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소식

[파워삼육人] 탈북민 아줌마의 인생역정…’남북한 1호 약사’ 이혜경(약학 02) 동문

2020.07.28 조회수 629 홍보팀
share

[파워삼육人] ‘남북한 1호 약사’ 이혜경(약학 02) 동문

지난 4·15 총선에서 우리나라 헌정 사상 최초로 탈북민 출신 지역구 국회의원이 배출됐다. 이전까지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탈북민은 있었지만, 지역구에서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아 당선된 사례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방인이었던 탈북민이 한국 사회 주류에 진입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았다.

당시 그와 함께 성공한 탈북민 사례로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던 이가 있었으니, ‘남북한 1호 약사’로 불리는 이혜경(56) 약사. 우리 대학 동문이다.

북한의 명문 함흥약대를 졸업하고 12년간 약제사(북한의 약사)로 일하던 그는 2002년 두 딸과 노모를 모시고 탈북해 우리나라에 정착했다. 하지만 북한에서의 경력이 인정되지 않았다. 이후 약사직을 되찾기 위한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일단 학교부터 다시 다녀야 했다. 전국의 모든 약학대학의 문을 두드린 끝에 어렵게 우리 대학 약학과에 편입했다. ‘주독야경’으로 학업과 생계, 양육을 병행하며 졸업했고, 졸업 후에는 3전 4기 끝에 약사시험을 패스했다. 당시 그의 나이 50이었다.

“끊임없는 절망과 좌절의 연속이었고, 끝 모를 터널 같았어요. 그 생활을 내가 어떻게 견뎌낸 건지. 나조차도 믿기 어렵습니다.” 그 불굴의 의지는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경기도 한 소도시 약국에서 만난 이혜경 동문은 오뚝이 같은 자신의 인생역정을 담담하게 길어 올렸다.

전염병 창궐의 기억

이 동문의 약국을 찾은 건 지난 5월 중순. 마스크를 찾는 손님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요일제가 여전히 시행되던 때라 신분증을 확인하고 마스크를 내주는 그의 손이 분주했다. 재고를 문의하는 전화도 걸려왔다.

“‘공산당식 배급제냐’고 불평하는 손님도 있어요. (북한에서 온)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 것 같은데.(웃음) ‘나라에서 국민들한테 골고루 보급하려고 하는 건데 얼마나 좋으냐’고 하니까 아무 말 안 해요. 한 할머니는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고 하길래 ‘그래도 지금은 나만 잘 지키면 되잖아요’ 하니까 ‘맞다’고 해요. 모두가 힘든 시기에요. 나야 마스크 하나 팔면 그만일 수 있지만, 이런 긍정적인 말 한마디가 함께 어려운 시기를 이겨낼 힘이 된다는 생각입니다.”

Q. 북한에서도 전염병 사태를 겪었다고요.

“1994년 10월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콜레라가 전국에 동시다발적으로 창궐했어요. 병원에는 침대가 부족해 판자와 집에서 가져온 침구류로 가설 침상을 설치했어요. 그 침상이 복도에서 병원 정문까지 이어졌죠. 몇 달간 집에서 한숨도 못 잘 정도로 바빴어요.”

Q. 콜레라는 후진국형 전염병으로 알고 있는데요.

“북한에서도 콜레라는 일제시대 때나 있던 병이라고 했어요. 고난의 행군 시기라 식량난에 경제난, 전력난, 의료난이 심각했습니다. 환자들은 쌀뜨물 같은 설사와 복통을 호소했어요. 전해질과 수액보충치료가 기본적으로 필요했는데, 전기와 물 사정이 좋지 않아 수액 수요를 맞추지 못했어요. 영양부실로 인한 체액 소실로 환자들이 하나둘 맥없이 죽어 나갔습니다. 아사자와 병사자가 속출했고 주변이 온통 시체뿐이었어요. 한 마디로 아비규환이었죠.”

Q. 전염병은 언제까지 이어졌나요.

“당국에서는 쉬쉬했어요. 이듬해 가을께야 사태가 외부에 알려져서 유엔에서 항생제와 치료제가 전달됐어요. 수액을 맞고 일어난 환자들이 잊지 않고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했어요. 그때마다 ‘내가 아니라 유엔 약이 당신을 살렸다’고 말하곤 했죠.”

이 동문이 탈북을 결심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약사라는 직업은 북한에서 상당한 엘리트층에 속했지만, 해마다 찾아오는 전염병은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저에겐 두 딸 아이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나도 언젠가 죽겠구나. 죽음을 실감했어요.”

먼저 첫째 딸을 데리고 북을 탈출했다. 이후 둘째 딸을 데리러 재입북했다가 체포돼 6개월간 구금 생활을 하기도 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계기로 기적적으로 풀려난 그는 둘째 딸을 안고 북한을 빠져나왔다. 목숨을 걸고 두 번이나 탈북하며 식구들을 다 모아놓고 보니 이제는 이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녹록지 않은 남한살이의 시작이었다.

무늬뿐인 환희

Q. 한국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풍요롭고 멋진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림의 떡, 무늬뿐인 환희였죠. 내 것이 아니잖아요. 북한에선 부족했어도 내가 할 일이 있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날 필요로 하는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더군요.”

하나원(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에서는 북한에서의 직업을 절대 고집하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새겨줬다. 특히 의사나 약사, 변호사 같은 엘리트 직업 출신은 더더욱 정착에서 멀어질 수 있다고. 나가면 제일 밑바닥부터 무엇이든 가리지 말고 열심히 하는 것이 정착의 지름길이라고 했다.

Q. 어떤 일을 했나요.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일용직 판매사원부터 파출부, 빌딩청소, 슈퍼, 마트 사원, 신문배달, 전단 돌리기, 드라마 엑스트라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어요. 2년간 정신없이 살다 보니 어느 정도 생계는 꾸려지더군요. 그런데 무언가 표현할 수 없는 공허감이 몰려왔어요.”

Q.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나요?

“아이들도 문제였어요. 일하는 동안 애들은 온종일 집에서 TV를 보거나 놀러 다녔어요. 북한에 있다 왔으니 얼마나 즐길 거리가 많았겠어요. 공부할 나이인데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았어요. 아차 싶더군요. 산토끼 잡으려다가 집토끼를 놓치겠구나.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시작했어요.”

이 동문은 경남대 북한대학원(현 북한대학원대)에 입학해 남북한 의료체계를 연구했다. 정계, 사회계, 언론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남한 사회를 알아가고, 북한의 실상을 공유하면서 학계에서 연고를 쌓았다. ‘북한 의료체계 파행화’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고, ‘북한의 보건일꾼 양성정책 연구’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탈북민 출신 여성 박사 2호’ 타이틀도 얻게 됐다.

북한 약제사, 남한 약사에 도전하다

Q. 약사는 어떻게 하게 됐는지.

“지도교수셨던 류길재 통일부 전 장관이 어느 날 절 불렀어요. 다시 약사로 일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요. 당시 파출부 일과 학업을 병행하고 있었어요. 학위를 받더라도 생계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었죠. 기왕 북한에서 하던 일이니 전문 직종을 살리는 게 좋지 않으냐는 거였죠. 탈북 후 한동안 덮어두었던 약사직에 대한 소망이 꿈틀거렸습니다.”

Q. 무엇부터 했나요?

“보건복지부를 찾아가 방법을 물었어요. 그런데 북한 대학 졸업장이 없어서 국가고시 자격을 줄 수 없다고 했어요. 탈북 당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사의 기로였어요. 유학 가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졸업장까지 챙기느냐고 완강히 맞섰지만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죠. 해결책을 물었어요. 한국에서 다시 약대를 졸업하지 않은 이상 어렵다고 했어요.”

이후 약대가 있는 전국 모든 대학 입학처에 자신의 사정이 담긴 이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약사 경력 10년이 넘어도 북한에서 교육받은 당신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회신이 아예 없는 대학도 있었다. 직접 찾아가서 사정해보기도 했지만, 무시와 냉대, 배타가 이어졌다. 그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준 곳이 바로 우리 대학이었다.

약학대학 임동술 교수는 “가장 큰 문제는 학업능력이었다”며 “당시 그의 입학을 두고 교수들끼리도 의견이 갈렸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방하는 우리 대학마저 배척할 순 없었다”고 회상했다. 2004년 3월, 탈북민 최초로 약대 편입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Q. 학교생활은 어땠나요?

“새벽 4시에 일어났어요. 5시까지 신문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애들 밥해 먹이고 등교시켰어요. 7시에는 집을 나와야 2시간 통학 거리인 학교에 도착해 9시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죠.

점심은 안 먹었어요. 첫 학기엔 학생식당에서 라면을 600원에 팔아서 가끔 사 먹을 수 있었는데, 다음 학기에 1000원으로 올랐어요. 한 달이면 2만5000원인데 그 돈이면 애들 용돈을 좀 더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죠. 처음엔 배가 무지 고팠는데 점차 익숙해져서 사탕 몇 개로도 꽤 괜찮아졌어요.(웃음)“

그런 엄마가 안쓰러웠는지 어느새 첫째 딸이 엄마보다 먼저 일어나 밥을 했다. 작은딸도 덩달아 자기 옷까지 다려 입고 엄마를 깨웠다. 그날 아이들을 붙들고 정말 많이 울었다고 했다. 고맙다. 미안하다. 힘들어도 참고 견뎌야 한다. 입을 앙다물고 다시 학교로 향했다.

Q. 학업은 어땠는지.

“사실 공부가 더 힘들었어요. 공부라면 남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자신 있었어요. 그런데 다 때가 있더군요. 40대 아줌마가 상위 1.5% 성적으로 입학한 20대 수재들과 경쟁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죠. 다른 학과에 비해 이수학점이 많았고, 퀴즈(쪽지시험)만 매주 2~3회씩 있었어요. 특히 해부학 수업은 내용 자체도 어려웠지만, 퀴즈를 꼭 아침 8시에 봤어요. 그 시간까지 학교에 도착하려면 그날은 그야말로 죽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Q. 학교생활의 추억도 없을 것 같습니다.

“없어요. 전혀 없어요.(웃음) 그 생활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정말 해낸 게 맞나. 나조차도 믿기 힘들어요.”

Q. 그런 학생을 지도해야 하는 교수님들의 수고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한 번은 F학점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김경제 교수님 수업이었어요. 다 포기할 생각으로 연구실을 찾아갔는데 교수님이 ‘참 잘 왔다. 안아주고 싶었다’면서 당신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미국 박사학위 시절 7개월 내기 아이가 있었대요. 낮에 햄버거집에서 아르바이트할 때는 아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밤에 공부할 때는 책상 옆에 뉘어놓고 공부하셨다고. 그러면서 ‘넌 말만 같을 뿐이지, 다른 나라에 유학 온 거나 다름없다. 넌 할 수 있다. 마더(mother)가 아니냐. Mother is strong! 그게 바로 마더의 힘이야’라고 격려해주셨어요.

다시 정신 차리고 공부할 수 있는 큰 용기가 됐습니다. 학기마다 익명으로 금일봉을 주신 교수님들께도 늦게나마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통일의 꿈

Q. 왜 그렇게 열심히 사셨나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모질게 버틴 건지.

“저는 소명이 있습니다. 어떤 일개인이 아니라, 통일의 역군이라는 생각으로 쉬지 않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살아왔어요. 내가 숨 쉬고 생활하고 활동하는 모든 것이 한반도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다고 믿고 있어요.”

Q. 무슨 말씀인가요.

“탈북민은 그 존재 자체가 ‘작은 통일’입니다. 탈북민의 정착과 남한 사회에서의 성공은 북한 주민들에게 어떠한 메시지가 될 수 있어요. 또 남북한 사회를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북 협력이나 향후 통일 준비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얼마 전 태구민(태영호) 국회의원의 당선은 정파를 초월해 상당히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한국살이가 너무나도 힘들었어요. 탈북민에 대한 사회의 편견, 치열한 자본주의 경쟁, 어느 한순간도 수월하게 넘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12번도 넘게 포기하고 싶었지만, 남한과 북한에서 모두 약학교육을 이수한 사람으로서 한민족 통일의 일익을 담당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버티고 버텼습니다.“

그가 1년 365일 문을 여는 약국을 운영하면서 틈틈이 대한약사회 정책위원과 국제위원, 경기도약사회 통일약료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며 약학 분야에서 남북 간 교류협력 방안을 모색해온 것도 그래서다.

또 ‘새삶’이라는 사단법인을 만들어 탈북 청소년과 여성들의 대모로서 이들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멘토링과 장학사업을 통해 남한 정착을 지원하고 있다. 그는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탈북민 후배들에게 등대가 되어주고 싶다”고도 말했다.

Q. 대한민국에서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끊어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헬조선’이니 ‘흙수저’니 ‘금수저’니 하는 말들이 요즘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신만의 명확한 목표를 세우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부단히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계획한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아이 둘에 연로한 어머니까지 모시고 탈북한 40대 후반의 여성 가장도 해낸 일입니다.

지금 약국을 운영하면서 정부에서 지원받았던 탈북 정착금보다 많은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당하게 납세의 의무와 권리를 이행해가는 것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낍니다. 이런 결실을 맺도록 도와주신 대한민국 정부와 삼육대학교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시리즈 연재]
[파워삼육人] 이방인 간호사로 병원장에 오르기까지, 심은미(간호 83) 동문
[파워삼육人] 탈북민 아줌마의 인생역정…’남북한 1호 약사’ 이혜경(약학 02) 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