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육人] 이탈리아의 이방인 유학생…그가 음악을 공부하는 이유
산타 체첼리아 국립음악원에서 유학 중인 김형구(음악학과 05) 동문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1565년에 설립돼 45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이 음악학교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역사가 깊은 명문 중의 명문으로 꼽힌다. 소프라노 조수미, 테너 베냐미노 질리,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영화음악가 엔니오 모리꼬네 등 음악계의 숱한 거장들을 배출했다.
특히 이 음악원은 입학시험 난이도가 매우 높기로 유명하다. 3~4수는 기본이고 다른 음악원에 들어갔다가 편입하는 ‘우회로’를 선택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실기와 언어의 장벽이 높아 1350여명의 전교생 중 아시아계 학생은 6%에 불과하다.
음악, 특히 성악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이 음악학교에 올해 초 우리 대학 김형구(음악학과 05학번 성악전공) 동문이 합격했다. 김 동문은 음악인으로서는 경력단절자다. 2010년 음악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음악학과에 진학해 석사 과정을 공부하던 중 우리 대학 교직원으로 입사해 8년 동안 근무했다. 그러다 지난해 초 돌연 사직서를 낸 그는 1년여간의 유학준비 끝에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합격 소식을 알려왔다.
물론 세계적인 음악원 출신이라는 타이틀이 음악가로서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전히 그는 30대 후반의 가난한 이방인 유학생.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버리고 불확실성으로 뛰어든 그의 용기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김 동문을 이메일과 카카오톡 메신저로 만났다.
즐기는 방법을 배운다
Q. 이탈리아는 코로나19 대유행 초기 피해가 컸다고 들었어요. 지금 현지 분위기는 어떤가요?
“작년 12월 처음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하루 확진자가 3만명 가까이 나왔어요. 로마 전 지역이 레드존으로 지정되면서 자가격리 기간을 제외하고도 집에만 약 10일 가까이 갇혀 지냈죠. 그러다 백신이 보급되고 일일 확진자가 1만명 아래로 떨어지면서 봉쇄도 많이 풀리기 시작했어요. 여름 바캉스 시즌부터 백신 접종 완료자에 한해 유럽 간 여행이 허용됐어요. 지금은 유럽 전역에서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주요 관광지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요.”
Q. 코로나인데 수업은 어떻게 진행하나요?
“이론수업은 줌이나 스카이프 등 온라인으로 하고, 실기수업과 레슨은 오프라인으로 하고 있어요. 성악전공자는 무조건 피아노를 배워야 하는데 피아노 레슨이나, 무대연기 수업도 대면으로 하고요. 봉쇄가 조금씩 완화되면서 교양수업도 음악원 강의실에서 오프라인으로 하기 시작했어요. 아마 다음 학기부터는 대부분 수업이 오프라인으로 진행될 것 같아요.”
Q.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성악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인 교수님들께 실기 레슨을 받는 것은 분명 한국에서는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발성, 발음, 표현, 느낌, 제스처, 표정, 걸음걸이 등 아주 세심한 부분까지 훈련을 받아요. 선생님들은 이탈리아어가 모국어이기 때문에 학생이 뜻과 내용을 정확히 알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가사의 의미대로 표현하는지 더 잘 지도할 수 있죠. 한국에서 교수님들께 잘 배웠던 것들이 여기에서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느낌이에요.
또 다른 점이라면 한국에서는 노래할 때 실수하지 않는 부분을 강조해서 배웠다면 이탈리아에서는 노래하다가 혹시 실수하거나 틀려도 즐기는 방법을 배우는 것 같아요.“
Q. 즐기는 방법이요?
“대학시절 실기시험 때 교수님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 너무 긴장되고 떨렸어요. 항상 어떻게 노래를 끝냈는지 모를 정도였고 늘 아쉽고 후회됐던 기억이 많았죠. 산타 체칠리아 첫 실기시험 때였어요. 엄청 긴장한 마음으로 노래를 시작했어요. 얼마나 떨렸겠어요. 그런데 제가 노래할 때 선생님들이 앞에서 같이 노래를 불러주시고, 노래의 내용대로 표정도 지어주셨어요. 떨면서 시작했는데 끝날 때는 저도 모르게 즐기면서 끝이 났어요.
시험 끝나고 코멘트를 여쭸는데 돌아온 대답도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너의 노래를 들으면서 너무 행복했고 멋진 음악을 선물해줘서 고맙다. 본인도 많이 배웠다. 그리고 혹시 스스로 생각하는 부족하거나 아쉬운 부분은 잊어버리라면서 너희는 학생이라고 말씀해 주셨죠. 시험이 끝나고도 행복했어요. 무대를 즐길 수 있는 준비를 이제 막 시작한 기분이 들었어요.“
쌍둥이 성악도
2005년 김형구 동문은 쌍둥이 형인 김원구 동문과 음악학과 성악전공으로 함께 입학했다. 쌍둥이의 동시 입학은 당시 학과에서도 꽤 화젯거리였다. 동생은 테너, 형은 바리톤으로 파트는 달랐지만, 어렸을 때부터 뭐든지 같이 했던 쌍둥이는 학부시절부터 듀오를 이뤄 크고 작은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Q. 대학생활은 어땠나요?
“저와 형 둘 다 졸업할 때까지 김철호 교수님께 배웠어요. 항상 연습실에서 지냈던 기억이 나요. 시골(경북 봉화)에서 올라와 놀거리를 접해보지 못해서 그런지, 수업 이외 시간은 대부분 연습실에서 보냈죠. 형과 음악 이야기하고 서로 소리 들어주고 연습하면서요. 형이랑 여러 교회에 초청돼 찬양할 기회도 많았어요.“
Q. 졸업하면서 취업과 진학 중 고민이 있었을 텐데요.
“졸업연주회 때였어요. 세 곡을 불렀는데 두 번째 노래를 부를 때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어요. 이 무대가 내가 노래하는 마지막 무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간신히 무대를 마쳤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 많은 고민이 있었어요. 일단 삼육대 대학원 음악학과에 진학했어요. 스승이신 김철호 교수님은 늘 유학을 권하셨고요. 과연 내가 유학을 갈 수 있을까, 갈 기회가 있다면 꼭 가고 싶은데, 하는 막연한 마음은 늘 있었어요.“
Q. 그러다가 삼육대 교직원으로 입사했죠.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학과 조교로 일하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보훈대상자 채용 공고가 났어요. 아버지가 국가유공자시거든요. 형이 먼저 입사를 했고, 저는 1년 반 후에 입사했어요. 그런데 입사하고 2달 뒤쯤 미국 미시간대에서 우리 형제를 전액 장학생으로 초청하겠다는 연락이 왔어요. 우리 노래를 사랑해주셨던 분이 노래를 녹화, 녹음한 파일을 대학 측에 제공했던 거였어요. 가장 많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기회를 포기했어요.”
Q. 왜요?
“학자금대출을 받아 학업을 이어왔어요. 등록금과 기숙사비, 생활비를 저희 두 형제가 알아서 마련해왔어요. 졸업 후에는 돈을 벌어서 대출을 갚아야 했고요.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지만, 그때는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어요. 어렵게 공부를 해서 그런지 당장 안정적인 직장에 대한 욕심이 컸고요.”
김 동문은 교직원으로 일하면서 레슨을 받기도 했다. 대학생 때처럼 형과 함께 여러 교회 음악예배 등에 초청돼 찬양하고, 대학에서 정기적으로 올리는 오페라에 동문 팀으로도 여러 번 참여했다.
Q. 취미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유학은 포기했지만, 꿈은 버리지 않았던 건가요?
“노래하는 것이 가장 행복해서 그만둘 수가 없었어요. 하면 할수록 부족함을 느꼈기에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연습하고 계속 공부했어요.”
Q. 직장에 소홀하진 않았나요? 직장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아 딴마음을 품은 건 아닌지.
“절대 그렇지 않아요.(웃음) 소홀한 적 없고 적성에 안 맞지도 않았어요. 일하면서 좋은 처장님, 선생님들께 정말 많이 배웠고, 또 즐거웠어요. 학교 여러 행사에서도 노래를 부르다 보니 직장에서 노래할 기회들도 많았죠.”
Q. 그러다 유학을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어떤 결정적인 계기가 있던 것은 아니었어요.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나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거로 생각하면서 살았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에는 짧은 기간이라도 외국에서 레슨을 받으면서 공부해보고 싶은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어요. 언제부턴가 그런 생각들이 점점 구체화 됐고, 정말 더 늦기 전에 내가 해보고 싶은 거 한번 해봐야겠다는 결심이 생겼어요. 김철호 교수님을 계속 찾아가서 상담하고 조언을 구했어요. 교수님도 이탈리아에서 공부하셨기에 여러 현실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죠.”
성대결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2019년 12월 31일부로 삼육대를 퇴사한 그는 2020년 1월 2일 이탈리아어 학원에 등록하면서 본격적인 유학 준비를 시작했다.
Q. 유학준비 과정은 어땠나요?
“1월부터 7월까지 이탈리아 어학원에 다녔고, 이후에는 개인과외를 받았어요. 정식으로 원서접수를 시작할 때는 준비해야 하는 서류들이 정말 많았어요. 하나라도 빠지면 접수 자체가 안 되기 때문에 긴장의 연속이었어요.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했어요. 노래연습은 기본적으로 많이 했고요.”
Q. 코로나가 변수가 됐나요?
“원래 계획은 6월까지 어학원에 다니고 이탈리아에 갈 계획이었어요. 현지에서 레슨을 받고 언어공부를 하면서 입학준비를 하는 게 좋다는 조언을 많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2월 말부터 이탈리아에 코로나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또 4월부터 대사관을 통해 원서접수가 이뤄져야 하는데 시작이 되지 않았어요. 대사관에 여러 번 물어봐도 이탈리아 교육부에서 아직 전달받은 사항이 없다는 대답뿐이었어요. 코로나 때문에 외국인 신입생을 안 뽑는 음악원이 많을 거라는 얘기도 들려왔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1년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참 힘들었어요.”
Q. 성대결절도 왔었다고요.
“7월쯤 노래할 때 조금 불편한 느낌이 있어서 병원을 찾았는데 성대결절 초기 진단을 받았어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죠. 계획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아내가 옆에서 마음을 다잡는 데 많은 도움을 줬어요.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께서 가장 좋은 때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인도해주실 거라는 말을 해줬어요. 그게 참 힘이 됐어요.”
Q. 입학시험은 어땠나요?
“코로나 사태로 이탈리아의 모든 음악원이 동영상으로 시험을 진행했어요. 제가 입학한 산타 체칠리아는 오페라 아리아로만 구성된 20~25분 분량의 동영상을 요구했어요. 대부분 학생은 좋은 연주홀과 멋진 교회, 성당을 대관해서 좋은 음향 시설에 화려한 연주복을 입고 찍은 영상을 보냈더라고요. 저는 레슨실에서 제 스마트폰으로 찍었는데 그 친구들과 비교했을 때 정말 초라하고 볼품없었죠.”
Q. 8년이나 직장을 다녔으니 음악인으로서는 경력단절자인데. 게다가 늦은 나이에 쟁쟁한 학생들을 제치고 합격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시험곡을 다양한 레퍼토리로 선택했어요. 모차르트, 푸치니, 베르디 곡을 다 넣었어요. 주변에서는 제정신이냐고 했어요. 시험곡이나 오디션 곡은 절대 이렇게 구성하지 않거든요. 같은 테너라도 본인의 소리에 따라 공부하고 불러야 하는 작곡가가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어요. 엄청난 모험이었고 승부수였죠. 하지만 늦은 나이에 도전하는 것인 만큼 뭔가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그리고 정말 많이 기도했어요. 제 노래와 소리를 심사위원들이 좋게 들어주셨던 것 같아요.”
Q. 미국 유학을 포기한 게 결과적으론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유학을 간다면 당연히 성악의 본고장인 이탈리아로 가고 싶었어요. 산타 체칠리아는 늘 꿈꾸던 학교였어요. 어쩌면 그때 미국에 가지 않은 게 저한테는 훨씬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네요.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마친 뒤 미국에 갈 수도 있겠지만, 유학의 시작은 반드시 이탈리아에서 하고 싶었어요. 1년을 공부해보니 왜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시작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아요.”
가슴 뛰는 일
Q. 합격 통보를 받고 퇴사를 한 게 아니라, 직장을 먼저 관두고 유학준비를 시작했어요. 어린 나이도 아니고 결혼까지 했는데 무모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유학준비를 하기 위해 퇴사를 하겠다고 했을 때 응원하는 분보다 만류하는 분들이 더 많았어요. 저에게도 굉장한 도전이었어요. 직장을 그만두는 순간부터 많이 불안했죠. 물론 결과적으로 꿈꾸던 학교에 들어왔지만, 이곳을 졸업한다고 해서 앞날이 보장되거나 탄탄대로가 펼쳐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쩌면 졸업 후 더 고민하고 더 힘든 날들을 보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한번 선택한 일은 결과가 어떻든 절대 뒤돌아보거나 후회하지 않아요. 장점이자 단점인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어떤 일을 했을 때 심장이 뛰는지 알았어요.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지만, 꿈이 있었기에 새롭게 도전할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Q.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조언한다면.
“아직 공부하는 학생이기에 누군가에게 조언해줄 입장은 아니에요.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무슨 일이든지 내가 행복한 일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이 일을 하고 싶은데 현실을 생각하면 아닌 것 같고, 꿈과 현실 사이에서 많이 고민할 거라고 생각해요. 정답은 없어요. 선택과 그 결과는 본인이 책임져야 하지만, 어떤 일을 하든지 행복한 일, 그리고 가슴이 뛰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저는 그걸 선택했습니다.”
Q. 18번(애창곡)은 무엇인가요?
“성악가들에게는 나름대로 자신 있게 부를 수 있는 오페라 아리아나 가곡이 있어요. 저도 그렇고요. 하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찬양입니다. 그중에서도 ‘참 좋으신 주님’이라는 찬양을 정말 좋아해요. 어려움을 겪는 그 당시에는 왜 내가 이런 일을 겪는지, 왜 이런 일을 경험하게 하시는지 절대 알 수 없었지만, 지나고 돌이켜보면 그때 그 일을 겪게 하신 이유와 그 일에 분명 개입하셨음을 알게 될 때가 참 많아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인도하셨던 거구나 하는 생각을 늘 지나고 하게 됩니다.”
“참 좋으신 주님 귀하신 나의 주 늘 가까이 계시니 나 두려움 없네 내 영이 곤할 때 내 맘 낙심될 때 내 품에 안기라 주님 말씀하셨네 광야 같은 세상 주만 의지하며 주의 인도하심 날 강건케 하시며 주의 사랑 안에서 살게 하소서 주만 의지하리 영원토록”
“그냥 모든 것 다 맡기면 책임져 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해서 정말 힘이 되고 힘들 때 부르면 위로가 되는 찬양이에요. 제 삶을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어떤 길로 인도하실진 모르지만, 그냥 맡기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면 책임져 주실 거라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게 되는 찬양입니다.”
Q. 어떤 음악가가 되고 싶나요?
“어떤 음악가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하고 유학을 나오지는 않았어요. 늘 마음에 간직한 말이 있어요. ‘음악을 잘 사용하면 가장 큰 축복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가장 큰 저주가 된다.’ 세계적인 가수가 돼서 세계적인 무대에서 오페라 주역으로 활동하면 정말 행복하겠죠. 하지만 순간일 거예요. 그보다 더 값진 것은 제가 배워서 부르는 이 노래를 통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면 가장 행복할 것 같아요. 제가 음악을 공부하는 이유에요. 그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