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간호조무사협회장이 간호법 하위법령 제정 과정에서 간호조무사의 직역이 배제되었고, 간호계에 ‘카스트 제도’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카스트 제도는 어느 한 계급에 귀속되어 대대로 벗어날 수 없는 원칙을 둔 신분제도이다. 이는 직역 내 수직이동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극단적 표현으로, 직역 내 수직적 상승체계를 지속적으로 연구해 온 필자에겐 매우 유감스러운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또 ‘간호사법’이 아닌 ‘간호법’으로 포괄한 법의 제정 취지와 내용을 곡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직역 내 상호 협력을 기반으로 해야 할 보건의료 현장에 불필요한 갈등과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 우려스럽기까지 하다.
간호법은 특정 직역의 이익에 초점을 맞춘 법이 아니다. 급변하는 보건의료 환경 속에서 간호 직역의 전문성과 고유 역할을 명확히 하고, 국민이 보다 안전하고 질 높은 간호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며 치료와 간호의 요구에 따른 적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제도적 바탕을 마련하는 것을 핵심 목적으로 한다.
더불어 간호법은 직역의 특성을 고려해 근로제도를 개선하고, 일과 가정의 양립은 물론 전문성 개발을 이어가면서 국가 발전과 자아실현을 이루도록 하는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특히 초고령사회 진입과 함께 지역사회 중심의 돌봄 체계로 전환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한 상황에서 간호 직역의 업무와 책임을 법적으로 명확히 규정하는 일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시대적 요구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간호사에 대한 법적 규정은 의료법 안에 포괄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간호사의 전문성과 고유성,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보건의료 현장에서는 역할의 경계와 책임 소재를 둘러싸고 혼선과 마찰이 이어졌다. 간호법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개선하고, 간호 직역의 법적 지위를 분명히 하여 적정 배치 등을 통해 간호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다.
무엇보다 간호법은 간호조무사의 지위 또는 업무를 축소하거나 배제할 뜻이 전혀 없다. 간호법과 하위법령은 국민 생명을 돌보는 의료 현장에서 서비스 업무 범위와 역할을 규정해 간호사와 간호조무사의 협업 체계를 더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정립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전체 보건의료서비스의 효율성과 안정성 또한 향상될 수 있다. 간호사와 간호조무사가 상호 보완적 관계로 함께 역할을 다하는 구조야말로 국민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는 협력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간호 직역 내 대립이나 감정적 논쟁이 아니다. 변화하는 보건의료 환경 속에서 각 직군이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상호 존중과 협력을 토대로 함께 국민 건강을 지켜나갈 수 있는 상생 구조가 절실히 요구된다. 간호법은 그러한 구조를 위한 제도적 기틀이며, 간호사만을 위한 법이 아닌 국민 전체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기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더 이상 사실과 다른 주장이나 감정적 언어로 간호법의 본질이 왜곡되고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간호법은 우리 모두의 건강한 삶을 위한, 국민을 위한 법이다. 이 점이 분명하게 인식되기를 바란다.
인공지능은 교육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며 학습 지원과 맞춤형 솔루션을 통해 교육 혁신의 중심에 서 있다. 학습자와 교사는 AI 기술을 활용해 학습의 효율성을 높이고 교육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은 윤리적 논란과 부작용을 동반하기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AI는 텍스트, 음성, 이미지 데이터를 분석하고 생성하는 능력을 통해 교육 현장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맞춤형 학습 플랫폼은 학습자의 데이터에 기반해 개인별 학습 속도와 수준에 맞춘 콘텐츠를 제공하며, 이를 통해 학습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I는 학습자가 어려움을 겪는 주제를 파악해 적합한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학습자 중심의 학습 환경을 지원한다. 또한 교사의 행정 업무를 줄이고 학생에게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도록 도우며, 교육의 개별화와 창의적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AI의 활용은 복잡한 윤리적 과제와 위험을 수반한다. 생성형 AI는 정교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허위 정보의 유포 가능성을 높인다. 잘못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제작된 학습 자료는 학습자에게 왜곡된 정보를 전달해 비판적 사고 능력을 저하시킬 위험이 있다. 가령 OpenAI의 GPT 모델과 같은 생성형 AI는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생성할 가능성이 있어 교사의 감독 없이 활용될 경우 학습자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개인정보 침해 문제도 중요한 쟁점이다. 학습자의 학습 기록, 성과 데이터, 행동 양식 등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개인정보가 부적절하게 사용되거나 유출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는 학습자의 사생활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교육 환경 전반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킬 수 있다. 유럽연합의 GDPR이나 한국의 개인정보 보호법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규제를 마련하고 있지만 이를 현장에서 준수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 사진=envato elements
교사와 학습자의 역할 변화
또한 AI의 확산은 교사와 학습자 간의 관계와 교육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킨다. AI가 학습자의 요구를 분석하고 피드백을 제공하면서 교사의 역할이 단순 관리자로 축소될 우려가 있다. 교사의 정서적 지지와 윤리적 판단이 약화될 수 있으며, 학습자는 스스로 사고하고 탐구하는 능력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 이는 장기적으로 인간의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를 저해할 가능성이 있다.
AI 기술이 긍정적으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우선, AI의 설계와 운영 과정에서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AI가 어떤 데이터를 기반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명확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통해 학습자와 교사가 결과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투명성은 공정성과 윤리적 문제 예방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AI는 인간 교사를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보완하는 존재로 자리 잡아야 한다. 교사는 AI가 제공하는 데이터를 활용해 학습자에게 적합한 학습 경험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하며, AI는 교사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집중돼야 한다. AI가 교사의 전문성과 정서적 지지를 대체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인간성과 기술의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AI는 교육 혁신과 윤리적 과제를 동시에 제시하는 기술이다. 기술의 가능성을 최대화하면서 위험 요소를 최소화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교육자는 AI를 단순히 도입하는 것을 넘어 이 기술이 교육의 본질적 가치를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되도록 해야 한다. 학습자가 AI 환경 속에서도 자율성과 창의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비판적 사고와 평생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간적 가치를 교육의 중심에 두는 과정에서 실현될 수 있다. 기술과 인간의 조화를 통해 교육적 혁신을 이루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먹는 것은 중요하다. 맛있는 음식, 건강에 좋은 음식을 챙겨 먹는 의미보다 더욱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단계로 내려가면, 먹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 때문인지 인간의 생존과 관련된 표현에는 유독 먹는 것과 관련된 것이 많다. 예컨대, 우리는 생계 수단을 “밥줄”이라 부르고, 생업을 “밥벌이”라 부르며, 생존권이나 기득권을 두고 싸우는 것을 “밥그릇 싸움”이라 부른다. 진로를 고민할 때도 “앞으로 뭐 먹고 살지?”라고 하며, 자식을 부양하는 것도 “자식을 먹여 살린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식구(食口)는 ‘함께 밥 먹고 사는 입’이다.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는 말은 ‘먹는 것’과 ‘사는 것’이 나란히 쓰인 말로, 이 두 가지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예증한다.
먹는 것을 중요시하는 것은 물론 인류 보편의 일이겠지만, 특히 우리나라는 예부터 먹는 것을 유난히 중요하게 여겼던 국가다. 그래서 오죽하면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 했겠는가? 우리나라에서는 인사말부터가 먹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그렇게 만나서 인사하고는 헤어질 때 다시 “언제 밥 한번 먹어요”라고 인사하는 것이 바로 ‘K-인사말’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처음 와서 겪는 해프닝 중에, “언제 밥 한번 먹어요”라는 인사치레의 ‘K-인사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언제 밥 먹지?’ 궁금해하며 오해가 생긴 해프닝이 종종 있다고 한다. 만나서 식사 여부를 묻고 헤어지면서 밥 한번 먹자고 기약하는 나라인 한국은 그만큼 먹는 것에 ‘진심’이다.
봉준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살인의 추억》(2003)에서 송강호는 살인 용의자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을 툭 내뱉는데, 이는 다양한 해석을 낳으며 영화 역사에 길이 남는 명대사로 자리매김했다. 봉준호 감독은 이후 《살인의 추억》이 외국에 수출될 때, “밥은 먹고 다니냐?”는 대사를 번역하는 것을 두고 “인류 최대의 난제”라고 칭한 바 있다. 이를 어떻게 번역했든지 간에, 한국 사람들만이 느끼는 ‘밥’에 대한 정서를 온전히 살리지는 못했으리라.
▲ 사진=envato elements
사랑의 메타포로서의 음식
우리나라가 음식을 중요시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한국전쟁과 뒤이은 빈곤한 시절을 겪은 경험 때문일 것이다.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음식이 정(情)과 사랑을 표현하는 메타포로 자리 잡은 것이다. 특히 이러한 정서는 대표적으로 가수 god의 노래 《어머님께》(1999)에 잘 담겨 있는데, 이 노래가 IMF 구제 금융이라는 ‘어려운 시절’에 발표되어 큰 사랑을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노래의 가사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에는, 가난해서 못 먹던 시절 짜장면이 싫다는 하얀 거짓말로 자식에게 음식을 양보하는 어머니의 먹먹한 사랑이 담겨 있다.
과거 못 먹던 시절에는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못 먹었다면, 요즘은 챙겨 먹을 시간이 부족해서 못 먹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메타포로서의 음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고(故) 신해철의 노래 《도시인》(1992)에는 현대인들의 바쁜 삶이 음식을 통해 잘 드러나 있다. “아침엔 우유 한잔 / 점심엔 FAST FOOD …… THIS IS THE CITY LIFE.”
현대인들의 삶이 이러하니, “어머니의 된장국”은 그리운 음식으로 마음에 와 닿을 수밖에 없다. 다이내믹 듀오의 노래 《어머니의 된장국》(2008)은 바쁜 현대인들이 느끼는 “어머니의 된장국”의 가치를 잘 말해 준다. “야근을 밥 먹듯 아침은 안 먹듯 하며 소화제를 달고 사는 더부룩한 날들 …… 냉장고엔 인스턴트식품 / 혀끝에 남은 조미료 맛이 너무 지겨워 / 그가 간절하게 생각나는 건 바로 어어어어어어 어머니의 된장국”
▲ 『H마트에서 울다』 표지
어머니가 양보하신 짜장면과 어머니가 끓여주신 된장국에서 보듯, 어머니, 음식, 그리고 사랑은 삼위일체로 자주 소환되는데, 그중 절정은 아마도 미셸 자우너(Michelle Zauner)의 『H마트에서 울다』(Crying in H Mart, 2021)일 것이다. 이 책은 가수이자 기타리스트인 자우너의 자전적 이야기다. 자우너는 한국인 엄마를 둔 한국계 미국인으로,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H마트에만 가면 운다. H마트는 ‘한아름 마트’의 약자로, 아시아 식재료를 전문으로 파는 슈퍼마켓 체인이다.
그녀가 H마트에서 우는 이유는, 슈퍼마켓에 진열된 한국 음식이 엄마가 해주던 음식을 상기시키면서 엄마 잃은 상실감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가 그 상실감을 치유해 나가는 매개물도 음식이다. 예컨대, 한 달에 한 번씩 김치를 담그는 것은 그녀의 “새로운 치유법”이 된다. 그녀에게 음식은 단순히 ‘먹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의 기억이고, 추억이며, 회상이고, 사랑이다. 자우너는 이렇게 말한다. “음식은 우리끼리 나누는 무언의 언어이며, 우리가 서로에게 돌아오는 일, 우리의 유대, 우리의 공통 기반을 상징”한다고.
이처럼 『H마트에서 울다』에서 음식은 “우리의 유대”이자 “우리의 공통 기반”을 상징하는 것으로 정체성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켄 로치(Ken Loach) 감독의 《나의 올드 오크》(The Old Oak, 2023)에서 음식을 통한 ‘우리의 유대’는 더욱 확장적인 의미를 띄며, 이는 타인의 정체성을 포용하고 환대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켄 로치 감독은 난민과 정체성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음식을 소재로 풀어낸다. 이 영화는 영국의 한 폐광촌을 배경으로 하는데, 정부에서 탄광 문을 닫으려 하자 노동자들은 연대하여 시위를 한다. 그때의 구호는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When you eat together, you stick together)이다. 그러나 함께 먹으며 연대하는 그들의 단단한 정체성은 다른 이들의 정체성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 서로 반목하던 지역민과 시리아 난민은 밥으로 하나가 된다. ‘우리’와 ‘너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어느 날 이 마을에 시리아 난민들이 들어오자 잔잔했던 마을에 혼란이 찾아온다. 마을 사람들은 난민들에게 “우리” 애 챙기기도 바쁘다며 “너희” 나라로 꺼지라고 소리친다.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우리’와 ‘너희’의 경계는 이처럼 명확하다. 그러나 펍을 운영하는 TJ는 펍에 딸린 방을 난민들에게 개방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도움과 한 끼 식사가 필요한 아이들을 돕고 싶어. …… 전쟁을 피해서 우리 동네에 온 새 친구들을 따뜻하게 맞고 싶어. 이 공간에서 같이 어울리고 나란히 앉아서 함께 밥 먹고 싶어.” 음식을 통해 ‘우리’와 ‘너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우리는 음식을 먹고 살지만, 사실은 음식에 담긴 사랑을 먹고 사는지 모른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자동 폐기된 직후, 스웨덴 한림원에서는 노벨문학상 강연이 있었다.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는 한국어로 강연을 진행했다. 21세기 한국의 민낯이 전 세계로 생중계된 이 두 사건은 묘하게 하나의 주제로 연결돼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성’에 대한 물음이다.
한국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왔다는 건 늦은 감은 있지만 다행한 경사다. 역사상 121명의 수상자 중 아시아인은 단 5명에 불과하다. 그중에서도 아시아 여성으로는 한국이 최초다. 그녀의 작품이 120여 년의 역사적 장벽을 넘고 전 세계 문학계에 소개될 수 있었던 것은 켜켜이 쌓은 한국 문학의 자양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성에 대한 작가의 치열한 문학적 물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는 강연에서 한강 작가는 ‘인간이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라는 물음에 천착해 온 자신의 문학적 여정을 소개했다. ‘폭력의 주체인 인간에 대한 신뢰의 상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담담하게 제시하는 그녀의 고백 속에 작금의 사태를 꿰뚫는 한 가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 》를 집필하기 위해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 900여 명의 증언집을 읽은 기억을 이야기하면서, 그 책에 있던 고(故) 박용준 열사의 한 메모를 읽어줬다. 야학교사로 시민 자치 활동 중 YWCA 건물에서 희생당한 그는 국가적 폭력의 마지막 밤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서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합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놀랍게도 이 메모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살아 있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글이 현재를 위한 예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움마저 느꼈다.
▲ 사진=envato elements
고(故) 박용준 열사의 인간적 고뇌와 한강 작가의 문학적 물음은 강연이 있기 몇 시간 전 국회 본회의장의 텅 빈 의자 사이에서 맴돌았다. 국민의 대표로 선출된 국회의원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표결에 앞서 집단퇴장할 때는 ‘보편적 인간이 지닌 신념과 양심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가 선언한 것처럼 또다시 끝난(죽은) 것일까?’라는 물음이 떠올랐다. 본회의장에 울려 퍼진 호명이 양심에 닿지 않는다는 사실에 오랫동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감정도 솟구쳤다. 그 눈물은 한강 작가의 고백처럼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고 세계를 구원할 희망마저도 상실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45년 만에 등장한 구시대의 유물인 ‘계엄’이라는 극단적 폭력 앞에 인간성은 여전히 굴복돼야 하는가? 하지만 한강 작가가 호소한 것처럼 인간성에 대한 희망(작가는 ‘사랑’이라고 칭했다)은 여전히 개인의 심장에 있어야 하고, 거기에 있다. 폭력 앞에서도 살고 싶지만 삶을 선택할 수 없게 하는 양심, 그래서 찌르고 아픈 저 양심을 가진 사람들의 심장 속 희망의 금실도 여전히 살아 있고, 살아있어야 한다.
예외 없이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는 2024년의 마지막 달에 대한민국은 또다시 아픈 역사를 쓰고 있다. 이 역사에 인간성에 대한 절망만 기록돼서는 안 된다. 우리는 45년 전 고(故) 박용준 열사의 메모를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와 동일한 아픈 양심으로 표결에 참석한 이들의 용기도 가슴에 새겨야 한다.
역사의 많은 부분은 절망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 속에서도 양심은 심장 속에 살아 있는 금실처럼 희망의 빛으로 존재할 것이다. 인간성이 존재하는 한 역사의 희망은 여전할 것이고, 교육은 바로 그 인간의 양심을 깨우는 텔로스(telos)를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 필자는 절망의 시간에 희망의 금실을 전해준 이들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시간은 환상이다. 점심시간은 두 배로 그렇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의 저자로 잘 알려진 더글러스 애덤스(Douglas Adams)의 말이다. 근무 시간 한 시간은 그리도 더디게 지나가면서, 점심시간 한 시간은 왜 두 배로 빠르게 지나가는 걸까?
이와 같은 맥락에서, “워얼, 화아, 수우, 모옥, 금, 퇼”이라는 유행어가 있다. 평일은 ‘워얼~, 화아~, 수우~, 모옥~’하며 ‘세월아~ 네월아~’ 느릿느릿 지나가지만, 토요일과 일요일은 ‘퇼!’하고 순식간에 지나감을 뜻한다.
이처럼 시간은 상대적이다. 물리적인 시간은 늘 동일한 속도로 흐르고 있지만, 지루하고 힘든 시간은 거북이처럼 기어가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은 토끼처럼 뛰어간다.
시간여행에서 ‘테스 형’을 만난다면
애덤스의 말처럼 시간이 ‘환상’(illusion)이라면, 시간여행은 ‘환상적’(fantastic)이다. 2022년에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재벌집 막내아들》은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다. 이 드라마에서 순양그룹의 김현우 실장은 죽은 뒤 순양그룹 회장의 손자 진도준으로 다시 태어나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시간을 거슬러 ‘과거’에 환생한다는 점이다.
미래의 일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는 진도준에게 과거에서 살아가기는 ‘땅 짚고 헤엄치기’이자, 동시에 일생일대의 ‘기회’가 된다. 그는 분당이 허허벌판일 때 아무도 눈독 들이지 않던 분당 토지 5만평을 할아버지인 진양철 회장에게 요청하여 결국 240억 원을 벌어들인다. 뿐만 아니라, 아마존(Amazon)이 소위 ‘떡상’하기 전에 아마존 주식을 대거 매입하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나홀로 집에》(Home Alone)를 수입하여 개봉하기도 한다.
▲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스틸
이러한 시간여행 모티프는 문학 작품, 영화, 드라마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자주 사용되며 인간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데, 시간여행을 이야기할 때 H. G. 웰스(H. G. Wells)의 『타임머신』(The Time Machine)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타임머신』의 초반부에서 ‘시간여행자’는 사람들에게 타임머신의 작동 원리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자 한 청년이 이렇게 말한다. “호메로스와 플라톤에게서 직접 그리스어를 배울 수도 있겠군요.”
호메로스와 플라톤뿐이겠는가. 이 대목에서 “소크라테스와 점심을 먹을 수 있다면 애플의 모든 기술을 포기할 수 있다.”던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말이 떠오른다. 힘겨운 인생살이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자 애타게 ‘테스 형’을 부르짖던 가수 나훈아도 떠오른다. 만약 웰스의 ‘타임머신’이 일찍이 현실화 되었다면, 잡스는 살아생전 소크라테스와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꿈을 이뤘을 것이고, 나훈아는 소크라테스를 만나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라며 투정을 부렸을지 모른다.
소크라테스를 ‘테스 형’이라고 부르며 인생의 질문들을 던지는 나훈아의 노래, 《테스 형》이 순수하고 낭만적이며 철학적이기까지 하다면, “소크라테스와 점심을 먹을 수 있다면 애플의 모든 기술을 포기할 수 있다.”는 잡스의 말은 그 자체로 상당히 자본주의적이다. 나훈아에게 소크라테스가 인생의 방향성을 물을 수 있는 존재라면, 잡스에게 소크라테스는 그와 함께 한 시간조차 경제 가치로 환산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애플의 기업 가치를 고려해 봤을 때, 잡스의 말대로라면 소크라테스와의 점심을 위한 시간여행의 가치는 약 2조 달러에 달할 것이다. 21세기 자본의 상징인 잡스에 이르러, ‘시간은 돈’이라는 명제가 일반화 된 현대사회에서 시간여행조차 돈의 가치로 환산될 수 있는 것으로 변질된 듯하여 마음 한편이 아릿하다.
《빽 투 더 퓨처》에서 《어바웃 타임》까지
만약 당신에게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맨 먼저 무엇을 하겠는가?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도준처럼 과거로 돌아가 주식이나 부동산을 사겠는가? 아니면 스티브 잡스의 염원처럼 명사(名師)를 만나 지혜를 구하겠는가?
그런데 의외로 시간여행 모티프를 활용한 영화들 중에서 ‘가족’의 가치를 주제로 한 영화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시간여행 영화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빽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 1987)에서 주인공 마티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한다. 과거 여행에서 마티는 아직 결혼 전인 자신의 부모님과 대면한다. 마티가 과거 여행 중 알게 된 사실은, 만약 변수가 생겨 자신의 부모님이 결혼을 하지 않게 되면 마티 자신을 비롯해 누나와 형 모두 미래 사회에서 소멸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마티의 과거 여행은 ‘가족 사수 작전’으로 바뀐다. 마티는 숫기 없는 자신의 아버지를 독려하여 어머니와 무사히 결혼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한다. 《빽 투 더 퓨처 2》(Back to the Future Part 2, 1990)에서 마티는 자신의 미래 자녀들이 범죄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게 될 처지에 놓이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번에는 미래로 향한다.
▲ 영화 ‘어바웃 타임’ 스틸
2013년에 개봉하여 큰 사랑을 받았던 《어바웃 타임》(About Time)은 《빽 투 더 퓨처》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잔잔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지만, 가족의 가치를 주제로 한 시간여행 서사라는 점에서 《빽 투 더 퓨처》의 계보를 이어받고 있다. 주인공 팀은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가문의 비밀을 듣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이 원할 때마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이다. 팀은 과거로 돌아가 망쳐 버린 순간을 바로잡기도 하고, 인생의 여러 갈림길을 다양하게 체험해 보며 그 중 최선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부러운 능력인가.
그런데 이처럼 ‘환상적’인 시간여행에도 큰 제약이 따른다. 어느 날 팀은 여느 때처럼 시간여행을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자신의 자녀의 모습이 바뀌어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시간여행 중 변수가 작용하여 자녀가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시간여행에 대한 팀의 관점이 변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시간여행이라는 ‘환상적’인 능력보다는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로서의 가족이 더 소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어바웃 타임》은 시간여행 모티프를 통해 유일무이하고 대체불가능한 가족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데프콘의 노래 《힙합유치원》의 가사처럼, 자녀에게 “넘버 원(일등)”이 되라고 말하기보다, “온리 원”이어서 고맙다는 말을 건네 보자.
패션디자이너는 한 해를 열두 계절로 나누어 작품을 기획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날씨의 영향을 받는 업계 종사자가 아니더라도 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 나는 가을 특히 낙엽이 지는 늦가을을 타는 편이다. 대략 10월 말에서 11월까지는 평소보다 좀 더 고독해지려는 경향이 있는데 공원이나 가로수길의 벤치에 홀로 앉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곤 한다.
가을은 열매를 맺고 수확의 풍성함을 전하지만 이내 스러짐의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이 아닐까? 상승과 하강을 빠르게 겪으면 우리의 정서는 차분해지고 유행하는 것보다는 잘 변하지 않는 것에 관심이 가는 듯하다. 봄이나 여름에 비해 신간보다는 스테디셀러나 인문 고전을 펼치게 되고 평소에는 뜸하게 찾던 클래식을 먼저 듣게 된다. 올가을에는 벤치에서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다가 지루해지면 베토벤의 음악을 틀 것이다.
클래식 초심자라도 베토벤의 ‘영웅’(3번), ‘운명’(5번), ‘전원’(6번), ‘합창’(9번)처럼 후대인이 제목을 붙인 곡들은 일부라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특별히 베토벤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5~6년 전 가을 클래식 해설가로 꽤 알려진 어느 피아니스트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나는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곡을 물었고 그는 몇 가지를 추천했는데 그중 교향곡으로는 베토벤 7번, 그 가운데서 4악장을 꼽았다. 우울할 때,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파티를 열 때, 분위기를 좀 더 고조시키고 싶을 때 자신은 빠른 템포의 이 음악을 튼다는 것이다. 헤어진 날 청취했는데 즉시 나는 4악장의 마니아가 되어 버렸다.
▲ 뉴욕 센트럴파크의 베토벤 흉상. 사진=envato elements
요즘 읽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책에 따르면 같은 예술이라도 음악과 미술은 ‘철학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는 그림들을 살펴보자.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물론 어떤 인물을 보고 그린 초상화이다.
초현실주의 작품인 뭉크의 ‘절규’는 어떤가? 노르웨이 오슬로의 어느 언덕에서 친구와 길을 걷던 뭉크는 해 질 녘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죽을 것 같은 피로감을 느끼면서 난간에 기댔다고 한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는데 그때의 상황을 그린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렇다면 뭉크는 실제로 귀를 막고 절규하는 사람을 보았을 수도 있고 자연의 소리를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으며 아니면 환청을 들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회화는 세상 안에서 본 것이나 들은 것을 그대로 혹은 상상력을 가미해서 시각적으로 그려 낸 것이다.
반면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이 세상을 직접 표현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베토벤이 창조한 음은 모델이 되는 인물이나 절규하는 누군가를 표현한 것이 아니다. 음악은 그 배후에 숨겨져 있으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원인이 되는 존재의 목소리를 작곡가가 음으로 옮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음악을 감상하면서 세상의 근원자와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
그리고 음악은 미술과 달리 소재도 형체도 없는 무형으로,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베토벤의 작품은 ‘모나리자’나 ‘절규’처럼 옥션에서 최고가를 경신하면서 판매될 수 없다. ‘모나 리자’를 보기 위해서는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야 하지만 음악은 누군가의 지휘와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의해 그 순간 구현되었다가 사라질 뿐이다. 베토벤이 오선지에 그린 악보는 하나지만 그것이 연주될 때는 그 어느 것도 동일하지 않다.
▲ 사진=envato elements
나는 수년간 베토벤 7번 교향곡 4악장을 들으면서 유튜브의 힘을 실감했다. 이 곡은 무수히 많은 오케스트라가 연주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예전에는 이런 연주를 간접적으로나마 듣기 위해 레코드 가게에서 구매해야 했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으면 한 곡의 여러 버전을 갖춘 클래식 애호가가 되기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유튜브는 많은 공연을 즉시 검색할 수 있게 해 주고 나중에는 굳이 찾지 않아도 알고리즘으로 추천 영상을 지속적으로 올려 준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곡을 정말 수도 없이 듣게 되었다. 어느 필하모닉인지, 지휘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이렇게 음색과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클래식에 대한 이해가 한결 깊어진다. 게다가 나보다 이 곡을 많이 들어 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라는 별로 영양가 없는 자긍심까지 올라오는 건 덤이다.
가을에는 분위기 있는 가요와 팝, 재즈도 어울리지만 그에 더해 클래식 한 곡은 어떨까? 베토벤, 모차르트, 쇼팽, 브람스 등 우리를 근원의 세계로 인도할 명작들을 지휘자가 그리는 아름다운 곡선 아래 수십 명의 연주자가 혼신을 다해 협력하는 모습을 보면 어떤 정서가 올라오는지 느껴 보자.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벤치에 앉을 필요는 없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한 뼘의 손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가수 비비의 ‘밤양갱’ 노래를 커버한 가수들이 곤욕을 치렀다. 유명가수 아이유, 오혁, 박명수 등의 목소리를 입혀 실제 밤양갱 노래를 부른 것처럼 보이는 영상인데, 이 영상들은 딥페이크로 제작돼 수십 만뷰의 조회수를 얻을 만큼 큰 화제가 됐다. 하지만 실제 밤양갱 커버곡은 해당 가수가 부른 것이 아닌, 가상의 목소리로 제작된 딥페이크 영상이었다.
네티즌들은 이에 대해 감쪽같이 속았고 소름이 돋는다는 반응이었다. 숨소리마저 똑같은 AI의 기술에 감탄하는 반면, 저작권이나 불법 도용의 문제로 불쾌감을 표현하는 반응도 있었다. 이처럼 우리 일상에 딥페이크 기술은 실제와 가상을 넘나들며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진짜처럼 감쪽같은 딥페이크 기술
딥페이크란 무엇일까? 딥페이크는 ‘딥러닝(deep learning)’과 ‘페이크(fake)’의 합성어다. 즉 특정 인물의 얼굴이나 목소리 등을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해 영상에 합성해 또 다른 창작물을 만드는 신기술이다. 인공지능 기술로 제작된 가짜 동영상은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유튜브 등 다양한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파되고 유통된다. 인공지능 기술을 기반으로 한 인간 이미지 합성 기술로, 생성적 적대신경망(GAN)이라는 기계학습 기술을 활용해 기존 사진, 영상을 원본에 겹쳐 만드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그렇다면 딥페이크는 일상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현재 딥페이크 기술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딥페이크의 유용성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 또는 범죄나 가짜 창작물 제작을 조장한다며 부정적 입장을 표하는 반대 입장 2가지다. 최근에는 딥페이크 기술의 발전에 따라 범죄나 도용 등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포르노 영상에 유명인이나 일반인의 얼굴을 합성하는 경우도 있어 디지털 성범죄나 디지털 도용 문제의 심각성이 대두되는 상황이다.
▲ 사진=envato elements
딥페이크 악용 범죄로 인한 피해 사례
실제 2022년 1월부터 11월까지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이 2723건으로, 2020년에 비해 5배 이상 증가했다. 유명인사의 경우 딥페이크에 대한 범죄에 더욱 많이 노출돼 있다. 최근에는 연예인 사진을 무단으로 도용해 딥페이크를 이용한 영상을 만들고, SNS에서 도박 방송을 하며 청소년이나 아이들의 온라인 도박사이트 가입을 유인한 일당이 경찰에 체포됐다. 이들은 성인뿐만 아니라 청소년까지 불법 도박사이트 가입을 유인해 3800억 원을 챙겼는데, 딥페이크를 악용해 범죄를 저지른 경우다.
딥페이크는 우리에게 새롭고 놀라운 기술로 다가올 수 있지만 웹사이트나 프로그램 등 인터넷 기술을 활용해 간단한 조작으로도 쉽게 딥페이크를 제작할 수 있어 우려스럽다. 딥페이크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쁜 의도를 품고 범죄나 도용 등 불법을 자행한다면 사회적으로 딥페이크 악용 사례가 크게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종 범죄에 대응하기 위한 사회적 안전망 필요
이에 딥페이크 확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정부와 관련 기관들은 발 빠른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은 ‘과학수사 분야 연구 협력’에 관한 업무 협약을 체결하고, 딥페이크 등 신종 인터넷 범죄들을 제대로 수사하기 위한 기술 연구개발에 앞장섰다. 딥페이크 악용으로 인한 사이버 범죄가 급증하는 가운데 미래 치안의 핵심은 첨단과학 기술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개발하는 데 있다. 딥페이크가 범죄에 악용될 우려가 높은 만큼 향후 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과학적 수사기술을 개발해 치안을 강화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일반인, 유명인사들의 딥페이크 피해 상황을 좌시할 수만은 없다. 기술의 발전은 때로 삶을 편리하게 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존재한다. 딥페이크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법적 제제를 강화하면서도 기술적 대응을 지속해야 한다. 딥페이크 생성 알고리즘의 발전에 따라 검출 기술을 발전시켜 실시간 검출이 가능한 기술을 개발하고, 범죄에 악용되는 딥페이크를 걸러내도록 하는 기술을 하루빨리 개발해 보급해야 한다.
20대 대학생 A씨는 1교시 수업을 위해 서둘러 지하철을 탔다. 평소보다 사람이 조금 많았지만 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10분 후 갑자기 어지럽고 속이 매스껍고 식은땀이 났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걱정이 되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지만 의사는 스트레스와 불안에 의한 반응이라며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라고 했다.
50대 중반의 B씨는 불면증으로 밤이 두렵다. 잠을 자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오히려 정신은 말똥말똥해지고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뒤척이다가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입이 쓰고 단내가 났다. 며칠 전부터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의사 선생님은 최근에 충격적인 일이나 힘든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더니 너무 속을 끓이지 말고 스트레스를 줄이라고 했다.
매일 운동을 하고 몸에 좋다는 것을 다 챙기며 건강에 나쁘다는 것은 입에도 안 대는데 스트레스로 인해 몸과 마음이 아픈 경우가 많다. 스트레스라는 독소를 우리 몸속에 품고 사는 것은 마치 거센 파도 앞에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다.
스트레스란 무엇인가?
스트레스는 사람이 심리적·신체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느끼는 불안과 위협의 감정이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캐나다의 내분비학자 셀리(Selye)는 스트레스를 의학에 처음 적용한 사람이다. 그는 스트레스 요인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질병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보고했다.
스트레스가 심해질 때 생리적 반응으로는 불면증, 근육 경련, 식욕 부진, 극도의 피로, 두통, 위장 장애 등이 있다. 심리적 반응에는 불안, 무기력함, 우울증, 피로, 죄의식 등이 있다. 무의식 중에 나타나는 행동 반응으로는 혀를 깨물거나 손톱을 물어뜯는 행동이 있다.
▲ 사진=envato elements
어린 학생들과 청소년들은 과도한 입시 경쟁으로, 청년들은 높은 결혼 비용과 취업난으로, 30~40세대는 자녀 사교육비와 집값 등의 경제적 문제로, 50~60대 이후 세대는 신체적 질병, 노후 불안, 부부 갈등, 부모 돌봄, 경제적 궁핍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우리 삶에서 스트레스는 본질적으로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생리적 반응이다. 스트레스 반응이 적절하게 작동하면 기억력이 좋아지고 집중력이 향상되어 성취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스트레스 반응이 지나치게 활성화되거나 만성적으로 지속되면 신체와 정신 모두에 다양한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
피터팬 증후군
어떤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을 사고로 잃었다. 어머니는 삶의 의미를 잃고 슬픔에 빠져 그 후 몇 년 동안 앓아누웠다. 그는 6살 난 둘째 아들에게는 무관심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이 방으로 들어오자 죽은 큰아들로 착각하며 “사랑하는 데이비드, 너로구나? 그런데 어떻게 네가?” “오, 나에게는 오직 너밖에 없어.”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망상은 반복됐다.
둘째 아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기 위해 성장을 멈췄다. 그는 어른이 되어서도 키가 150cm밖에 자라지 않았고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다. 스트레스성 왜소 발육증을 앓았던 둘째 아들은 바로 ‘피터팬’의 작가 J. M. 배리였다.
왜 얼룩말은 위궤양이 생기지 않을까?
언제 어디서 맹수들이 덮칠지 모르는 초원에 사는 얼룩말에게 스트레스는 꼭 필요한 생존 기능이다. 얼룩말에게 스트레스는 사자보다 더 빨리 또 더 오래 뛰어 달아날 수 있게 하는 코르티솔과 같은 호르몬을 분출시키는 생리 기능이다. 굶주린 사자에게 쫓길 때 얼룩말의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는 급상승한다. 그리하여 모든 신경과 장기의 기능은 ‘도망’에 집중된다.
하지만 그때뿐이다. 살아남은 얼룩말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햇볕을 쬐고 풀을 뜯는다. ‘아까 왜 그랬을까?’라고 후회하지 않고, 앞으로 닥칠지 모를 사자의 위협에 전전긍긍하거나 불안에 떨지도 않는다.
스탠퍼드 대학의 신경과학자인 사폴스키에 의하면 스트레스는 모든 동물이 가지고 있는 필수 생리 현상이지만 사자에게 쫓기는 얼룩말에게는 위궤양이 생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얼룩말은 죽을 위험에 닥쳤을 때만 스트레스를 받고 스트레스 상황이 종료되면 곧바로 정상 상태로 생리 현상이 돌아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 사진=envato elements
그러나 생각이 많은 인간은 스트레스 상황이 종료되어도 ‘심리적으로’ 그 스트레스 상황을 오래 기억하고 곱씹으며 확대 재생산하여 부정적인 결말을 상상하면서 미리 걱정과 근심을 한다. 그 결과 스트레스에 따른 생리 작용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만성적으로 악화되어 병리적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스트레스 자체는 매우 정상적인 생리 기능이다. 스트레스 호르몬의 반응은 위험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문제는 스트레스가 직접 적으로 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스트레스가 항상 활성화되어 있으면 면역 체계가 무너지면서 질병과 질환에 더 취약한 상태가 된다.
매일 스트레스와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가 얼룩말처럼 단기간에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는 사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고통’이 있음을 인정한다. 오늘의 일은 오늘로 충분하다, ‘조금쯤 모자라거나 비뚤어진 구석이 있다면 내일 다시 하거나 내일 다시 고쳐서 하면 된다.’라고 하는 나태주 시인의 말처럼 너무 잘하려고 애쓰며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통제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자.
둘째는 사자가 보이기 전에는 사자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닥친 상황으로 인한 스트레스만으로도 삶이 버거울 때가 많다. 오늘은 오늘 하루만의 짐만 지는 연습이 필요하다. 오늘의 짐만으로도 무거운데, 어제의 후회를 곱씹으며 되새기고 앞으로 닥칠 걱정과 염려로 내일의 불안의 짐까지 더하면 그 짐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다. 이해인 수녀의 말처럼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한순간씩만 살기로’ 하자.
셋째는 내 몸에서 보내는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삶은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삶이 이어지는 동안 스트레스로부터 탈출하거나 졸업을 할 수 없다. 당뇨나 혈압을 관리하듯이 스트레스를 관리하며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작은 일에도 쉽게 짜증이 나고 화를 참기 어렵다면, 어깨나 목이 뻣뻣하고 머리가 아프고 쉽게 피곤하다면 이는 내 몸이 휴식을 필요로 하다고 보내는 신호이다. 자연의 품에서 기도와 묵상을 하며 쉼을 가져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신앙 공동체나 지지 그룹들과 함께 감사의 이야기를 나누고 봉사와 나눔을 통한 영적 교제하는 것은 쉴 만한 물가에 다다른 것처럼 우리에게 깊은 안식과 위로를 준다.
SW중심대학사업은 10여 년간 대한민국의 소프트웨어 융합 인재 양성을 위한 이정표와 함께 ICT 강국의 면모를 대내외적으로 견고히 해왔다.
2015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MSIT)와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의 주관으로 시작되어 SW 중심의 교육 혁신, 산업 맞춤형 인재 양성, 융합형 인재 배출 및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 강화를 통해 대한민국의 소프트웨어 교육 환경을 구축하였다.
IITP는 2021년부터 중소 대학에 연간 10억 원을 지원하는 특화형을 기획하여 기존의 일반형과 투 트랙으로 운영하고 있다. 특화형은 일반형과 달리 학부생 수가 1만 명 미만인 중소규모 대학을 대상으로 하며, 산업적·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중소 대학의 잠재력을 발굴함으로써 소프트웨어 기반의 대학 특성화 분야 확장을 꾀한 것이다.
SW중심대학사업의 특화형은 특정 도메인(domain)에 집중된 대학들의 역량을 소프트웨어로 융합하기 위한 IITP의 시기 적절한 혁신적 결단이었으며, 참여 대학들은 SW 교육 성과를 지역사회와 산업으로 확장하는 새로운 결과를 양산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대학들이 자력으로 기술적 역량을 지역사회 개발에 지원하던 것을 경쟁 속에서 가속화하는 유인책이 되었으며, 기술 수준을 향상시키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융합 인재 풀(pool)의 구성에도 일조하고 있다.
필자가 소속된 삼육대학교는 특화형 SW중심대학의 원년 멤버로서, 우리 대학의 특성화 분야인 건강과학을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기반으로 제안하여 ‘건강한 지역사회를 위한 SW 건강과학 융합 인재 양성’을 비전으로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본 사업은 교육부로부터 5년간 87억 원의 건강과학 특성화 사업(CK-II)을 수주 및 수행한 이력을 바탕으로 한 정부 사업의 확장과 우리 대학의 장점을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현대화하기 위한 새로운 도전이었다.
우리 대학의 118년에 걸친 고유한 이슈인 건강은 CK-II 사업을 수행한 후 건강과학 특성화 학과로 구현하였으며, 현재 간호학과, 물리치료학과, 보건관리학과, 상담심리학과, 약학과를 중심으로 다수의 인력을 배출하고,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중독, 헬스, 웰니스(wellness), 디지털 치료제 등 다양한 교육을 수행하면서 지역 동반 성장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건강은 삶의 질 향상, 고령화 사회, 만성질환 증가, 디지털 헬스케어 기술 발전, 그리고 사회적 비용 절감 등의 복합적 요소로 인해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있다. 우리 대학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건강과학 융합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SW 전공 교육과 함께 SW 건강과학 연계 전공, 산학협력 건강과학 프로젝트, 국제 학술대회 논문 발표 등을 수행하고 있다.
건강과학 특성화 학부생들은 집중적인 SW 교육과 건강과학 전공 수업을 통해 건강 관련 빅데이터의 수집, 분석 방법을 익히고 인공지능 기술을 적용한 기계 학습을 통해 학부의 이론 수업에 머물지 않고 높은 수준의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우리 대학은 특화형 사업을 통해 발전하는 ICT 기술을 SW 전공 분야뿐만 아니라 인문, 사회, 예체능 분야까지 확대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하였으며, 특히 건강 특성화 분야에 집중함으로써 대학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특화형은 중소 대학이 자신들의 전문 영역을 지역사회 및 산업 분야에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헤게모니를 가질 수 있는 프로젝트이다. 따라서 다양한 대학들이 특화형에 도전하고, 특화형에서 배출한 학부생, 획득한 기술적 역량, 지역사회에 대한 영향, 발전 방향에 대한 축적된 아이디어 등은 대학 및 지역사회의 연계를 위해 유지 및 발전되어야 한다. 즉, 사업 수행으로 축적된 성과는 확대 재생산되어야 지역사회, 대학 그리고 정부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SW중심대학사업이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본 사업을 수행한 대학들의 성과 단절이 없어야 한다. 10년간 수행되어 온 일반형 사업에서 축적된 다양한 성과를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PRIME 또는 PREMIUM과 같은 새로운 상위 사업으로 재구성이 필요하다. 또한, 특화형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대학들의 성과는 일반형으로 도약할 길을 열어준다면 더욱 고도화될 것이다.
이제는 SW중심대학사업에 헤겔의 양질 전환 법칙이 적용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동안 양적으로 축적된 다양한 성과가 사업 고도화를 통해 질적으로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20년 전쯤 채식 동호회에 가입해서 반년 정도 비건(계란, 유제품까지 먹지 않는 채식인)으로 지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동호회 시솝(Sysop·운영자)은 지금 꽤 이름있는 채식 운동가로 활동 중인데 “우리의 음식 취향은 100% 습관에 의한 겁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우리가 만약 미국에서 나고 자랐다면 된장찌개나 청국장을 좋아할 리 없다는 말이다. 반년이 지나 참아왔던 고기를 구워 먹는데 입안이 즐겁다기보다 생경한 느낌이 들었을 때 이 견해가 약간의 진실은 담고 있다고 느꼈다.
채식을 하며 알게 된 어느 분에게 왜 비건이 되었냐고 묻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배가 고플 때 굳이 닭 모가지를 비틀고 털을 뽑아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들어낸 후 기름에 튀겨 먹는 것보다 감자를 삶아 먹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 끔찍한 일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대신해 주더라도 닭보다는 감자를 먹는 선택이 여러모로 나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채식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전공인 철학과 무관하지 않다. 대학원 시절 서양철학, 그 가운데 윤리학을 전공하던 동료들 사이에서 피터 싱어(1946~)의 『동물해방』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는데 우리 사회에서 인권에 이어 동물권이 드디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한 시점이고 그 영향으로 채식주의자로 살겠다는 선언이 이어졌다. 물론 고기를 끊는 게 쉬운 일은 아니어서 대부분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 피터 싱어. 사진=피터 싱어 홈페이지 ⓒ알레타 밴더링
피터 싱어는 20세기는 물론 현대를 대표하는 공리주의자다. 공(功)은 전쟁에서 무슨 ‘공을 세웠다’고 할 때의 공이고, 리(利)는 이익을 의미하니까, 공리주의란 좋은 결과를 추구하는 사조를 말한다. 18세기 때 이 이론을 주창한 제러미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런데 행복은 모두가 바라는 상태이긴 하지만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이고 측정도 쉽지 않아서 싱어는 행복보다 그것의 대척점에 있는 ‘고통’에 주목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그 대상은 인간만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로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강아지만 먹지 않는다고 비윤리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기획으로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분리되어 근육 없는 부드러운 육질을 위해 4개월간 움직일 수 없는 우리에 갇힌 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송아지의 고통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럼 이런 동물 해방 운동에 동참하고 싶다면 모두 싱어처럼 비건이 되어야 할까? 좋은 결정일 수도 있으나 다음 사례를 보고 좀 더 생각해 보자.
사람 살기도 바쁘고 힘든 세상에서 동물까지 신경 쓰는 비건인들 사이에 회자되는 유명한 에피소드 중 하나로 모 패스트푸드사의 감자튀김 사건이 있다. 이 회사는 감자를 식물성 기름으로 튀긴다고 광고해 왔고 채식인들 중에는 이 회사의 감튀와 콜라만 먹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유럽의 채식인들 사이에 이곳 감자튀김의 맛이 너무 고소해서 이상하다는 의견이 조금씩 올라왔고 결국 이들은 이 기름이 식물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본사 앞에서 시위가 이어졌고 결국 이 회사는 사실과 다른 광고를 한 것에 대해서 공식 사과했다(이후 지금까지 동물성 기름을 쓰고 있고 비건인들은 발길을 끊었다.)
▲ 사진=envato elements
내가 사적으로 경험한 에피소드도 있다. 한 채식인과 만날 일이 있어서 단골 파스타집으로 초대를 했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집이 아니면 믿을 수 없다고 우려를 표했지만 비건식으로 나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킨 후 요리를 하는 사장님에게 토마토파스타를 100% 채식으로 만들어 달라고 몇 번이고 당부했다. 그런데 그녀는 식사 중에 맛이 조금 이상하다며 포크를 놓더니 혹시 고기 재료가 들어간 게 아닌지 확인해 달라고 요구했다. 주방에 가서 물어보니 뭐가 문제인지 고심하던 사장님이 눈이 커지더니 말했다. “면을 육수에 삶았어요!” 그녀는 식사를 중단하고 음료만 다시 주문했다.
위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집에서 은둔하지 않는 한 고기를 먹지 않는 식생활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쉽지 않고, 특히 우유와 계란까지 끊는 일은 보통 사람들에게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수 있다. 보통의 빵에는 우유나 버터가 들어가고, 보통의 김밥에는 햄이나 어묵이 들어가고, 보통의 탕이나 찌개에는 멸치나 고기로 우린 육수가 들어가니 말이다. 서툰 요리에 맛없는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며 숨어서 밥을 먹다가 결국 지구와 동물을 살리겠다는 거창한 꿈은 그치게 된다.
6개월간 비건으로 살다가 그친 나는 어떤 식생활을 추구하고 있을까? 단식하던 사람이 더 무섭게 먹어 치우게 되는 현상처럼 고기를 더 밝히는 생활로 돌아갔을까? 그렇지는 않다. 나는 여전히 피터 싱어의 주장에 꽤 공감하고 고기 위주가 아닌 채식 위주의 식생활이 여러모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야채 없이 밥과 고기만 제공되는 식사보다는 차라리 비건식을 더 선호하며 친구들과 고깃집에 가서 쌈에 밥과 고기 한 점 넣어 먹는 불리한 태도로도 계산할 때 N분의 일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 정도는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