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通] 대학생을 위한 디지털 디톡스

[김기석 교육혁신원 원격교육지원센터 팀장 / 콘텐츠학 박사]

스마트폰 보급이 대중화되면서 디지털 중독 현상으로 인한 부작용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IT기술 개발로 인한 스마트 기기 사용이 늘었지만 그에 따른 과의존, 디지털 중독으로 심리적·인지적·정신적 피해가 덩달아 증가하고 있다. 이에 스마트폰 사용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디지털 디톡스’가 대두되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 사용률이 높은 1020세대 청소년, 대학생들 사이에서 디지털 디톡스가 꼭 필요한 상황이다.

대학생의 경우 스마트폰 중독 위험군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의 경우 학교, 부모에 의해 스마트폰 이용을 제한당할 수 있으나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 갓 성인이 된 대학생들은 스마트폰 이용을 멈출 만한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긴 방학 기간, 공강 시간 등 자유의 쾌락에 빠진 대학생들은 강의실에서도, 밖에서도 늘 스마트폰이 손에 달려 있다. 어떻게 하면 대학생의 디지털 중독을 예방할 수 있을까?

흔히 ‘디톡스(Detox)’는 건강, 다이어트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다. 해독의 뜻을 가진 디톡스는 스마트폰 중독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현대인들에게 건강한 디지털 단식 효과를 준다. 2022년 스마트폰 과의존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소년의 40.1%, 성인 22.8%가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에 속해 있다. 스마트폰 보급률이 95%에 달하는 우리나라에서 빠른 보급이 이뤄진만큼 디지털 중독이 가속화돼 이에 따른 치료 및 상담, 해결방안이 필요한 실정이다.

현대인의 삶은 스마트폰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대화를 비롯한 교통, 쇼핑, 금융, 문화생활, 취미활동, 교육 등 일상적인 생활 전 영역이 스마트폰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이에 스마트폰 사용을 마냥 금지하고 억제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없는 공간을 직접 찾아 자발적으로 디지털 단식을 시도하거나 일상의 스마트폰 사용을 줄여가는 디지털 자가치료가 이뤄진다면 디지털 중독으로 인한 부작용을 예방할 수 있다.

디지털 디톡스를 실천할 경우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쉼 없이 움직이던 뇌를 편안하게 쉬게 할 수 있다. 핸드폰을 내려두면 자기 자신의 삶과 취미, 학습 등 건강한 습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미뤄뒀던 방 청소, 독서, 가벼운 산책과 명상 등 스마트폰 없이 할 수 있는 활동이 충분히 많다.

혼자 스마트폰과 떨어지기 어렵다면 디지털 디톡스를 위한 ‘스마트쉼센터’를 이용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 센터는 스마트폰 과의존 예방해소 전문 상담기관으로 삶의 건강한 균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예방교육부터 상담, 캠페인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전국 17개 광역시도에 스마트쉼센터가 운영되고 있는데, 스마트폰 중독에 해당된다면 방문해 상담을 받아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스마트폰 과의존과 관련해 학교생활 부적응, 학업과 진로고민, 부모와의 갈등 등 심리적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스마트쉼센터에서 전문 상담을 받아볼 수 있다.

센터 방문이 부담된다면 일상 속 카페에서 잠깐의 쉼을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다.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욕망의 북카페’는 2층 주택을 개조해 만든 ‘디지털 디톡스 공간’이다. 이곳은 ‘핸드폰 감옥’이라는 보관함에 스마트폰을 맡겨야 입장할 수 있다. 스마트폰과 멀리 떨어지기 위해 카페를 찾아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오롯이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얻는 셈이다.

스마트폰이 단 한시라도 없으면 불안하고 괴롭다. 대다수 현대인들이 느끼는 감정은 비슷하다. 스마트폰 과의존을 막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과도한 사용을 줄이도록 노력하고, 취침 전 스마트폰과 거리를 떨어뜨려 수면장애를 예방해야 한다. 길을 걸을 때엔 가방이나 주머니에 스마트폰을 소지하고, 대화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문자, 메신저 앱보다 간단한 전화로 소통하는 것도 스마트폰 이용 횟수를 줄일 수 있다. 또한 하루 중 특정 시간을 디지털 디톡스로 지정하는 것도 좋다. 건강한 스마트폰 사용으로 건강과 행복을 더하고, 지친 몸과 마음에게 한순간 휴식을 주는 것은 어떨까?

한국대학신문 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61547

[건강칼럼] 달콤한 유혹, 쇼핑 천국에 사시나요?

[안재순 상담심리학과 교수]

“자기야 나 오늘 캠핑 용품 세트 주문했어.” 미리 의논 한마디 안 하고 덜컥 물건부터 주문한 남편에게 “이번에 캠핑이 처음이니까 우리가 경험을 하고 난 후에 필요한 것을 사면 되지 않을까?”라며 불편한 마음을 애써 눌렀다. “내가 사고 싶었던 제품이 쿠팡에서 대박 세일을 하더라고. 5만원 할인 쿠폰에 무이자 12개월 할부까지 된다잖아!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제품으로 구성이 되어 있어.” 남편은 마치 ‘신무기’를 구입하듯 좋은 자동차나 고급 오디오 등 기계에 열광하고 꽂히면 무조건 사야 직성이 풀렸다.

30대 싱글인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고생스럽고 힘든 직장 생활을 잘 견딘 자신에게 가방과 신상 옷을 선물하면서 자기를 위로했다. 기쁘면 기뻐서 옷을 샀고 화가 나면 홧김에 가방을 샀다. 그런데도 아침마다 옷장 문을 열면 입을 옷이 도무지 없다. 어렵게 번 거금을 카드로 결제할 때는 긴장되고 고민도 됐지만 결제가 되는 순간, 불안과 떨림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짜릿한 기분도 들었다. 직장 내에서 ‘베스트드레서’로 불릴 때마다 우쭐한 기분이 들고 행복했다. 그녀에게 쇼핑은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녀는 초등학교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친척집을 전전하며 서러움을 겪었다. 돈을 벌자 그동안 못했던 것들을 맘껏 해보고 싶었다.

50대 중반인 그녀는 집에 있는 시간에 습관적으로 홈쇼핑 채널을 켜 놓는다. 자궁 수술 후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부쩍 더 허탈하고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딸은 독립하여 떠났고 아들은 군대에 갔으며 무뚝뚝한 남편과는 한 지붕 두 가족 같다. TV 홈쇼핑에서 ‘마감 임박, 한정 판매, 무이자 할부, 사은품과 내일부터는 가격 인상’이라는 쇼호스트의 현란한 멘트에 지금 안 사면 오히려 손해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다. 한 푼 두 푼 아끼며 살아온 자신의 인생에 보상이라도 하듯 결제를 했다. 비로소 자신이 사람답게 그리고 수준 있게 삶을 사는 것 같았다.

혹시 나도 쇼핑 중독?

쇼핑 좀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중독’까지 거론하는 것은 억울한가? ‘여자는 할인을 해 준다면 필요 없는 물건도 사고, 남자는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물건의 두 배 가격에도 무조건 산다’는 말이 있다. 쇼핑 중독은 아직 질병 코드까지는 없지만 알코올이나 약물 등에 의존하는 ‘물질’ 중독과 달리 쇼핑이라는 ‘행위’에 의존한다.

뇌과학자들은 뇌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세로토닌이 줄면 남자들은 충동성이 강해지고 여자들 은 우울증을 느껴 쇼핑 중독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뇌는 신상품을 가지는 행동을 매우 좋아하므로 쇼핑할 때마다 도파민 등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신경 전달 물질을 배출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쇼핑할 때가 아니라 쇼핑하기 직전 즉 조만간 새로운 물건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도파민이 가장 많이 분비된다. 기대감이 도파민의 분비를 촉진하는 것이다. 따라서 쇼핑이 끝나자마자 행복감은 감소한다. 이후 계속해서 쇼핑을 갈망하게 하는 ‘보상회로’가 작동되며, 이때 뇌에 생물학적 변화가 일어나면서 쇼핑은 즐거운 오락이자 여가 활동이 되어 집이 물건으로 가득 찬다.

▲ 사진=envato elements

왜 사람들은 쇼핑의 유혹에 넘어갈까?

계획되지 않은 충동적인 쇼핑을 ‘지름신’으로, 쇼핑으로 얻게 되는 쾌감을 ‘탕진잼’으로, 과소비로 텅 빈 통장을 ‘텅장’으로 표현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쇼핑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최고의 힐링 세리머니이자 재미있는 놀이이다. 여러분은 혼자 있는 시간에 주로 무엇을 하는가? 홈쇼핑을 보거나 휴대폰으로 상품 광고를 보며 물건을 구경하거나 아이쇼핑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백화점의 쇼핑몰에 진열된 물품을 보고 있는가? 사람들은 왜 쇼핑에 열광할까?

첫째, 인간은 무언가를 소유해야 행복하다고 착각한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들은 ‘소비’와 ‘소유’를 통해 자신을 과시하고 다른 사람을 평가한다고 했다. 우리는 대량 생산, 대량 소비 사회에서 나고 자란 탓에 어릴 때부터 ‘물건은 많을수록 좋다, 많이 소유할수록 행복해진다’는 믿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물건이 적으면 궁핍하고 부자유스럽고 위험하며 못산다고 생각했다(가난한 것이지 못산 것은 아니다). ‘물건이 많으면 풍족하고 행복하며 안전하게 잘 살수 있다’는 가치관을 무의식 중에 주입당했다. 그래서 언제나 쇼핑할 기회를 찾고 물건을 새로 사서 늘리려고 한다.

하버드 심리학과 다니엘 길버트 교수의 말처럼 자신이 원하는 자동차를 사거나 명품을 구입하더라도 이것들을 통한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불필요한 쇼핑 욕구는 바닷물을 먹는 것과 같아서 먹으면 먹을수록 목이 마르고 갈증은 점점 더 심해진다.

둘째, 인간은 사랑받고 인정받지 못하면 심리적으로 허기진 마음을 갖는다.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관심이나 애정에 대한 결핍감이 있거나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속에 공허감이 자리 잡는다. 허기진 마음을 채우기 위해 목표를 달성해서 인정을 받거나 과도하게 물질을 소유하려고 한다. 소비의 상당 부분은 남들에게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이루어진다. 남들이 부러워할 거라는 상상을 통해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고자 한다. 물질을 통해 자신이 우월감을 갖고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다.

미국 정신분석가인 코허트(Kohut)는 모든 중독은 자기애적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물질을 소유했을 때 전능감을 갖는다고 했다.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술에 취하면 용감하고 자신감 있으며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을 뿐 아니라 알코올이 자신을 이해하고 도와주는 친구로 착각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쇼핑도 마찬가지다. 물건을 사는 순간 관심과 대접을 받을 때 자신이 왕처럼 전지전능하다고 생각한다.

쇼핑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첫째, 구매를 유혹하는 자극에서 자신을 멀리 떨어뜨려 놓는 방법이다. 홈쇼핑 채널 보지 않기, 인터넷 쇼핑몰 즐겨찾기 삭제하기, 자신의 쇼핑 욕구를 말려 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쇼핑하러 가기, 인터넷 쇼핑 시 원하는 것은 장바구니에 넣은 후 꼭 필요한지 생각할 시간 갖기, 신용카드 대신 체크카드 사용하기, 결제 한도 낮추기, 집 안에 있는 물건을 종류대로 정리한 후 물건 구입하기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핑을 하고 싶다면 리스트를 작성하여 쇼핑을 하거나 ‘다이소’를 이용한다.

둘째, 새로운 보상 도구를 만든다. 사람들은 쇼핑을 통해서 자기의 가치를 끌어 올리고 자신에게 보상해 주려고 한다. 허기진 마음을 물건이나 제품과 같은 물질로 채우려 한다. 그 대신 작은 일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습관을 들이면 마음에 기쁨이 채워진다. ‘상큼하고 달콤한 과일을 먹으니 기쁘다. 좋은 사람과 통화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마음에 드는 음악을 들으니 즐겁다’라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잣말이라도 말로 표현하므로 기본 행복치를 증가시키고 자신에 대한 긍정적 자아상을 키우면 공허한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찬다.

셋째, 작은 친절은 위대한 힘이 있다. 여러 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 사람들은 물질의 소유가 아닌 자신의 존재 자체로서의 가치를 보상받을 수 있다고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에게 미소 띤 얼굴로 인사하기, 무거운 짐 같이 들어주기, 생일을 기억하여 축하해 주기, 병원에 입원한 지인에게 전화하기, 독거노인에게 반찬 나누기 등과 같은 작지만 선한 행위에 참여해 보는 것은 당신의 삶을 더 만족스럽고 충만하게 할 것이다. 친절한 행동을 할 때 뇌에서 도파민 호르몬이 증가하여 행복해진다.

월간 <가정과 건강> 4월호

[시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최경천 신학과 교수 / 교목처장]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이 『정의란 무엇인가?』(2014, 와이즈베리)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을 때 우리는 세계가 겪고 있는 불공평과 불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갖기를 기대했었다. 자본주의 중심의 현대 사회에서 부의 분배와 정의의 문제는 아무리 분석을 잘하고 원인 파악을 해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지난한 문제가 틀림없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문제이며, 조금 더 구체화 시키면 힘과 권력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총선과 더불어 온 국민의 관심은 누가 힘을 갖는 것이 내게 더 유리할 것인가를 주판알 튀기는 일에 가 있다. 샌델이 아무리 공공선과 사회적 가치를 설파함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어도 인간은 쉽사리 권력욕에서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스스로 이익이라는 권좌에 자신의 발목을 묶어 족쇄를 채운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거의 한계가 없는 권력 지향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파악했다. 인간의 권력 지향은 죽음을 회피하고자 하는 의식에서 비롯되었으며, 자신의 죽음을 회피하고자 타인을 살해하고 폭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했다. 더 많은 살해와 폭력은 성장, 힘, 권력, 불멸의 느낌과 함께 더 강한 권력을 향해 달려간다. 쉽게 말해 죽지 않으려고 타인을 죽어라 살해하는 것이다(한병철,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2024).

현재 우주 안에 하나의 점 같은 행성인 지구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정복과 착취로 얼룩진 식민지 전쟁의 연장 이상이 아니다. 국가 대 국가, 기업 대 기업뿐만 아니라 하나의 국가와 기업이나 조직 내에서도 권력의 반지를 쟁취하기 위해 파벌을 짓고 연대하고 협상하고 사기를 친다.

선교인류학자들이 인도네시아령 이리안 자야(Irian Jaya)에 살고 있는 원주민의 문화를 파악하는 동안 그들의 의식 속에 형성된 영웅관이 기독교의 희생적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의 이야기를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에게는 자신의 선생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가 훨씬 더 영웅적이었다. 왜냐하면 마지막 순간까지 선생님의 볼에 키스를 하고 완벽하게 속였기 때문이다. 부족들 간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들을 영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했는데 그 사람은 가룟 유다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로마의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신의 친구였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칼을 맞으며 했던 말과 연관될 수 있을 것이다. “브루투스, 너마저도(Et tu, Brute)?”

우정도 신념도 권력 앞에서 썩은 지푸라기처럼 힘을 쓰지 못한다. 한번은 석계역 앞에 있던 노숙자를 만나 그를 도우려 했던 적이 있다. 집에 데려다 씻기고 먹이고 병원을 데려가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가 결국은 다시 떠나 버려 나의 선행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지만 그가 덧없이 삶을 살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의정부에서 친구와 사업을 하던 중 친구의 배신으로 부도를 맞고 맥이 풀려 버렸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권력욕은 타인을 파괴함으로 얻을 수 있기에 세력화된 인간들은 전복에 전복을 거듭하며 피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묘사되었듯이 정의나 충성 같은 가치들은 대의명분이라는 그럴싸한 이유로 포장되면 순식간에 포악한 형태로 바뀌어 버린다. 실패하면 반란이고, 성공하면 혁명이 된다. 그 숭고한 종교라는 이름으로 처단한 순박한 이단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졌다면 힘이 없어진 것이고, 죽었다면 권력이 없어 죽은 것이다. 무전무죄, 유전유죄라는 말이 특수한 말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라는 것을 투쟁해 본 사람들은 안다.

이렇게 권력에 대한 단편들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는 이 주제가 자신과는 별반 상관이 없다고 말할 분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노동 현장(그것이 사무직이든 노무직이든 상관없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은 한마디로 권력에 의한 착취의 현장이다. 심지어 종교 조직에서의 착취는 특정 종파나 교단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점조직 된 조직 내부의 힘겨루기에서 나타난다. 내가 아는 어떤 크리스천은 집안에 목사가 하나쯤은 있어야 되겠다 생각하고 자식을 신학교에 보냈다. 집안은 클수록 좋고, 인맥은 넓을수록 좋은 것이지만 힘과 권력이라는 역학이 움직이고 있는 한 순수는 없다. 영국의 정치가이며 역사가인 존 액턴(John Dalberg-Acton)이 언급했듯이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어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Philip George Zimbardo)가 1971년에 실시했던 감옥 실험이 이를 증명한다. 18명의 대학생 참가자들에게 절반은 ‘간수’로, 절반은 ‘죄수’로 배정해서 건물 지하에 만들어진 모조 감옥에서 지내도록 했다. 그랬더니 간수 학생들은 곧 죄수 학생들을 학대하기 시작했고 죄수들은 복종하는 태도를 보였다. 역할을 준 것뿐인데 파괴적인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권력은 사람들을 나쁘게 만드는가? 어떻게 하면 권력이 부패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는가?

권력과 부패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 영국의 브라이언 클라스(Brian Klaas)의 『권력의 심리학』(2022년, 웅진지식하우스)에서는 어떤 사람, 어떤 시스템이 더 쉽게 권력을 쥐고 부패하는지 파악했다. 권력이 부패하는 첫 번째 책임은 쉽게 부패할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권력을 갈망하는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부패한다. 권력이 가진 경향성을 인식하기만 해도 부패에 대응할 수 있다. 결국 부패하지 않을 유형의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그는 권력을 갈망하지 않으며 권력의 자리를 가장 원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일까? 석기 시대부터 전달된 집단적 이기심 때문일 것이다. 집단의 생존을 위해 인간들은 독재를 용인한다. 기독교 사상가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2018, 생명의 말씀사)라는 책의 후반부에서 인간은 전쟁, 환경, 기후, 식량, 전염병 등의 위협이 높아지면 도덕적 타협을 통해 전체주의적 독재자를 용인할 준비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을 파괴할 핵무기는 다른 곳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인간은 자신이 아닌 타인을 용납할 수 있는가? 과연 인간은 권력욕이 가진 부패성을 의식적으로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인간은 자신이 살자고 타인을 죽이지 않을 수 있는가? 반대로 인간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남을 위해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결국 인간은 각자 믿고 있는 신념대로 선택할 것이다. 생존의 신념을 선택한다면 타인을 파괴할 것이고, 희생의 신념을 선택한다면 타인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국회의원 총선거 이후의 대한민국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선택이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월간 <시조> 4월호

[문학 속 가정 이야기] 인류애와 가족애 사이에서

영화 《똑똑똑》

[노동욱 스미스학부대학 교수, 문학사상 편집기획위원]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소확행’은 일상에서 만나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한다. 그런데 혹시 ‘소확횡’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이는 ‘소고기는 확실히 횡성한우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횡성한우는 최고의 맛과 품질을 보증하는 소고기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횡성한우를 즐겨 먹으면서도 정작 횡성한우가 어떤 소인지는 잘 모른다. 횡성에서 판매하는 소인지, 횡성에서 태어난 소인지, 횡성에서 자란 소인지, 횡성에서 자란 소라면 횡성에서 몇 년을 자라야 ‘횡성한우’라는 ‘자격’을 얻을 수 있는지 말이다.

농수산물 원산지 표시법에 따르면, 소를 “1년 이상 횡성에서 키우면” ‘횡성한우’로 표시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소의 가격을 높이기 위해 다른 지역에서 키우던 소들을 횡성으로 데려와 도축만 하거나, 횡성에서 불과 몇 달만 키운 뒤 도축한 소들을 ‘횡성한우’로 둔갑시켜 비싼 가격에 판매한 업자가 적발되어 재판을 받은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해프닝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횡성한우의 진짜/가짜 여부가 아니라, 횡성한우를 정의하는 규정 자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법에 따르면 소를 “1년 이상 횡성에서 키우면” ‘횡성한우’로 표시할 수 있는데, 이 법은 매우 미심쩍다. 예컨대, 정읍에서 태어나서 인천에서 10년 자란 소를 횡성으로 데려와 1년 키운 뒤 도축하면, 이 소는 정읍한우일까, 인천한우일까, 횡성한우일까? 어쨌든 법에 따르면 이 소는 ‘횡성한우’다.

뜬금없이 횡성한우 이야기를 꺼낸 것은, 횡성한우의 ‘정체성’ 문제를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지역주의, 지역갈등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거울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도 이처럼 어려운데, 하물며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아니, 어쩌면 누군가의 정체성을 이처럼 타인이 규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 아닐까? 예컨대, 강원도에서 태어나 10년을 살다가 서울로 이사를 가서 10년을 산 사람은 ‘강원도 사람’인가, ‘서울 사람’인가? 경상도에서 태어나 20년을 살다가 전라도로 이사를 가서 30년을 산 사람은 ‘경상도 사람’인가, ‘전라도 사람’인가?

이처럼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어느 지역 사람’이라는 말은 ‘횡성한우’보다 더 미심쩍은 용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강원도 사람’, ‘경상도 사람’, ‘전라도 사람’, ‘제주도 사람’, ‘충청도 사람’은 물론, ‘서울 사람/‘지방 사람’, ‘강남 사람’/‘강북 사람’ 등 끊임없이 사람을 분류하여 쉽게 규정 짓고 일반화 시킨다. 문제는 종종 이러한 ‘꼬리표’가 특정 지역 사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나 편견, 혐오로까지 이어지는 ‘낙인’이 되기도 하며, 더 나아가 지역주의, 지역갈등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타인이 누군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방식은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인간의 정체성은 단순히 하나의 그물망으로 떠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넓디넓은 세상에서 타인에게 너무나도 협소한 이름을 붙여 가며 마음의 감옥을 만들어 내고 있는 건 아닐까?

인간의 협소한 마음이 만들어 낸 비극이 어찌 지역주의뿐이겠는가? 2022년에 발발하여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한 크고 작은 수많은 전쟁들은 ‘국가주의’, ‘민족주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규탄하기 위해, 양국의 국적을 가진 바이올리니스트 부부가 세계를 순회하며 한 무대에 올라 평화를 기원하는 연주를 하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우크라이나인 파벨 베르니코프(남편)와 러시아인 스베틀라나 마카로바(부인)의 아름다운 화음은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벌이는 전쟁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파괴적인지를 관객들에게 말해 준다.

‘소확세’(소소하지만 확실한 세계시민주의)

우리에게 ‘지역주의’, ‘민족주의’ 등의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라고 촉구하는 것이 바로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누군가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오?”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세계시민이오!” 그의 대답은 여전히 ‘지역주의’와 ‘민족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세계시민주의’라는 이상적(理想的)인 단어에는 허상(虛像) 또한 존재한다. 지난해 개봉한 M. 나이트 샤말란(M. Night Shyamalan) 감독의 영화 《똑똑똑》(Knock at the Cabin, 2023)은 바로 세계시민주의의 이상과 허상을 지적한다. 어느 날 낯선 사람들이 어느 한적한 오두막을 방문한다. 그 오두막에서는 한 가족이 한가롭게 행복한 휴가를 보내고 있다. 낯선 사람들은 그 오두막을 무단 침입한 뒤 그 가족에게 너무나도 무거운 제안을 한다. 지금 당장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을 가족 스스로 죽여야 하며, 그러면 다가오는 재난으로부터 전 세계 70억 명의 목숨을 구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 영화 《똑똑똑》 스틸. 별장에서 휴가를 즐기던 한 가족에게 낯선 이들이 찾아와 가족 중 한 명을 희생시켜야 인류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황당무계해 보이는 제안은 사실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무거운 성찰을 담고 있다. 전 세계 70억 명의 목숨을 구해 낼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내 가족 1명의 생명을 내 놓을 수 있는가? 내 가족 1명의 목숨과, 전 세계 70억 명의 목숨의 경중을 따질 수 있는가?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우리는 입버릇처럼 ‘세계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세계시민’이 되는 길은 생각보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이 영화에서처럼 전 세계 70억 명의 목숨을 구원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되지도, 이를 위해 내 가족 중 한 명을 내가 스스로 죽여야 하는 혹독한 선택이 부여되지도 않았다. 이것은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 주신 하나님께서 감당하신 일이다.

그렇다면, 세계시민주의를 지향하기 위해 우리가 오늘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강남순은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종교』에서, ‘코즈모폴리턴 정신’이란 곧 소외된 “주변인들을 향한 예수의 연민과 연대”의 시선을 배우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우리는 매일 만나는 사람들을 구별 없이,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하고 있는가? 그들을 “동일한 시민”(엡 2:19)으로 대하고 있는가? 그들을 마치 내 가족처럼 귀히 여기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성찰해 보는 것, 그리고 매일 만나는 “지극히 작은 자”(마 25:40)를 향한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보는 것, 그것은 ‘소확세’(소소하지만 확실한 세계시민주의)의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월간 <가정과 건강>

[칼럼] 디지털 혁신과 세대 간 격차

[김기석 교육혁신원 원격교육지원센터 팀장 / 콘텐츠학 박사]

‘격세지감(隔世之感)’. 요즘 세태를 바라보면 이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아날로그가 점령하던 옛날과 달리 현대는 진보와 변화를 많이 겪어 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그야말로 ‘다른 시대’를 사는 셈이다. 전쟁의 시련을 겪은 한국은 21세기 최첨단 기술을 선도하는 선진국 반열에 올랐고 스마트 기기의 보급으로 발 빠른 성장을 겪으며 경제발전을 이뤄 왔다.

라이프 패턴을 바꾸는 스마트 기기

디지털 사회가 도래하면서 스마트 기기의 발전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원격제어가 가능한 사회, AI 인공지능 기술을 탑재한 로봇 가전과 가구 등 생활 전반의 영역에서 디지털 기술이 적용되고 더욱 간편하고 빠른 세상이 되어 갔다. 사용자는 스마트폰 앱과 음성 명령, 원격 제어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집안의 기기를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이렇게 발전된 스마트홈 기술은 일상생활의 편리함을 극대화했다.

이렇게 발전한 스마트 기기는 태블릿 PC, 스마트폰, 스마트 가전 등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 왔다. 학교에서는 종이 공책 대신 태블릿 PC를 이용한 필기가 보편화되고, 집에서는 AI 자동화 기술을 탑재한 홈 제어 시스템으로 집 안의 가전 스위치 작동이나 집 안 상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 로봇 청소기, 스마트 냉장고 같은 스마트 가전 기기부터 인공지능 비서를 통한 일정 관리, 음성 인식 명령 제어 등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라이프 스타일을 편리하게 개선하는 스마트 기기의 유용성이 강조되는 추세이다. 노인의 경우 단순 명령에 따라 온도 조절, 보안 시스템 활성화, 인공 지능 비서의 알림 서비스 등 맞춤형 생활 서비스로 인해 건강이나 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스마트 기기 사용이 긍정적인 변화를 주기도 한다.

치매 노인의 위치 추적을 위한 ‘스마트 태그’

실제 지자체에서도 다양한 스마트 기술과 아이디어를 접목한 서비스로 노인의 삶을 더욱 편리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일례로 지방의 한 기관에서는 기존 치매 환자들이 위치 추적을 위해 사용했던 배회 감지기의 단점을 보완한 ‘스마트 태그’ 아이디어를 고안했다. 이 스마트 태그는 물건 또는 사람에게 부착해 스마트폰으로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전자 기기인데, 충전 없이 1년 정도를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건전지만 교체하면 되기에 비교적 사용이 간편하고 치매 노인들의 안전과 건강을 책임져 주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스마트 기기의 보편화된 사용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주로 65세 이상 노인의 경우 급변한 디지털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워 일상생활에 문제를 느끼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키오스크 기기 사용이 있다. 이제 카페, 음식점, 터미널, 관공서, 병원, 은행 등 다양한 업종에서 사용되는 키오스크 기기는 대표적인 디지털 기기의 사례이다. 하지만 키오스크 기기의 빠른 도입과 달리 병원과 은행 수납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노인이 많아지고 있다. 젊은 청년 세대가 아무런 문제 없이 편리하고 빠르게 이용할 수 있는 키오스크 기기는 노인에게 어렵고 불편한 스마트 기기일 뿐이다.

기술 격차에 소외되는 노인들

이처럼 실버세대는 디지털이 주도하는 일상에서 소외되고 있다. 서울디지털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55세 미만 응답자의 94.1%가 키오스크를 이용해 봤다고 답했지만, 55~64세는 68.9%, 65~74세는 29.4%, 75세 이상은 13.8%만 키오스크를 이용했다고 응답했다. 그 이유로 고령층은 ‘사용 방법을 모르거나 어려워서(33.8%)’, ‘뒷사람 눈치가 보여서(17.8%)’ 등의 이유로 키오스크를 이용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이처럼 고령화되는 한국 사회에서 디지털 기기의 보편화는 일부 세대에겐 크나큰 어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다.

스마트 기기의 사용이 대중화될수록 현명한 이용법에 관한 교육과 서비스가 필요하다. 디지털 스마트 기기의 적절한 활용은 일상의 편익을 높여주고 새로운 기술의 진보에 가까워지는 일이지만 기술의 발전에 따른 특정 계층의 소외감을 없애고 기술 격차를 줄이는 것도 우리가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로 남아 있다.

월간 <가정과 건강> 3월호

[에세이] 중년의 아빠와 손

[이관호 스미스학부대학 연구원 / 철학자]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슷한데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

톨스토이(1828~1910)의 명작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작가들은 대체로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 많은 공을 들이기 때문에 위 인용문은 톨스토이가 삶에서 얻은 통찰 가운데 독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불행한 가정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면 속을 터놓는 친한 친구가 가족 간의 고민을 꺼낼 때는 나름 열심히 들었는데도 쉬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반대의 경우도 그렇다. 그만큼 가족은 아주 특수한 관계로 그 안의 갈등이나 고민거리들은 그 구성원이 아니면 접근하기 힘든 내밀한 문제들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슷한 모습들이어서 공감하기 어렵지 않다. 그 모습을 시각적으로 상상해 보자. 어떤 행복한 가족이라도 그 장면을 클로즈업하면 가족과 맞잡은 ‘손’이 보이지 않을까?

중년의 아버지

어린 시절 아버지는 엄하신 편이었고 그 사랑이 은근하고 잔잔하게 흐르는 물과 같아서 살갑게 표출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와 손을 잡아본 장면이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지는 않다.

그런데 꽤 오래전, 막 서른이 된 어느 날 방 정리를 하다가 앨범에서 한 장의 증거물을 발견했다. 아마도 어머니가 찍으셨을 사진에는 예닐곱 정도의 내가 집 앞에서 아버지 손을 꼭 잡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누가 먼저 잡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바깥이니까 어린 나로서는 안전을 위해서라도 아빠의 손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사진을 꺼내서 당시 몰던 차에 넣어 두고 다녔다. 이유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앨범의 그 많은 사진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진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차를 바꾸는 과정에서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싶어 몇 번을 더 찾다가 결국 포기했다.

기억하는 한 처음 아버지의 손을 잡은 건 돌아가시기 한 달 전 병상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요즘 식사를 하지 못하신다는 전화를 받았고 병원의 검진 결과 의사로부터 귀가 멍해지고 가슴이 내려앉는 정보 몇 가지를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평생 아프거나 불편한 것을 내색하지 않으셨던 아버지는 그날도 표정의 변화가 없으셨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셨을 때 나는 ‘드디어’ 그분의 손을 잡아드렸고 ‘살가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굳이 아들에게 말하지 않으셨던 지난 일들을 들으면서 나는 몇 가지 퍼즐 조각들을 얻었고 아버지의 삶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 또 가족에 대한 솔직한 생각들, 하늘에서 만나고 싶은 분들의 이야기까지 대화의 주제도 경계가 없었다. 한 달 후 떠나시려는 순간 “아버지!”라고 불렀을 때 내게 맞닿은 그 손은 마지막으로 꿈틀거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 것 같았다.

진정한 사랑은 말이 없다고 한다. 아버지는 한 번도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지만(물론 내 기억에) 그럼에도 나는 그것의 무한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 무한함이 어떤 유산의 유한함보다 아직도 내게는 가장 소중한 것으로 남아 있다.

중년의 나

이제 또 다른 손에 대한 이야기다. 내게는 이제 막 열 살을 넘긴 아들이 한 명 있다. 주변 친구들에 비해 결혼이 늦었고 아이가 생긴 건 또 그로부터 상당 기간 후여서 ‘중년의 아빠’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치러야 할 의무가 면제될 리는 없다. 주말 중 하루는 내 일을 반납하고 온전히 아이와 함께 무엇을 해야 한다. 여느 젊은 아빠들처럼 서해 바다에 가면 갯벌에서 하루 종일 허리를 굽혀서 아이가 지목한 곳을 삽으로 파야 하고, 동해 바다에 가면 아이와 파도놀이를 하면서 역시 종일 얼굴과 어깨를 태워야 한다.

나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스스로에게 희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의무를 이행하는 아빠가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아이와 함께 즐기는 수밖에 없다는 걸 일찍이 터득했다. 그런 와중에도 사랑의 표현에 인색한 좋지 않은 태도는 유전이 되었는지 나 또한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고 먼저 살갑게 다가가서 손을 잡는 일도 드물다.

그런데 손과 관련해서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발견했던 순간이 있었다. 아들이 일곱 살이었던 해의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당시 공룡에 빠져 있던 아이는 나와 수시로 공룡 배틀을 하던 적대적 관계였지 손을 잡고 다니는 관계는 아니었다. 그날은 엄마 없이 둘이 걸어가고 있었는데 내 걸음이 더 빠르다 보니 혼자 너무 앞서 있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뒤에서 내 손을 잡는 감촉이 느껴졌다.

조금은 멋쩍고 쑥스러운 느낌이었다. 그간 얼마나 아이 손을 잡지 않았으면 그랬을까. 불현듯 젊은 날 차에 놓고 다니다 잃어버렸던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그리고 수십 년 전 어머니의 사진기가 포착한 그 순간의 전후 정황이 그려졌다.

연초에는 역시 아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주말에 스케이트장에 다녔다. 도대체 그전 언제 탔었는지 가물가물할 만큼 추억의 공간이지만 넘어져 보니 추억이 소환되기보다 뼈마디가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아들 녀석이 없었다면 이 나이에 내가 어떻게 이런 경험을 하고 있겠는가. 어쨌든 빙상에서 아슬아슬하고도 위태로운 두 사람은 함께 타고 넘어지면서 충분히 손을 잡았다.

몇 해 지나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 아빠의 손을 피할 것이 분명하니 그전에 좀 더 잡아 두어야겠다. 러시아 대문호의 글처럼 모든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비슷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는 행복도 그러할 것이다.

월간 <가정과 건강> 3월호

[정신건강 칼럼] 자녀는 사춘기인데 엄마 아빠는 갱년기래요

[안재순 상담심리학과 교수]

자녀가 사춘기일 때 부모는 중년기에 접어들면서 갱년기를 보냅니다. 정서적으로 가장 불안정한 사춘기 자녀와 갱년기인 부모가 한 집안에서 만나게 되니 매일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춘기 자녀의 목소리가 변하고, 하룻밤 자고 나니 송송 솟아 나온 턱수염, 예고도 없이 찾아온 생리로 팬티가 붉게 물들고, 봉긋 솟아오르는 가슴이 살짝 아파지는 등 몸의 변화로 불편하고 혼란스러워한다면 갱년기인 부모는 깊어만 가는 주름살, 파 뿌리처럼 희끗희끗 자라나는 흰머리, 탄력을 잃어 가는 피부, 처지는 뱃가죽과 여기저기 몸이 아파지면서 미래가 불안하고 건강에 자신이 없어집니다.

사춘기 자녀의 정서 상태도 극도로 예민해집니다. 모든 것이 불만스럽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불안하고 우울해집니다. 감정은 하루에도 몇 번씩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 널뛰기합니다. 갱년기인 부모도 어느 날 갑자기 외로움이 몰려오면서 만사가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공허하며 우울해집니다. 그래서 사춘기나 갱년기 때 공황장애, 강박장애, 우울증, 불안으로 불면증과 같은 정서적인 문제가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게다가 사춘기의 자녀는 성호르몬의 왕성한 분비로 이성 교제를 갈망합니다. 강한 성적 충동이 일어나면서 성적 자극을 주는 영상물이나 이성에게 정신을 빼앗깁니다. 자신의 성적 매력을 발산하기 위해 외모를 꾸미는 데 집착하거나 더 나아가 랜덤 채팅방과 같은 매체를 통한 만남으로 위험한 성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갱년기인 ‘사추기’도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유혹이 가장 강렬한 시기입니다. 권태로웠던 결혼 생활의 활력을 찾기 위해 외도와 같은 일탈을 하거나 불법 영상물에 심취하면서 가정의 위기, 중년의 위기가 시작됩니다. 사춘기 아이들을 상담하다 보면 부모의 외도를 자녀가 먼저 발견하고 큰 상처를 받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인생의 첫 격동기를 맞이한 사춘기 자녀와 인생의 가을 앞에서 허무와 공허감으로 방황하는 갱년기 부모가 서로 반대 방향에서 불안하게 서 있습니다. 판(거대한 땅덩어리 조각)이 충돌하는 지점은 지진 발생 위험이 큰 것처럼 사춘기 판과 갱년기 두 판이 충돌하면서 가정은 대혼란 그 자체가 됩니다. 마치 뇌 안에 브레이크 역할을 했던 이성이 고장 난 것처럼 자녀의 감정 폭풍과 부모의 감정 폭풍이 만나 거대한 태풍이 일어난 것과 같습니다. 이때 부모는 자신의 상태를 바라보지 못하고 사춘기가 된 자녀의 문제점을 비난하며 불평을 쏟아냅니다. 불안정한 사춘기 자녀는 위기의 중년기를 보내는 부모님의 거울과 같습니다. 사춘기 자녀를 보면서 느슨해지던 마음을 조이고 흐트러지던 삶의 태도를 다시 추슬러야 합니다.

사춘기 없이 어른이 되면 안 되나요?

청소년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 부모의 손에 핸들링(?) 되던 아이들이 저항하고 거부하면서 부모와 자녀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합니다. 순종적이던 자녀가 무섭게 변하면 부모도 당황합니다. 온갖 방법으로 고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큰 갈등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상처만 남기게 됩니다. 부모가 아이들의 못마땅한 행동을 고치려 달려들기 바로 전에 사춘기라는 특별한 기간이 왜 존재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애는 사춘기가 없나 봐. 말도 너무 잘 듣고 참 착해.”하는 분들에게도 결국 언젠가는 자녀의 사춘기가 찾아옵니다. 오히려 부모에게 억눌려 있다가 성인이 되어 사춘기가 찾아온다면 더 힘든 늦깎이 사춘기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춘기는 단순히 부모를 힘들게 하는 ‘이유 없는 반항의 시기’가 아닙니다. 조용히 지나간다고 사춘기를 건너뛰는 것도 아닙니다. 사춘기는 인간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그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성인기 삶의 질과 행복이 결정됩니다.

사춘기에는 아이에서 성인으로 독립하면서 몸도 성장하지만 자기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세우는 중요한 발달 과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의견을 부정하고 무조건 반대해 보고 기존의 관행이나 질서에 역행하는 일을 하기도 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아이가 엄마의 모태에서 태어날 때 피를 흘리며 탯줄을 자르는 분리의 고통이 있었다면 사춘기는 부모와 정서적, 심리적인 분리를 하는 또 다른 산고의 시간입니다. 그것은 마치 애벌레가 나비로 변신하는 것처럼 인생의 중요한 과업입니다.

사춘기 자녀가 골칫덩어리인가요? 선물인가요?

사춘기 자녀는 중년의 부모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녀도 몸과 마음이 성장하지만 동시에 부모도 성숙하도록 도전을 주시고 단련시키십니다. 때로 자녀는 부모를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넣으면서 오래 참고 인내하도록 마음 그릇을 키울 뿐 아니라 겸손하도록 훈련을 시켜 줍니다. 사춘기는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나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님이 사춘기 자녀로 인해 겪게 되는 경험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면 “지혜가 자라고 사랑스러워”지는 성숙한 부모·자녀 관계라는 귀한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은 “중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고 싶은 욕구가 올라오면서 심리적인 재조정, 리모델링 과정을 겪는다.”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중년의 위기가 아닌 중년의 성숙함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성숙한 어른의 모습으로 삶을 살아내는 모습을 보여 주면 됩니다. 부모가 먼저 불안하고 우울해하면 아이들의 심리 상태는 더 불안하고 더 많이 우울해집니다. 그래서 부모의 본보기가 중요합니다. 사춘기 자녀와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통해 성장하려는 부모의 몸부림을 자녀가 옆에서 지켜보면서 자녀도 성장의 기쁨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질풍노도의 시기인 사춘기는 ‘고쳐야 할 병’이 아니라 부모와 자녀 모두가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제2의 기회입니다.

사춘기 자녀가 걱정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자녀의 방을 청소하다가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라이터가 나왔습니다. 학교에서 오자마자 “너 담배 피우니? 넌 어쩜 그렇게 못된 짓만 골라서 하고 있어. 내가 못 살아 정말.”라고 자녀를 비난하며 부모의 불안을 쏟아 놓는 대신 식사 후 자녀에게 대화할 수 있냐고 물어봅니다. “오늘 엄마가 청소하다가 라이터를 발견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얘기해 줄래?”라고 물어봅니다. 자녀가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갈 때 곧바로 “야!”하고 소리를 지르기보다 “아빠가 얘기하는데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리면 내가 무시당한 것 같아서 상처받게 된단다.”라고 마음을 얘기합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거칠게 말하고 반항적으로 말하면 강하게 보인다고 착각해서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녀가 버릇없이 말할 때 부모도 화를 내면 자녀는 부모의 화만 기억하지 부모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잘 알지 못합니다. “내가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이성적으로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조금 있다가 다시 말하자.” 부모가 화를 내면 감정에 휘둘려 객관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먼저 감정을 다스린 다음 정중하게 표현합니다.

성 문제는 다른 어떤 세대들보다 사춘기 아이들에게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성적 욕망이 절정에 달하는 이 시기 아이들의 욕망은 쉽게 자극받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자극하는 덫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춘기 아이들은 가끔 동성연애에 빠지거나 원치 않는 임신으로 큰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연애하면 성적이 떨어져. 대학교에 가서는 얼마든지 이성 교제해도 돼.”라고 말하는 대신 “너는 그 이성 친구와 신체적인 접촉을 어디까지 허락할지 생각해 보고 만나는 거니?”, “넌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남자 친구가 네게 키스하고 네 몸을 만지면 어떻게 할 거니?”라고 질문하고 한계를 설정하도록 명확히 말해 줍니다. 그리고 만약 그 이상의 일이 발생하면 부모와 함께 상의하도록 요청합니다.

아들에게는 남자와 여자의 성적 특징과 충동의 차이로 인한 오해로 벌어지는 실수와 성적 행동에 따른 책임과 생명 존중에 대해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전달하도록 합니다. 누군가의 인권을 유린하고 잘못된 성의식을 조장하는 불법 영상물을 보유하거나 시청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미 그러한 행동을 하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단호하게 단절하도록 합니다.

그 외에도 부모 자녀 간에 좋은 접점을 찾아야 할 많은 주제가 있는데 이것은 소통이 될 때 가능합니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부모 자녀 간에 좋은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과 믿음이 전제된 이해와 경청은 사춘기 자녀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습니다.

월간 <가정과 건강> 2월호

[시론] 다시, 은혜의 가치를 생각한다

[봉원영 신학과 교수]

개인 중심(me-centered) 사회

분명히 오늘날은 공동체보다는 개인이 더 우선하는 사회인 것처럼 보인다. 최근 스마트폰에 대한 의존성은 타인(他人)의 필요를 대체할 정도로 높아졌다. 사람은 서로가 주고받는 소통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관계를 발전시키게 되는데 요즘은 단지 두 사람의 만남 속에서도 각자가 스마트폰을 사용하기도 하고 궁금한 내용은 타인 혹은 상대에게서가 아니라 스마트폰을 통해 해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현상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의 정도가 현격히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관심 자체를 줄어들게 하고 서로 간의 소통의 부재를 낳게 되어 공감 능력이나 인지 능력과 같은 사회적 능력을 저하시킨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이야깃거리를 찾아 대화한다는 것 자체를 감정을 소모하는 것으로 여겨서 피곤해하는 ‘나홀로족’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들은 혼자 뭔가를 먹는 혼밥을 오히려 즐기는데 그러한 주된 이유는 자신의 식사와 관련된 취향, 상황 등을 타인에게 맞추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개인이 자신의 감정을 중시하는 경향은 타인과의 관계를 확장하려는 욕구를 떨어뜨리게 하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끊을 수 있는 인간관계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조만간 1억 개의 센서가 존재하며 이로 인해 광대역 폭을 지닌 즉각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본격적인 제4차 산업 혁명의 시대가 이르면 더욱 두드러질 것으로 예측된다. 또한 인간과 거의 유사한 인공지능을 가진 감성 인식 로봇의 등장으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소통과 감정 통제의 노력 없이도 사람은 로봇과의 관계 형성과 소통을 더욱 편안하게 느끼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그 관계에 가치를 부여하는 우리네 인간(人間)적 삶의 의미가 점점 더 사라져 가게 될 것이라는 말인데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은혜의 가치

2019년 여름, 미국에서 일 년 동안 연구년을 보낼 기회를 얻게 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연구년을 보내게 될 학교가 마침 딸아이가 신입생으로 입학하여 한동안 공부할 곳이기도 해서 차라리 집을 구입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 함께 머물 곳은 정말로 작고 조용한 시골 동네에 있었기 때문에 집을 구입하는 데 경제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집을 구하기 위해 그곳을 직접 방문하여 둘러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부득이 인터넷 부동산 사이트에 올라온 집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는 부동산 중개업자를 통해 집을 구입하는 절차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사 2주 전 마지막 잔금을 치르는 날에야 그 집을 직접 둘러볼 수 있었다.

그리고 2주 후에 들어간 집에는 집 앞뒤로 잔디 상태가 정말 말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잔금을 치른 뒤로 2주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으니 잡초가 수북이 올라와 있었고 민들레가 노랗게 밭을 이루고 있었다. 어차피 잔디 공간이 작지 않았기 때문에 이사하자마자 탑승식 제초기를 구입할 계획이었지만 미국이란 곳이 물건을 주문한 후에 바로 그다음 날 배달이 되는 것이 아니어서 앞으로 며칠 동안 그 상황을 그대로 보고 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여간 심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길 건너편에 사는 한 가족이 새로 이사 온 우리 가족을 환영하기 위해 방문했다. 서로 가족들을 소개하면서 간단히 서로의 관심사들을 나누었다. 종파는 달랐지만 그들도 그리스도인 가정이었다. 한창 얘기가 진행되던 중에 그쪽에서 환영의 의미로 자기의 장비로 우리 집 잔디를 깎아 주어도 되는지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서 그가 하는 말이 사실은 누군가가 이사 들어오기 전에 이 집의 잔디를 깨끗하게 깎아 놓고 싶었는데 주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허락한다면 자신이 잔디를 깎아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렇게 해 주도록 요청했고 마침 우리 가족은 예정된 다른 일정이 있어서 부득이 바로 집을 나서야 했다. 두어 시간 후에 돌아와 보니 집 안의 잔디가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너무 감사했다. 온 가족이 일부러 방문해서 환영해 준 것도 고마운 일인데 실제로 자기 집 잔디보다도 더 신경 써서 깎아 놓았으니 어떻게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장비를 사서 직접 깎아 보니 그 일은 한 시간 반은 족히 걸리는 일이었다.

얼른 마트에 가서 가장 좋은 과일 한 박스를 샀다. 그리고 봉투에 돈도 좀 넣었다. 미국엔 공짜가 없으니. 그리고 그 집을 방문하여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표하면서 과일과 돈봉투를 건네려는데 그가 정색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도 그리스도인이라 하셨지요? 더군다나 목회자라 하셨고요. 그런데도 당신은 은혜의 가치(the value of grace)를 모르시나요?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실천하면서 그 가치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고 저는 단지 그것을 실천했을 뿐인데요.”

은혜의 가치! 그랬다. 진정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나누어야 할 그 은혜의 가치를 잊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의 수고와 봉사를 단순히 돈 몇 푼 정도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제 막 이웃이 된 사람이 나에게 베푼 호의에 대한 마음의 고마움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는 그러한 나의 행동에 불쾌한 지적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공동체를 뜻하는 영어 단어 ‘커뮤니티(community)’는 ‘서로’와 ‘함께’를 의미하는 ‘com’과 ‘선물’을 의미하는 ‘munus’가 결합되어 생겨난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공동체라는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귀한 선물로 주어지는 집단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사회는 분명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공동체이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모든 공동체는 그것이 속한 더 큰 공동체를 향해서도 분명 귀한 선물일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할 때, 남이 가진 연약함을 업신여기고 무시할 때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연약함을 가려 주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소망해 주는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삶이 적어도 미래의 우리 세상을 염려하는 오늘을 위한 해답이 되지 않을까?

다시, 은혜의 가치를

2021년 여름, 그 가족을 다시 만났다. 우린 다시 그 ‘은혜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남은 인생에서 그것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하겠는지를 이야기하며 사람들에게 꼭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자고 함께 약속했다. 그리고 이번 여름에도 딸아이가 있는 그 집에 가면 다시 그 가족을 방문하려고 한다.

월간 <시조> 2월호

[문학 속 가정 이야기] ‘나무 인형’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피노키오

[노동욱 스미스학부대학 교수, 문학사상 편집기획위원]

‘피노키오’ 하면 우리는 월트 디즈니(Walt Disney)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사랑스러운 나무 인형 피노키오를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다. 자꾸 거짓말을 해서 코가 길어져도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한 그 피노키오 말이다.

하지만 카를로 콜로디(Carlo Collodi)라는 필명을 가진 이탈리아 작가의 원작 『피노키오의 모험: 꼭두각시의 이야기』(Le avventure di Pinocchio: Storia di un burattino, 1881~1883)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전혀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원작에서의 피노키오는 그저 애교스러운 장난꾸러기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집에서 도망쳐 밥 먹듯이 말썽만 피우며 제페토의 속을 썩이던 피노키오는, 결국 길에서 강도를 만나 나무에 목이 매달려 죽음을 당하면서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피노키오』의 이런 끔찍한 결말은 독자들로부터 강한 비판과 항의를 받게 되고, 이후 콜로디는 결말을 바꾸기도 한다.

원작 『피노키오』의 교훈은 아주 명확하다. 콜로디는 『피노키오』에 등장하는 귀뚜라미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부모님 말씀을 듣지 않고 집에서 뛰쳐나가는 애들은 문제아야. 그 애들은 결코 행복해지지 못할 거야.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땅을 치며 후회하겠지.” 이처럼 『피노키오』는 ‘후회’라는 감정을 이용해 아이들을 훈육할 목적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월트 디즈니의 20세기 《피노키오》(Pinocchio, 1940)

콜로디의 ‘피노키오’라는 캐릭터를 눈여겨 본 월트 디즈니는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원작 『피노키오』의 무시무시한 결말을 삭제한다. 그리고 ‘문제아’ 피노키오는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변모시키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아름답게’ 덧칠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랑스러운’ 피노키오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이렇게 탄생했다.

자녀가 없는 목수 제페토는 꼭두각시 인형을 만들어 ‘피노키오’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그리고는 잠자리에 들기 전, 별을 향해 소원을 빈다. 나무 인형 피노키오를 ‘진짜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말이다. 그 소원을 들은 파란 요정이 나타나 피노키오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다. 그러나 피노키오는 여전히 나무 인형의 모습이다. 요정은 피노키오에게 “네 자신이 용감하고, 진실 되고, 이기적이지 않다는 걸 증명하면 언젠가 ‘진짜 소년’이 될 거야”라고 일러 준다. 결국 피노키오는 고래에게 잡아먹힌 제페토를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 내어 ‘진짜 사람’으로 거듭 나면서, 동화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피노키오』 원작과는 달리 ‘아름다운’ 월트 디즈니판 《피노키오》에도 여전히 한계점은 존재한다. 그것은 ‘나무 인형’ 피노키오가 반드시 ‘진짜 사람’이 되어야만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피노키오는 ‘나무 인형’으로서는 결코 사랑받을 수 없는 걸까? 반드시 ‘진짜 사람’이 되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는 걸까? ‘진짜 사람’이 되어야만 ‘해피엔딩’인 걸까? 피노키오는 나무 인형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수용되고 인정받을 수는 없는 걸까?

이러한 질문들은 동화를 읽는 아이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특히 자기 스스로를 ‘평균’, ‘보편’, ‘일반’과 ‘다르다’고 느끼는 아이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아이들은 《피노키오》를 보면서 ‘내가 반드시 그 무엇(somebody)이 되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는 걸까’, ‘현재 나의 모습으로는 결코 사랑받을 수 없는 걸까’라는 슬픈 생각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는 결코 사랑받을 수 없다는 월트 디즈니 판 《피노키오》에 함의된 메시지는, 『피노키오』 원작의 무시무시한 결말보다 더 끔찍할 수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의 21세기 《피노키오》(Pinocchio, 2022)

이러한 맥락에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21세기 《피노키오》는 기존의 피노키오 버전들과는 사뭇 다른 획기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델 토로의 《피노키오》에서 목수 제페토는 전쟁 중 포격으로 아들 카를로를 잃는다. 실의에 빠진 제페토는 어느 날 홧김에 나무를 깎아 피노키오를 만들어 아들로 삼는다. 그러나 제페토는 피노키오를 자신의 ‘진짜 아들’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제페토에게 피노키오는 어디까지나 죽은 아들의 ‘대체물’일 뿐이다. 제페토는 ‘있는 그대로’의 피노키오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고, 왜 “카를로처럼 굴지 않느냐”고 피노키오를 비난한다. 그런데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누군가의 ‘대체물’이라는 사실만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델 토로의 《피노키오》에서 어른들은 피노키오를 자신들에게 필요한 존재로 훈육시키고 성장시키고자 혈안이 되어 있다. 제페토가 피노키오에게서 카를로의 모습을 기대하듯, 볼페 백작은 피노키오를 ‘살아 있는 꼭두각시’로 이용해 큰돈을 벌 궁리만 하고, 포데스타 시장은 피노키오를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의 승리를 이끌 ‘전사’(戰士)로 만들고자 한다. 아무도 피노키오에게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묻지 않는다. 아무도 피노키오에게 지금 이대로의 모습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말해 주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페토와 볼페 백작이 피노키오를 서로 ‘자신의 것’이라고 다투다가 피노키오가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차에 치어 산산조각이 나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처럼 어른들이 아이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착각한다면, 아이들은 피노키오처럼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원작이나 월트 디즈니 판처럼 아이들에게 협박성 교훈이나 훈육적 메시지를 남기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어른들에게 강력한 성찰적 메시지를 던진다. ‘후회’하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 때문에 산산조각이 나 버린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이 될 터다. 델 토로의 《피노키오》의 결말부에서 제페토가 ‘나무 인형’ 피노키오를 끌어안고 하는 말은 어른의 입장에서, 부모의 입장에서 꼭 한번쯤은 곱씹어 봐야 할 것이다. “피노키오, 내 아들아, 내가 널 다른 아이로 만들려고 했구나. 이제 카를로가 되지도, 다른 누군가가 되지도 마라. 네 모습 그대로 살아라. 난…… 난 널 사랑한단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말이다.”

월간 <가정과 건강>

[칼럼] AI와 돌봄 케어 로봇, 노인 문제 해결한다

[김기석 교육혁신원 원격교육지원센터 팀장 / 콘텐츠학 박사]

대한민국이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면서 AI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헬스케어 로봇이 각광받고 있다. 최근 심화되는 노인 고독사 문제는 비단 특정 가구만의 문제가 아니다. 생계유지가 어려운 열악한 재정 상태와 주거 환경으로 인한 노인 고독사가 증가하며 사회적인 안전 조치가 요구되고 있다. 노인 고독사와 노인 건강을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AI 기술을 활용한 신(新) 디지털 헬스케어 로봇, 인공 지능 스피커 기반 헬스케어 서비스 등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가 주목받고 있다.

노인 고독사 살리는 AI 기술

작년 5월, 홀로 거주하는 노인이 갑작스러운 편마비 증세로 뇌경색 위기에 처했으나 인공지능(AI) 스피커를 향해 살려 달라는 외침 한마디로 생명을 건졌다. 음성 인식을 통한 자동 전화 연결로 해당 노인은 신속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야말로 AI 기술이 노인의 생명을 구한 셈이다.

서울시 금천구는 올해 1월부터 이 같은 AI 스피커 보급을 통해 1인 가구로 거주하는 노인에게 보급하는 사업을 점차 확대하고 있다. 고독사 예방을 위해 100가구에 AI 스피커를 보급해 24시간 돌봄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이처럼 기술의 진화는 놀라운 삶의 변화를 야기한다. 혼자 사는 노인에게 꼭 필요한 간편하고 신속한 인공 지능 스피커 서비스로 소중한 생명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AI 스피커 기반 케어 서비스는 노인의 심리적, 신체적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된다. 실제 노인 고독사 예방에도 탁월한 효과를 보이고 있다. 건강 수준 개선과 유지, 노인 우울감과 불안감, 외로움을 감소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노인에게는 말벗이 필요하다. 이 경우 AI 인공 지능 대화 챗봇으로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도 있다. 인공 지능 로봇이 노인의 일상에서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활용될 수 있는 역량이 충분하다.

노인 문제 해결하는 디지털 헬스케어 돌봄 로봇

더불어 초고령화 시대에 발생하는 다양한 노인 문제 해결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 AI 헬스케어 돌봄 로봇이 화제이다.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일컬어지는 로봇 산업은 인공지능 기술과 접목되어 더 다양한 생활 제품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국내 대기업을 비롯한 스타트업, 중견 기업 등 유용한 AI 기술 탑재 로봇 개발 및 출시에 사활을 걸고 있다.

S전자의 경우 입는 헬스케어 로봇인 ‘봇핏’을 기획 중이다. 이 로봇은 허리에 차면 근력이 27% 상승하고, 관절 유연성이 39%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 신체적 노화가 진행되어 거동이 힘든 노인들이 무리 없이 운동량을 증가시키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휴머노이드 로봇 기업인 로보케어의 경우 S병원과 연계해 치매 예방 교육 서비스, 학습 관리 시스템을 적용한 헬스케어 로봇 ‘실벗’을 개발했다. 이 로봇은 인지 돌봄 서비스와 정서 돌봄 서비스 2가지를 융합한 헬스케어 로봇으로 노인의 심리적, 지능적 어려움을 보완하고자 개발된 로봇이다. 이외에도 세계 최초의 자율 주행 기반 돌봄 로봇인 ‘보미2’도 주목할 만하다. 보미2는 외로운 노인들을 위한 반려 로봇이다. 소근육 운동과 가벼운 체조, 인지 훈련 콘텐츠를 탑재한 신체 돌봄 서비스뿐 아니라 복약 지시, 응급 알림 기능, 정서 돌봄 기능 등이 있어 노인에게 최적화된 맞춤 헬스케어가 가능하다.

이처럼 디지털 인공 지능 AI 기술을 활용한 노인 맞춤형 헬스케어 로봇의 등장은 차세대 실버 산업의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다. 초고령화를 겪고 있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노인이 처한 신체적, 심리적, 인지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노인 대상 사회 복지 사업은 사회 복지 제공 인력 및 예산 부족 등 다양한 요인으로 충분한 복지 서비스가 노인에게 제공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헬스케어 돌봄 로봇을 이용한 가정, 복지 기관에서의 헬스케어는 사람의 노동력을 최소화하면서도 노인 돌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다. 노인에게 필요한 헬스케어 확산은 AI 시대 초고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 될 것이다.

월간 <가정과 건강>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