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 가정 이야기] 멋쟁이 토마토는 왜 춤을 추는가?

[노동욱 창의융합자유전공학부 교수 / 문학사상 편집기획위원]

“울퉁불퉁 멋진 몸매에 빨간 옷을 입고 새콤달콤 향기풍기는 멋쟁이 토마토 토마토 / 나는야 주스 될 거야 (꿀꺽) 나는야 케첩 될 거야 (찍) 나는야 춤을 출거야 (헤이) 뽐내는 토마토 토마토”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노래는 아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국민 동요’로 자리 잡은 ‘멋쟁이 토마토’다. (▷영상보기)

이 노래의 가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는야 춤을 출거야”라고 외치는 마지막 토마토가 유독 눈길을 끈다. 왜일까? 그건 아마도 ‘춤추는’ 토마토가 남들과는 사뭇 다른 길을 걸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토마토의 인생(?)에서 ‘주스’가 되고, ‘케첩’이 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일이다. 더군다나 토마토 주스나 케첩이 되면, 대형마트에서 멋진 상표를 달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인생을 살 수도 있다. 주스가 되면 고즈넉한 카페에서 예쁜 컵에 담겨 우아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고, 케첩이 되면 식당에서 감자튀김과 함께 어울려 지내며 많은 사랑을 받을 수도 있다. 토마토의 인생에서 주스나 케첩이 되는 것은 누구나가 꿈꾸는 소위 ‘메이저’한 삶의 선택지라 할 수 있다.

반면 ‘춤추는’ 토마토, 그것도 ‘울퉁불퉁한 몸매’를 스스로 멋지다고 착각하며 춤을 추는 토마토는 ‘마이너’한 감성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주스나 케첩처럼 ‘완제품’을 꿈꾸는 것도 아니고 그저 대책 없이 춤을 추겠다고 하니, 토마토의 부모가 들으면 복장이 터질 노릇이다. 하지만 역으로 춤추는 토마토가 눈길을 끄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춤추는 토마토의 진짜 매력은 남들과는 달리 자기만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의지에 있다.

딴따라 정신의 재해석

어린 시절의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오랜만에 열어 보았다. 당시 초등학교 졸업앨범에는 이름과 사진 옆에 자신의 장래희망을 적는 칸이 있었다. 거기에는 자기 꿈인지 부모님의 꿈인지 알 수 없는 직업들이 쓰여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대부분 의사 아니면 판검사다. 첫 장부터 끝 장까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춤추는’ 댄서가 꿈인 친구는 없고, 그 비슷한 것이라도 찾아볼 수 없다.

내가 어린 시절에 공부 안 하고 춤추러 다니는 친구가 있으면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커서 딴따라 될래?” 그렇게 비하되던 소위 ‘딴따라’는 최근 K-pop의 전 세계적 열풍과 함께 초대박 인기스타로 거듭나게 되었다. 시대는 이렇게 ‘개벽’하고 있다.

내 생각에, 비하적인 ‘딴따라’라는 표현은 이제 21세기에 생존을 위한 매우 중요한 덕목이 되었다. 딴따라 기질은 달리 말하면 무대 체질, 남들 앞에서도 긴장하거나 ‘쫄지’ 않는 자신감이나 배짱과 다르지 않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흥겨움을 줄 수 있는 능력, 청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나 리더십, 더 나아가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길을 확고히 걸어가는 소신이나 주관과 다르지 않다. 울퉁불퉁한 몸매를 스스로 멋지다고 생각하며 춤을 추는 토마토 정신이 바로 딴따라 정신이다.

마크 프렌스키(Marc Prensky)는 2022년에 Re-Framing ‘Growing Up’ For a New Age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의 제목은 “새로운 시대에 ‘성장’을 재구성하기” 정도로 직역할 수 있겠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이 책을 번역 출간할 때 “세상에 없던 아이들이 온다”는 기가 막힌 제목을 달았다. 그렇다. 새로운 시대에 ‘세상에 없던 아이들’이 오고 있다. 아니, 이미 와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세상에 있던’ 방식, 아니 세상에는 오로지 이것만 있다고 착각하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는지 모른다. 프렌스키의 책 제목처럼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아이들의 성장을 재구성하지 않은 채, 자신이 가진 낡고 오랜 기존의 틀에 아이들을 끼워 맞춰 구성하려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럼 춤은 누가 춰?

그야말로 의대 광풍(狂風)의 시대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수능시험을 잘 봐서 의대에 가겠단다. 수능시험은 수학능력시험이 아니라 ‘의사고시’로 불린 지 오래다. 사람을 살리는 가치 있는 직업인 의사가 되겠다는 것은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너도나도 의대에‘만’ 가겠다니 문제다. ‘나는 왜 의대에 가고 싶은가?’라는 근원적 성찰은 삭제된 채,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면 된단다. 일단 시험을 잘 봐서 의대에 간 뒤, 그때 성찰도 하고 소명도 찾고 적성은 끼워 맞추면 된단다. 아니, 그런 과정을 굳이 거치지 않아도 돈만 잘 벌면 된단다.

대치동 학원가 ‘의대 준비반’에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소수 정예 의대 반’이 성행하고 있다. 한 유투버가 ‘의대 반’ 초등학생들에게 “의사가 왜 되고 싶냐?”고 묻자 “몰라요.”라고 대답하는 학생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의대 광풍 시대의 어두운 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라 할 수 있다.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메디컬 캠프’도 유행하고 있다. 나는 순진하게도 메디컬 캠프가 의료봉사대인 줄 알았는데, 의대 진학을 위한 학습 전략을 전수해 주는 사교육 시스템이라고 한다.

최근 의대 증원 소식에 의대 광풍은 더욱 휘몰아치고 있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30대 대기업 과장도, 40대 공무원도, 50대 금융맨도 의대 입시에 뛰어들었고, 심지어 고2 아빠도 수험생인 아이와 함께 의대 입시를 준비한다고 한다. 그러자 한 칼럼니스트는 모두가 의대에 가면 “소는 누가 키워?”라고 반문했다. 모두들 케첩이나 주스만 되겠다면 춤은 누가 추는가?

영화 ‘조조 래빗Jojo Rabbit’에서 아이들은 히틀러라는 망령과 그 망령을 추종하는 망령들 틈에서 자신들은 망령이 되지 않기 위해 사투한다. 주인공인 ‘조조’라는 아이는 나치의 눈을 피해 다락방에 숨어 사는 유대인 소녀에게 묻는다. “나중에 다락방을 나가게 되면 뭘 하고 싶어?” 그 소녀는 춤을 추고 싶다고 말한다. 결국 그 망령된 세상에서 끝내 살아남은 아이들이 둠칫둠칫 춤을 추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다. 아이들이 이 망령된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둠칫둠칫 춤을 출 수 있으면 좋겠다. 춤추는 토마토처럼 말이다.

월간 <가정과 건강>

[칼럼] 숏폼 시대 디지털 디톡스

[김기석 IR센터 팀장 / 콘텐츠학 박사]

1970~1980년대만 해도 부의 상징이었던 텔레비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수십 년 전 과거에는 많은 사람이 텔레비전을 집집마다 한 대씩 들이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미디어 노출이 적었다. 하지만 요즘 시대는 다르다. 누구나 다 ‘작은 텔레비전’으로 지칭하는 스마트폰을 항상 몸에 소지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의 기능을 대신하는 유튜브와 스마트폰

스마트폰은 텔레비전보다 더 작은 화면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용한 생활 도구로 자리 잡았다. 인터넷 뱅킹과 같은 금융 서비스, 모바일 쇼핑 플랫폼을 이용한 쇼핑 활동, 사람들과의 친목 도모가 이루어지는 카카오톡, 밴드, SNS 등의 메신저와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까지 모든 활동이 전부 스마트폰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술의 발전은 디지털 기기의 놀라운 성장을 함께 이루었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분명 존재하고 있다.

과도한 정보의 범람으로 사람들은 더 중요한 정보가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지나치게 자극적인 시각적 숏폼 콘텐츠는 유익한 가치를 전달하기보다 단순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상으로 사람들을 현혹한다. 연령을 불문하고 다양한 사람이 이용하는 최대 플랫폼으로 자리잡은 ‘유튜브’는 이제 텔레비전을 대신하는 거대 콘텐츠 기업으로 우뚝 섰다. 이 가운데 장시간 노출되는 긴 영상보다 유튜브 쇼츠, 인스타 릴스, 틱톡 등 재생 시간이 짧은 ‘숏폼 콘텐츠’가 그야말로 대세가 되면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자극하고 있다.

과도한 정보의 범람, 자극적인 숏폼 콘텐츠의 문제

모바일 빅데이터 플랫폼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최근 국내에서 모바일 기기로 유튜브를 시청한 시간은 19억 5000만 시간으로 집계됐다. 2023년은 전년 대비(2022년 9월 총사용 시간은 13억 8057만 시간) 41% 증가했다. 유튜브 사용량의 급격한 상승은 쇼츠의 인기가 주요 요인으로 꼽히는 상황이다.

숏폼 콘텐츠는 짧은 재생 시간으로 이루어져 순식간에 시청자의 이목을 끌 수 있고 순간 집중력을 높이는 데 유용한 콘텐츠이다. 하지만 수익성이 가미된 숏폼 콘텐츠가 과다하게 등장하면서 사람들의 조회수를 올리기 위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숏폼 콘텐츠들이 무분별하게 노출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자극적인 숏폼 콘텐츠 노출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 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숏폼 콘텐츠에 과도하게 노출될 경우 인지 능력 저하, 수면 장애, 불면증 등 신체적 기능이 퇴화할 수 있다. 실제로 숏폼 콘텐츠를 시청할 때 사람들의 뇌파를 측정하면 전두엽의 활성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뇌 전두엽은 기억력, 감정 조절, 사고력을 담당하는데 자극적인 숏폼 영상에 중독될 경우 산만하고 주의 집중력이 떨어지며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될 확률이 높다. 또한 몰입과 집중을 방해해 한창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의 학업 성취감을 크게 저하하는 요인이 된다. 그들은 주의력과 집중력을 방해받아 평소 산만한 기분이 들고 무언가에 몰입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이 같은 디지털 방해 현상은 현대인이 일상생활을 온전히 지속하는 데 어려운 요인이 될 수 있다.

디지털 휴식과 ‘디지털 디톡스’ 필요성 대두

최근에는 이러한 디지털 중독 현상을 예방하기 위한 ‘디지털 디톡스’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손이나 주머니 안에 항상 소지하고 있는 스마트폰을 잠시 중단하고 일상에서 할 수 있는 독서, 운동, 취미 활동 등 다양한 여가를 즐기며 피로해진 심신을 회복하는 것이 취지이다.

실제로 해외 일부 국가들은 숏폼 콘텐츠의 지나친 사용을 법적으로 규제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14세 이하 어린이, 청소년에게 하루 40분만 틱톡을 이용하도록 제한하고 있으며 미국 유타·메릴랜드·사우스다코타주는 틱톡 사용을 전부 금지한 상태이다.

디지털 중독에 빠진 현대인들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에 일상 속 평범한 습관을 길들여 긍정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도 방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 사용하는 디지털 기기를 내려 두고 숏폼에 길들여진 눈과 감정을 돌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숏폼 콘텐츠가 더 이상 일상에 스며들지 못하게 집중적으로 숏폼 시청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유익하게 쓸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도 하나의 예방책이다. 스마트폰의 과도한 사용을 막기 위한 앱 ‘넌 얼마나 쓰니’는 스마트폰 중독을 예방해 주고, 또 다른 앱 ‘스라밸’은 스마트폰 사용량 확인을 수시로 가능케 함으로써 과도한 스마트폰 사용을 방지하는 기능이 있다. ‘포레스트’라는 앱의 경우 30분 이상 스마트폰 앱을 사용하지 않으면 가상의 나무를 한 그루 만들어 주고, 30분을 참지 못한 채 다른 앱을 실행하면 자라던 나무가 죽어 버리는 독특한 콘셉트의 앱이다. 앱 실행과 동시에 스마트폰은 무음 모드로 변경되어 과도한 숏폼 콘텐츠 이용을 의식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 이 앱에선 다양한 나무를 길러 숲을 가꿀 수 있고 친구와 경쟁하며 스마트폰 중독 예방에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월간 <가정과 건강> 9월호

[마음건강] 음식, 사랑의 언어

[안재순 상담심리학과 교수]

요즘 식사 후 빠질 수 없는 코스가 카페다. 배가 부른데도 카페에 들러 달달하고 시원한 음료와 함께 빵이나 조각 케이크 혹은 빙수를 앞에 두고 흔히 “디저트 배는 따로 있으니까 먹자”라며 즐긴다. 밥 먹고 ‘입가심만 해야지’라며 한두 개 집어 먹다가 결국 커다란 과자 한 봉지를 다 비웠다든지, 식사 후 뭔가 허전하여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냉장고를 뒤지거나 간식을 찾은 적이 있는가?

어린이와 청소년들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은 알싸하게 맵고 짠 마라탕으로 식사를 한 후 생과일에 설탕 시럽을 듬뿍 묻혀 코팅한 탕후루를 먹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다. 그 결과 ‘단짠단짠’에 중독된 아이가 많다.

배가 고프고 당이 떨어졌을 때 우리의 몸은 생존을 위한 식욕을 느낀다. 그러나 생존에 필요한 열량과 영양분을 이미 배부르게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즐거움과 만족을 위해 음식을 먹는 것은 ‘쾌락적 식욕’이다. 식욕과 에너지 균형을 연구한 제임스 스텁스 교수는 “사람은 쾌락적 동기를 충족시키기 위한 행동을 하므로 거의 모든 사람이 쾌락적 음식 섭취를 경험한다”고 했다.

가짜 식욕

요즘은 눈만 돌리면 우리의 입맛을 자극하는 음식이 넘쳐난다. 집 근처 편의점에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넘쳐나고, 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면 순식간에 음식이 집으로 배달된다. 유튜브와 방송에서는 ‘먹방’이 우리의 입맛을 유혹하고 SNS에는 자신이 먹은 음식 사진을 올리거나 맛집을 소개하는 게시물이 넘쳐난다. 화를 풀거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먹고 마시는 것을 권하는 사회 분위기도 음식중독을 증가시킨다. 바야흐로 지금은 우리의 식욕을 유혹하는 시대이다.

대부분의 음식중독은 ‘불안정한 마음’과 관련된 심리적 요인이 많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아이스크림 한 통을 먹어 본 적이 있는가? 고독하고 우울한 밤에 혼자서 술을 마셔 본 적이 있는가? 마음이 헛헛하면 배는 부른데도 이상하게 먹는 게 당긴다. 이것은 가짜 식욕이다. 허전함, 불안, 우울감, 분노, 외로움, 공허감은 감정적 허기를 느껴, 자극적이고 달고 짠 음식을 먹으며 결핍된 사랑과 인정을 대신하여 음식으로 채워 넣는다.

내가 음식중독이라고?

맛있는 음식을 즐긴다고 음식중독으로 진단하진 않는다. 음식중독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식탐’이다. 식탐은 배가 불러도 음식이 먹고 싶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음식 중독자들의 뇌를 살펴보면 마약중독, 게임중독처럼 설탕, 밀가루 같은 정제 탄수화물을 섭취하면 나오는 도파민이 뇌 전체로 전달되어 쾌감을 유발한다. 도파민은 우리 몸에서 즐거움, 쾌감 같은 신호를 전달하여 행복감을 느끼게 하고 행동을 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신경전달 물질이다. 사람들은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우울할 때 주로 빵이나 케이크, 마카롱, 커피, 술을 찾게 되는데 이런 음식은 도파민을 급격히 상승시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집중력과 활력을 순간적으로 향상시킨다. 문제는 우리 몸이 이 잠깐의 짜릿한 기분을 기억해서 자꾸 음식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 사진=envato elements

생명의학연구소인 ‘스크립스 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쥐에게 인스턴트식품을 지속적으로 섭취하게 한 결과 쥐들은 약물중독과 비슷한 성향을 보였다. 인스턴트식품에 중독된 쥐들은 다리에 전기충격을 가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먹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인스턴트식품을 끊고 건강한 먹이를 주자 2주 동안이나 단식 투쟁을 했다. 이들의 뇌를 살펴본 결과 코카인, 헤로인 중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도파민2 수용체가 줄어든 것을 발견했다.

연구자는 “고칼로리 인스턴트식품들이 마약처럼 뇌의 보상 중추를 과도하게 자극해 쾌락을 유발함으로써 먹지 않고는 못 견디는 강박 섭식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는 음식중독을 일으킬 수 있는 식품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의지력이 강한 사람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 앞에서는 대부분 무릎을 꿇는다.

참을 수 없는 음식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여러 연구에 의하면 과식이나 폭식을 하는 75%는 배가 고플 때가 아니라 기분이 안 좋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라고 한다. 음식으로 마음의 위로를 얻으려는 것은 마치 큰 수술 후에 일회용 반창고로 상처를 덮는 것과 같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음악 듣기, 동식물 키우기, 봉사활동 또는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 활동, 식후 20~30분 산책, 야외에서 햇빛을 보며 걷기 등을 통해 뇌를 쉬게 하고 도파민을 증가시켜 뇌 안의 새로운 보상체계를 만들 수 있다.

규칙적으로 일찍 잠드는 습관은 식욕 호르몬을 줄이고 식욕 억제 호르몬인 렙틴을 증가시킨다. 심리적 허기가 몰려온다면 ‘지금 내 마음이 힘들어서 보내는 내 몸의 메시지구나’라고 받아들이고 오늘 하루도 열심히 달려오느라 지친 내 마음에게 “수고했어, 잘 견뎠어, 정말 잘했어”라고 다독이며 스스로를 격려해 주면 어떨까?

둘째, 중독의 핵심 요인 중 하나는 접근성이다. 옥스퍼드대 연구진은 음식 콘텐츠를 시청한 사람은 허기를 느끼게 되고 두뇌의 보상 중추를 자극해 식탐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그러므로 ‘먹방’을 보지 않기, 탄산음료, 감자칩, 도넛, 냉동피자 등 집 안 구석구석에 쌓인 인스턴트식품을 치우고, 배달 앱 회원 탈퇴 등을 실천하고 가급적이면 채소와 과일 등과 같은 지중해식 식단으로 직접 음식을 해 먹으면서 조금은 지루한 준비 과정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음식은 맛이자 기억이다. 기억은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힘이다. 어릴 때 입맛이 평생 간다. 입맛은 어렸을 때부터 경험한 맛을 기억하고 배우는 과정 속에 좋고 싫음의 기준을 만든다. 건강한 식습관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쾌락 중추를 잘 훈련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성장하면서 가족과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식사한 추억들, 친구나 가족과의 교류를 통한 정서적 지지, 의미 있는 종교적 체험들, 운동, 자연 속에서 시간 보내기 등은 쾌락 중추를 자극하여 긍정적인 보상 체계를 형성한다.

오랜 기다림 끝에 출산한 산모는 아이와 첫 번째 만남에서 모유 수유를 한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엄마와 함께하는 첫 식사이자 엄마의 사랑을 처음 느끼는 순간일 것이다. 부모들이여! 집에서 만들어 준 음식이 맛없다고 불평하는 아이들 앞에서 기죽지 마라. 진심이 담긴 음식은 사랑이요, 생명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힘이 있다. 또한 음식을 제공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된다. 여유로운 시간에 가족이 함께 음식을 만들고 함께 즐기라.

월간 <가정과 건강> 9월호

[에세이] 사는 날까지, 죽는 날까지

[이관호 스미스학부대학 연구원 / 철학자]

중학교 때 다녔던 서예 학원에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혼자 썼던 적이 있다. 시가 마음에 들어 방에 걸어 놓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당시 나이가 지긋하신 원장님이 보더니 ‘죽는 날까지’를 ‘사는 날까지’로 바꾸어서 적어 보라고 권하셨다(시의 도입부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다). 어차피 같은 의미면 사는 쪽으로 사고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씀이었다.

언어는 수와 달리 뉘앙스의 차이가 있어서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같은 의미라도 다른 느낌을 전하기도 하고 다른 의미인데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가수 김범수의 대표곡인 ‘보고 싶다’를 들어 보면 “죽을 만큼 보고 싶다”라고 한 후 “죽을 만큼 잊고 싶다”로 마무리한다. 누군가를 보기 바라는 것과 잊기 바라는 건 다른 말이지만 마지막 가사는 같은 의미를 좀 더 절실하게 전하고 있다. 이별의 순간 김소월 님이 노래한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처럼 말이다.

이렇게 보니 우리는 뭔가 강조할 때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생각보다 자주 구사하면서 살아가는 듯하다. 영화나 소설에서도 등장인물의 죽음이 강한 정서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스토리 어딘가에 자주 활용되는 기법이기도 하다. 죽음은 끝이라는 극단적인 느낌과 함께 경험하지 못한 생경함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죽음은 낯설다. 우리 모두는 아직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다.

철학의 역사에서 이 낯선 상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있었다. 고대의 에피쿠로스는 “살아 있을 때는 아직 죽지 않았고 죽으면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건 죽어 가는 과정까지지 죽음은 아니니 굳이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냐는 의미다.

하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좀 다르다. 그들은 우리가 죽으면 영혼에서 감정을 느끼는 부분은 없어지지만 이성적인 부분은 영원히 지속된다고 설명했다. 이후 근대 철학을 열었다고 하는 데카르트는 몸과 영혼을 완전히 분리하면서 우리의 본질은 영혼일 뿐 몸은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칸트는 우리가 살아서 아무리 선해지려고 애써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 완전한 선에 도달하려면 죽어서도 영혼이 지속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19세기 쇼펜하우어는 이런 전통을 거부했다. 이를테면 생각은 뇌에서 하는데 뇌가 죽은 다음에 무엇으로 사유를 할 수 있냐는 설명이었다.

▲ 사진=envato elements

동아시아에서는 이 테마에 대해서 민간과 지식인 사이에 꽤 큰 괴리가 있었다. 조상이 돌아간 다음 귀신이 되어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혹시 그분들의 원한이 있다면 풀어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기(氣)가 바로 사라지지는 않을지라도 여하튼 시간이 지나면 소멸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영혼 불멸과 같은 사상은 발붙이지 못했다.

죽음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아직 삶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죽음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말한 공자 이래로 유학자들은 사후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들이 귀신을 부르는 무당을 멀리한 것도, 불교의 윤회설을 싫어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들은 중국 북송 시대의 횡거 장재가 적은 “살아서는 하늘이 내린 일에 충실하다가 죽어서는 편안히 쉬리라(存吾順事, 沒吾寧也.).”와 같은 문구를 책상에 붙여 놓곤 했다.

그럼 살아 있는 동안 하늘이 부여한 일에 충실한 자세는 무엇일까? 이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철학의 굵직한 질문이기도 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육십 대의 조르바가 아흔이 넘은 노인을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목이 나온다.

노인은 나무를 심고 있었다. 조르바가 물었다.

“할아버지, 그 연세에도 아몬드나무를 심으세요?

”노인은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 대답했다.

“젊은이, 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네.”

그러자 조르바가 이렇게 대꾸했다.

“그러세요? 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처럼 살고 있는걸요.”

삶을 대하는 조르바와 노인의 태도 중 누구의 것이 옳을까? 사실 두 사람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이가 아흔이든 예순이든 더 어리든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혹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처럼’ 오늘 아몬드나무를 심는 것이 사는 날까지 혹은 죽는 날까지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까.

월간 <가정과 건강> 7월호

[문학 속 가정 이야기] 찰리 브라운의 품격

[노동욱 창의융합자유전공학부 교수 / 문학사상 편집기획위원]

제주도에서 ‘스누피가든’을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어릴 적 좋아했던 스누피 캐릭터를 실컷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스누피가든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곳에서 느끼게 된 감정은 단순히 볼거리로서의 캐릭터 감상 측면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스누피가든 내부에는 스누피와 찰리 브라운을 주인공을 한 만화 ‘피너츠 Peanuts’의 스토리 라인, 캐릭터들의 대사 등이 적혀 있었는데, 그것들은 하나같이 중요한 메시지들을 담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루저”

스누피의 단짝 친구인 찰리 브라운은 “사랑스러운 루저”라고 불린다. 찰리 브라운은 야구 팀 투수 겸 매니저인데, 그의 야구팀은 “세계 최악”이지만 늘 야구 시즌이 오기를 기다린다. ‘피너츠’의 작가 찰스 M. 슐츠는 늘 지기만 하는 “세계 최악”의 팀 투수가 야구 시즌을 기대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루저=패배주의’라는 공식을 전복하는 듯하다. 루저라고 해서 늘 패배주의에 젖어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고 말이다. 더 나아가, 루저도 사랑스러울 수 있음을,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말하려는 듯하다. “사랑스러운 루저”라는 모순어법은 이렇게 성립된다.

“맙소사!”(Good Grief!). 그다지 잘 하는 것이 없는 찰리 브라운이 자주 내뱉는 말이다. 찰리 브라운과 그의 야구팀 친구들은 결과가 좋지 못해도 끊임없이 도전하며 거듭 경기장에 선다. 주목할 것은 찰리 브라운의 ‘덤덤한’ 표정인데, 이기든 지든 늘 덤덤한 표정으로 자기 할 일을 하는 그의 표정은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우리를 반성케 한다.

▲ 사진=스누피가든 제공

스누피가든 내부의 각각의 테마 홀에서는 독특하고 위트 있는 인생 이야기와 삶의 지혜를 담은 ‘피너츠’ 친구들의 일상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작가 슐츠는 찰리 브라운, 스누피, 마시, 루시, 라이너스 등의 캐릭터를 통해 인생, 사랑, 웃음, 애환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다. 슐츠는 독자들에게 패배의 상황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긴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또한, 실수를 하는 것은 그가 인간이라는 증거이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 그 자체로도 충분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스누피가든의 정원으로 나가 보니, 벤치에 적혀 있는 “인생에는 햇살과 비가 있다(Life has its sunshine and its rain).”는 마시의 대사와, “우리는 승리보다 패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잖아(We learn more from losing than we do from winning).”라는 루시의 대사가 나를 반겼다. ‘피너츠’의 메시지는 명확해 진다. 우리 인생에는 따듯한 햇살이 내리쬐는 날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 공존하는데, 우리는 굵은 빗줄기에 흠뻑 젖은 날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실패연구소

이러한 맥락에서, ‘KAIST 실패연구소’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시사한다. 카이스트에서는 2021년 실패연구소를 설립했는데, 이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과감한 도전정신을 함양하기 위함이다. 실패연구소가 정기적으로 주최하는 ‘실패 주간’에는, 학생들이 너도나도 실패한 프로젝트를 가지고 나와 ‘자랑’하는 시간을 갖는다. 실패를 자랑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루시의 말처럼, 우리는 실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는 도전하는 사람의 특권이다. 도전하지 않으면 실패할 일도 없다. 그러므로 실패란 열정의 산물이다. “혹시 아직 실패를 많이 안 해봤다면 그걸 더 걱정해야 한다.”는 조성호 실패연구소장의 말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최근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무빙’에서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능력자 두식이 아들 봉석에게, 하늘을 잘 날기 위해서는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잘 떨어져야 한다.”고 두식은 말한다.

조성호 소장은 이어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백날 해도 사회가 실패를 용인하는 분위기가 아니면 소용없다. 실패를 용인하고 실패를 통해 배우는 문화를 앞장서서 만들어 보자.”고 말한다. 말로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실패한 자를 ‘루저’ 취급하는 사회는 위선적이다. 실패연구소의 진짜 목적은 실패해도 괜찮다고, 더 나아가 실패를 거듭해야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실패한 자를 응원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사진=스누피가든 제공

자갈길 잘 걸어가기

정신과 의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는 “모든 악몽은 언젠가는 삶의 일부인 축복으로 바뀐다.”고 했다. 여기에 한 마디 첨언하자면, “모든 악몽은 [이를 악물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삶의 일부인 축복으로 바뀐다.” 그런데 찰리 브라운은 한 발 더 나아가 이렇게 덧붙이는 듯하다. “모든 악몽은 [덤덤하게 툭툭 털어내면] 언젠가는 삶의 일부인 축복으로 바뀐다.”

우리가 흔히 하는 축복의 말로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말이 있다. 특히 새 출발을 하는 사람에게 종종 건네는 말이다. 하지만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말을 건네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이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다. 인생에는 꽃길보다 울퉁불퉁한 자갈길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길을 잘 걸어 나아가는 것은 무엇보다 이 자갈길들을 ‘어떻게’ 통과하는지에 달려 있다.

혹자는 우리나라에는 ‘교육’은 없고 ‘입시’만 있다고 통렬하게 지적한다. 어떠한 좋은 교육적 명분을 갖다 붙여도, 그것은 ‘입시 전략’으로 왜곡되고 변질되고 만다. 우리나라 입시 광풍의 이면에는 결국 남들보다 더 좋은 성적을 얻어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교육은 능력주의 신화와 결탁하여 이러한 욕망을 속절없이 방관하거나 심지어 부추기고 있음을 쉽게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우리의 교육이 승리하는 법만을 가르치다 보니, 학생들은 살아가다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패배의 순간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피너츠’는 학교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 ‘패배의 품격’을 가르쳐 준다. 패배의 순간을 마주할 때, 찰리 브라운처럼 ‘맙소사!’라는 낮은 탄식을 외치며 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자갈길을 걸어가자.

월간 <가정과 건강>

[대학通] 숏폼 콘텐츠의 위험성

[김기석 교육혁신원 원격교육지원센터 팀장 / 콘텐츠학 박사]

최근 대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유행하는 콘텐츠는 ‘숏폼 콘텐츠’다. 인스타 릴스, 유튜브 쇼츠, 틱톡 등 화제 이슈를 몰고 다니는 숏폼 영상콘텐츠는 1020 MZ세대를 비롯한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대세’로 꼽히고 있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시각 효과를 가미한 숏폼 콘텐츠의 등장은 장시간 영상을 시청하거나 문자화된 텍스트를 읽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자극적인 시각 표현, 메시지 없는 숏폼 콘텐츠

색채가 화려하고 자극적인 움직임, 시청각적 효과로 범벅된 숏폼 콘텐츠는 짧은 시간에 핵심적인 메시지와 이야기를 노출해 확실한 각인 효과를 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단점 또한 존재한다. 바로 긴 텍스트 형태의 줄글을 읽거나 장시간 영상콘텐츠에 집중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숏폼 콘텐츠의 대다수는 1분 이하의 아주 짧은 영상으로 이뤄진다. 진지한 메시지를 담기보다 단순한 재미와 웃음, 호기심을 유발하는 자극적인 소재가 주를 이룬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많은 인기와 관심을 얻는 것이 목적이므로 맥락 없는 내용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를 두고 교육계에선 심각한 문해력 저하와 난독증 유발에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과도한 숏폼 콘텐츠 시청, 문해력 저하의 위험 요인

지나친 숏폼 콘텐츠의 남용은 디지털 리터러시 능력과 문해력 저하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자극적인 숏폼 콘텐츠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 정신건강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지난 2021년 OECD가 발표한 ‘피사(PISA) 21세기 독자: 디지털 세상에서의 문해력 개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만 15세 학생들의 디지털 문해력은 OECD 국가 중 최저 수준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그 원인의 일부 요인으로 ‘숏폼의 유행’을 꼽고 있다. 미국의 경우 숏폼 콘텐츠의 선두주자 ‘틱톡’이 젊은이들에게 심리적으로 가장 지장을 주는 네트워크로 꼽으며 정신건강 위협의 이유로 지목한 바 있다.

숏폼 콘텐츠에 과도하게 노출될 경우 지나친 중독 현상으로 뇌 활동이 변화한다. 우리의 뇌는 약한 자극에 더이상 반응하지 않게 되고, 더 강렬한 자극을 본능적으로 원할 것이다. 이는 곧 청소년과 대학생들의 문해력을 떨어뜨리는 심각한 위협 요인이 되고, 틱 장애 또는 정신질환을 유발할 수 있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숏폼 콘텐츠 시청에 이미 익숙해진 대학생들은 더이상 긴 글에 집착하지 않는다. 문자나 메일, 두꺼운 전공 교재의 내용 또한 대충 읽고 훑어보는 경우가 많다. 단시간 집중력이 떨어져 내용을 깊게 파고들지 않고 의미만 간단히 파악한 채 넘기는 경우가 잦아지게 된다. 긴 글을 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난독증의 형태로 변화한다. 숏폼 콘텐츠의 주요 특징인 빠르고 단편적인 정보 전달 방식은 오히려 난독증 환자들의 내용 이해에 더 큰 어려움으로 다가갈 수 있다. 난독증 환자일수록 읽기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텍스트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오히려 독서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동시에 학습을 할 때 필요한 집중력을 떨어뜨려 인지능력이나 학습 효과를 저해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숏폼 콘텐츠는 난독증 환자의 학습, 정보처리 방식에 부정적 영향을 끼쳐 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숏폼 이용 의식적으로 자제해야

그렇다면 숏폼 콘텐츠로 인한 나쁜 영향을 줄일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스마트폰 사용을 의식적으로 자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유아의 경우 하루 1시간 이상, 청소년·성인의 경우 하루 2시간 이하로 영상콘텐츠를 시청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숏폼 시청 시간이 지나치게 많을 경우 앱을 삭제하거나 일상의 오프라인 활동을 더 늘리는 것도 도움이 된다.

또한 문해력 향상을 위한 가벼운 독서와 필사 같은 손글씨 작업에 익숙해지는 것도 방법이다. 자극적이고 빠른 정보에 익숙한 대학생들이 과거로 회귀해 태블릿 PC가 아닌 아날로그식 노트 필기, 학습법을 수용해 따라하는 것도 학습 효과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한국대학신문 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64058

[마음건강] 누구나 인정에 목말라 있다

[안재순 상담심리학과 교수]

중학교 3학년인 채영이는 학교나 학원 선생님들로부터 모범생으로 칭찬이 자자하다. 그런데 시험 성적이 좋지 않으면 거의 패닉 상태가 된다. 1등이 되지 않으면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쓰레기 같은 인생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극도의 불안으로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린다. 항상 잘한다는 칭찬만 받아서인지 누군가로부터 지적을 받거나 혼이 나면 분이 나서 견디지 못 한다.

40대 직장인 성준 씨는 야근을 하거나 주말에 나와 일한 적이 많다. 팀장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몇 배나 열심히 일한다. 그런데도 팀장이 소리를 지르며 지적하면 손발이 얼음처럼 차갑게 마비된다. 억울한 마음에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한다. 때로는 팀장이 이번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다고 칭찬하지만 기쁨이나 안도감은 잠시 잠깐이고, 다음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금세 불안이 밀려온다.

3년 전 은퇴를 한 재식 씨는 최근 들어 거의 집에만 머물러 있다. 직장에서 나름 존경과 인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아무 쓸모없이 버려진 폐품처럼 생각되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무시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가족들 눈치를 봤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과거에 무슨 일을 한 사람이었는지, 어떤 직책을 가졌는지’ 장황하게 설명을 하며 허세를 부렸다.

남에게 인정받아야 비로소 안심이 되고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타인에게 ‘좋은 사람’, ‘유능한 사람’이란 말을 들어야 안심되는 사람은 인정 중독자다. 인정 중독자들은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에서 자기 존재감을 찾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 같은 인정 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예민하다. 타인의 부정적인 말에 감정이 쉽게 상처를 받거나 동요한다. 항상 사람들이 나를 ‘착한 사람,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긴장되고 상대방에게 맞추어 주느라 피곤하다.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이 더 우월하면 안심이 되고 더 낮다고 평가되면 위축된다. 마치 목마른 사슴처럼 사람들의 인정을 갈구하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

이들은 도대체 왜 타인의 인정에 집착할까?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인간은 미숙아로 태어났다.

부모로부터 독립하기까지 오래 걸리기 때문에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또한 그 보살핌을 받기 위해 사랑과 인정이 필요하다. 사람들로부터 “와! 정말 대단한데?”, “멋집니다. 최고예요.”라는 칭찬을 들을 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는다. 이처럼 인정 욕구는 성취를 하기 위한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어린 시절 중요한 타인으로부터 건강하게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결핍감으로 인해 타인으로부터 확인이나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부모가 자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부모 마음에 드는 행동을 했을 때에만 좋아하고 칭찬을 했거나, 그렇지 못할 때는 냉담한 표정으로 쌀쌀맞게 대하면서 ‘○○하면 너를 사랑해 줄 거야’라는 조건부 사랑 속에서 자란 아이는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항상 부모와 타인의 눈치를 보며 인정을 갈망한다.

▲ 사진=envato elements

과도한 인정 욕구는 어떤 문제를 일으키나?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전혀 이상하지 않고 병리적인 것도 아니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모든 아이는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참을 수 없는 욕구를 가지며, 어떤 아이도 이런 욕망 없이 성장할 수 없다.’고 했다. 이처럼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분명 삶의 동기 부여이며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누군가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것이 내 삶의 전부가 되어 버릴 때 문제가 된다. 인정을 받지 못했거나, 누군가로부터 거절을 당하거나 비난받았을 때 삶 전체가 허망하게 무너져버린다면 그것은 문제다. 단지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에 내 삶의 소중한 것을 모두 걸어 버린다면 내 삶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내주는 것이 된다.

과도한 인정 욕구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자신에게 가혹한 요구를 하는 완벽주의에 빠지기 쉽다. 즉 인정 중독자들은 타인의 시선에 저당 잡힌 인생을 사는 셈이다. 내 삶이 전적으로 타인의 판단에 달려 있다. 마치 개의 목줄을 달아 개를 컨트롤할 수 있는 손잡이를 주변 사람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인정해 주면 살랑살랑 꼬리를 치며 행복해하고 인정해 주지 않으면 주눅 들고 불행해진다고 생각한다. 또한 하나를 성취하거나 한번 인정받았을 때 일시적인 만족이 되지만 바로 다음 성취나 인정을 받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 이러한 삶은 시간이 지날수록 만성 피로감으로 녹초가 되고 짜증이 많아진다.

오늘 나를 인정해 준 사람이 내일은 인정해 주지 않을 수도 있다. 타인의 인정 기준이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며 가변적이어서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삶은 불행해지기 마련이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불안과 우울, 분노라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된다. 마치 태평양에 떠 있는 조각배처럼 물결치는 대로 요동치는 인생을 살게 된다. 나의 소중한 삶이 남에게 저당 잡혀 그로 인해 나의 행복이 좌지우지된다는 것은 참 억울하다.

문제는 인정 욕구를 ‘어떻게 없애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자신이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온전하지 못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닌 것으로 인식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인정 중독성 성격은 만들어진다.

먼저 자신이 인정 중독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면의 욕구에 귀를 기울이고 반응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감을 회복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는 지금 충분하다.’, ‘지금 당장 행복해지기 위해서 더 필요한 것은 없다.’, ‘나는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다.’라고 자신에게 말해 준다. 가장 소중한 친구를 대하듯 나를 존중하고 사랑해 주자.

‘그것밖에 못하니?’, ‘너는 그게 문제야.’라는 타인의 공격으로 자존감에 큰 상처를 받았을 때 누군가 한 사람은 ‘이만하면 충분해.’, ‘네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알아.’, ‘너를 응원하고 있어.’라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존중해 주면 자존감은 회복된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에서 내가 아무리 잘 보이려고 애써도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만약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를 다시 좋아하는 것도 그 사람의 몫이다. 인간관계에서 내 영역이 아닌 부분은 과감히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인정 욕구를 채우고 싶다면 타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에만 집중하지 말고 상대방 자체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연민의 마음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남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만 원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다.

월간 <가정과 건강> 6월호

[시론] 호모 에티쿠스의 고뇌

[이국헌 신학과 교수]

지난해 등장한 챗GPT로 인해 인류 사회는 대변곡점에 접어들었다. 70여 년 전에 존 폰 노이만이 언급한 기술적 특이점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AI의 발달이 가속화되면서 인간의 자연지능이 인공지능에 추월당하게 될 시점이 가까이 왔음을 직감한다.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의 예측이 맞다면, 그 시점은 2045년이 될 것이다. 유엔 미래보고서에도 나타나고 있는 이 시점은 이제 20년밖에 남지 않았다. 이 변혁의 시기에 대학 공동체는 무엇을 염려하고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생각할수록 복잡하고 난해한 과제다.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고려해 볼 때 대학과 지식인의 고뇌는 더 깊어진다. 교육 현장에서 다가올 미래 사회에 부합하는 역량을 갖춘 인재를 양성해야 하는데, 그것을 통찰하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지식인에게조차 전혀 새로운 데이터가 쌓이고 생소한 알고리즘이 고도화되면서 기존의 지적 능력으로는 그 데이터를 처리하기가 어렵다. 유발 하라리가 예언한 것처럼 소수의 엘리트 집단인 호모 데우스를 제외하고는 그 사회적 복잡계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복잡하면 단순화시키라는 윌리엄 오컴의 면도날 원리가 필요해 보인다. 중세 실념론과도 같은 불필요한 형이상학적 담론을 제거하고 핵심 논증에 집중해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 오컴의 면도날로 기술인본주의 사회의 논리비약적 실재들을 도려내고 한 가지를 남겨둔다면, 거기에 호모 에티쿠스가 있을 것이다. 윤리적 인간이야말로 미래 사회에서 인류가 호모 유스리스가 되지 않을 유일한 존재론일 것이다. 하라리는 궁극적인 미래의 인류를 호모 유스리스로 예측했지만, 그건 존재론적 결여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의 고도화로 만물인터넷이 등장할지라도 호모 에티쿠스가 존재하는 한 인류의 미래는 그의 예측처럼 디스토피아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대학과 지식인에게 맡겨진 책임은 윤리적 인간, 윤리적 사회, 윤리적 미래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윤리 역량을 갖춘 호모 에티쿠스가 양성되면 윤리적 사회, 즉 문화와 기술을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사람의 문화와 기술이 발전한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윤리적 사회는 윤리적 미래를 전망하게 해 줄 것이다. 호모 에티쿠스가 꿈꾸는 미래에서, 만물인터넷은 인간을 지배하는 수단이기보다는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장이 돼야 하며, 호모 데우스가 개발한 알고리즘은 도구적이라기보다는 윤리적이어야 하고, 도래할 종교는 데이터교가 아니라 메시아교가 되어야 한다. 호모 에티쿠스는 그것을 꿈꾸고 그것을 희망한다.

시대의 변곡점에서 윤리적 미래를 희망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시대의 지식인이 호모 에티쿠스로 거듭나는 것이다. 대학의 지식인 사회에서 윤리 역량이 무너지면 사회와 미래는 암울하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윤리적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 미래를 위한 교육은 실패한 것이다. 교수가 윤리 역량을 갖추지 못한다면 학생의 윤리 역량의 성장을 기대할 수 있을까? 호모 에티쿠스의 고뇌는 대학 사회가 곱씹어야 할 사안이다.

학생들의 기말고사를 채점하다가 충격을 받았다. 온라인 오픈북 시험이었는데, 두 학생의 답안이 99% 똑같았다. 두 학생에게 해명의 기회를 주었는데, 표절을 부인했다. 표절도 문제지만, 해명의 기회마저 부정직하게 대응하는 것이 더 문제였다. 한 학기 동안 학생들에게 윤리 역량을 키워주지 못한 것을 스스로 자책하면서, 그들에게는 재시험의 기회를 줬다. 학생들이 정직함을 배울 기회가 됐기를 바란다. 인공지능이 고도화되면 이런 윤리 문제는 더 심화될 것이다. 각 대학과 지식인이 윤리 역량을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

한국대학신문 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64891

[에세이] 마음속에 빛나는 별

[이관호 스미스학부대학 연구원 / 철학자]

몇 년 전 경상북도 안동의 한 도서관에서 특강을 할 일이 있었는데 가는 김에 가족여행까지 계획했다. 그중 하루는 도산서원에서 낙동강 상류 쪽으로 올라가면 보이는 농암종택이라는 고택에서 보냈다. ‘어부가’로 유명한 조선 전기 문인 농암 이현보의 집인데 멋들어진 강과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기품 있는 한옥과 정자가 어우러져 있어 언제 한번 묵어 봤으면 했던 곳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세상의 불빛도 꺼졌고 주변에 아무런 인공의 흔적도 없는 2월의 밤이었다. 시골의 하늘을 보고 싶어서 가족이 잠자리에 든 후 밤 11시쯤 홀로 밖에 나왔는데 바로 눈이 번쩍 뜨였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관측소에 온 것처럼 수많은 별이 쏟아져 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혼자 보기 아까운 장면이어서 용감하게 가족들을 깨웠다. 아직 날은 추웠지만 아이도 아내도 밤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계속 보다 보니 점차 빛나는 별들 사이의 흐릿한 별들까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을 깜박이지 않고 뜬 상태로 유지하니 그 빛들도 선명하게 다가와서 그렇게 하늘 전체가 별로 뒤덮였다.

그때 윤동주 님의 시가 떠올랐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별을 세던 시인이 마지막으로 두 번 부른 존재는 어머니였다.

이어서 옛날 학교 교과서에서 읽었던 알퐁스 도데의 ‘별’이 생각났다. 프로방스의 한 목동이 짝사랑하던 주인집 딸 스테파네트는 산에서 길을 잃고 목동과 밤을 지새우게 된다. 목동은 불을 지피고 앉아 그녀와 밤하늘을 보며 여러 별들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다 문득 어깨 위에 무언가 가볍게 닿는 것을 느낀다. 목동은 하늘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별이 길을 잃고 자신의 어깨에 잠시 내려와 잠들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별에는 사랑, 아름다움, 순수함, 그리움, 설레임이 깃들어 있다. 그런데 혹시 딱딱한 철학의 역사에서도 별을 이야기한 이가 있을까? 근대 철학과 윤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칸트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
내 마음속에는 찬란한 도덕률

▲ 사진=envato elements

아마도 칸트는 자주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의 철학을 구상했던 것 같다. 그의 말대로 정말 우리의 내면에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가 있다면 얼마나 낭만적인가! 문제는 칸트가 말한 마음속의 보석이 도덕 법칙 즉 ‘의무’라는 점이다. 의무는 자유에 비해 부담스럽고 우리를 구속하는 느낌을 준다. 예를 들어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하지 말라.”라는 말을 떠올려 보자. 이런 의무가 어떻게 찬란할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칸트는 이런 의무에서 ‘자유’를 발견했다. 이를테면 우리는 여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겨울에 따뜻한 카페라떼를 자유롭게 선택한다. 그런데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어서 자유롭다면 그 자유는 정글의 사자나 호랑이가 먼저 누렸을 것이다. 칸트가 말한 진정한 자유란 각자가 고심 끝에 받아들인 자발적인 의무를 날씨가 추우나 더우나 변함없이 따를 때 증명된다. 다음의 사례가 혹시 이해에 도움을 줄지 모르겠다.

에마누엘 레비나스(1906~1995)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러시아의 변방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독일 철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에서 활동하였고 가족들은 고국에서 나치의 대학살 때 희생되었다. 이렇게 네 개의 문화를 거치며 누구보다 타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가족의 비극을 겪은 그가 ‘타자’에 대한 ‘환대’로 대표되는 사랑 그 자체로 돌아가라는 철학을 전개한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가지고 있던 하나의 의무가 있었다.

평생 레비나스를 연구하던 일본의 어느 저명 한 학자(우치다 다쓰루)가 그를 만나겠다고 작심하고 편지를 쓴 후 파리를 방문했다. 집을 찾아 초인종을 누르자 인터폰으로 “올라오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렸고 계단을 올라가자 문 앞에서 양 손을 벌리고 자신을 환대해 주는 레비나스를 만날 수 있었다. 감격에 겨운 학자는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헤어질 때 직접 가지고 간 스승의 책을 꺼내서 사인을 요청했다. 그런데 그 유대인 철학자는 펜을 들고 사인을 하려다 멈추더니 너무도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거절했다고 한다. “오늘이 예배일이군요.”

사인을 하려던 철학자의 손을 멈추게 했던 원칙은 그를 구속하고 있을까? 아니면 자유롭게 하고 있을까? 그 원칙을 별처럼 빛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 행위는 자유로움을 증명하고 있을 것이다.

날이 맑으면 밤에 잠시 나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각자 간직하고 있는 원칙 몇 가지를 떠올려 보자. 그리고 의무와 자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글을 마무리하면서 방의 커튼을 걷고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낀 탓도 있겠지만 저기 달만 홀로 있을 뿐 하나의 별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 서울은 적어도 마음속의 도덕률을 확인하기에 좋은 곳은 아닌 듯하다.

월간 <가정과 건강> 5월호

[문학 속 가정 이야기] 모두가 나의 아들

[노동욱 스미스학부대학 교수 / 문학사상 편집기획위원]

2019년에 개봉한 영화 《나를 찾아줘》는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 준다. 정연의 아들은 6년 전 실종되었다. 실종된 아들의 행방을 애타게 찾던 중 그녀는 아들과 생김새가 똑같고 심지어 흉터까지 똑같은 아이를 봤다는 제보를 받게 된다. 정연은 지체 없이 혈혈단신 그 낯선 곳으로 향한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아들을 찾게 되는데 그는 결국 죽은 채로 개펄에서 발견된다. 정연은 개펄로 달려가 아들을 끌어안는다. 그러나 그 아이의 발톱은 자신의 아들이 가진 특유의 발톱 모양과 달랐다. 정연의 아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아이를 끌어안고 오열한다. 그 순간 그 아이가 자신의 아들인지 아닌지는 정연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아이의 죽음은 실종된 아들을 둔 정연의 마음에 자기 아들의 죽음과도 같은 가슴 찢어지는 슬픔으로 다가온다. 다른 아이의 죽음이 내 아이의 죽음처럼 다가오는 이 극적인 공감의 순간은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준다.

▲ 영화 《나를 찾아줘》 스틸

아서 밀러의 『모두가 나의 아들』

영화 《나를 찾아줘》는 ‘나의’ 아들/‘너의’ 아들이라는 이분법적 경계가 허물어지는 극적인 장면을 통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데 이런 점에서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희곡 『모두가 나의 아들(All My Sons)』은 제목부터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 작품은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다. 전쟁 당시 조 켈러는 전투기 부품을 군납하는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그에게는 숨기고 싶은 비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전쟁 당시 발생한 전투기 사고와 관련이 있다. 조 켈러는 결함 있는 부품을 공군에 납품함으로써 전투기 스물한 대가 추락하여 조종사 스물한 명이 사망하게 되는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다. 조 켈러는 군의 독촉에 못 이겨 부득이하게 결함이 있는 실린더 헤드를 급하게 납품한다.

그러나 그 행위의 이면에는 ‘끔찍한’ 자식 사랑이 자리하고 있었다. 납품을 제때 못하면 계약이 취소될 것이고, 따라서 아들들에게 물려줄 사업이 위기에 처할 거라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자기 아들에 대한 ‘끔찍한’ 사랑이 다른 사람의 아들 스물한 명의 목숨을 앗아 가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조 켈러의 둘째 아들 래리는 아버지의 행위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비행기 사고를 일으켜 생을 마감한다.

래리가 자살 비행을 감행하면서까지 아버지에게 남기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모두가 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래리 자신만 아버지 조 켈러의 아들이 아니라 전투기 사고로 사망한 스물한 명의 꽃다운 청춘 모두 조 켈러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래리가 남긴 유서를 읽은 조 켈러는 뒤늦게야 자신의 행동을 돌아본다. “물론이지. 그 애는 내 아들이었어. 하지만 래리는 그들 모두가 내 아들이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 생각에도 그들이 내 아들이었던 것 같군. 그들이 내 아들이었던 것 같아.”

▲ 아서 밀러의 희곡 『모두가 나의 아들』  표지

우리는 자기 자녀를 ‘끔찍이’ 사랑하지만 다른 사람의 자녀는 ‘끔찍하게’ 괴롭히는 이들을 종종 보게 된다. 최근 큰 화제를 모았던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에서 재준은 학창 시절 동은을 끔찍하게 괴롭힌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다시 만난 그들. 그 즈음, 재준은 자신의 딸 예솔을 향한 사랑에 푹 빠져 있다. 동은은 재준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모르는 것 같아 알려 주는데, 나도 누군가의 딸이었거든, 재준아.” 재준과 같은 ‘괴물’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재준의 진정한 ‘괴물성’은 사실 그의 잔학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끔찍한 내 자식 사랑’과 ‘끔찍한 남의 자식 괴롭히기’라는 크나큰 간극 속에 존재한다.

마땅히 해야 할 일

2006년 어느 여름밤, 여덟 살 소년 카일 홀트러스트가 자전거를 타고 길을 건너다가 트럭에 치였다. 트럭은 소년을 9m 정도 끌고 갔다. 목격자였던 토머스 보일 주니어가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트럭 앞쪽을 움켜쥐고 들어 올려 소년을 끌어낼 수 있도록 무려 45초간 잡고 있었다. 그 트럭의 무게는 약 1,500~1,800kg 정도였다. 데드리프트 세계 기록이 500kg이라고 하니 보일은 그날 역도 세계 챔피언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 묻자 보일은 “지금은 저 차를 절대 들어 올릴 수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묻자 보일은 이렇게 대답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어요. 저 애가 내 아들이라면?”

위에 제시한 일화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Jonathan Safran Foer)가 『우리가 날씨다(We Are the Weather)』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화다. 트럭에 깔린 소년이 ‘내 아들 같아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기적적으로 구출해 낸 이 일화는 그 자체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포어가 이 일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두가 나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훨씬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포어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누군가를 도와야 할 이유는 그 사람이 ‘내 아들 같아서’ 혹은 ‘내 딸 같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내 아들 같아서’ 혹은 ‘내 딸 같아서’라는 말조차도 매우 자기중심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포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타고 있을지도 몰라서 구급차가 올 때 길을 비켜 주는 것이 아니다. 법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길을 비키는 것도 아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에 비켜 주는 것이다.”

모두가 나의 아들딸이라고 여기며 타인을 귀히 여길 때, 아니 모두가 나의 아들딸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느낄 때 세상은 조금 더 살 만한 곳이 되지 않을까. 『모두가 나의 아들』 속의 대사는 이런 점에서 곱씹어 볼 만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단 한 번만이라도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다는 것과 거기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아는 것 말이에요.”

월간 <가정과 건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