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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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며 돌아가셨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할 죄값을 따라 우리를 취급하지 않으신다. 비록 우리의 죄는 정죄받기에 합당하지마는, 그분께서는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 우리의 냉담과 고집을 여러 해 동안 참으셨다. 우리가 방황하고, 심령이 완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있을지라도 그분의 팔은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뻗쳐 있다.

은혜는 은혜받기에 합당치 못한 인간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태도이다. 우리가 은혜를 찾는 것이 아니고 은혜가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가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에서가 아니고 전혀 가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유일의 이유는 우리에게 그 자비가 크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많고 타락한 사람들을 초청하시고자 온 종일 당신의 손을 뻗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영접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환영하신다. 죄인들의 괴수를 용서해 주는 것이 그분의 영광이다. 그분께서는 사로잡힌 자를 강한 자에게서 빼앗으시고, 포로된 자를 건져내시고, 나무토막을 붙는 불에서 꺼내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가장 깊은 인간의 불행의 심연(深淵)까지 당신의 자비의 황금 사슬을 내려서 죄로 병든 타락한 영혼을 끌어올리실 것이다.

162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데려가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주신 그분에게 부드러운 관심의 대상이 된다. 죄 많고 속절없는 영혼들, 사단의 간계와 사슬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영혼들이 마치 목자가 양떼를 돌보는 것과 같은 보호를 받는다.

구주의 모본은 시험당하는 자와 실수한 자들을 위하여 나타내는 우리의 봉사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것과 꼭 같은 흥미와 친절과 인내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야 한다. 그분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요 13:34).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우리와 관련되는 모든 사람에게 그분의 이기심 없는 사랑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동정과 도움이 필요되는 남녀들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이 도움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고 묻지 않고, “내가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가”고 자문해야 할 것이다.

부요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자유인과 종들은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다. 인류를 구속(救贖)하기 위하여 생명을 주신 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서 유한한 인간이 평가할 수 없는 가치를 보신다. 십자가의 오묘한 영광을 통하여 우리는 그분께서 영혼의 가치를 평가하시는 바를 알아야 한다. 163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사람이 비록 아무리 타락하였을지라도 냉대와 모멸로 취급되어서는 안되리만큼 큰 값이 지불되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동료 인간들이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높임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하여 일하는 중요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구주의 비유에 나오는 잃어버린 은전은 비록 먼지와 쓰레기 속에 묻혀 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의 은이었다. 그것이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 은전의 주인은 그것을 찾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각 영혼은, 죄로 말미암아 아무리 타락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에 가치 있게 여겨진다. 은전이 통치자의 상(像)과 명각(銘刻)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은 창조 시에 하나님의 형상과 명각을 간직하게 되었다. 비록 죄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은 훼손되고 희미해졌을지라도 각 영혼에는 그 명각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의와 성결로써 그 위에 당신의 형상을 다시 새기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가장 강한 연합의 띠가 되는 동정심, 곧 타락하고, 죄 많고, 고통당하고, 죄와 허물로 죽은 영혼들에 대한 동정심을 그분과 같이 간직하는 일이 얼마나 적은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몰인정이 우리에게 있는 가장 큰 죄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그분의 위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일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엄격하고 가혹하게 취급당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유혹의 압박을 받는다. 사단은 그와 같은 영혼들로 더불어 싸우고 있다. 그러므로 거칠고 냉랭한 말은 그들을 낙담케 하고, 그들을 유혹자의 세력에 사로잡히게 한다.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것은 미묘한 일이다. 오직 마음을 아시는 분만이 사람들을 어떻게 회개하도록 인도할 것인지 아신다. 오직 하나님의 지혜만이 잃어버린 사람들을 접촉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에게 성공을 거두게 하실 수 있다. 그대는 엄격하게 혼자 서서 “나는 너보다 거룩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의 이론이 아무리 정확하고 그대의 말이 아무리 진실할지라도 그와 같은 자세는 사람들의 마음과 결코 접촉될 수 없다. 164 교훈과 논쟁의 반복이 아무런 일을 성취하지 못할 때, 말과 행동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이 영혼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와 같은 동정심이 더욱 필요하다. 그와 같은 동정심은 단순히 우리에게 결점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고, 때때로 결점에 사로잡혀 있고, 죄를 짓고 통회하며, 시험을 받아 낙심 중에 있는 가난한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 갈등속에 놓인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비로운 대제사장처럼 우리의 동료 인간들의 약점들을 느끼면서 그들에게 가서 그들과 접촉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부르셔서 당신의 부드러운 친절로 당신께 오도록 강권하신 사람들은 버림받은 사람들, 곧 세리들과 죄인들이었다. 그분께서 결코 호의를 보이실 수 없었던 한 계급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자존심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들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이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는 가까이 있는 이방인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로 가야한다. “세리들과 창기들”도 그리스도의 초청을 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종들의 친절과 인내를 통하여 그 초청은 가장 깊은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건져내 주는 강권하는 힘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동기는 사단이 멸망시키고자 애쓰는 영혼들을 위하여 확고한 목적과 끊임없는 관심과 불굴의 인내로 일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한다. 어떠한 것도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간절하고 열렬한 활력을 냉각시켜서는 안된다.

전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남녀들을 그리스도께 나오도록 호소하고 강권하는 정신이 나타나 있음을 주목해 보라. 우리는 사람들을 구주께 이끌기 위하여 공사(公私)간의 온갖 기회를 포착하여 모든 이론을 전개하고, 모든 동기를 한량없이 일으키도록 격려해야 한다. 우리는 온갖 능력을 기울여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의 극기와 희생의 생애를 받아들이도록 강권해야 한다. 165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일에 그분께서 주신 모든 재능을 다 활용함으로써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소망으로 구원을 받음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롬 8:24). 타락한 사람들은 그들이 사람답게 되기에 너무 늦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지도받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확신을 가지고 인류를 영화롭게 하셨으므로 인류의 명예를 스스로 간직하게 하셨다. 가장 깊이 타락한 사람들일지라도 그분께서는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적의(敵意)와 부패와 불순을 접촉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분에게 끊임없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의 감정에 충격을 받았다거나 당신의 고상한 취미가 훼손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을 결코 하지 않으셨다. 인간의 악습과 강한 편견과 거만한 감정이 어떠하든 간에, 그분께서는 그 모든 것을 동정 깊은 친절로 대하셨다. 우리가 그분의 영을 받게 되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유사한 시험과 시련을 당하는 형제들로, 또한 이따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고자 애쓰며, 낙담과 어려움에 부딪혀 싸우고, 동정과 도움을 갈망하고 있는 형제들로 여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들을 낙심시키거나 쫓아 버리기 위하여 만나지 않고 그들의 마음 속에 소망을 일으켜 주기 위하여 만나게 될 것이다. 166 그리하여 그들이 용기를 얻게 되면 그들은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미 7:8, 9).

하나님께서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시편 33편 14, 15절)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받아 실수하는 사람들을 취급할 때 “네 자신을 돌아 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갈 6:1)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생각하므로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없신여기느뇨.”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고전 4:7, 마 23:8, 롬 14:10, 13).

사람이 잘못을 지적당하는 것은 언제나 굴욕적인 일이다. 어떤 사람도 쓸데없는 비난으로 그 경험을 더욱 쓰라리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도 지금껏 비난으로 개선된 일이 없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비난으로 반감을 갖게 되고,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각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부드러운 정신과 친절하고 상냥한 태도는 실수한 사람들을 구원해 내고 많은 죄를 가리워 준다.

사도 바울은 잘못을 책망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이 실수한 사람의 친구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하여 얼마나 신중하게 노력하였던가! 그는 자기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그들에게 얼마나 열렬하게 설명하였던가! 그는 그들에게 고통을 준 것이 그에게도 고통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는 승리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자신의 확신과 동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내가 큰 환란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였다(고후 2:4). 167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냈었느니라 …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고후 7:8-13).

“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고후 7:16, 빌 1:3-5, 1:6, 7, 4:1, 살전 3:8).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로서의 형제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는 품성에 있어서 완전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유혹을 대항하여 싸우는 한편, 또한 넘어질 위험에 놓여 있는 그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그들에게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그들에게 “영원한 언약의 피로” 그분께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실 것을 보증하였다(히 13:20, 21).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그의 실수를 깨달을 때, 그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무관심과 불신으로 그 사람을 낙담케 하지 말라. 168 “그 사람이 끝까지 잘 해 나갈 것인지 본 후에 그를 신뢰하겠다”고 말하지 말라. 흔히 바로 그와 같은 불신이 시험받는 사람을 실족케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흑암의 사슬에 매인 채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결심과 도덕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의 마음의 시련을 별로 알지 못한다. 가장 비참한 것은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받는 사람의 상태이다. 그는 진흙 속으로 빠져들어가면서 비틀거리며 정신을 잃고 있는 사람과 같다. 그는 아무것도 분명하게 볼 수 없다. 마음이 흐려져 있으므로 발을 어떻게 옮겨야 할지 모른다. 많은 불쌍한 영혼들이 오해를 받고,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고통과 번민에 싸인 채 잃어버린 양이 되어 방황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럴지라도 그는 용서와 평안을 갈급하는 강력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아, 고통을 더욱 심하게 해 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말아야 한다! 죄악 생애에 지쳐있으면서도 벗어날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긍휼이 많으신 구주를 알려 주라. 그의 손을 잡아 주고, 그를 일으켜 주고, 그에게 용기와 희망의 말을 해 주고, 그를 도와서 구주의 손을 붙들게 해 주라.

우리는 우리의 노력에 즉시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너무나 쉽게 실망한다. 우리는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남아 있으면 영혼을 위한 노력을 결코 그쳐서는 안된다. 우리 구속주의 희생으로 산 귀한 영혼들은 유혹자의 세력에 가볍게 버려두기에 너무나 귀중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험받는 사람들의 처지에 놓을 필요가 있다. 유전의 힘, 나쁜 교제와 환경의 영향, 나쁜 습관의 힘 등을 생각해 보라. 그와 같은 영향 아래 많은 사람들이 타락하는 것을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에 그들이 느리게 반응한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때때로 복음을 받아들일 때 외관상으로 보잘 것없고 유망해 보이지 않은 사람들이 가장 충성스런 복음의 신봉자와 옹호자들 중에 속할 것이다. 그들은 대체로 더럽혀져 있지 않다. 169 외관상으로 가까이 가기 어려운 이면에는 접촉할 수 있는 선량한 본성이 잠재해 있다. 도움의 손길이 없으면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결코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내와 꾸준한 노력을 통하여,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부드러운 말과 친절한 염려와 실제적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은 마음 속에 있는 한 줄기 희미한 희망이 사라지지 않게 해 주는 그런 종류의 권면이 필요하다. 그들과 접촉하는 사역자들은 이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너무 오랫동안 타락해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생애에서 더 나은 환경에 결코 처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의의 태양의 밝은 광선은 그 영혼에게도 비추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평가되는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 그들의 특권이다. 그들의 마음 속에 숭고하고 고상한 사상을 심어 주라. 그대의 생활로써 부도덕과 순결, 흑암과 빛의 차이점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라. 그대의 모본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그들에게 알려 주라.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죄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곳에 두시며, 그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불멸의 유업(遺業)을 상속받는 자들이 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이적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유용한 생활에 적합해질 수 있다. 그들은 멸시당하고 버림받은 나머지 완전히 낙심상태에 빠져 있다. 그들은 냉랭하고 완고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구원을 참으로 절망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어리석음은 성령의 역사 아래 사라져 버릴 것이다. 우둔하고 흐려 있던 정신은 각성될 것이다. 죄의 사슬은 끊어질 것이다. 부도덕은 사라지고, 무지는 극복될 것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통하여, 마음은 순결해지고, 정신은 계발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