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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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가버나움의 한 어부의 집에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다. “사람들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났다.” 그러자 베드로의 장모는 일어나서 구주와 그분의 제자들에게 봉사하였다(눅 4:38, 막 1:30, 마 8:15).

그 소식은 신속히 퍼져 갔다. 그 이적은 안식일에 행해졌으므로 사람들은 랍비들을 두려워하여 해가 지기 전에는 치료를 받으러 오지 못했다. 그러나 해가 진 후에 집에서, 상점에서, 시장에서, 그 마을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초라한 오막살이로 몰려왔다. 병자들은 들것에 들려, 지팡이에 의지하여,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힘 없이 비틀거리면서 예수님 앞에 나아왔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사람들은 몰려왔다가 몰려가곤 했다. 내일 그 동일한 치료자를 그들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가버나움에서 그 날의 일과 같은 것을 본적이 없었다. 승리의 음성과 구원의 함성으로 공중은 충만해 졌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환자가 고침을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당신의 일을 멈추셨다. 30 무리들이 떠나 가자 이미 밤은 깊어졌고 시몬의 집은 적막에 싸였다. 지루하고 분주했던 하루는 지나갔고, 예수님께서는 휴식을 찾으셨다. 그러나 도시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에 구주께서는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 하셨다”(막 1:35).

아침 일찍이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예수님께로 와서 가버나움 사람들이 이미 예수님을 찾고 있다고 말하였다. 31 놀랍게도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내가 다른 동리에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눅 4:43)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그 당시에 가버나움에 있던 흥분 상태로 볼 때 그분의 사업의 목적이 상실될 위험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이적을 행하는 사람이나 육체적 질병을 고쳐 주는 사람으로 당신 자신이 주목을 받는 일을 만족히 여기시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사람들에게 그들의 구주로 알려 주고자 노력하고 계셨다. 사람들이 그분을 세속적 나라를 통치할 왕으로 오신 분이라고 열렬히 믿고 있을 때 그분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세속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돌이키고자 열망하셨다. 단순한 세속적 성공은 그분의 사업을 방해할 것이었다.

주의성 없는 무리들의 경탄(驚嘆)은 그분의 마음에 거슬렸다. 그분의 생애에는 자신을 내세우는 주장이 전혀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지위와 재물과 재능에 대하여 돌리는 존경은 인자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사람들이 충성심을 얻거나 존경심을 요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어떤 수단도 예수님께서는 사용치 않으셨다. 그분께서 출생하시기 여러 세기 전에 그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되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사 42:2, 3).

32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까다로운 형식주의와 그들의 예배의 허식과 그들의 자선 행위로써 두드러지게 나타나고자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토론의 주제로 만듦으로 그들의 종교에 대한 열성을 증거하였다. 교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논쟁은 요란하고도 지루하였다. 거리에서 율법을 잘 아는 학자들이 내뱉는 분노한 논쟁의 음성을 듣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생애는 그 모든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 생애에는 시끄러운 논쟁, 허식적인 예배, 칭찬을 받고자 하는 행동 등을 볼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품성 가운데 나타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계시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고자 열망하셨다.

의의 태양께서는 당신의 영광으로 빛나는 화려한 모습을 세상에 나타내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다고 기록되어 있다(호 6:3). 조용하고 부드럽게 새벽 빛은 이 세상에 나타나서 어두움을 몰아내고 세상에 생명을 일깨워 준다.* 그와 마찬가지로 의의 태양께서는 “치료하는 광선을” 가지고 떠오르신다(말 4:2).

33 “내가 붙드는 나의 종,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사 42:1)

“주는 빈핍한 자의 보장이시며 폭풍 중에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사 25:4)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5-7)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흑암으로 그 앞에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사 42:16)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광야와 거기 있는 성읍들과 게달 사람의 거하는 촌락들은 소리를 높이라 셀라의 거민들은 노래하며 산 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선전할지어다”(사 42:10-12).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삼림과 그 가운데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로 자기를 영화롭게 하실 것임이로다”(사 44:23).*

34 헤롯의 감옥에서, 구주의 사업에 관하여 실망과 낭패를 안고 있던 그곳에서, 침례 요한은 사태를 주시하고 기다린 나머지 그의 두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하였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3).

구주께서는 그 제자들의 질문에 즉시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그분의 침묵을 이상히 생각하면서 서 있는 동안, 앓는 사람들이 그분께로 나오고 있었다. 전능하신 치료자의 음성이 귀머거리의 귀를 뚫고 들어갔다. 그분께서 손으로 한 번 만지시면서 말씀하시자, 소경의 눈이 열려 대낮의 빛과 천연계의 모습과 친구들의 얼굴과 구주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분의 음성이 죽어가는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자 그들은 건강하고 활기 찬 모습으로 일어났다. 중풍병 걸리고 사귀 들린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자 그들의 광기(狂氣)는 떠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을 경배하였다. 랍비들에게 불결한 사람들이라고 도외시되어온 가난한 농부들과 노동자들이 그분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영생의 말씀을 들려 주셨다.

35 그와 같이 그 날은 지나가게 되었다. 요한의 제자들은 그 모든 것을 보고 들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로 부르시고, 가서 그들의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6절)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요한의 제자들은 그 기별을 가지고 갔으며,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요한은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회상하였다.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심이라 (사 61:1, 2). 나사렛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야셨다. 그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는 고통당하는 인간의 필요성을 따라 봉사하시는 그분의 사업에 나타났다. 그분의 영광은 우리의 낮은 신분까지 내려오신 그분의 겸손에서 보여졌다.

36 그리스도의 사업은 그분께서 메시야가 되심을 선포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세우시고자 하는 나라가 어떤 성격의 것인지 보여주었다. 요한에게는 광야에 있던 엘리야에게 나타났던 것과 동일한 진리가 계시되었다.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라(왕상 19:11, 12), 그러나 불 후에 하나님께서 세미한 소리로써 선지자에게 말씀하셨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왕위와 나라들을 전복하거나, 화려한 것과 외관상 과시로 당신의 사업을 수행하실 것이 아니고, 긍휼과 자아희생의 생애를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말씀하심으로 수행하실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외부적 과시를 수반하여 임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부드러운 영감을 통하여, 성령의 내적 역사(內的役事), 곧 생명되시는 분과의 영혼의 교통을 통하여 오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가장 위대한 능력의 표현은 그리스도의 품성의 완전함에 도달한 인간의 성품 속에 보여진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빛을 비추기 위한 노력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훌륭한 선(善)을 자랑하기 위하여 자기 만족에 도취된 어떤 노력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심령이 하늘 나라의 원칙에 잠겨 지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세상과 접촉할 때, 그들 속에 있는 빛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생애의 모든 면에 나타나는 그들의 확고한 성실성은 빛을 비추는 수단이 될 것이다.* 재물과 높은 지위, 값비싼 장비, 건물과 설비 등은 하나님의 사업을 발전시키는데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허영심을 조장시켜 주는 것은 성공이 아니다. 아무리 화려하게 보일지라도 세속적인 과시는 하나님의 안목에 무가치한 것이다. 37 그분께서는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 것을 가치있게 여기신다. 전자는 후자를 나타내 줄 때에만 가치가 있다. 가장 잘 정선된 예술품도 심령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열매인 품성의 아름다움과 비교될 수 있는 미(美)를 간직하고 있지는 않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주셨을 때, 그분께서는 불멸의 재산, 곧 세상이 창조된 이래 사람들이 축적해 온 부(富)도 그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런 재산을 인류에게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간직되어 온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 앞에 서셨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그분과의 연결을 통하여 받고 나타내고, 나누어 주어야 할 보화이다.

하나님의 사업에 있어서의 인간의 노력은 헌신적인 일꾼의 활동에 의하여, 생애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냄으로써만 능률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을 우리에게 치셨고,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의 품성을 우리에게 나타내고 계시므로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의 구속주께서는 당신의 의로써 우리를 덮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봉사사업에 남녀들을 택하실 때, 그들이 세속적 재산과 학문과 웅변력을 소유하고 있는지 묻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신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나의 길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겸손하게 걸어가고 있는가? 내가 나의 말을 그들의 입술에 넣어 줄 수 있는가? 그들이 나를 대표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성전에 당신의 성령을 넣어 주실 수 있는 비례만큼 각 사람을 사용할 수 있으시다. 그분께서 가납하실 사업은 당신의 형상을 반영하는 사업이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의 영원한 원칙에 속한 불후의 특성들을 세상에 제시할 그들의 신임장으로 간직해야 한다.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38 예수님께서 도시들의 거리에서 봉사하시자 어머니들이 그들의 병들고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을 품에 안고 군중을 헤치며 그분의 시선이 미치는 지점까지 나오고자 애쓰고 있다.

핏기없이 지쳐 있는 그 어머니들, 거의 절망적이면서도 굳은 결심과 인내력을 잃지 않고 있는 그 모습들을 바라보라. 그들은 고통의 짐을 진 채 구주를 찾고 있다. 밀려 오는 군중 때문에 그들이 뒤로 물러가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로 발걸음을 옮겨 마침내 그들 곁으로 접근해 가신다. 희망이 그들의 마음 속에서 솟아난다. 그들이 그분의 시선과 마주치고 긍휼과 사랑이 충만한 그 눈을 바라볼 때 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 무리들 중 한 사람을 골라내어, 구주께서는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줄까”하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여자의 신뢰심을 불러 일으키신다. 그 여자는 흐느끼며 “주님, 나의 아이를 고쳐 주소서”라고 말하므로 그의 가장 큰 소원을 아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어린 아이를 그 여자의 팔에서 받으신다. 그분께서 그 아이를 만지시자 질병은 즉시 물러간다. 39 창백한 죽음의 흔적은 사라지고, 생명의 물결이 혈관을 통하여 흐르고, 근육은 힘을 얻는다. 위로와 평안의 말씀이 그 어머니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그 일과 마찬가지로 긴급한 또 다른 상황이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주는 당신의 능력을 다시 발휘하신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은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생애에 대하여 많이 생각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에 관하여, 그분께서 행하신 이적들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40 그러나 적은 것으로 간주된 사물들에 기울인 그분의 주의력은 그분의 위대함을 더욱 잘 나타내 주는 증거이다.

유대인들 중에는 어린이들을 어떤 랍비에게 데리고 가서 그의 손을 그들 위에 얹고 축복하게 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구주의 사업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일로 방해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어머니들이 그들의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축복해 달라고 그분께 요청할 때, 제자들은 그들을 불쾌하게 쳐다보았다. 그들은 그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을 찾아 와서 유익을 얻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분께서 그들이 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41 그러나 구주께서는 그들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육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그 어머니들의 염려와 근심을 이해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당신이 계신 곳으로 오게 하셨다.

한 어머니는 예수님을 찾고자 그의 아이를 데리고 집을 떠났다. 도중에서 그는 이웃 사람에게 자기의 용무를 이야기하였더니 그 이웃사람 역시 그의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서 축복받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몇 사람의 어머니들이 그들의 자녀들을 데리고 함께 왔다. 그 어린이들 중 몇은 이미 영아기를 넘어서 유년기와 소년기에 도달해 있었다. 그 어머니들이 소원을 아뢰자, 예수님께서는 동정의 마음으로 그들의 수줍고 눈물어린 요구를 들으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제자들이 그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보고자 기다리셨다. 제자들이 그 어머니들을 책망하면서 그들을 쫓아 버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을 위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보시고, 그분께서는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잘못을 알려 주셨다. 그분께서는 어린 아이들을 당신의 팔에 안으시고, 당신의 손을 그들 위에 얹으시고, 그들이 받으러 온 축복을 베푸셨다.

어머니들은 위로를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 축복을 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새로운 기분으로 그들의 의무를 감당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위하여 희망찬 마음으로 일할 용기를 얻었다.

만일 그 어린 아이들의 미래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면, 우리는 그 어머니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그 날의 광경을 회상시켜 주고, 사랑스러운 구주의 말씀을 그들에게 되풀이해서 들려주는 것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훗날에 그 어린이들이 참으로 자주 그 말씀들을 기억함으로써 주님의 구원받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셨던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동정 깊은 구주이시다. 42 그분께서는 유대나라에서 어린 아이들을 팔에 안으셨던 그 당시와 꼭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진실로 어머니들을 도우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가정에 있는 자녀들은 옛날의 어린 아이들과 꼭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피로 산 영혼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어머니의 마음 속에 있는 부담을 아신다. 궁핍과 가난으로 고생한 어머니를 모셨던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모든 어머니를 동정하신다. 가나안 여인의 근심된 마음을 위로하고자 긴 여행을 하셨던 그분께서는 오늘날의 어머니들을 위하여 꼭 같은 일을 해주실 것이다. 나인성 과부에게 그의 독자를 돌려 주셨고,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당신의 어머니를 기억하셨던 그분께서는 오늘날도 어머니들의 슬픔을 동정하신다. 모든 슬픔과 고난을 그분께서는 위로하시고 도와 주실 것이다.

어머니들로 하여금 그들의 어려운 문제들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가게 하라. 그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돌보는데 필요한 충분한 은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짐을 구주의 발 앞에 내려놓고자 하는 모든 어머니들에게 문이 열려 있다.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막 10:14)고 말씀하신 분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어머니들에게 그들의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와서 당신의 축복을 받으라고 초청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데리고 온 어린 아이들 중에서 당신의 은혜의 후사와 당신의 나라의 백성이 될 남녀들을 보셨다. 그리고 그들 중 어떤 어린이들은 당신을 위하여 순교자가 될 것을 보셨다. 그분께서는 그 어린 아이들이 장성한 사람들, 곧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세속적으로 현명하고 마음이 굳어져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쉽게 당신의 말씀을 듣고 당신을 그들의 구속주로 받아들일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가르치실 때, 그들의 수준까지 낮추셨다. 하늘의 왕이신 그분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셨고, 그들의 순진한 이해력에 맞도록 당신의 중요한 교훈들을 단순하게 풀이하셨다. 그분께서는 훗날에 자라나서 영생의 열매를 맺을 진리의 씨를 그들의 마음에 심으셨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각 시대에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 곧 교회의 직원들과 목사들과 조력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을 당신께 이끌고 계신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그것은 만일 그대들이 그들을 방해하지 않으면 그들이 올 것이라고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대들은 비그리스도인적 품성으로 예수님을 그릇되게 나타내지 않아야 한다. 그대들의 냉랭하고 거칠은 태도로 어린 아이들을 그분께로부터 떠나가게 하지 말라. 만일 그대가 하늘에 있다면 하늘이 즐거운 장소가 될 수 없다는 느낌을 그들에게 주지 않도록 하라. 44 종교란 어린 아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말하거나, 마치 그들이 어린 시절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종교란 우울한 종교라는 것과 구주께 나오면 생애를 즐겁게 해주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그릇된 인상을 주지 말라.

성령께서 어린이들의 마음에 역사하고 계실 때 그분의 사업에 협력하라. 구주께서 그들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과 그들이 원기왕성한 꽃다운 시절에 자신들을 구주께 바치는 것이 그분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라.

부모의 책임

구주께서는 당신의 피로 산 영혼들을 무한한 자비로 돌보신다. 그들은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다. 그분께서는 말할 수 없는 열망으로 그들을 바라보신다. 그분의 마음은 잘 양육받은 가장 매력적인 어린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유전과 태만으로 좋지 못한 품성의 특성을 가진 어린이들에게로 끌려간다. 많은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특성들에 대하여 그들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녀들의 품성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도 그들을 취급함에 있어서 자비와 지혜를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어린이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바라 보신다. 그분께서는 원인에서 결과까지 알아 보신다.

그리스도인 일꾼은 결함 많고 잘못된 그 어린이들을 구주께로 인도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될 수 있다. 지혜와 기지로써 그는 그들을 자기의 마음에 붙들어 매고,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그들에게서 품성이 변화된 것을 보고, 그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섯 덩이의 적은 보리떡으로 무리들을 먹임

45 그리스도께서 바닷가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은 하루 종일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을 따라 모여들었다. 그들은 그분의 은혜로운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말씀은 너무도 단순하고 쉬웠기 때문에 그들의 심령에 마치 길르앗의 유향과 같았다. 그분의 거룩한 손의 치유력은 앓는 자들에게 건강과 죽어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날은 마치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식사 후 얼마의 시간이 흘러갔는지조차 깨닫지 못하였다.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돌아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마침내 제자들이 그리스도께 와서 그들 자신들을 위하여 무리들을 보내야겠다고 주장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먼 곳에서 왔으며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 주위에 있는 마을과 촌락에서 그들은 음식물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다(마 14:16). 그리고 그분께서는 빌립을 돌아보시며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질문하셨다(요 6:5).

빌립은 눈을 들어 사람의 물결을 쳐다보았다. 그는 그 많은 무리에게 음식물을 제공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200 데나리온에 해당되는 떡을 구하더라도 그 사람들에게 충분치 못하고 조금씩 밖에 안돌아가겠다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무리들 가운데서 얼마만큼의 음식물을 발견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셨다. 그러자 안드레는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말했다(요 6:9).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당신께로 가져 오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풀밭에 앉히라고 명령하셨다. 46 그 일이 다 이루어지자 그분께서는 그 음식물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게 되었다(마 14:19, 20).

47 그리스도께서 무리를 먹이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신 이적이었다. 그러나 제공된 음식물은 갈릴리의 어부들이 매일 먹는 물고기와 보리떡에 불과한 것,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음식물이 아니었던가.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호화로운 식사를 제공할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단순히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준비된 음식물은 그들에게 유익한 교훈이 되지 못할 것이었다. 이 이적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단순성(單純性)의 교훈을 가르치고자 하셨다. 만일 오늘날의 사람들이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생활했던 것처럼 천연계의 법칙에 조화되게 생활함으로써 그들의 습관이 단순했을 것같으면, 인류의 필요는 풍성하게 채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기심과 식욕의 방종이 죄악과 불행을 초래하여 한편으로는 폭음폭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궁핍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사치에 대한 욕망을 만족시켜 주심으로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끌고자 하지 않으셨다. 흥분되고 긴긴 하루를 보낸 후 피곤하고 배고픈 그 큰 무리에게 주어진 그 단순한 식사는 그분의 능력과, 일상생활에서 그들을 돌보시는 그분의 사랑의 보증이 되었다. 구주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호화로운 것을 주시기로 약속하지 않으셨다. 48 그들의 운명은 빈곤으로 둘러싸여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은 그들의 필요가 채워질 것이라고 보증해 준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세상의 물질보다 더 좋은 것, 곧 당신 자신이 임하심으로 마음 속에 거하는 위로를 약속하신다.

무리들이 먹고난 후에도 많은 음식이 남았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명령하셨다(요 6:12). 이 말씀은 음식물을 광주리에 담으라는 말 이상의 뜻이었다. 그 교훈은 이중적(二重的)이었다. 아무것도 낭비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세속적 유익이 지나가 버리도록 방임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인류의 유익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등한히 해서는 안된다. 세상의 주린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거두어 들이라. 그와 꼭 같은 주의력으로 우리는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고자 하늘에서 온 떡을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과 관련된 말씀은 하나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한 말씀도 헛되이 땅에 떨어져서는 안된다.

보리떡의 이적은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5,000명을 먹이실 때 가까이에 음식물이 없었다. 그분에게는 당신의 명령대로 될 길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분께서는 그곳 광야에서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 이외에 5,000명의 사람들과 함께 계셨다. 그분께서는 무리들에게 당신을 떠나 그곳까지 오라고 초청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그분과 함께 있고 싶은 열성 때문에 초청이나 명령을 받지 않고 왔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이 하루 종일 당신의 교훈을 들었으므로 배가 고프고 지쳐 있다는 것을 아셨다. 그들은 집에서 멀리 떠나 있었고 밤은 가까왔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음식을 살 돈이 없었다. 그들을 위하여 광야에서 40일 간 금식하셨던 분께서는 그들을 주린 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실 것이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예수님을 그곳에 계시게 하였으므로, 그분께서는 어려움을 해결할 길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의존하셨다. 49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 모든 비상사태에서 우리는 무한한 자원을 좌우하시는 분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이 이적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고,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상호간에 나누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모든 사람은 그분에게 생명의 떡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그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사람들 사이에 임명된 교통의 수단이다.

제자들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한 구주의 명령을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온갖 어려움이 생겼다. 그들은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게 하겠느냐”고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던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먹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봉사하라고 명령하셨다. 음식물은 그분의 손에서 불어났다. 그리고 그리스도께로 뻗혀진 제자들의 손은 채워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조금 밖에 안되는 그 식물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였다. 무리들이 먹고나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서 공급된 귀중한 음식을 먹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 무지한 사람들,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깨달을 때,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자주 위축되는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의문을 품는다. “우리의 연약한 힘과 빈약한 자원이 이 큰 필요를 어떻게 채워 줄 것인가? 우리는 그 사업을 지도하기 위하여 더욱 큰 재능을 가진 어떤 사람이나 그 일을 맡아 줄 어떤 기관이 나오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신다. 그대가 가진 재산과 시간과 재능을 사용하라. 그대의 보리떡을 예수님께 가지고 가라.

비록 그대의 자원이 수천 명을 먹이기에는 충분하지 못할지라도 한 사람을 먹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손에 들어가면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을 것이다. 제자들처럼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을 주라. 그리스도께서는 그 선물을 증가시켜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정직하고 단순하게 의지할 때 갚아 주실 것이다. 50 보잘 것없는 공급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 것이 풍성한 잔치가 되었음이 입증될 것이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고후 9:6-11) 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