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칼럼

[명지원 칼럼] 새 세상에는 국경이 없다

2014.09.02 조회수 4,948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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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원 삼육대 스미스학부대학 교수]

지난해 토론토대학교에서 연구년을 보낸 인연으로 이번 여름에 방학을 이용하여 토론토를 다시 찾았다. 캐나다 원주민 말로 ‘만남의 광장’이라는 의미를 가진 토론토에서 지난해에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으로 기억될 한 분을 만났다. 한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뒤늦게 한글로 글을 쓰고 영문으로 번역하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있는 60대 후반의 여성인 이영화 씨다. 우연히 “A Bird flown to Dr. Won”이라는 6쪽의 영문 에세이를 읽고, 나의 관심 분야 중 하나인 남북한의 역사와 통일 연구에 의미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하여 그녀의 일생을 추적해 보기로 하였다.

가족의 사연을 한인사회에 소개함으로써 남북이산가족들의 이산의 아픔을 위로하고, 분단 조국의 통일을 앞당기는데 힘이 되고 싶다는 말에 손사래를 친다. 간신히 설득하여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영화 씨의 할아버지인 고 원홍구 전 김일성 대학교 교수는 북한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조류학자이다. 1948년에 월남한 원홍구 박사의 아들이자 영화 씨의 삼촌인 원병오 교수 또한 남한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조류학자요 조류학계의 거두이다. 두 사람은 공히 남북한 조류 연구의 학문적 체계를 세운 분으로 인정받고 있다. 영화 씨의 가정사에 우리 민족의 비극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던 해인 1945년 12월에 태어난 영화 씨는 북한 평안남도 덕천의 어느 중고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직하던 할아버지의 네 아들 중 둘째 아들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는 중국에서 흑사병이 극성일 때였는데, 영화 씨의 아버지는 흑사병을 옮기는 야생 쥐의 서식 생태를 연구하기 위해 중국 산간벽지에 들어갔다가 해방을 맞았다. 같이 동행했던 친구의 말에 의하면 산을 내려오던 중 일본인으로 오해를 받아 분노한 중국인들의 보복으로 변을 당하였다. 어머니는 26살에 남편 없이 다섯 째 영화 씨를 낳았다. 그 나이에 아이 다섯을 기르는 며느리를 보다 못한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맡기로 하고, 영화 씨의 어머니를 월남하여 살고 있는 친정으로 보내 새 출발하기를 원하였다. 1948년 8월, 어머니는 세 살짜리 어린 딸만 안내원 등에 업혀 38선을 넘는다. 영화 씨의 큰오빠가 열 살 때였다. 이남에서 자리를 잡는 대로 아이들을 하나씩 데려 오리라 작정하였던 것은 속절없는 것이었다. 그 후 어머니가 재혼하고 이름도 원영화가 이영화로 바뀌게 된다.

서울 중앙여중 재학 시절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삼촌의 이야기를 통하여 할아버지의 존재와 세 명의 삼촌이 남하하여, 그 중 두 분의 삼촌은 국내 대학의 생물학과 교수로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중학교 2학년 때 교내방송대회에 나가 우승을 하고 교내 방송부에서 활동하던 당시, 대이북방송인 국제방송국이 개국되면서 ‘소녀의 일기’라는 프로그램의 MC로 발탁 되어 3년간이나 “서울에 사는 동생 이영화가 이북에 있는 이영희 씨에게 보내는 일기”를 매일 낭독한다. 보안상 이름이 바뀐 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유학시험에 합격한 후, 유학시험 효력 만기 보름을 앞둔 1970년 12월 19일 미국 시카고의 한 대학원으로 단돈 200달러를 들고 향한다. 시카고에 도착하자 여행자에게 잠시 이민 문호를 개방한 캐나다에 정착하기를 권고 받고 일주일 만에 캐나다에 와서 이민 시험을 통과하였다. 운 좋게도 캐나다 입국 며칠 만에 한국어 방송에 영어 자막을 넣는 방송 보조 일을 시작하며 이민 생활을 시작한다.

결혼을 하여 두 아들을 두었고, 이후 보험업, 건강식품점 등을 두루 운영하였으며. 지금은 은퇴할 나이임에도 보험인으로 또 창작 활동으로 바쁘게 지내시는 영화 씨, 한편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할아버지와 삼촌의 한 길 인생이 보여주는 고통의 의미,, 그리고 북한에 아직 살아 있있는 오빠와 언니를 가슴에 담고 있는 영화 씨는 글 쓰는 작업을 통하여 이들 소중한 분들이 그의 삶 속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고 싶다고 한다. 또한 2년 후, 66년 만의 북의 오빠와 언니를 만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1963년 남한의 원병오 박사는 철새의 이동경로를 파악하기 위하여 다리에 일련번호가 새겨진 일본산 알루미늄 링을 달아 날려 보낸다. 강남 갔다 돌아온 새는 서울을 거치지 않고 평양의 근처 서식지로 날아가 그곳에서 원홍구 박사에게 발견된다. 이 새는 이미 원홍구 박사가 ‘북방쇠찌르레기’ 라는 이름을 붙인 새로서, 알루미늄링 제조사에 문의한 결과 이 새를 날려 보낸 이는 남한의 원병오 교수이며, 그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게 된다.

원홍구 박사는 이 사연을 삐라로 만들어 남한으로 날려 보낸다. 1963년 영화 씨가 K대학 생물학과 재학 중인 어느 날, 학과 학생들과 야외 실습을 위해 경기도 광주에 있는 산에 갔을 때, 한 학생이 삐라를 주웠는데 놀랍게도 영화 씨의 할아버지인 원홍구 교수가 막내아들 원병오 교수에게 보낸 편지였다. 마침 그 삐라를 원병오 교수의 제자가 주웠던 것이다. 영화 씨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내 아들 병오 보아라. 나는 너의 이름과 똑같은 동명이인이 있는 것인가라고 의아해했지만, 네가 나의 아들이라고 확신하며 이 글을 쓴다. 아들인 너에게 글을 전할 수 없어 너의 손에 닿기를 바라며 이렇게 하늘로 날려 보낸다. 내가 이북에서 새로운 새를 잡아 이름을 붙였단다. 그런데 너 또한 남한에서 똑같은 새를 잡아 이름을 지어 주었더구나. 물론 이름이 달랐지. 그때 나는 내 아들이 남한에서도 나와 같은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새들은 남북으로 막힘이 없이 자유롭게 날아다니지만 우리에겐 38선이 가로 막혀 있구나. 살아생전 우리가 다시 볼 날이 있기를 바란다.” 원홍구 박사는 그리운 아들을 만나지 못하고 1970년 눈을 감는다.

1989년 지인인 프리랜서 S기자가 평양의 국립묘지를 방문하였을 때, 원홍구 박사의 묘 앞에서 안내원을 통하여 남북의 두 부자의 사연을 듣는다. 캐나다로 돌아온 그는 관련 내용이 담긴 기사와 사진들을 모아 원병오 교수를 찾아 전달하였다.

2010년, 일본을 다녀온 S기자는 영화 씨에게 두 부자의 사연이 실린 일본 내 조총련계 고등학교에서 사용되는 국어 교과서를 전해주었다. ‘쇠찌르레기’라는 제목으로 26쪽 분량의 글이 실려 있었다. 이 글의 저자는 할아버지인 원홍구 박사를 도와 조류 연구에 매진했던 영화 씨의 오빠 원창인 씨의 대학 동창으로 일본에서 활약 중인 임종상이란 작가이다. 영화 씨의 오빠는 이 친구에게 남한에 있는 삼촌 원병오 박사에게 편지를 전해주도록 부탁한다. 이 일은 당시로는 남한 내에서 간첩죄에 해당되는 것이어서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작가가 영화 씨 오빠의 집을 방문했을 때, 서재에 박제된 새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는데, 그 중에도 가장 우아한 자태로 다른 새들과 구별되는 새가 있었다. 이 새가 남북의 두 부자를 연결해주는 깊은 사연이 있는 ‘쇠찌르레기’이란 새였다. 북한은 이 사연을 주제로 1990년 “새” 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하였고, 1992년에는 ‘조선의 조류’라는 기념우표를 발행했는데, 원홍구 박사의 얼굴과 7가지의 새의 그림, 그 밑에는 ‘원홍구 박사에게 날아온 새’, ‘A Bird flown to Dr. Won’ 이라고 인쇄되어 있는 이 우표들은 영화 씨 어머니가 북한 방문 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영화 씨는 ‘쇠찌르레기’라는 글 중의 한 대목이라며 할아버지가 얼마나 새에 관심이 있었고 새를 사랑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어느 날 아침 학교 운동장에서 아침 조회시 한참 훈화를 하는 도중 한 희귀한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당시 훈화를 듣고 있던 딸아이에게 그 새를 따라가도록 큰소리로 외쳤다고 해요. 저에게는 고모가 되는 분이지요. 아침 조회를 서둘러 끝내더니 그 새를 따라가 마침내 둥지를 찾아냈다고. 당시 할아버지는 알려지지 않은 새를 발견하고 그 새들을 관찰하고 보호하는 일 등 새 연구에 몰두하셨는데, 그런 그의 삶의 모습이 그 어떤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한 길만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해요.”

남한과 북한에서 조류 연구의 대표자인 두 부자의 사연이 1990년대 남한에 알려졌을 때, 크게 화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두 부자의 드라마 같은 사연을 접한 국민들은 기쁨과 함께 슬픔을 느꼈다. 한편 영화 씨의 오빠 원원창인 씨는 40년이나 지난 후에야 어머니와 막내 여동생이 캐나다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카나다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며’ 라는 제목의 글을 눈물로 써서 일본의 한 잡지에 사진과 함께 실었다. 자신의 글이 어머니에게 전해지기를 바랐던 것인데 돌고 돌아 영화 씨에게 도착하였다.

1991년과 1992년 캐나다 시민권자인 영화 씨의 어머니는 평양을 방문하여 꿈에 그리던 자녀들을 상봉하였다. 원병오 박사는 2001년 캐나다를 방문하여 영화 씨를 만나고, 이듬해인 2002년에 북한을 방문하여 아버지의 묘소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새는 날개가 있어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고 국경이 없는데…”, 이는 영화 씨가 이십 년 넘게 간직하고 있는 ‘새’ 라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할아버지인 원홍구 박사가 새를 쫓아가다 멈추게 된 38선 앞에서 한 허탈한 독백이다.

반 만 년 역사를 지내온 우리 민족은 전세계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다. 남북한의 분단이 만들어 낸 비극 중에 이보다 그 아픔을 상징하는 예가 있을까. 남과 북이 동강난 허리를 잇고 얼싸 안는 그 날까지 영화 씨와 같이 꿋꿋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이산가족들이 기다림에 지치지 않도록 우리 한인공동체 구성원 하나하나의 위로와 보살핌이 끊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캐나다 한국일보
http://www.koreatimes.net/?mid=kt_opinion&category=1002281&document_srl=1002289
http://www.koreatimes.net/kt_opinion/1003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