로 주시고, 소스는 랜치와 허니 머스터드로 주세요. 야채는 올리브와 할라피뇨 빼고 주세요.” 《가타카》의 세계가 현실화되었을 때, 아기도 마치 샌드위치처럼 ‘맞춤식 주문’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성별은 딸로 해주세요. 눈에 쌍꺼풀 넣어주시고, 코는 오뚝하게, 입은 앙증맞게, 피부는 뽀얗게 해주세요. 머리숱은 좀 많이 넣어주시고요. 키는 167cm, IQ는 150 정도로 맞춰주세요. 질병은 다 빼주시고요.”

이런 세상이 오면 비록 ‘부모의 기호’에 맞는 ‘완벽한’ 아기가 태어나겠지만, 서브웨이 샌드위치처럼 제조될 아기를 기다리는 부모들의 마음이 과연 이 시대의 부모들의 간절한 마음과 같을까? 엄마의 뱃속에서 탄생을 기다리는 아기가 아들이든 딸이든, 어떤 모습이든, 건강하게만 태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부모의 마음이 계속 존재할까? 때로는 설레는 마음으로, 때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선물’과 같이 찾아온 아기를 처음 안을 때의 그 마음이 계속 존재할까? ‘부모 됨’이란 ‘완벽한’ 아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놓인 ‘불완전한’ 아기를 사랑하며 부모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월간 <가정과 건강>

[시론] 챗GPT 열풍, 어떤 인간상을 추구할 것인가?

[김성익 신학과 교수]

최근에 전 세계가 함께 고통을 겪은 코로나바이러스 범유행은 다양한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중 하나는 감염 예방을 위한 개인위생 조치인 비대면 강조로 인해 모든 것을 연결해 주는 사물인터넷 기술에 기초한 비대면 초연결 사회(hyper-connected society)가 정착된 것이다.

필자도 국제적인 회의도 교회 성경 연구 모임도 줌이라는 앱을 통해 비대면으로 했고, 모든 강의도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강의로 진행했다. 사람들은 어디에 있든지 휴대전화기를 통해 끊임없이 서로 소통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주문을 하고, 정보를 검색한다. 이제는 마스크를 벗어 던지게 됐지만 코로나로 인해 성큼 다가온 4차 산업 혁명의 중요 요소인 초연결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일상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런 와중에 4차 산업 혁명의 또 다른 요소인 챗GPT는 가히 혁명적이다. 기존의 다양한 검색엔진을 통해 원하는 주제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찾아보는 것을 넘어선 것이다.

작년 12월 1일 오픈에이아이(Open Al)라는 인공지능 연구재단이 공개한 챗GPT는 인터넷에 축적된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인공지능의 영역을 대화로 발전시켰다. 요구받은 주제를 스스로 학습하여 사람과 대화할 뿐 아니라 요구받은 질문 사항에 대해 매우 그럴듯한 대답을 하고 심지어 그림을 그려 내기도 한다. 어떤 작가는 여러 상황을 입력한 한국형 막장드라마를 만들어 보라고 한 결과 제법 훌륭한 시나리오를 받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온종일 인터넷을 통한 컴퓨터 화면 혹은 휴대전화기 화면을 바라보면서 하는 새로운 소통의 초연결 시대, 검색의 시대와 더불어 이제는 인공지능과 대화를 통해 정보를 획득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이렇게 급변하는 초연결 시대와 챗GPT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지식이 증가하는 시대

기원전 7세기 인물인 다니엘은 당시 종주국이던 신바빌로니아의 운명을 포함하여 그 이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흥망사는 물론 예수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종말 시대에 관한 예언을 남겼다. 종말 시대에 관한 그의 묘사는 매우 흥미롭다.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많은 사람이 빨리 왕복한다’는 표현은 19세기부터 상용화되기 시작한 철도와 자동차의 발명과 1903년 라이트 형제에 의해 발명된 비행기를 떠오르게 한다. 매년 비행기에 탑승하는 승객이 코로나 대유행 이전에는 47억 명에 달했다. 주말에 고속도로를 가득 채우는 자동차만 보아도 현대인들이 과거와 비교하여 얼마나 빨리 많이 왕래하는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지식이 더한다’는 표현은 지식의 증가 속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982년 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는 그의 책 임계경로 (Critical Path)』에서 인간 지식의 배가에 관해 이야기했다. 서기 1년부터 1500년까지는 한 번 배가되었다. 그 후 속도가 높아져 1750년에 한 번 배가되었고, 1900년에 한 번 더 배가되었다. 1945년 말에는 25년에 한 번 배가되었다. 1983년에는 12~13개월 걸렸다. 2012년 아이비엠 빅 데이터(IBM Big Data) 연구는 미래의 특정 시점이 되면 지식은 12시간마다 배가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는 인터넷 데이터 축적에 따른 결과이다. 이 시기에 청소년들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 온 세상의 지식이 두 배 이상 증가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단순히 과거의 지식을 암기하는 학습은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이다.

미래학자이자 구글의 기술개발자인 레이 커츠와일(Ray Kurzweil)은 2005년 그의 책 『특이점이 온다(The Singualrity Is Near)」에서 2020년 말에는 인간지능을 완벽히 모방하고 대화가 가능한 인공지능이 출현할 것이라 내다보았다. 이후 그는 2029년에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 수준을 넘어서리라 예측했다.

10년 전만 해도 판타지 같던 이 같은 예견들이 현실이 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다니엘은 이런 시대에 사람됨에 주목하고 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

지혜 있는 자가 빛을 발한다

챗GPT는 표절과 저작권 문제, 학문 연구의 저하 문제 등 많은 잠재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챗GPT가 사용하는 인터넷에 쌓인 빅데이터는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다는 점이다. 챗GPT는 가짜 뉴스나 혐오를 유발하기 위해 사진과 영상을 조작할 수 있고, 종종 다수의 오류를 거르지 못하고 이를 옳은 것으로 제시할 수 있다. 이런 한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다니엘이 말한 지혜 있는 자는 히브리어로 ‘분별력이 있는 자’, ‘신중한 자’, ‘통찰력을 가진 자’를 의미한다. 이는 인공지능을 통해 지식을 배가하고 논리적인 지식의 생산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시기에 놓치지 말아야 할 덕목이다.

먼저 챗GPT가 제공하는 정보를 맹신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개인이나 단체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거나 사회의 화합과 안정을 해 치는 정보는 검중하여 분별하는 능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정확한 잣대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게 무섭게 축적되는 정보를 올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빛을 발하는 시대가 되었다.

옳은 삶으로 인도하는 사람이 진정한 스타이다

미셸 황이라는 프로그램 개발자는 어린 시절 자신이 쓴 일기를 챗GPT에 학습시킨다음, 자신의 어린 시절 인공지능을 만들어 내어 어린 시절의 자신과 실시간 대화를 나눈 내용을 자신의 트위터에 공개하여 화제가 되었다. 이를 생성형 인공지능이라고 한다. 과거의 챗봇은 입력된 질문을 선택하면 정해진 대답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챗GPT는 내가 원하는 인물을 다양하게 설정하면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자연스런 대화가 가능해진다. 외로운 현대인들은 기술과 기계가 만드는 이런 유사 관계에서 위로받으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제는 챗GPT가 올바른 가치관을 전수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공지능이 모방할 수 없는 창의성을 가진 개인이 현안에 대해 제대로 문제화하여 질문하고, 올바 른 지시어를 제시해서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건강한 세상을 만드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개인을 교육해 내는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또한 초연결 사회는 전통적인 대면 인간관계나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있다. 하지만 이는 온라인을 통한 새로운 공동체를 출현시키고 있다. 역설적으로 이들은 쉽게 직접 대면하여 만나는 모임으로 변모하곤 한다. 이렇게 새로운 공동체를 통해 공유한 정보는 맹목적인 신뢰성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공유된 정보는 가치관을 형성하고 더 나아가 행동하게 만든다.

따라서 과거 어머니 품에서 구전으로 문화와 가치관이 전수되던 시절처럼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올바른 가치관으로 사람들에게 바른 정보를 제공하고 선한 영향을 미쳐서 올바른 길로 이끄는 개인의 중요성이 두드러지는 시대가 되었다. 다니엘은 이 시대의 진정한 스타는 이처럼 많은 사람 을 옳은 곳으로 이끄는 사람이 될 것이라 예견하고 있다.

월간 <시조> 7월호

[특별기고] “적목리 복원” 유언 남기고 떠난 신우균 목사

일제에 항거해 목숨 걸고 지킨 유일의 신앙공동체 유적지

[이종근 명예교수, 전 신학대학원장]

향년 85세, 적목리 생존자 중 막내둥이인 신우균 목사가 지난 6월 15일 우리 곁을 떠났다. 지난달 23일 삼육서울병원 추모관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시신을 화장한 뒤, 유골을 미국으로 이송했다. 현지시각으로 지난 8일 5년간 목회하시고 은퇴 후 출석했던 북가주 새크라멘토교회에서 추모예배를 진행했다. 고인은 5~6세 때 부모를 따라 적목리 심산계곡으로 피신해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한국에서 16년, 미국에서 40년 모두 56년의 목회를 마치고, 고국에 귀국해 동중한합회 양구 해안교회, 인제 미산교회 및 고성 본향교회를 목회자로 2023년 5월까지 섬기셨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노구를 이끌고, 미약한 교회들을 찾아 안식일 설교와 오후 방문했다. 양구 해안교회에는 본인의 5000만 원과 딸이 보낸 2만 달러로 8000만 원의 건축헌금을 드렸고, 속초 남부교회에는 본인이 교회 의자 교체와 액정 비용 2000만 원을 헌신했다. 일생 병원 한 번 가보지 않으실 정도로 건강했던 분이 갑자기 발병해 삼육서울병원, 아산병원 그리고 인천 길병원에서 심지어 병명도 나오지 않는 채 운명했다.

쓰러지시기 전 몇 달 동안 고인은 필자에게 적목리를 복원하라고 수차 말씀하셨다. 특히 적목리 땅을 확보하고, 필요한 시설을 갖추라고 강조하셨다. 독지가가 땅을 확보할 수 있는 자금을 교회에 기증할 것이니 염려말고 추진하라고 거듭 부탁하셨다. 이런 유지를 받들어, 고인의 사후 유족들은 삼육대 교내에 적목리 기념관 건립과 땅 확보 후의 현장 경비 등 적목리 기념사업을 위해 20억 원의 발전기금과 외국인장학기금으로 5000만 원을 기탁했다. 발전기금 전달식에는 고인의 아내 문정자 사모, 처제인 문정희 장로와 유제성 원장(삐땅기의원 대표원장), 딸 내외 신현숙 사모와 김정도 장로 등 손자녀, 친척 20여 명이 참석했다.

▲ 지난 3일 교내 백주년기념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적목리 발전기금 전달식. 고 신우균 목사의 아내 문정자 사모(앞줄 왼쪽)를 비롯해 가족, 친지 등 20여명이 참석했다.

적목리 신앙공동체

그는 적목리 신앙공동체의 창시자이자 지도자 중 한 분인 신태식 목사의 차남이다. 이 공동체는 일제강점기 말엽 당시 하늘 아래 첫 동네로 불렸던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심산유곡에 70여 명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이 피신해 공동생활로 폭압적인 일제의 제국정책을 목숨을 걸고 거부했던 곳이다. 어떤 기관이나 조직 또는 교회의 도움 없이 풍찬노숙(風餐露宿)하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면서도, 종교탄압과 강제징병과 징용을 피해 전국에서 찾아오는 청년과 가족들을 조건 없이 뜨겁게 환영하고, 자급자족의 삶을 훈련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기도했다.

지도자들은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고, 사선(死線)을 넘어 전국 각지 교인들을 찾아 다니면서 민족계몽과 전도 활동을 펼쳤다. 적목리 신앙유적지는 1943년 9월부터 1945년 해방되기까지 만 2년 동안 일제의 제국정책을 목숨을 걸고 거부하며 신앙을 지켰다. 적목리 공동체는 만난(萬難)을 극복하고 신앙 양심과 민족정기를 지킨 한반도 내의 유일한 공동체 유적지로 가평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됐다(가평군 향토문화재 13호[1999년 12. 31]; 13-1, 2호[2015. 12. 2]). 이곳은 항일 신앙 역사의 현장으로, 로마제국 시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걸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신했던 로마의 지하동굴 카타콤(Catacomb)과 유사하다. 또한 중세시대 험준한 유럽의 알프스 산속에서 모든 것을 희생하며 진리와 자유를 수호했던 왈덴스(Waldenses) 유적지와 같이 세계의 자랑거리이다. 이 유적지를 복원하는 것이 시대적 소명이다.

다목리 가는 길

다목리는 나무가 많다는 뜻의 동네 이름이고, 적목리는 붉은 나무골이라는 뜻이다. 껍질과 속이 붉은 주목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신태식 목사 가족이 적목리 공동체로 가기 전 기거했던 곳이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이다. 이곳을 확인하기 위해 몇 차 답사한 적이 있지만, 심지어 살아생전 신우균 목사와 함께 시도했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신 목사의 부음을 듣고 고인의 누나인 신선옥 집사(89세)께서 방한하셨다. 이 기회를 이용해 신태식 목사께서 사셨던 다목리를 찾아 보고자 다시 계획했다.

▲ 신우균 목사의 장례식 후 유족과 관계자들이 적목리 신앙공동체 옛터를 찾았다.

지난 7월 7일 아침 일찍 신선옥 집사를 모시고, 신태식 목사의 둘째 딸 신선희 집사의 딸 강충숙 집사, 신태식 목사의 셋째 딸 신선영 집사의 딸 엄기경 집사와 남편 최익종 장로(북아태지회 대총회 감사 후 퇴임)와 함께 다목리를 향했다.

먼저 신우균 목사의 출생지였던 화천군 상서면 산양리 111번지를 몇 번의 군 초소를 거쳐 찾아갔지만, 울창한 숲이 뒤덮여 있고 일대에 민가가 없어 다목리를 찾아갔다. 수소문 끝에 주민센터를 찾아 나이 많으신 경로회장을 만났다. 신 집사가 80년 전 다목리에서 적목리로 옮겼을 때의 사정을 말했다. 집 옆에 광산이 있었고, 동생인 신 목사와 함께 산에 올라 광산의 인부가 땅속에 묻어둔 장갑 속의 금광석을 주운 것이며, 앞 개울을 이야기하니, 그 장소는 휴전선 근처로 개발이 되지 않아 지금도 그대로 있다고 했다.

경로회장의 인도로 황우광산 입구와 거기서 약간 떨어진 산기슭의 가옥, 그리고 앞에 흐르는 시내 등을 확인했다. 또한 이웃 주민도 동일하게 그것을 인정했다. 모두 숲과 나무가 무성해 접근이 어려웠지만, 80년 전 살았던 집의 위치가 대략 확인되자 신 집사는 어린아이처럼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고, 강 집사는 “엄마, 엄마” 하며 목 놓아 어머니를 불렀다.

당시 신태식 목사는 50명~250명의 인부를 거느린 목상이었다. 전설로만 들어왔던 황우광산은 강원도에서 당시 제일 큰 광산으로, 채광량이 많아 그렇게도 많은 인부가 필요했다. 신태식 목사는 지방 유지로 아래 네 동생들(태복, 태흥, 태섭, 태범)이 강제징병과 집용 대상이었고, 딸 신선희와 신선영이 모두 정신대에 끌려갈 나이였기 때문에,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외 딴 곳에 살았다. 어느 날 일제와 친한 동네 구장이 일경의 급습 계획을 알렸다. 그 즉시 모든 세간살이 일체를 두고 미숫가루를 준비해 몸만 황급히 빠져나왔다. 정말 숨 막히는 공포의 수색과 체포를 피해 신태식 목사 가족은 적목리를 향했다.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했던(히 11:38), 세상이 감당하지 못했던 온 나라와 교회를 위한 신앙행전, 곧 적목리 공동체의 출발이었다.

▲ 적목리 신앙유적지 비석

[관련기사]
20억 규모 ‘적목리 발전기금’ 기탁…故 신우균 목사 유족
[특별기고] “적목리 복원” 유언 남기고 떠난 신우균 목사

재림신문 https://www.adventist.or.kr/news/bbs/board.php?bo_table=news&wr_id=13786&sca=%EA%B5%90%ED%9A%8C

[정신건강 칼럼] 꺾이지 않는 마음, 회복탄력성

[정성진 상담심리학과 교수]

우리네 삶은 양면성이 있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고, 사랑과 미움이 왔다 갔다 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다가도,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이타적인 행동을 할 때도 있지만, 이기적인 행동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삶이 밝기만 하면 좋으련만 어둠이 밀려오기도 하고, 순탄하기를 바라지만 비바람이 닥쳐올 때도 있다. 인생은 아름답지만 녹록하지 않다.

갈대에게 배우라

고통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역경은 예외 없이 모두에게 닥친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어려움이 생긴다. 돈이나 건강을 잃기도 하고, 인간관계에서 배신과 갈등을 경험하기도 하며, 원치 않는 사고나 재해를 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역경이 생길 때 의연하게 대처하는 이들도 있지만, 좌절과 우울에 빠지는 이들도 있다.

이렇게 길흉화복이 교차하고 희로애락이 등락을 거듭하는 삶에서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무엇일까? 2022년에 가장 유행했던 표현 중 하나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었다. 어느 기자가 인터뷰 기사 제목으로 사용한 이 표현은, 카타르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이 확정된 후 국가대표 선수들이 건네받은 태극기에 적혀 있었던 덕분에 전 국민에게 회자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 그 어느 것 하나 순탄치 않고 개인적으로도 고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은 큰 영감을 주었다. 강풍이 불 때 꼿꼿하게 서 있는 고목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지만, 바람 따라 유연하게 춤추는 갈대는 꺾이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 흔들리는 삶 속에서 꺾이지 않고 중심을 잡고 행복하게 살려면 갈대처럼 유연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회복탄력성’이라고 부른다.

회복탄력성이란

회복탄력성은 영단어 ‘resilience(리질리언스)’를 번역한 용어인데, 리질리언스은 ‘되돌아온다’, ‘다시 튀어 오른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resilire’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무공을 바닥에 던지면 다시 튀어 오르는 것처럼, 회복탄력성은 역경에 주저앉지 않고 바닥을 딛고 다시 솟아오르는 특성이다. 심리학자들은 회복탄력성을 ‘역경을 경험했거나 경험하면서도 이전의 적응수준으로 돌아오고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오뚝이처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능력, 실패와 좌절을 겪고 난 뒤에 오히려 더 강해지고 성장하는 능력인 것이다. 당연히 회복탄력성이 좋은 사람은 대처능력과 적응력이 좋고 행복을 더 많이 경험한다.

당신의 회복탄력성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면 다음 질문에 ‘예’ 혹은 ‘아니오’로 답해 보라.

1. 어려움에 직면해도 쉽게 적응한다.
2. 손실을 경험해도 상대적으로 쉽게 회복한다.
3.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다.
4. 위기의 때에 침착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다.
5. 건강한 자존감과 자신감을 갖고 있다.
6. 어떤 어려움이든 일시적이라고 생각한다.
7. 역경 속에서도 합리적으로 생각하여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8. 어려울 때도 자조하며 웃는 법을 알고 있다.
9. 역경을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10. 가급적 문제를 피하기 위해 미리 대비한다.
11. 과거의 역경 덕분에 더 강해지고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12.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다.

‘예’라고 대답한 개수가 9개 이상이라면 회복탄력성이 높은 것이지만, 4개 이하라면 회복탄련성이 낮다고 볼 수 있다. 회복탄력성은 가정과 학교에서 주로 길러지긴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강화할 수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좋은 일과 나쁜 일, 즐거운 일과 힘든 일이 끊임없이 밀려올 때 마음이 꺾이지 않고 잘 견디려면 회복탄력성을 증진할 필요가 있다.

역경에 대처하는 방법

특히 나쁜 일이나 힘든 일이 닥쳐올 때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은 어떻게 대처하는가? 첫째, 역경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는 점을 인식한다. 누구에게나 근심은 생기기 마련이며, 자기도 예외가 아님을 알고 있기에 의연하게 대처한다. 둘째, 만능 해결책이나 완벽한 해결책을 기대하지 않는다. 역경이 생기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단번에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음을 기억하고 기다리고 견딘다. 셋째, 반성하되 후회에 빠지지 않는다. 불행을 미리 막지 못한 것 때문에 반성하지만, 후회와 좌절에 빠지지 않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배운다.

넷째,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생각한다. 역경이 처음에는 큰 충격을 주지만 조금씩 그 강도는 약해진다. 끝나지 않는 고난은 없다. 다섯째, 역경을 다른 영역으로 확대하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여전히 남아 있는 행복의 요소들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는 데 힘쓴다. 여섯째, 역경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찾는다. 상처와 고통은 불가피하겠지만, 이를 성장통이자 단련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도종환 시인의 표현처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필자가 좋아하는 찬미가의 가사 일부를 옮겨본다. “어둔 것 후에 빛이 오며, 바람 분 후에 잔잔하며, 소나기 후에 햇빛 나며… 연약한 후에 강건하며… 고생한 후에 평안하며, 슬퍼한 후에 기쁨 있고, 멀게 된 후에 가까우며, 외로운 후에 사랑 있네…” 신앙인은 언제나 동행하시는 하나님, 특히 고난의 때에 우리를 업고 가시는 하나님 덕분에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잠 24:16)날 수 있다. 희로애락을 사중주로, 순경과 역경을 변주곡으로 생각하며 갈대처럼 바람에 맞춰 유연하게 춤을 춰보지 않겠는가!

월간 <가정과 건강> 2023년 6월호

[문학 속 가정 이야기] 금쪽같은 내 새끼

《사일러스 마너》

[노동욱 스미스학부대학 교수]

“어린이는 쇠락해 가는 사람에게,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선물보다 더 많은 것, 즉 희망과 미래 지향적인 생각을 가져다준다.” 19세기 영국의 소설가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의 소설 《사일러스 마너Silas Marner》는 이와 같은 제사(epigraph)로 시작된다. 이 제사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시 〈마이클Michael〉에서 빌려온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워즈워스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시구로 유명한 시인이다. 이처럼 엘리엇은 워즈워스의 시를 《사일러스 마너》의 제사로 인용함으로써, 어린이가 어른에게 얼마나 큰 선물과 같은 존재인지를 이야기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사일러스 마너는 절친한 친구 윌리엄에게 배신을 당한다. 윌리엄은 마너에게 도둑이라는 누명을 씌운다. 교회의 목사와 교인들은 억울한 누명을 쓴 마너의 말은 들으려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윌리엄의 편에 서서 마너를 정죄한다. 설상가상으로 마너의 약혼자 사라는 그를 떠나 윌리엄과 결혼한다. 이러한 일련의 충격적인 일들을 겪은 마너는 하루아침에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마너는 쓸쓸히 마을을 떠난다. 우정, 사랑, 신앙, 그리고 삶의 터전까지 한꺼번에 송두리째 잃고 만 마너가 느낀 배신감과 절망감은 도저히 미루어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이다.

마너는 다른 마을로 이사하여 이웃들과 일체 교류를 하지 않은 채 은둔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마치 거미처럼” 아무 생각 없이 베틀 앞에 앉아서 그저 옷감을 짜는 일만 한다. 그가 베틀 앞에 앉아서 요즘 말로 ‘멍을 때리며’ 옷감을 짜는 것은 그러한 단순하고 기계적인 노동을 통해 과거에 겪은 충격적인 일들을 모두 잊고 스스로를 치유하고자 하는 행위였으리라.

그러나 마너가 옷감을 짜는 행위는 이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버린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마너는 옷감을 짜는 행위 자체에 집착하게 되고, 그 결과로 얻게 된 금화에 집착하게 된다. 그는 안식일도 없이 하루 16시간씩 끊임없이 일만 하며, 딱히 쓸 데도 없는 금화를 세어보며 흡족해한다. “신앙의 빛이 완전히 꺼지고 애정이 고갈되자 그는 온 힘을 다해 자기 일과 돈에 매달렸다.” 일의 대가로 받은 금화는 점점 쌓여갔지만, 그의 내면은 점점 고갈되어갔다.

그렇게 살아간 지 15년 째 되던 어느 날, 마너의 삶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금화를 도둑맞은 그에게 금발 머리 아이가 찾아온 것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에피는 길거리에서 엄마가 동사하자 아장아장 걸어 인근에 있는 마너의 집으로 걸어 들어간다. 벽난로 앞 마룻바닥에서 금발 머리 에피를 발견한 마너는 그 아이를 금화로 착각한다. 도둑맞았던 금화가 제 발로 다시 찾아왔다고 착각한 것이다.

“딱딱한” 금화 대신 찾아온 “부드럽고 따뜻한” 금발 머리 에피는 마너를 자기소외의 삶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의 일상이 이웃들의 삶과 얽히게 한다. 그것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던 마너의 마음이 에피를 통해 ‘부드럽고 따뜻’하게 녹아내리는 것을 은유적으로 상징하는 듯하다. 또한 ‘딱딱’하게 경직되었던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드럽고 따뜻’하게 녹아내리는 것을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 재산이자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금화를 도둑맞은 사건. 에피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인 사건. 마너의 인생에서 이 두 가지 커다란 사건은 긴밀하게 교차하면서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이를 통해 마너는 어느 순간 금화가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편협하고 고립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에피로 인해 그는 마을 사람들과 소통 및 교류를 시작하게 되며, 잃어버렸던 신앙도 다시 찾게 된다. 마너는 “모든 순수한 평화와 기쁨과 더불어 인간에 대한 신뢰, 그리고 세상만사를 주재하는 선(善)을 의식”하게 된다. 에피가 “다시 한 번 그와 온 세상을 연결”시켜 주는 계기가 된 셈이다.

마너는 이렇게 말한다. “이 아이가 제게 온 뒤로 제가 이 아이를 제 몸처럼 사랑하게 된 이후로, 저는 온전한 신앙의 빛을 얻었어요.” 마너는 에피를 “제 몸처럼 사랑”하게 되면서, 우리 인간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느낀 뒤 신앙을 되찾을 수 있었다. ‘금화’를 도둑맞은 뒤 찾아온 ‘금발 머리’ 아이 에피는 마너에게 요즘 말로 “금쪽같은 내 새끼”인 것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금쪽같은’ 아이들의 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출생률은 끝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다. 2021년 합계출산율은 0.81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는데, 합계출산율이 1명도 안 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영국 옥스퍼드대 인구문제연구소는 한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소멸하는 나라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 사회의 극도로 낮은 출생률은 우려스러움을 넘어 슬프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과연 희망찬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부부들의 깊은 고심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최근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를 출산한 부모에게 ‘금화’를 쥐어주겠다는 정책도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출생률은 꿈쩍도 하지 않고 계속 떨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이는 아이를 출산했다고 해서 ‘금화’를 쥐어주기보다, 우리 사회의 기저에 깔려있는 근본적인 인식이 변화해야 함을 보여준다.

저출생을 우려하는 우리 사회의 이면에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고 반(反)가족적, 반(反)인권적이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노키즈존(No Kids Zone)이 버젓이 존재한다. 출산 및 육아 휴직은 여전히 눈치가 보여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남자의 육아 휴직은 굳건한 사회 통념이 가로막고 있어서, 육아의 부담은 고스란히 여자에게 전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린이라는 세계》의 저자 김소영은 이렇게 반문한다. “우리나라 출생률이 곤두박질친다고 뉴스에서는 ‘다급히’ 외치고 있다. 그런데 어린이를 환영하지 않는 곳에 어린이가 찾아올까?” 언젠가 ‘금쪽같은’ 아이들의 탄생과 성장이 진정으로 환영받는 푸르른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월간 <가정과 건강>

[대학通] 코로나 이후 엔데믹 시대, 변화된 대학교육

[김기석 교육혁신원 원격교육지원센터 팀장 / 콘텐츠학 박사]

코로나19 엔데믹 후 되찾은 일상의 변화가 반갑다. 가장 많은 타격을 입었던 대학 교육계에도 새로운 활기가 돌아왔다. 2020~2021년에 입학한 신입생의 경우 ‘코로나 학번’으로 불리며 대학 생활 상당수를 비대면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올해 코로나 엔데믹 후 처음으로 MT와 새내기배움터, 축제, 체육대회 등 대학생들이 즐길 수 있는 캠퍼스 라이프가 펼쳐지고 있다.

다시 찾은 일상이지만 코로나 시대 3년간 대학교육과 생활의 상당수가 변했다. 가장 먼저 두드러지는 변화는 ‘책’의 실종이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온라인 비대면 강의가 주로 이뤄졌고 각종 강의와 관련된 자료들은 태블릿PC나 모바일 기기를 통해 전송됐다. 종이책이 사라지고 강의 자료를 출력하기 위해 북적이던 인쇄소도 자취를 감췄다. 이미 온라인 비대면 강의에 적응한 학생들은 사이버 강의를 더 선호하고, 두꺼운 교재 대신 가벼운 태블릿PC 한 대로 강의 자료를 확인한다. 한국갤럽 자료에 따르면 지난 3년간 국내 태블릿PC 보유율은 2020년 19%, 2023년 36%로 급증했다. 그중 2022년에는 20대의 절반이 태블릿PC를 보유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교육의 변화는 캠퍼스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일으켰다. 전자화된 대학 수업이 사이버캠퍼스를 통해 이뤄지며 디지털 대전환과 포스트 원격교육 시대가 열린 것이다. 대학 교육 현장에서도 인공지능, 메타버스, 증강현실 등 다양한 미래 기술을 활용해 교육 콘텐츠 기획·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최근 3년간 코로나19로 인해 원격수업이 활성화되면서 체계적인 미래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고 활용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디지털 대전환의 시기와 맞물려 부상되는 대학 학제 개편도 신교육 패러다임이 적용된 사례로 볼 수 있다. 다학제 융합 전공을 확대해 2개 이상의 학과를 학생들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미래사회에 필요한 첨단 신기술을 익힐 수 있게 하는 방침이다. 미래 수요를 반영한 첨단기술 학습 기회를 늘림으로써 새로운 전공 교육과정을 편성하는 전략이다. 인공지능융합과 가상현실을 적용한 실습 수업, 학생이 아바타가 돼 참여하는 메타버스 캠퍼스 등 다양한 교육의 변화로 포스트 원격교육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예를 들어 H공대는 국내 대학 최초로 가상현실 실습 수업에 메타버스 개념을 도입했다. 메타버스 실습실에서는 전자기학, 반도체 공정설계, 전기자동차 구동제어 등 학생과 교수 간 상호작용이 가능한 가상현실 콘텐츠를 자체적으로 개발해 운영하고 참여 학생 90% 이상이 교육에 만족하는 효과를 거뒀다. 이외에도 메타버스 교육을 전담하는 ‘메타버시티혁신센터’를 설치하고, 대학의 메타버스 포탈인 ‘TU-메타게이트’와 실제 캠퍼스를 가상현실 속에서 체험해보는 ‘TU-메타캠퍼스’ 등을 운영 중이다.

이처럼 디지털 대전환 시기에 새롭게 바뀐 교육 현장은 학생들에게 전혀 다른 경험을 제공해준다. 인공지능과 메타버스 등 최첨단 기술을 일찍부터 접하는 학생들은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계발할 수 있다. 앞으로 다가올 기술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해 교육적 활용이 가능해진다.

코로나 엔데믹 시대 대학가에 필요한 자세는 ‘유연함’이다. 급변한 환경 속에 가장 유익한 교육 콘텐츠와 인프라를 개발하고 실제 교육 현장에 적용해야 한다.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학제 개편과 기업과 산학협력 강화, 온라인 사이버 원격교육 강의 확대 등 다양한 전략으로 대학의 생존 전략을 확보해야 한다.

미래 첨단기술 개발에 맞춰 기업과의 산학협력을 강화하는 것도 좋은 대안이다. 대학과 기업이 보유한 데이터와 인력을 산학 공유 체계로 만들어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기업은 유능한 인재를 확보할 수 있고 대학은 기업의 첨단기술을 배우는 교육 기회를 학생에게 제공할 수 있다. 지역사회와 협력도 중요하다. 상호이익을 위해 유연하게 협력하며 지역 내 유망한 산업을 발전시킬 인재를 양성하고 관련 전공을 설립해 대학 교육에 적용할 수 있다.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 필요한 교육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대학만의 장점을 살린 특화된 교육 서비스를 운영해 독자적인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한국대학신문 http://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48714

[기고] 숲과 아이들의 만남, 행복한 미래교육의 시작이다

[신지연 유아교육과 교수]

‘숲과 아이들의 행복한 만남’을 추구하는 숲유치원 교육이 국내에 소개된 지 10여 년이 훌쩍 지났다. 숲유치원은 1950년대 덴마크의 한 엄마가 자녀와 이웃 아이들을 매일 숲으로 데리고 가면서 시작됐다. 매일 자연에서 맑은 공기를 맡으며 자유롭게 놀면서 아이들은 신체적, 사회적, 정서적으로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랐다. 덴마크 숲유치원의 긍정적 효과는 1960년대 이후 독일, 스위스, 영국 등의 인근 국가들의 숲교육 운동으로 이어졌고 2006년 이후 미국, 캐나다, 호주, 한국과 중국 등으로 소개돼 숲 교육은 이제 전 세계적인 트렌드가 됐다.

숲에서의 교육은 아이들에게 어떤 이점이 있을까? 연구에 따르면 숲에서 놀이를 즐긴 아이들은 신체적으로 건강하다. 탁 트인 하늘 아래 마음껏 뛰어놀면 면역력이 좋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예쁜 꽃과 나무와 곤충을 자주 접하며 아이들은 자연스레 생명 존중의 마음을 기르고 더 나아가 관찰력과 주의 집중력이 좋아질 수 있다. 바위와 높은 나무에 오르며 도전과 모험 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은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이겨내는 인내심과 자신감, 문제해결 능력을 키울 수 있다. 무엇보다 기후 위기가 현실화되며 탄소중립 교육이 미래 교육의 필수가 된 시대에, 숲에서 자연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가치와 태도를 내면화한 아이들은 진정한 탄소중립을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다.

한국의 숲 교육은 산림청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크게 발전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다. 생애주기별 산림복지 서비스를 지향해온 산림청은 2011년 산림 교육 활성화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유아숲체험원 조성과 유아숲지도사 양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산림청과 지방자치단체가 지속적으로 유아숲체험원 조성 및 산림교육센터 지정을 확대하고 있으나 수요 대비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전국 유치원·어린이집(4만1906개소) 대비 숲 체험 기관(1200개소)은 2.9%에 불과하고 지역별로도 불균형 상태다. 이에 국가적 차원에서 유아숲체험원과 산림교육센터를 더욱 확대해 대한민국의 유아동과 청소년들이 숲을 쉽게 자주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6월 9일을 ‘어린이 숲날’로 제정하기 위해 숲 교육을 지지하는 전국의 교육자들과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대한민국 유아숲교육대회’를 개최했다. 6월 9일은 24절기 중 ‘망종’ 즈음으로 씨를 뿌리는 날이다. 지구환경과 인성 파괴, 저출산 국가의 불행한 현실 속에서 숲을 살리고, 아이를 살리는 길이 우리 사회를 살리는 길이라 믿는다. 숲과 아이들의 행복한 만남을 위해 국가, 사회, 학교, 교사와 부모, 우리 모두가 더 열심히 씨를 뿌려야 할 때다.

동아일보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3505689?sid=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