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8.15 특집] ‘항일 신앙유산 증거’ 적목리 바위구멍 실물 전시

2025.08.15 조회수 107 커뮤니케이션팀

현존하는 일제강점기 신앙공동체 유일 유적지…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 지난 1일, 이종근 삼육대 명예박물관장(오른쪽)과 이상기 적목리 이장이 ‘작은 바위’를 적목리 유적지 현장으로 옮긴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난 1일, 삼육대 명예박물관장 이종근 교수가 일제강점기 적목리 인근에서 벌목 작업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바위를 적목리 유적지 현장으로 옮긴 뒤 기념 촬영을 했다.

적목리 바위구멍은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논의돼 온 ‘적목리 신앙공동체 아랫장소’와 경춘철도 가평출장소 존재를 입증하는 뜻깊은 유물이다.

지난해 삼육대 개교 118주년 기념 적목리 공동체 기념식에서 처음 발견된 이후 각고의 수고 끝에 현재까지 23개가 확인됐으며, 이 중 특수한 형태의 작은 바위와 파편을 계곡 밖으로 옮겨 실물 전시하게 됐다. (관련기사▷개교 118주년 맞아 ‘적목리 신앙공동체’ 기념행사)

이 바위구멍은 적목리 공동체 구성원들이 경춘철도 가평출장소의 하청을 받아 벌목한 나무를 뗏목으로 묶어 물에 띄울 때, 댐이나 보의 철제 막대를 고정하기 위해 계곡 바위에 뚫은 인공 구멍이다.

▲ 적목리 계곡 상류에서 떠내려온 ‘작은 바위’. 80여 년간 격류에 마모된 채 지난해 11월 7일 발견됐다. 사진은 당시 이종근 명예관장이 이를 확인하는 모습이다. 바위는 지난 7월 가평 지역 폭우가 나기 전 계곡 밖으로 옮겨졌다.

이홍교 옹의 바위구멍 이야기는 적목리 공동체를 한국 재림교회에 처음 소개한 신태복 장로와 주민 임오준 옹의 증언으로 뒷받침됐으며, 경춘철도 가평출장소가 조성한 바위구멍의 실물 발견으로 확증됐다.

당시 바위구멍 댐의 물을 갑자기 터뜨려 목재를 뗏목으로 운반하던 중, 불어난 물에 적목리 용수동의 한 처녀가 빨래를 하다 희생되는 사고가 있었다. 이 처녀는 이상기 이장의 친형인 이상열 씨(82세, 장로교 은퇴목사)의 친구였던 안용환 씨의 누나였으며, 당시 이상기 이장의 큰집과 작은집도 모두 같은 동네에 있었다. 이 내용은 증언과 현장 조사, 다양한 관계자들의 기억을 통해 입증된 사실로 평가된다.

현재 적목리 계곡 상류의 큰 바위 위에도 바위구멍이 남아 있으나, 최근 기록적인 폭우로 일부 작은 바위와 파편이 유실되거나 훼손될 위험이 있어 안전하게 반출됐다. 이를 위해 이상기 적목리 이장이 힘을 보탰으며, 가평군 문화과 담당관 역시 귀중한 유물 보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계곡은 깊고 험준해 전문가 도움 없이는 탐사가 어렵다. 현재 옮겨진 작은 바위는 적목리 공동체 아랫장소 안내표지판 옆에 전시돼 있으며, 파편은 삼육대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이번에 옮겨진 유물은 적목리 공동체와 경춘철도 가평출장소의 역사성을 입증하며, 일제의 자원 수탈과 만행을 증언하는 생활유적이다.

▲ 작은 바위 주변에서 채집된 파편. 한 뼘보다 조금 더 긴 길이다. 계곡 급류로 마모된 흔적이 뚜렷하다. 현재 삼육대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적목리 공동체는 일제강점기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산 1-28 일대에 조성된 집단 생활공동체다. 한국 재림교회 신자들이 종교 탄압과 징병·징용, 신사참배, 창씨개명, 정신대 동원 등 압박을 피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 신앙과 민족의식을 지키며 공동생활을 했다.

일제 말기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교회 해산을 거부한 최태현 목사가 순교했다. 1943년 9월, 반내현 목사와 신태식 목사를 비롯한 선발대가 험준한 산악 지대인 적목리에 정착했고, 이후 전국 각지에서 신앙 동료들이 합류했다.

이들은 감시를 피해 계곡 주변에 움집을 짓고 벌목과 산나물 채취로 생계를 이어가며, 새벽기도·예배·성경 공부를 꾸준히 이어갔다. 극심한 가난과 고난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신앙을 지켰고, 종교·출신·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를 환영했다.

▲ 지난해 11월 1일 삼육대와 삼육대박물관은 경기도 가평군 소재 적목리 신앙공동체 유적지에서 ‘적목리 가는 길 – 신앙과 애국의 여정’이라는 주제로 기념행사를 열었다. 참석자 단체 사진

전문가들은 적목리 공동체가 비폭력 신앙적 항일의 독특한 사례를 보여주며,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우리말과 글을 지킨 점, 공동체적 자급자족과 상생으로 극한 상황을 견뎌낸 점, 신앙 자유를 끝까지 지켜낸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입을 모은다.

이 공동체는 외부의 도움 없이 신앙과 민족애를 바탕으로 일상적 항일을 실천했다. 단순한 은신처가 아니라, 일제 패망을 확신하며 지도자들이 전국을 돌며 전도와 민족계몽에 힘썼다. 현재 적목리 공동체는 가평군 향토유적 제13-1, 2호로 지정돼 있다.

폭압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전한 이들은 신앙·애국·자유의 상징으로, 재림교회사 연구자들은 이들을 ‘한국교회의 왈덴스 교도들’에 비유한다. 그들의 역사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절대 폭력에 저항한 카타콤·왈덴스 유적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적목리 공동체의 기록은 오늘날 신앙과 공동체의 의미를 일깨우는 소중한 역사다. 이는 한국재림교회뿐 아니라 민족의 긍지이자 자랑이며, 후대에 전해야 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글 재림신문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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