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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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우리 사업을 정의하는 장(章) ― 이사야 58장은 이 시대를 위한 기별로 간주되어야 하며, 몇 번이고 반복하여 주어져야 한다.―특별 증언 씨리즈 B, 2호 5

주님은 이사야 58장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 전장(全章)은 가장 중요하다.―교회증언 8권 159.

나는 이사야 58장을 우리 백성에게 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장을 주의 깊이 읽고, 교회 안에 생명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종류의 봉사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라. 복음사업은 우리의 수고로써, 또한 너그럽게 드리는 우리의 재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고통당하는 영혼들을 만나면 그들을 도와 주라. 굶주린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그렇게 함으로 그대는 그리스도의 봉사사업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거룩한 사업은 일종의 자선사업이었다. 우리의 백성들이 어디에서나 이러한 사업의 한 부분을 담당하도록 격려하라.―원고 7, 1908

사업 개요 ― 이사야 58장을 읽어 보라. 30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통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5-11).

이것이 오늘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특별한 사업이다. 우리가 이 사업을 확고하게 추진해 가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기도와 금식은 아무 효력이 없을 것이다. 신성한 의무가 우리 위에 놓여 있다. 우리의 의무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 주님의 생각과 그분의 길은 눈멀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고 믿는 바와,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과는 다르다. 주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 만일 이기심이 마음에 있으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아신다.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성격을 형제 자매들에게 감추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 그분에게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금식이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는 것이다. 그들이 그대를 찾아 오기까지 기다리지 말라. 그들이 그대를 찾아 와서 그들을 위한 안식처를 달라고 간청하는 수고가 그들에게 주어져서는 안 된다. 31 그대가 그들을 찾아내어 그대의 집으로 데려와야 한다. 그대가 그대의 마음으로 그들을 찾아 가야 한다. 그대는 한 손을 위로 뻗쳐 구원을 주는 전능자의 팔을 믿음으로 붙들고 다른 사랑의 손으로는 압제당하는 자들에게 뻗쳐 그들을 구원해 내야 한다. 그대는 한 손으로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면서 다른 손으로 하나님의 손을 굳게 붙들 수 없다.

만일 그대가 이러한 자비와 사랑의 일을 한다면, 그 일이 그대에게 너무 어렵게 될 것 같은가? 그가 실패하여 무거운 짐에 눌리고, 그대의 가족들이 그대의 도움과 영향을 받지 못할 것 같은가? 아,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그대의 순종을 조건으로 하나의 보증을 하심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모든 의문을 주의 깊이 제거해 주셨다. 이 약속에는 가장 꼼꼼하고 주저하는 사람이 열렬히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다(사 58:8). 그분은 약속하신 것에 신실하시다는 것을 믿기만 하라. 하나님께서는 육체적 힘을 새롭게 하실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약속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라(사 58:8). 하나님께서는 그대의 주위에 성벽을 쌓으실 것이다. 그러나 약속은 또한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9). 만일 그대가 멍에와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같을 것이라”(사 58:10, 11) ― 교회증언 2권 33-35.

32 이사야 58장의 이중 개혁 ― 이 말씀(이사야 58장)에 명시된 사업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기를 요구하시는 사업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정하신 사업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옹호하고 하나님의 계명의 무너진 곳을 수보(修補)하는 사업에 고통당하는 인간을 동정하는 사업을 병행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최고의 사랑을 보여야 하며, 불경스런 발에 짓밟힌 그분의 기념일을 높여야 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타락한 인류에게 자비와 긍휼과 가장 부드러운 동정을 나타내야 한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 22:39). 우리는 한 백성으로서 이 사업을 수행해야 한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낸 사랑은 진리를 의미 있게 해주고 힘있게 해준다.―특별 증언 씨리즈 A. 10호, 3, 4

복음의 참된 해석 ―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이기심없는 관심을 보여 줌으로써만 복음의 진리를 실제적으로 증거할 수 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5-17)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니라”(고전 13:13).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단순히 설교하는 일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무식한 자는 계몽을 받아야 하고, 낙심한 자는 용기를 얻어야 하며, 병든 자는 고침을 받아야 한다. 인간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사업에서 그 일부분을 담당하게 되어 있다. 부드럽고 동정적이며 사랑에 넘치는 말로 진리가 증거되어야 한다. 열렬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천사들을 가까이 오게 한다. … 주님께서는 이 사업에서 그대에게 성공을 거두게 하실 것이다. 33 왜냐하면 복음이 실생활에 적용되어 생활화되고 실천될때 그것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육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과 동일한 사업과, 영혼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과 같은 사업이 연합될 때, 복음이 올바르게 해석된다.―리뷰 앤 헤랄드 1902.3.4

권면이 명시되어 있음 ― 나는 이사야 58장에 명시된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일꾼들에 대하여 아무런 염려가 없다. 이 장은 너무나 분명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 사람에게 축복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충분히 주어져 있다. 세째 천사의 기별은 이 사업에서 두 번째 자리에 놓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이 사업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정당한 일을 할 때 진리의 위대한 원칙들을 묻어 버릴 위험이 생길 수 있으며, 사실상 그런 일이 있다. 손이 몸에 관련되듯이 이 사업은 세째 천사의 기별과 관련되어야 한다. 사람들의 영적 필요가 현저하게 채워져야 한다.―서신 24, 1898

우리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사업 ― 내가 우리 모든 교인들과, 모든 참된 선교인들과, 세째 천사의 기별을 믿는 모든 사람과, 안식일에서 그들의 발길을 돌이킨 모든 사람에게 이사야 58장의 기별을 생각하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할 수 없다. 이 장에서 명령한 자선사업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시대에 행하기를 바라시는 사업이다. 우리는 그 기별이 적용될 곳과 그것이 현저하게 성취될 때에 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에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12절)는 말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표가 되고 기념일이 되는 제칠일 안식일은 죄악의 사람에 의하여 바뀌어졌다. 34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 중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특별한 사업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끝이 가까와질수록 이 사업은 더욱 시급해 진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업을 받아들일 때 다음과 같은 약속이 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라(사 58:8) ― 교회증언 6권 265-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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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순수한 종교의 정의 ― 순수한 종교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순수한 종교란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서 동정과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종교이며 가르쳐야 할 진정한 조항이다. 그들에게 생각을 자신들에게 집중시키지 않도록 가르치고, 인간의 필요와 고난이 있는 곳은 어디나 선교사업을 위한 분야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라.―리뷰 앤 헤랄드 1895.11.12

아버지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한 친절한 말, 자비로운 행동, 부드러운 관심과 같은 선한 행위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맺히기를 요구하시는 열매들이다. 실망과 슬픔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마음으로 동정하고, 궁핍한 자들에게 손으로 봉사하며, 벗은 자들을 입히고, 나그네를 영접하여 그대의 방에 앉히고 그대의 마음의 한 자리를 내어 줄 때, 천사들은 아주 가까이 오게 되고 하늘에서는 화답하는 노래가 울려 퍼진다.―교회증언 2권 25

우리의 경건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 ― 나는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관하여 몇 가지 것들을 보게 되었는데 지금 그것을 기록하는 것이 나의 의무인 것으로 느껴진다.

나는 과부와 고아와 소경과 귀머거리와 절름발이와 그 외에 여러 가지 면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이 당신의 교회와 밀접한 그리스도인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보았다. 36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백성을 시험하고 그들의 진정한 성품을 계발하기 위한 것임을 보았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우리의 동정과 사랑과 사심없는 자선이 필요한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 알기 위하여 주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품을 그렇게 시험하신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경건을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제들을 위하여 하는 일에서 그분께 갚아야 할 사랑과 친절과 관심의 빚을 갚는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형제들과 우리보다 불행한 자들에게 깊은 관심과 이기심없는 사랑을 나타냄으로써 우리가 그분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없는 죄인이었을 때 우리에게 베푸신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감사의 마음을 바로 나타내 보일 수 있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3권 511

그대의 빛이 어떻게 비치는가? ― 마땅히 세상의 빛이 되어 있어야 할 자들이 지금껏 가냘프고 희미한 광선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빛이 무엇인가? 그것은 경건과 양선과 진리와 자비와 사랑이다. 그것은 성품과 생활로써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복음의 적극적 능력은 복음을 믿는 신자들의 개인적 경건에 좌우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각 사람이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될 수 있도록 준비하셨다.―리뷰 앤 헤랄드 1891.3.24

참 종교와 거짓 종교를 구별하는 표 ― 인간과 그의 동료 인간 사이에서 나누어지는 진정한 동정은 하나님의 법을 염두에 두지 않는 자들과 그 법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자들을 구별하는 표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어가는 세상을 위한 희생 제물로 당신의 생명을 주시고자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나타내신 그 동정심은 얼마나 위대한가! 그분의 종교는 참된 의료 선교사업*을 하게 했다. 예수님은 치료하는 능력이셨다. 3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 12:7)고 그분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말은 위대한 진리의 근원되시는 분께서 참 종교와 거짓 종교를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하신 시금석(試金石)이다.―원고, 117, 1903

순결의 시금석이 되는 실제적 동정 ― 사단은 모든 영혼에게 생애의 게임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실제적 동정이 마음의 순결과 이타심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됨을 잘 안다. 그러므로 사단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을 닫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렇게 하여 결국 고통당하는 광경을 보고도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할 것이다. 그는 사랑과 동정을 나타내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일을 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는 유다를 멸망시켰다. 유다는 끊임없이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경우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유다처럼 그리스도께 가까이 지내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와 나누는 우리의 교제가 유다처럼 그분과 하나가 되지 못한 상태라면 또한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바친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동정을 우리의 마음 속에 계발시켜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서 사단의 유혹의 놀림거리가 되었던 유다와 꼭같은 위험에 빠져 있게 된다.

우리는 의에서 처음으로 이탈하는 일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한 번의 범죄, 그리스도의 정신을 나타내는 일에 있어서의 한 번의 소홀이 다른 하나의 길을 열어 주고, 또 하나의 다른 길을 열어 주게 되어 마침내 마음이 원수의 원칙에 압도당하게 된다. 만일 이기심이 계발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능력 외의 어떤 능력으로도 정복할 수 없는, 삼켜 버리는 정욕이 될 것이다.―교회증언 6권 264, 265

순수한 종교는 자비와 사랑의 행동을 함 ― 참된 경건은 행한 일에 의하여 측정된다. 신앙 고백도, 지위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품과 같은 성품만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우리가 전해야 할 증거이다. 38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입장에 계신다면 하실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업을 크게 해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구주를 잘못 대표하며, 거짓된 깃발 아래 서 있는 것이다. …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하나의 감정이 아니고 자비와 사랑의 사업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는 건강과 행복에 필요 불가결하다. 그것은 더럽혀진 영혼의 성전에 들어가서 채찍을 가지고 죄악의 침입자들을 몰아 낸다. 그것이 마음 속에서 자리를 잡을 때 그것은 모든 것을 바치게 하고, 마음은 의의 태양의 밝은 빛에 비추어진다. 그것은 마음의 창을 하늘로 향하여 열어 줌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햇빛이 들어오게 한다. 그것과 함께 마음의 안정과 평온이 온다.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힘이 증가된다. 왜냐하면 하늘의 분위기가 활기 있고 활동적인 능력으로써 그 영혼을 채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소망으로 우리 안에 자리를 잡게 된다.―리뷰 앤 헤랄드 1901.10.15

자아 부정의 활동을 요구하는 선행을 꾸준히 계속하는 일꾼이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사업이며, 하늘이 미소를 짓는 사업이다. 성실한 사업은 가장 열성적이고 가장 거룩한 것으로 생각되는 예배보다 하나님께 더욱 가납될 만한 일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것이 바로 참된 예배이다. 기도와 권면과 이야기 등은 값싼 열매들이며, 흔히는 나무에 매달아 놓은 열매에 불과하다. 그러나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들을 돌봐 주는 선행에 나타나는 열매들은 좋은 나무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참 열매들이다.―교회증언 2권 24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인가? ―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변덕스런 봉사가 아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은 정서적 발작에서 나오는 경건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진실되고 확고하고 영속적인 원칙을 위하여 일하기를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만일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마음 속에 거하시면 그분이 성품으로 나타날 것이며, 그 성품은 그리스도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3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나타내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야 한다.―리뷰 앤 헤랄드 1898.1.11

우리는 마치 어떤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자세에서가 아니라, 만일 우리가 그와 유사한 환경에 처해 있다면 어느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할 그런 종류의 그리스도인적 온정과 진심을 보여 주기를 원한다.―서신 68, 1898

선행에 피곤치 말아야 함 ― 다른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수고가 무시되고 외관상 헛수고가 되어 버리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우리가 선행에서 피곤해 져야 할 구실이 될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돌보시던 나무에 열매를 찾으러 오셨으나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발견치 못한 때가 얼마나 흔했던가! 우리는 최선을 다한 노력의 결과를 보고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무관심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어서는 안 된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 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삿 5:23).―교회증언 3권 525

남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것임 ― 나에게 보여진 바에 의하면, 안식일 준수자들은 그들의 부가 증가됨에 따라 그들의 이기심도 더욱 자라난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점점 감소되어 가고 있다. 그들은 궁핍한 자들의 필요를 알지 못하고,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가난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들을 등한히 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소홀히 하는 것이며, 할 수 있는 대로 가난한 자들의 필요와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일임을 깨닫지 못한다. …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1-46).

40 예수님은 여기서 당신 스스로를 고통당하는 당신의 백성들과 동일시하신다. 배고프고 목마른 자는 바로 나였다. 나그네된 자는 바로 나였다. 벗은 자는 곧 나였다. 병든 자도 바로 나였다. 갇힌 자도 바로 나였다. 그대들이 풍성한 식탁에서 음식을 즐기고 있을 때 나는 그대들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움막과 거리에서 굶주리고 있었다. 그대가 나를 외면한 채 문을 닫아 버렸을 때, 잘 치장된 그대의 방들은 비어 있었으나 나는 머리 둘 곳도 없었다. 그대의 옷장은 바꾸어 입을 여러 가지 옷들로 가득했고, 궁핍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던 재정은 쓸데없이 낭비되었다. 나는 편안한 옷이 부족했다. 그대가 건강을 즐기고 있을 때 나는 병들어 있었다. 불운(不運)이 나를 감옥에 들어가게 하고, 차꼬가 나를 결박하고, 나의 심령을 저상하게 하고, 자유와 희망을 빼앗아 갔을 때, 그대는 목적없이 자유로이 방황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고난받은 당신의 제자들을 참으로 동일하게 표현하고 계시지 않는가? 그분은 그들의 환경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신다. 예수님은 감옥에서 고생하는 사람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신다. 이기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여,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을 소홀히 하는 것이 바로 그들 속에 계신 예수님을 소홀히 하는 것임을 생각하라.

크게 공언하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자신에 대한 사랑과 이기심에 묻혀 있으므로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바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41 그들은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만을 위하여 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희생하고, 다른 사람들을 유리하게 해 주기 위하여 자기들이 손해 보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 밖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것을 그들에게 요구하신다는 것을 그들은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자아가 그들의 우상이다. 귀중한 주일과 달과 해가 영원히 흘러가고 있지만, 그들은 친절한 행동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희생과, 주린 자를 먹이고, 벗은 자를 입히고, 나그네를 영접한 기록을 하늘에 보관하고 있지 않다. 위험을 무릅쓰고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은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다. 만일 그들의 자금을 나누어 받고자 한 모든 사람들이 도와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들은 그런 방면에서 어떤 일을 할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을 모험적으로 하는 데 가치가 있다. 우리는 우연히 천사들을 대접할지도 모른다.―교회증언 2권 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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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참된 종교의 본질이 예시됨 ―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가운데서 그리스도는 참 종교가 제도나 신조나 의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다른 사람에게 최대의 선을 베풀고 진정한 선으로 사랑하는 행위를 이루는 데 있다는 것을 보이셨다. … 이 교훈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당시보다 오늘날 더욱 필요하다. 이기심과 냉정한 형식주의는 사랑의 불길을 거의 꺼 버렸으며 품성을 향기롭게 할 은혜를 쫓아 버렸다. 그리스도인임을 공언하는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대표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이가 많다. 가족이나 이웃 사이에서, 교회에서나 또 어디에 있든지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간에 남의 유익을 위하여 자아를 희생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시대의 소망 2권 301, 308, 309

내 이웃이 누구오니까? ― 유대인 중에서 “내 이웃이 누구오니까?” 라는 문제가 끝없는 논의의 원인이 되었다. 저들은 이방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은 문제로 삼지도 아니하였다. 이들은 외인이요 원수였다. 그러나 저희의 같은 나라 사람들 사이와 계급이 다른 사람들 사이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제사장과 “랍비”와 장로들은 누구를 이웃으로 생각하여야 할 것인가? 저들은 저희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의식을 거행하는 일로 저희의 생애를 보냈다. 무식하고 침착성이 없는 사람들과 접촉하면 더럽힘을 받는다고 하고, 이것을 제거함에는 많은 수고를 들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43 저들은 이 “부정한 자”들을 이웃으로 여기고 있었던가?

그리스도께서는 이 문제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로써 대답하셨다. 그는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은 다만 우리가 속한 교회의 교인이나 우리와 믿음을 같이하는 사람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셨다. 그것은 인종이나, 피부색, 또는 계급적 차별과도 관계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나 우리의 도움이 요구되는 사람이다. 우리의 이웃은 역경으로 말미암아 매를 맞고 상함을 받은 모든 사람을 말한다. 우리의 이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모든 사람이다.―실물교훈 393

비유로써 예시됨 ― 그리스도께서는 큰 무리를 대상으로 말씀하시고 계셨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정죄할 어떤 구실을 그분의 입술에서 찾아내기를 바란 나머지 한 율법사를 보내어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그분께 질문하게 하였다(눅 10:25).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의 마음을 펼쳐진 책처럼 읽으시고 질문하는 사람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 10:26)고 반문하셨다.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그리스도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28절)고 말씀하셨다. 그 율법사는 자신의 대답으로 자기 자신을 정죄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29절)라고 질문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청중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한 사건을 이야기하심으로써 이 질문에 대답하셨다.―원고 117, 1903

그분께서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눅 10:30)고 말씀하셨다.

44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사람들은 유대의 광야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길은 황무하고 돌이 많은 산골짜기 길이었고 거기에는 때로 강도가 출몰하여 포악한 사건이 발생하곤 하였다. 이야기 가운데 한 사람이 습격을 당하여 귀중품을 빼앗기고 거의 죽게 되어 길 가에 넘어졌던 곳은 바로 이러한 길이었다. 그가 이렇게 넘어져 있을 때에 한 제사장이 그 길로 왔다. 그는 매를 맞아 상처를 입고 피투성이가 되어 넘어진 한 사람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아니하고 떠나갔다. 다음에는 한 레위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무슨 일이 생겼는가 하는 호기심에서 발을 멈추고 그 강도 만난 사람을 자세히 보았다. 그는 자기가 마땅히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을 알았으나 그 일은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차라리 그리로 오지 않았더면 그 상처당한 사람을 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 일이 자기에게 아무 관계될 문제가 아니라고 스스로 자기에게 말하면서 그도 또한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같은 길로 지나가던 사마리아 사람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는 다른 사람들이 거절한 일을 몸소 행하였다. 즉 그는 친절하게 그 상처 입은 한 사람을 구호하였다. 그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하였다.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은 다 신앙이 깊은 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이었으나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가 참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나타내 보였다. 그 일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그러한 것처럼 사마리아인에게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정신과 행실에 있어서 그 자신이 하나님과 일치되어야 할 것임을 증거하였다.

45 그리스도께서 이 교훈을 주시는 가운데 율법의 원칙을 직접적으로 고조하는 동시에 그 청중들에게 저희가 이 원칙들을 실행하는 일에 등한히 하였음을 지적하셨다. 그의 말씀은 너무도 분명하고 노골적이었으므로 청중들은 책잡을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율법사는 그리스도의 교훈 가운데서 하나도 비평할 조건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편견은 없어졌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민족적 편견을 타파하지 못하였으므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명사를 써서 명예를 그에게 돌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하고 물었을 때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도움이 요구되는 자들에게 그와 같은 부드러운 친절로 대하라. 그렇게 함으로 그대는 율법을 완전히 지킨다는 것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실물교훈 397, 398

도움이 요구되는 사람은 누구나 우리의 이웃임 ― 우리의 동정과 우리의 친절한 봉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나 우리의 이웃이다. 고통당하고 빈곤한 모든 부류의 사람들은 우리의 이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필요가 알려지면 가능한 한 그들을 구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교회증언 4권 226, 227

동료들에 대한 인간의 의무는 이 비유에 의하여 영원히 해결되었다. 우리는 고통당하는 모든 경우를 돌봐 주어야 하며, 또한 바로 우리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곤궁한 자를 구제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 자기들의 친척과 친구와, 자기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깊은 애정을 나타내면서도, 부드러운 동정이 필요한 자들과, 친절과 사랑이 요구되는 자들에게는 친절과 이해심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간절한 마음으로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하고 물어 보자. 우리의 이웃은 단순히 우리의 동료나 특별한 친구들만이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우리의 교회에 속한 자나 우리와 생각을 같이 하는 자들만이 아니다. 46 우리의 이웃은 전 인간 가족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더욱 그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실천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실제로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리뷰 앤 헤랄드 1895.1.1

참된 종교가 잘못 전해 짐 ―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성전 예배에 참석하였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 예배에 참석하는 일은 크고 고상한 특권이었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저희가 이렇게 높임을 받는 사람인고로 알지도 못하는 길가의 봉변당한 사람을 봉사하여 주는 일은 저희의 위신을 떨어지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저희는 하나님께서 저희로 동포들에게 복을 끼치는 하나님의 대표자가 되게하는 이 특별한 기회를 등한히 하였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이와 같은 과오를 범하고 있다. 저들은 저희의 의무를 뚜렷이 다른 두 종류로 구별하나니 그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조절될 큰 일들이고 다른 하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소위 작은 일들인데 이 명령이 무시를 당한다. 이러한 범위의 일들은 사람의 돌아가는 대로의 기분에 맡겨 둔 바되어 그 생기는 충동과 기분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리하여 그 성품은 훼손되고 그리스도교는 오해를 받게 된다.

고난에 처한 사람들을 봉사하는 일은 저희의 위엄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은 심령의 성전이 황폐된 사람들을 무관심과 멸시의 눈으로 본다. 또 어떤 이들은 이와 다른 동기로써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다. 저희는 그리스도의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믿으면서 어떤 가치있는 사업을 하려고 애쓴다. 저희의 생각에는 저희는 선한 사업을 하고있는 사람인고로 궁핍하고 곤경에 처하여 있는 사람들은 돌볼 여가가 없다고 생각한다. 47 그들은 소위 큰 사업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심지어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것까지라도 거리끼지 않는다. 저들은 가난한 자들을 곤란하고 괴로운 처지에 들어가게 하며, 저들의 권리를 빼앗으며, 저들의 요구되는 바를 돌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저희는 저희의 일이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일은 근거있는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실물교훈 400, 401

하나님의 율법의 광범위한 요구 ― 고통당하는 이웃을 구제하여 주지 않고 버려 두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에게 자비와 도움이 필요한 경우를 그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해주시고자 그를 그 길로 이끄셨다. 그러나 그 제사장은 긍휼을 베풀고 선을 행하는 거룩한 직분을 맡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편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의 성품은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 진상을 드러내었다. 그는 가식적으로 긴 기도를 드릴 수 있었지만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을 지킬 수 없었다. 레위인은 상처를 입고 고생하고 있는 자와 같은 동족이었다. 레위인이 그 길을 지날 때 인간의 재난에 그의 마음이 움직일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 보기 위하여 온 하늘이 주시하였다. 그 사람을 보았을 때 그는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유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차라리 그 길로 오지 않음으로써 상처를 입고, 멍이 들고, 옷이 벗겨져, 죽어가고 있는 그 사람, 동료 인간의 도움을 요구하고 있는 그 사람을 보지 않았더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그 일이 자기에게 상관없는 일이며, 그러한 일로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키면서 그 길을 지나쳐 버렸다. 율법의 해석자요, 신성한 직무의 봉사자로 주장하면서도 그는 다른 편으로 가버렸다.

구름기둥 속에서 주님께서는 인간과 짐승에게 자비로운 행동을 할 것에 대하여 특별한 지시를 하셨다. 48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사랑과 우리 이웃에 대한 편견 없는 사랑을 요구하고 있는 동시에 그 율법의 더욱 광범위한 요구는 그들의 필요와 고통을 말로 나타낼 수 없는 말 못하는 짐승에게까지 미친다.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서 그것을 일으킬지니라”(신 22:4).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들의 동료 인간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동물들에게까지 부드러운 동정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안에 거하시면, 그 사람은 고통을 만들기보다는 고통에서 구해 주는 사람이 된다.―리뷰 앤 헤랄드 1895.1.1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이 잊혀짐 ― 그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기들의 냉담한 무관심에 대하여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자비와 친절의 법이 구약에 분명히 밝혀져 있었다. 그들이 냉정하게 지나쳐 버린 그 사람과 같은 처지에 있는 자에게 봉사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사업이었다. 만일 그들이 존중하고 있노라고 주장한 법을 순종하였더면 그들은 이 사람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조상들을 광야로 인도하실 때 그들에게 주신 율법의 원칙을 잊어버렸다. …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이것은 우리 모든 교회들이 이해할 필요가 있는 질문이다. 만일 그 제사장과 레위인이 히브리 경전을 주의 깊이 읽었을 것 같으면 상처 입은 그 사람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원고 117, 1903

영생을 얻는 조건 ― 우리 구주께서는 영생을 얻는 조건에 대하여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상처를 입고 강도에게 약탈당한 그 사람은 우리의 관심과 동정과 애정의 대상이 되는 자들을 나타낸다. 49 만일 우리가 목격하는 빈궁한 자와 불행한 자들을 등한히 하면, 그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우리는 영생의 보증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게 하신 요구에 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류에 대하여 동정과 긍휼의 마음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의 일가 친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십계명 중 여섯 계명이 포함되어 있는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을 범하는 자들임이 판명되었다. 율법 중 한 가지를 범한 자는 모두를 범한 죄가 있다. 사람들의 필요와 고통에 마음을 열지 않는 자들은 십계명의 처음 네 가지 명령에 언급되어 있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서도 그들의 마음을 열지 않을 것이다. 우상들이 마음과 애정을 채우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존경을 받지 못하고, 최상의 통치를 하시지 못한다.―교회증언 3권 524

그대의 기회와 나의 기회 ―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저희 이웃을 사랑하는지의 여부를 보여 줄 기회를 주신다. 하나님과 그의 동료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가난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와, 상처 입는 자와, 죽어가는 자들에게 자비를 보여 주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소홀히 한 일을 착수하여 인간에게 창조주의 도덕적 형상을 회복시켜주기 위하여 노력하라고 호소하신다.―서신 113, 1901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방법 ― 우리가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할 때만 우리는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열매를 맺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유일한 참 열매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면서 걸어가고 일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계속해서 바라보게 된다.―리뷰 앤 헤랄드 1894.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