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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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일치한 의식을 되풀이 하는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참 예배에서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의 영적 능력을 상실하게 되자,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의식과 유전을 첨가함으로 그 부족을 채우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에서 정결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다만 그분의 능력만이 사람들을 범죄에서 지켜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들 스스로의 행위와 종교적 의식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은 의식들에 대한 열성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의롭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망은 세속적으로 위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와 능력을 갈망하였습니다. 그나마도 그들은 자기들의 외관상 경건에 대한 보상으로 그런 것들이 주어지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께서 이 세상에 그분의 나라를 세우고, 위대한 왕으로서 사람들을 통치해 줄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분께서 오심으로 모든 세속적 축복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희망이 실망으로 끝난 것을 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구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60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참 예배를 회복시켜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순결한 마음의 종교, 곧 순결한 생애와 거룩한 품성 속에서 저절로 나타나게 될 종교를 가져다 줄 것이었습니다.

훌륭한 산상설교에서 그분께서는 하나님께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이며,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것이 무엇임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구주의 제자들은 랍비들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그 제자들을 위하여 교훈을 베푸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가르치신 교훈은 또한 우리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동일한 교훈들을 배워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마 5:3)다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죄악적인 형편과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선한 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을 갈망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함이라”(사 57:15).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4). 이 말은 불평과 원망을 하거나, 우울하고 기가 꺾인 표정으로 지내는 사람들에 대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자기의 죄를 후회스럽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을 의미 합니다.

그와같은 사람들을 그분께서는 모두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니라”(렘 31:13)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5).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1:29) 그분께서는 불공평한 대우를 받으셨을 때, 선으로 악을 갚으셨습니다. 61 이와같은 방법으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모본을 남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께서 하신 대로 행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마 5:6) 의는 옳게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는 의의 원칙이 밝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의 모든 계명이 의 “롭다고 말합니다(시 119:172).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모본을 통하여 그 율법을 순종하도록 사람들을 교훈하셨습니다. 율법의 의는 그분의 생애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사상과 말과 행동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같이 되고자 할 때,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심으로 원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를 그분의 생애와 같이, 우리의 행동을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되게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넣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뜻을 즐거운 마음으로 행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좋은 것들을 주기를 기뻐하는 것보다 더욱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주시기를 기뻐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 요”라고 약속하십니다(눅 11:9, 마 7:7). 의에 주리고 목마른 모든 자는 배부를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7).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그들이 받아야 할 것 이상으로 대접해 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대접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긍휼히 여기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 친절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우리들 상호간에 그렇게 행동하라고 교훈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엡 4:32).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현실에 대하여 말로써 공언하는 것보다 우리의 현실이 정말로 어떠하냐 하는데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느냐 하는데는 관심을 갖지 않으십니다. 62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순결은 원하십니다. 마음이 순결하면 우리의 말과 행동이 모두 올바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51:10, 19:14)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9). 온유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는 사람들은 화평케 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와같은 정신은 싸움을 일으키거나, 화를 내게 하는 대답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가정을 행복하게 하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달콤한 평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10),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옥에 갇히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와같은 일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해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어느 곳에서나 그들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그들은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생명과 결코 쇠하지 않을 면류관을 그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도 사랑하는 구주에 관하여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마 5:14)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구에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실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당신의 사랑에 관하여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빛의 역할을 다해야 하였습니다.

어두움을 밝혀 주는 등대의 빛은 배를 항구까지 안전하게 인도해 줍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 어두운 세상을 비추어 줌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하늘의 본향으로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63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그분과 함께 일하도록 요구하십니다.

그와같은 교훈은 그리스도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이상하고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그 교훈들을 여러 번 되풀이하셨습니다. 한 번은 어떤 율법사가 그분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나이다”(눅 10:27)

그리스도께서도 “네 대답이 옳도다 이 일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율법사는 그런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대신에 자기의 이기심에 대하여 변명할 구실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라고 물었습니다(눅 10:29).

제사장들과 랍비들은 이 문제에 관하여 흔히 논쟁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무지한 사람들을 그들의 이웃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그들에게 친절을 나타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논쟁에 가담하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얼마 전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함으로 그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길은 가파르고 바위가 많을 뿐만 아니라, 거칠고 쓸쓸한 지역을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거기서 그 사람은 강도들을 만나서 가지고 있던 소유물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그는 매를 맞아 상처가 난 채 로 죽도록 내버려졌습니다.

그와같은 모양으로 그 사람이 쓰러져 있는 동안, 한 제사장과 그 다음에는 한 레위인이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그길을 통하여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불쌍한 사람을 도와 주기는 커녕 다른 길로 해서 지나가버렸습니다.

65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도록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땅히 예수님과 같이 자비와 동정이 충만한 사람들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냉랭하고 무정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한 사마리아 사람이 가까이 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멸시와 증오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그와같은 사람들에게 유대인들은 한 모금의 물이나 한 조각의 식물도 주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마리아 사람은 그와같은 일들을 생각함으로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강도들이 자기를 지켜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것조차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낯선 사람이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그 사람에게 둘러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포도주를 그에게 마시우고 기름을 그의 상처에 부었습니다. 그는 그 사람을 자기의 짐승에 태우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그를 간호해주었습니다.

이튿날 그는 길을 떠나기 전에 그 사람이 건강을 회복할때까지 필요될 만큼의 돈을 주막의 주인에게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와같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사를 향하여 질문하셨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그러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0:37). 그와같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마치 우리 자신이 대접을 받고자하는 그대로 대접해야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정말로 지킨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친절하고 부드러웠습니다.

상처를 입은 나그네를 돌봐 줌으로, 그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요 하나님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66 왜냐하면 우리가 상호 간에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므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게 됩니다.

친절하고 부드러운 마음은 이 세상의 모든 재물 보다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 선을 행하기 위하여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할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