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육소개

[삼육 120년 : 공간의 기억] ① 삼육동 최초의 건물 ‘실업관’

2026.03.26 조회수 81 커뮤니케이션팀

흙벽돌 직접 빚어 올린 노작교육의 산실

▲ 실업관 전경

1906년 평안남도 순안에서 태동한 삼육 교육 이념은 1948년 이곳 삼육동에 터를 잡으며 비로소 꽃을 피웠습니다. 개교 120주년을 맞아 브랜드전략본부 커뮤니케이션팀과 박물관이 공동 기획한 [삼육 120년 : 공간의 기억]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캠퍼스 곳곳에 숨겨진 건물의 역사를 발굴하고, 낡은 도면과 빛바랜 사진 속에 잠들어 있던 우리 대학의 뿌리를 다시 깨워 기록하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1948년 7월 현 삼육동 부지 매매계약이 체결된 직후, 8월부터 본격적인 건축이 시작됐다. 당시 캠퍼스에는 사택, 소강당, 교사, 기숙사, 목장 등 건물을 올리는 망치 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완공된 삼육동 최초의 건물이 바로 ‘실업관’이었다.

실업관은 초기 캠퍼스의 심장과도 같았다. 1949년 크리스마스에 이곳 공장에서 생산한 전기로 자가 발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내부에 발전기 등 전기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육동을 밝힌 역사적인 첫 전등 불빛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 셈이다.

약 280평 규모의 이 단층 건물에는 당시 학생과 교직원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 건축 자재를 구입할 재정이 부족했던 탓에, 삼육동의 명물이었던 백토에 백회를 섞어 직접 흙벽돌을 찍어내거나 교내 채석장에서 돌을 캐어 회를 칠하는 방식으로 벽을 올렸다. 실업관을 비롯한 초창기 건물들의 내부가 다소 삐뚤빼뚤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값진 수고의 흔적이다.

▲ 1950년대 실업관 앞에서 제12대 교장 제임스 리(이제명,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선교사와 재학생, 교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부족한 재정 탓에 직접 빚어 올린 흙벽돌의 삐뚤빼뚤한 질감이 사진 속 외벽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사진은 저해상도 원본을 AI 업스케일링 기술로 복원했다.

참고로 당시 돌을 캐던 채석장은 제명호로 오르는 길 우측에 아직 그 자취가 남아있다. 채석으로 파인 공간에 물이 흘러들어 한때 야외 수영장으로 활용되기도 했으나, 낙석 위험 등으로 인해 현재는 생태습지로 보존 중이다.

실업관은 지·영·체(智·靈·體)의 균형진 발달이라는 교육 이념이 실현되는 현장이었다. 당시 학생들은 오전 7시 15분부터 낮 12시 30분까지 학과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실업관과 목장, 농장 등에서 땀 흘려 일하는 ‘노작교육’을 받았다. 이곳은 단순한 작업장을 넘어 목공, 철공, 인쇄, 사진, 전기 등 실물 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진 기술노작 교육의 핵심 터전이었다.

실업관은 삶과 신앙이 어우러진 공간이기도 했다. 고(故) 임정혁 교수는 회고록에서 “밤 예배를 드리는 날이면 목공실 한쪽을 치우고 남포등을 나란히 걸어 놓은 뒤, 벽돌을 고인 널빤지에 앉아 예배를 드렸다”고 회상했다. 교실이자 예배당, 강당이자 사교장의 역할까지 겸한 진정한 다목적 공간이었던 셈이다.

6.25전쟁 당시 지붕과 벽면 곳곳에 새겨진 총탄 자국을 훈장처럼 품은 채, 실업관은 오랜 세월 우리 곁을 묵묵히 지켰다. 이후 자동차 정비과 실습실, 전기부·영선부 사무실 등 캠퍼스의 궂은일을 도맡는 공간으로 쓰이다가, 1999년 제1실습실(현 제1실습관)이 새롭게 지어지기 전까지 대학의 초창기 역사를 증언하며 그 소임을 다했다.

글·자료 최환철(박물관)
기획·편집 하홍준(브랜드전략본부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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