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로의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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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의 선하심과 자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대표자가 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참된 품성을 우리에게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부드럽고 인자하신 사랑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게 드러내어 보일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요 17:18)다고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요 17:23)을 알게 하옵소서 하셨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그리스도의 편지니”,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후 3:3, 2)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모든 자녀를 통하여 한 편지를 세상에 보내신다. 그대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면 그는 그대들을 한 편지로 그대가 사는 가정과 동리와 거리로 보내신다. 그대들 안에 거하시는 예수께서 당신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마음에 호소하신다. 설혹 저들이 성경을 읽지도 아니하고 또는 그 가운데 기록된 말씀으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지 못하였을지라도, 또는 저들이 하나님의 업적 가운데서 그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였을지라도, 그대들이 예수의 참된 대표자일 것만 같으면 저희가 그대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하심을 얼마만큼 이해하게 되어 그를 사랑하고 섬기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 가는 길에 등불을 비추는 자로 세움을 받았다.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저희에게 비춘 빛을 세상에 반사해야 할 것이다. 저희의 생애와 품성은 다른 사람들이 저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봉사에 대하여 옳은 관념을 가질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

116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표할진대 우리는 그의 봉사가 재미있는 것임을 사실 그대로 나타내게 될 것이다. 우울함과 슬픈 것만을 생각하고 원망과 불평만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생애를 잘못 표시하는 것이 된다. 저들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행복되기를 기뻐하시지 아니하신다는 감상을 주나니 저들은 이 점에 있어서 우리의 하늘 아버지에 대하여 그릇된 증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단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신과 낙망 가운데 빠지게 할 수 있을 때에 크게 기뻐한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불신하며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그의 갈망과 능력을 의심하는 것을 보기를 기뻐한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주께서 당신의 섭리로써 우리를 해롭게 하신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주께서 긍휼과 동정이 없으신 것처럼 나타내는 것은 사단의 하는 일이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사실을 그릇되게 말한다. 그는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대한 그릇된 관념으로 차게 하나니 우리들은 우리 천부께 대한 사실을 깊이 생각하는 대신에 우리의 마음을 사단의 오전(誤傳)하는 말에 기울인다. 하나님을 신뢰치 아니함으로써 또는 그를 원망함으로써 그에게 불경하는 때가 너무도 많다. 사단은 언제나 신앙 생애가 우울한 생애가 되게 하려고 힘쓴다. 그가 신앙 생애가 고생스럽고 어려운 것처럼 보여지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생애 가운데서 신앙에 대하여 이와같이 괴로운 것임을 드러낼 때에는 그는 그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기만을 찬동하는 것이 된다.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많은 사람은 저희의 잘못과 실패와 실망에 대하여 자꾸 생각함으로 저희의 마음이 근심과 낙망으로 가득 차게 된다. 필자가 유럽에 있을 때에 이러한 처지에 있어서 깊은 고민 가운데 빠진 한 자매가 나에게 무슨 위로의 말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보낸 일이 있었다. 내가 그의 편지를 읽는 날 밤에 난 한 꿈을 꾸었는데 그 꿈 가운데 나는 한 동산에 있었고 그 동산의 주인인듯한 사람이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117 나는 꽃을 따며 향기를 맡고 있었는데 그때에 내 옆에 서서 가던 그 자매는 그의 길을 방해하는 보기 싫은 찔레나무에 나의 주의를 이끌었다. 그 자매는 거기서 슬퍼하며 탄식하고 있었다. 그는 안내자를 따라 길로 걸어가지 아니하고 찔레와 가시나무 가운데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아! 이런 아름다운 동산이 가시나무로 하여 면목이 손상되는 것은 가석한 일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그때에 그 안내자는 말하기를 “가시나무는 당신을 상하게 할뿐이니 그것은 상관하지 마시오. 그리고 장미와 백합화와 석죽을 따시오.”라고 하였다.

그대들의 경험 가운데 어떤 명랑한 장면은 없었는가? 그대들은 그대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성신의 감화에 따라 기쁨으로 뛰는 그러한 귀한 기회를 가져본 일은 없는가? 그대의 일생의 경험들을 회고할 때에 거기서 무슨 유쾌한 장면은 찾아볼 수 없는가? 하나님의 허락은 향기로운 꽃과 같이 그대들이 나아가는 길 좌우편에서 자라나지 않는가? 그대들은 그 허락들의 미(美)와 향기로써 그대들의 마음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지 아니할 것인가? 찔레와 가시는 그대들을 상하게 하고 고립케 할 것 뿐이니 만일 그대가 이런 것들만을 꺾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준다고 하면 그대는 그대 자신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저버릴 뿐만 아니라 그대들의 주의에 있는 사람들까지 생명의 길로 걸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되지 않는가? 과거 생애 가운데 모든 불유쾌한 추억들-과거의 불의와 실망-만을 모아 가지고 거기 대하여 이야기하고 거기 대하여 비탄하는 중에 마침내 낙담에 빠지게 되는 일은 현명한 일은 아니다. 낙담된 심령은 흑암으로 가득 차게 되고 또 하나님의 빛이 그 심령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버리고 다른 사람의 길에 암영(暗影)을 던지는 것이다.

11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여 주신 마음에 생각할 명랑한 제목들에 대하여 감사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복된 보증들을 모아 가지고 그것들을 늘 바라보자.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사단의 권세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신성을 인성으로 옷 입으시고 그 아버지의 보좌를 떠나신 것과, 그가 우리를 위하여 승리하심으로 인류에게 하늘 문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알현실(謁見室)을 사람에게 보여 주시는 것과-타락한 인류가 죄로 인하여 빠진 그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사 다시 무한하신 하나님께로 연합하게 하시는 것과, 또 인류가 우리 구주에 대한 신앙을 시험하는 그 시험을 견디고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그의 보좌에 함께 앉기까지 높임을 받는 것-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깊이 묵상하기를 원하시는 제목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의 허락을 믿지 아니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그의 성신을 근심케 하는 것이다. 가령 한 모친이 자기 자녀들의 유익을 도모하고 안락을 주기 위하여 온 생애의 노력을 기울이는데 그 자녀들은 자기 모친이 저희에게 호의(好意)를 가지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항상 그 모친에 대하여 불평만 한다고 하면 그 모친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 자녀들이 모친의 사랑을 의심한다고 하면 그것은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다. 어떤 부모든지 그 자녀들에게 이러한 대우를 받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러면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하신 그의 사랑을 우리가 의심할 때에 우리의 천부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실 것인가? 사도는 기록하기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은 비록 말로는 표시하지 아니할지라도 저희의 행동으로써 “주께서 내게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119 아마 주께서 다른 사람은 사랑하실는지 모르나 나는 사랑하시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는 일은 모두 그대 자신의 심령을 해롭게 하는 것이니 대개 그대가 말하는 의심하는 말마다 사단의 유혹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또 의심하는 말은 그대에게 의심하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하며 봉사하는 천사들로 하여금 슬피 그대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이다. 사단이 그대들을 시험할 때에 그대들은 의심하고 비판하는 말은 한마디라도 말아야 한다. 만일 그대들이 사단의 유혹을 용납하는 문을 열어 놓을 것 같으면 그대의 마음은 불신과 반역적 의심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대들이 그대들의 느끼는 바를 기탄없이 말하여 버린다면 그대들이 말하는 의심마다, 그대 자신에게만 영향이 미치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또한 다른 사람의 생애에도 싹이 나서 열매를 맺게 하는 씨가 되어 그대들의 말의 감화를 소멸시킬 수 없게 될 것이다. 비록 그대들 자신은 사단의 일시적 시험과 올무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는지 모르나 그대들의 감화를 받은 다른 사람들이 말한 그 불신에서 벗어날 수 없을는지 모른다. 그런즉 우리가 언제나 영적 힘과 생기를 주는 그러한 말만을 하는 것이 얼마나 긴요한가!

천사들은 그대들이 하늘에 계신 주께 대하여 세상 사람에게 어떠한 말을 하는지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대들의 담화는 천부 앞에서 그대들을 위하여 중보하시는 자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대들이 친구의 손을 잡고 인사할 때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말이 그대들의 입술에서 나오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생각이 그대들의 마음에서 생겨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그 친구의 생각을 예수에게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다 시험이 있고 또 견디기 어려운 근심과 대항하기 어려운 유혹들이 있다. 그대들의 어려운 사정은 그대들과 같은 연약한 인간에게 말할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기도로써 하나님께 내어 놓을 것이다. 언제든지 의심하고 낙담하는 말은 한마디라도 입밖에 내지 않는 주의(主義)를 세우라. 그대들은 희망을 주고 원기를 돋우는 말로써 다른 사람의 생애를 명랑하게 하고 그들의 노력에 힘을 더하여 주는 데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120 시험에 용감한 마음을 가지고도 시험으로 몹시 괴로운 가운데서 자아(自我)와 더불어 또는 의 세력으로 더불어 싸우는 가운데 거의 기력을 잃어버린 자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힘든 투쟁 중에 있는 자들을 낙담케 하지 말라. 그런 이들에게 저희의 길을 전진할만한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로 원기를 돋우어 주라.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빛이 그대들에게서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롬 14:7)다. 우리가 무의식 중에 끼치는 감화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격려를 받으며 힘을 얻게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낙담하게 되어 그리스도와 진리에서 떠나게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품성에 대하여 그릇된 생각을 가진 자들이 많이 있다. 저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는 온정미와 쾌활성이 결핍하고 엄하고 가혹하고 기뻐하시는 일이 없다고 한다. 모든 신앙상 경험이 이러한 우울한 견해(見害)로 말미암아 악평(惡評)을 받는 경우가 많다.

예수는 울기는 하였으나 웃은 일은 도무지 없다는 말을 흔히 한다. 우리 구주께서는 참으로 슬픔에 처한 자이었으며 비통을 잘 아셨나니, 이는 그가 인류의 모든 우고(憂苦)를 위하여 당신의 마음을 여신 까닭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극기의 생애였나니 비록 고통과 근심으로 그늘졌을지라도 그의 정신은 꺾이지 아니하셨다.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나 원망의 표정이 없고 도리어 항상 안정하고 침착한 표정을 띠셨다. 그의 마음은 생명샘이었고 그는 어디를 가시든지 안정과 화평과 기쁨과 즐거움을 주셨다.

우리 구주께서는 심히 진중(鎭重)하시고 매우 열정적이었으나 조금도 음울하거나 얼굴을 찌푸린 표정이 없으셨다. 구주를 모방하는 자들의 생애는 진실된 목적으로 차게 될 것이고 저들은 개인적 책임을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121 경박함이 없어지고 난잡한 환락(歡樂)과 비열한 농담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는 강과 같은 평강을 준다. 이 종교는 기쁨의 빛을 꺼버리지도 아니하고 유쾌함을 억제하거나 명랑하고 웃는 얼굴을 흐리게 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하심이 아니요 섬기려 하심이니, 그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주관할 때에 우리는 그의 모본을 따르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의 불친절하고 온당치 않은 행위만을 자꾸 생각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것처럼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긍휼을 깊이 생각할 것 같으면 그와 동일한 정신이 흘러나와서 다른 사람에게로 미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과 불완전함을 보지 않을 수 없을지라도 서로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 겸손하고 자기를 의지하지 않는 정신을 길러야 하며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 참으며 동정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모든 인색한 이기심을 없이하고 우리로 하여금 관대하고 너그럽게 할 것이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시 37:3)라고 하였다. “여호와를 의뢰하라” 날마다 그날의 의무가 있는 것이고 그날의 근심과 난문제들이 있나니 우리가 서로 만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어려운 사정과 시험에 대하여 얼마나 입빠르게 말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하고 너무나 많은 공포심을 가지며 또 너무나 무거운 근심되는 말을 함으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우리에게는 우리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시고 급할 때에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를 기뻐하시는 긍휼과 사랑이 많으신 구주가 계시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어떤 이는 항상 염려하고 공연한 근심을 사서 한다. 저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의 표적들로 둘러싸이고 날마다 하나님의 섭리로 주시는 은사를 누리건만 저들은 이러한 현재의 축복을 모르고 지낸다. 122 저들의 마음은 항상 앞으로 오리라고 염려하는 어떤 불유쾌한 것에 대하여 항상 생각한다. 또는 실지로 존재하고 있으나 그다지 크지 않은 어떤 어려운 일이 저희의 눈을 가리워서 마땅히 감사해야 할 여러 가지 축복을 보지 못하게 한다. 저희가 당하는 곤란이 저희 유일한 도움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대신에 도리어 그것이 불안과 불평의 생각을 일으키므로 저희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한다.

우리는 이렇게 믿지 않아도 좋은가? 우리는 어찌하여 감사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신뢰치 않는가? 예수는 우리의 친구이시며 온 하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매일의 생애의 번민과 걱정이 우리 마음을 번민케 하거나 얼굴을 찌푸리게 하지 말게 하라.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면 언제나 우리에게는 성가신 일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다만 번민케 하고 피로(疲勞)케 할뿐이니 우리로 하여금 시험을 견디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걱정은 버려야 한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업무에 있어서 번민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대의 앞길이 점점 암담하여져서 손실을 당할 염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낙담하지 말라. 그대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침착하고 기쁜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들이 사건들을 신중히 처리할 지혜를 얻기 위하여 기도하라. 그리함으로 손해와 재난(災難)을 면하게 하라.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하여 그대로서 할 최선을 다하라. 예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겠다고 허락하셨으나 이것은 우리의 노력이 없이도 될 것은 아니다. 그대들이 그대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대들의 할 수 있는 것을 다한 다음에는 그 결과가 좋든지 나쁘든지 달게 받아들이라.

당신의 백성이 근심에 눌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는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신다. 그는 “너의 앞길에는 위험이 없으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시련과 위험이 있음을 아시고 우리에게 대한 처리를 솔직하게 하신다. 그는 당신의 백성을 죄악 세상에서 떠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저들에게 절대 실족함이 없는 피난처를 가리켜 주신다. 123 당신의 제자들을 위한 당신의 기도는 아버지께서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라는 것이었다. 그는 또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산상 설교를 하시는 가운데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귀중한 교훈을 주셨다. 이 교훈들은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격려가 되게 하기 위함이니 그것은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많은 교훈과 위안이 되는 것이다. 구주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아무 걱정 없이 찬송의 노래를 부르는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저희는 “심지도 않”(마 6:26)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크신 아버지께서는 저들의 필요를 공급하신다. 구주께서 물으시기를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라고 하셨다. 사람과 짐승의 크신 공급자께서는 그 손을 펴사 당신의 모든 피조물에게 공급하여 주신다. 공중의 나는 새도 그의 돌보심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였다. 물론 그는 식물을 새의 주둥이에 떨어뜨리지는 않으시나 저희의 필요한 것을 준비하여 주신다. 새들은 그가 저희를 위하여 흩어 놓은 곡식을 주워 먹어야 한다. 또 새들은 저희의 새둥우리를 지을 재료를 마련하여야 하고 저희 새끼를 먹여야 한다. 저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일하러 나아가나니 이는 “천부께서 기르”(마 6:26)심이다. 그런데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즉 지능을 가지고 신령으로 예배할 수 있는 그대들은 공중의 새보다 더욱 가치가 있지 아니하냐?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시요 우리의 생명의 보존하시는 이시요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자께서 우리가 그를 의지할 때에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지 아니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무성하게 자라서 천부께서 부여하신 아담한 미(美)를 빛내는 들의 꽃들은 인류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124 그는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 6:28)고 말씀하셨다. 이 들의 꽃들의 미와 아담함은 솔로몬의 영화보다도 훨씬 뛰어난다. 예술적 기술을 다하여 만든 가장 화려한 성장(盛裝)이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꽃들의 자연적인 우아(優雅)와 눈부신 미(美)와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30)라고 하셨다. 신령한 예술가이신 하나님께서 하루 동안에 없어지는 단순한 꽃에게도 아름다운 여러 가지 색채로 단장하게 하셨거든 하물며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들을 위하여서야 얼마나 더욱 크게 돌보실 것인가? 이 그리스도의 교훈은 믿음이 없는 자들의 염려하는 생각과 번민과 의심을 책하는 견책이 되는 것이다.

주께서는 당신의 모든 자녀들이 행복되고 화평하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고 하셨다.

의무의 상도(常道)에서 벗어나서 이기적 동기로써 구하는 행복은 편벽된 것이요 변역하기 쉬운 것이요 일시적인 것이니, 그것이 지나가 버리면 심령은 쓸쓸함과 섭섭함으로 차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기쁨과 만족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안전한 길로 걸어가라고 방임되지 아니하였다. 또 그리스도인은 공연한 후회와 실망 가운데 버린바 되지도 아니하였다. 125 만일 우리가 현세의 낙(樂)을 가지지 못하였을지라도 우리는 내세를 바라봄으로 오히려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라도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며 그의 사랑의 빛과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받는 영구적 위안을 누릴 수도 있다. 우리 생애의 매 발걸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되고 복된 평화의 본향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할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우리의 담대함을 버리지 말고 전보다 더욱 굳은 확신을 가지자.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삼상 7:12)으니 그는 또한 끝까지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멸망시키시는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떻게 행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는 기념비를 바라보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인애와 자비-눈물을 씻어 주신 것-을 언제나 새롭게 기억하자. 그리함으로 우리의 나그네 생애의 여생(餘生)을 통하여 우리 앞에 있을 모든 난관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굳세게 하자.

우리는 장차 오는 투쟁에 있어서 새로운 난국(難局)을 내다보지 않을 수는 없으나 장차 있을 일도 이미 지난 일과 같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 33:25). 시험은 우리가 그것을 감당하도록 부여된 힘의 한도를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런즉 우리는 어떤 일이 생길지라도 그 시험을 감당할 힘을 주실 것을 믿고 우리에게 당하는 일을 무엇이든지 착수하자.

그리하면 머지않아서 천국문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들이기 위하여 열리게 될 것이고 영광의 왕의 입술에서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는 큰 음악 소리와 같은 축복이 저희 귀에 들릴 것이다.

126 그 때에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예수께서 저희를 위하여 예비하신 나라로 맞아들임을 받게 될 것이다. 거기서 저희가 사귈 동무들은 이 땅의 비열한 자, 거짓말하는 자, 우상 숭배자, 더러운 자,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닐 것이다. 저희는 사단을 이기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완전한 품성을 형성한 자들로 더불어 교제하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저희를 괴롭게 하는 모든 죄의 습관, 모든 불완전한 것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완전히 제거되고 태양의 광선보다 훨씬 뛰어난 아름답고 광채나는 당신의 영광을 저희에게 나누어 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품성의 완전하심, 즉 도덕적 미(美)가 저들을 통하여 빛날 것이니 그 가치는 이 세상의 외관상 화려보다 훨씬 뛰어날 것이다. 저들은 하나님이 흰 보좌 앞에 허물이 없는 자로 천사의 권위와 특권을 누릴 것이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스러운 유업을 생각할 때에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 비록 그는 가난할지라도 그 자신에게 세상이 도무지 줄 수 없는 부요와 위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죄에서 구속함을 받아 정결케 되고 자기의 온갖 고상한 능력을 하나님께로 바친 그 사람은 지극히 가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회개할 때에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기쁨이 있나니 이 기쁨은 거룩한 승리의 노래로 표시되는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