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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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마태복음 6장 1절).

산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께서 생애를 통해 말없이 가르쳐 오셨으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 교훈을 말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처럼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도 그들이 가장 좋게 생각하는 것을 얻는 데 그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자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 하고 의아해 했다. 그들의 정신과 동기와 방법은 예수님과 반대였다. 그들은 매우 열성적으로 율법을 존중했지만 실제적인 목적은 자신의 영광이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아를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범하는 자임을 그들에게 나타내시고자 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중히 여기던 원칙들은 각 시대 사람들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 준다. 바리새인의 정신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 정신이다. 따라서 구주께서 당신 자신의 정신과 방법이 랍비들의 그것들과 상이함을 나타내셨을 때, 그분의 교훈은 각 시대의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리스도 당시,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덕행의 보상으로 간주해 온 세상의 명예와 번영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세인의 주목을 끌고 거룩하다는 명성을 얻기 위하여 사람들 앞에서 자선 행위를 자랑했다.

80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봉사를 인정치 않으신다는 것과 또 그들이 받게 될 상은 그처럼 추구하던 사람들의 아첨과 칭찬뿐일 것이라는 사실을 단언하시면서 그들의 외식을 책망하셨다.

그분께서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께서는, 친절한 행동은 항상 비밀로 지켜져야 된다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편지를 쓰면서, 마게도니아 교인들의 관대한 자아 희생의 정신을 숨기지 않은 것은 물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서 역사하신 은혜를 이야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정신으로 물들게 하였다. 그는 또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고린도후서 9장 2절)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자선이 사람들에게서 칭찬과 명예를 얻기 위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분의 생각을 분명히 밝혀 준다. 진정으로 경건하면 자랑하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칭찬과 아첨의 말을 듣기 원하고 그것들을 달콤한 음식으로 먹는 자들은 이름만의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들의 선행을 통하여 영광을 그들 자신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그들에게 일하도록 은혜와 능력을 주신 분에게 돌려야 한다. 모든 선한 일은 성령을 통하여 성취되며, 성령은 받는 자가 아닌 주신 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다. 그리스도의 빛이 심령 속에서 빛나게 되면, 입술이 하나님께 돌리는 찬송과 감사로 채워질 것이다. 그대의 기도, 의무 수행, 자선, 극기가 생각과 대화의 주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81 그리스도께서 찬양을 받으시고, 자신은 숨겨질 것이다.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주되 선한 행실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생하는 자들에 대한 동정과 사랑으로 해야 한다. 목적의 진실, 곧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친절은 하늘이 귀하게 여기는 동기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영혼을 오빌의 순금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신다.

우리는 보상이 아닌 봉사를 생각해야 한다. 이런 정신으로 나타내는 친절에는 필히 그 보상이 있을 것이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하나님 자신이 다른 모든 상급을 포함하는 위대한 상급이 되시는 것은 사실이나, 영혼은 품성 면에서 그분과 동화될 때만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으로 인해 즐거워 할 수 있다. 동류가 되어야 서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인류의 봉사를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때, 비로소 그분은 당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누구든지 마음과 생애에 하나님의 축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내면 자신도 반드시 풍성한 축복을 받게 된다. 산과 들은 산 속의 개울이 바다로 흘러가도록 길을 제공하지만 그것 때문에 피해를 보는 일이 없다. 오히려, 주는 것으로 인해 몇 백 배 보답을 받는다. 노래를 부르며 흘러가는 시냇물이 신록과 수확이라는 선물을 남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기슭의 풀을 봐도 다른 곳보다 더 푸르고, 나무들도 더 싱싱하고, 꽃들도 더 탐스럽다. 대지가 여름의 폭염으로 바짝 말라 갈색으로 변할 때에도, 강줄기는 하나의 파란 선을 이룬다. 82 이리하여 산의 보화가 바다로 흘러가도록 가슴을 열어 준 들판은 생기와 아름다움, 곧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통로로 자신을 제공한 사람이면 누구나 받게 되는 그분의 은혜의 보상을 증거하는 것들로 옷 입게 된다.

이것은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받는 축복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 하리니…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이사야 58장 7~11절).

자선 사업은 이중으로 축복을 받는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축복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더 큰 축복을 받는다.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은혜는 이기심과 반대되는 품성의 특성 곧 생애를 깨끗하게 하고, 고상하게 하고, 풍성하게 해줄 특성을 계발시켜 준다. 은밀한 중에 행한 친절한 행동은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고, 이들을 모든 관대한 생각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마음에 더욱 가까이 가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꽃에서 풍겨 나는 향기처럼 생애 속에서 조용하게 흘러나오는 작은 친절, 곧 사랑과 자아 희생의 작은 행동은 생애의 축복과 행복을 나누어 가지는 일에 작지 않은 부분을 이룬다. 타인의 유익과 행복을 위한 극기가 비록 이 땅에서는 비천하고 칭찬 받지 못할 일로 취급될지 모르나 하늘에서는, 부요하였으나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영광의 왕이신 그분과 우리가 하나 된 것을 나타내는 표로 인정받게 된다는 사실을 결국 알게 될 것이다.

83 친절한 행동은 은밀한 중에 행해질 수 있으나, 그렇게 한 사람의 품성에 나타나는 결과는 숨겨질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성의와 관심을 가지고 일한다면, 마음이 하나님과 밀접히 상통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은 그 거룩한 접촉에 대한 응답으로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조화되게 하실 것이다.

맡겨진 재능을 지혜롭게 활용한 자들에게 더 많은 재능을 허락하시는 분께서는 사랑하는 분을 믿는 백성들이 그분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행한 봉사를 즐겨 인정하신다. 선한 사업에서 그들의 재능을 활용함으로 그리스도인 품성의 계발과 완성을 위하여 노력해 온 사람들은 장차 올 세상에서 그들이 뿌린 씨를 거두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시작된 사업은 영원히 계속될 더욱 거룩하고 고상한 생애에서 그 극치를 이룰 것이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마태복음 6장 5절).

바리새인들은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 두었다. 그래서 종종 일어나는 일로, 정한 시간에 밖에 있게 될 때는 거리, 시장, 혹은 바쁘게 다니는 사람들 사이 등 어디든지,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큰 소리로 그들의 형식적인 기도를 외웠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자기 영광을 위해 드리던 이런 예배를 심하게 책망하셨다. 84 그러나 공중 기도를 무시하신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신 스스로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고 대중 앞에서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개인 기도를 공중 앞에서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우리의 기도는 은밀한 중에 드려짐으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귀에도 들려선 안 된다. 이런 간구의 내용이 호기심이 많은 귀에 들어가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라.” 은밀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장소를 갖도록 하라. 예수께서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한 은밀한 장소를 가지고 계셨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비록 훌륭한 곳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홀로 지낼 수 있는 장소로 물러갈 필요가 있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 기도하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 그 어떤 사람도 중보자로 나설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 수 있다.

하나님의 눈 외에는 그 어떤 사람의 눈에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귀 외에는 그 어떤 사람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 은밀한 기도의 장소에서, 우리는 가장 깊이 감추어진 우리의 욕망과 소원을 무한히 자비하신 아버지께 쏟아 놓을 수 있다. 그리하면 인간의 필요의 부르짖음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음성이 영혼의 고요와 침묵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향해 말씀하실 것이다.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야고보서 5장 11절). 그분께서는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완고한 자들의 자복을 들으시고 그들의 참회를 받아 주시고자 기다리신다. 그분은 마치 어머니가 귀여운 아기에게서 엄마를 알아보고 웃는 미소를 기다리듯이 우리에게서 감사함에 대한 어떤 표시를 기다리신다. 그분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고 부드러운지 우리가 깨닫기를 바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시련을 당신의 동정으로, 우리의 슬픔을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의 상처를 당신의 치유로, 우리의 연약함을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의 공허를 당신의 충만으로 가지고 나오도록 우리를 초청하신다. 85 그분께 나온 사람은 아무도 실망을 맛보지 않았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시편 34편 5절).

은밀한 중에 하나님을 찾고 그들의 필요를 주께 아뢰고 도움을 구하는 자들은 그 간구가 허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매일의 친구로 삼을 때 보이지 않는 세계의 능력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느끼며, 또 예수님을 쳐다봄으로 그분의 형상으로 동화될 것이다. 위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변화된다. 품성이 천국에 합당할 만큼 부드럽고 세련되고 고상해진다. 우리 주님과 나누는 교제와 친교의 분명한 결과로, 경건과 순결과 열성이 증가될 것이다. 지능이 기도를 통하여 계발될 것이다. 우리는 신령한 교육을 받고 있으며, 이것은 근면과 열성의 생애로 실증된다.

매일 열렬한 기도로 도움과 지지와 능력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향하는 사람은 고상한 포부, 진리와 의무에 대한 분명한 이해, 행동의 고상한 목적, 그리고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심령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연결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우리는 사람들과 나누는 교제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빛과 평화와 평온을 그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얻어진 힘, 다시 말해 마음을 사려 깊고 조심성 있는 마음으로 훈련시키는 꾸준한 노력과 연합된 힘은 사람을 매일의 의무를 위하여 준비시키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마음을 평안하게 지켜 준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입에 말씀을 주셔서 당신을 위해 이야기하게 하시는 것은 물론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게까지 하실 것이다. 86 그분은 천사들의 노래에서 한 곡을 뽑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실 것이다. 생활 하나 하나에서 마음속에 거하시는 구주의 빛과 사랑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외부의 어려움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생애를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마태복음 6장 7절).

이방인들은 그들의 기도 속에 죄를 속하는 공효(功效)가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기도를 오래 하면 할수록 공효가 더 커지는 줄 생각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거룩해질 수 있다면, 스스로 즐거워 할 수 있는 무엇, 곧 자랑할 어떤 근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도의 사상은 거짓 종교의 모든 제도의 기초를 이루는, 자력(自力)에 의한 속죄의 원리에서 생긴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기도에 있어서 이 이교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며,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사이에까지 퍼져 있다. 마음에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틀에 박히고 습관적인 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이방인의 “중언부언”과 똑같은 성격을 가진다.

기도가 죄를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에는 아무런 효능과 공효가 없다. 우리가 멋대로 내뱉는 화려한 말은 모두 합해도 거룩한 소원 한 가지만 못하다. 가장 유창한 기도라 할지라도 마음의 진정한 뜻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면 무익한 말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상 친구에게 당연히 받을 것으로 믿고 은혜를 구할 때와 같이 진정한 마음으로 영혼의 단순한 소원을 아뢰며 드리는 기도, 이것은 믿음의 기도이다. 8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격식을 차린 찬양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나 상하고 억눌린 마음이, 죄가 많고 더없이 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부르짖는 무언의 절규는 무한히 자비하신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을 발견한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마태복음 6장 16절).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하는 금식은 형식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음식을 거절하고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뿌리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며 금식하는 사람은 결코 겉으로 과시하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금식의 목적은 심령의 죄 때문에 육체를 괴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죄의 무서운 특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그분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한 그분의 명령은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요엘 2장 13절)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도의 유업을 사거나 공효를 미칠 것으로 알고 고행을 하거나 우쭐해 하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한복음 6장 28절)라는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한복음 6장 29절)고 대답하셨다. 회개는 자신에게서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할 때, 선한 업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88 예수께서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마태복음 6장 17, 18절)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즐거움으로 해야지 슬픔과 우울한 기분으로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는 우울한 것이 없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주님 안에서 실망당한 것과 같은 인상을 주게 되면, 이것은 곧 주님의 품성을 잘못 나타내고 그분의 원수의 입에 구실을 붙여 주는 것이 된다. 말로는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나, 우울하고 슬픈 표정을 지음으로써 그들은 고아(孤兒)의 모습을 세상에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봉사를 사실 그대로 매력 있게 나타내기를 바라신다. 극기와, 마음의 은밀한 고통을 자비하신 구주께 내어 놓도록 하자. 짐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그대를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 안에서 즐겁게 갈 길을 가도록 하라. 사람들은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은밀히 진행되는 일을 끝까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의 결과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분이 “갚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마태복음 6장 19절).

땅에 쌓아 둔 보물은 오래 가지 못한다. 도둑이 구멍을 뚫어 훔쳐 가고, 좀이 먹고 동록이 쏠기도 한다. 화재와 폭풍우가 소유를 쓸어가 버리기도 한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러므로 땅에 쌓아 둔 보물이 마음을 빼앗아 하늘의 것이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유대인 시대에는 사람들의 정열이 주로 돈을 사랑하는 쪽으로 쏠렸다. 89 속된 마음이 하나님과 믿음이 차지할 자리를 빼앗았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재물을 향한 탐욕은 너무도 매혹적이며 황홀케 하는 영향을 생애에 미치기 때문에, 고결함을 왜곡시키고 인간성을 부패케 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마침내 사람들을 멸망에 빠뜨리고 만다. 사단을 섬기면 근심과 번민과 피곤한 수고로 가득 찬다. 또, 사람이 세상에 쌓아 두려고 애쓰는 재물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예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 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교훈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것이다. 하늘의 보물을 획득하는 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이들만이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다. 하늘에 쌓아 둔 보물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 어떤 화재나 홍수도 그것을 없애 버릴 수 없고, 그 어떤 도둑도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없고, 좀이나 동록이 그것을 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재산보다 더욱 귀중하게 여기시는 이 보물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에베소서 1장 18절)함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분의 보배, 곧 그분의 귀중하고 특별한 보물로 불리어진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 같”(스가랴 9장 16절)다.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케 하며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하리로다”(이사야 13장 12절). 모든 영광의 발원지인 위대한 중심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순결하고 완전한 상태에 있는 당신의 백성을 당신의 고난과 겸비와 사랑의 대가로, 또 당신의 영광의 보충으로 바라보신다.

우리는 위대한 구속 사업에 그분과 연합하고그분의 죽음과 고난으로 얻은 부를 그분과 함께 나누도록 허락 받고 있다. 90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2장 19, 20절)고 편지하였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노력하여 얻으라고 하신 보물이다. 품성은 생애의 위대한 수확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사람의 마음속에 하늘을 향해 가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언행, 곧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의 형성에 이바지하는 모든 노력은 하늘에 보물을 쌓고 있는 것이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유익을 얻는다. 복음을 전하는 데 금전과 시간을 바치는 사람은 그 사업과 또 그 사업을 통하여 접촉하게 될 영혼들을 위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기도하게 된다. 애정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하면서, 그는 그들에게 최대의 선을 행하기 위하여 더욱 하나님께 헌신하게 된다.

그리하여 세상의 재물이 소멸될 마지막 날,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둔 사람은 그의 생애에서 얻은 것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만일, 지금껏 그리스도의 말씀에 유의해 왔다면, 우리는 크고 흰 보좌 주위에 모일 때 우리의 활동으로 구원받은 영혼들을 보는 것은 물론, 저들의 면류관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놓고 세세 무궁토록 그분을 찬양하는 큰 무리가 우리의 노력의 결과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구원하고 구원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식으로 하여 안식의 항구에 들어오게 된 사람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한 자는 구속 주의 영광에 참예하는 구속받은 이 사람들을 얼마나 큰 기쁨으로 바라보겠는가! 영혼을 구원하는 사업에 신실했던 자들에게 하늘은 얼마나 귀중한 것이 될 것인가!

91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로새서 3장 1절).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마태복음 6장 22절).

오직 하나의 목적, 곧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은 우리 구주의 말씀에 의하여 제시된 조건이다. 이 목적에 더욱 신실하고 굳게 서서 진리를 식별하며 어떤 희생이 닥치더라도 그것에 순종하도록 하자. 그리하면 분명히 신령한 깨우침을 받게 될 것이다. 진정한 경건은 죄악과의 모든 타협이 끝난 후에 시작된다. 그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은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을 것이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립보서 3장 13, 14, 8절)자 함이라.

그러나 자아를 사랑함으로 눈이 흐려지면 흑암만이 있게 된다. 92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유대인을 완고한 불신에 둘러싸이게 함으로써,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의 품성과 사명을 분별할 수 없게 한 것은 이 무서운 흑암이었다.

마음이 요동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없을 때, 시험에 굴복하는 일이 시작된다. 주께 자신을 완전히 바치려고 마음먹지 않으면 암흑 가운데 머물게 된다. 자신의 일부를 남겨 두는 것은 사단이 들어와 우리를 유혹하여 타락시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는 것이나 같다. 그는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하여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만 하면 죄에 대한 방어벽이 없어진다는 것을 안다.

죄악의 욕망이 우세한 것은 영혼이 기만당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욕망의 온갖 방종은 하나님께 대한 반감을 강화시킨다. 사단이 택한 길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악의 그림자에 둘러싸이고 발걸음이 더 캄캄한 데로 끌려가며, 마음이 더욱 어두워진다.

천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적 세계에도 동일한 법칙이 행해진다. 흑암 가운데 거하는 자는 결국 시력을 잃게 될 것이다. 그는 한밤의 흑암보다 더욱 짙은 흑암에 갇히게 된다. 그리하여 가장 밝은 대낮도 그에게는 아무런 빛을 가져다줄 수 없다. 그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한일서 2장 11절). 죄인은, 끝까지 악을 간직하고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를 멸시함으로써, 선을 좋아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찾는 욕망과 하늘의 빛을 받을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자비의 초청은 여전히 사랑으로 충만하고, 빛은 그의 영혼에 처음 비치던 당시와 마찬가지로 밝게 빛난다. 그러나 음성은 귀머거리가 된 귀에 떨어지고, 빛은 어두워진 눈을 비출 뿐이다.

93 어느 영혼이든지 구원의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로 하여금 방종케 하여 버림받은 자가 되도록 하지 않으신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돌아설지라도,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돌아서지 않으신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더 이상의 기회와 특권이 소용없을 때까지, 자비의 호소와 경고와 보증을 가지고 우리를 쫓아오신다. 책임은 죄인에게 있다. 그는 오늘 하나님의 영을 거절함으로써 빛이 더 큰 능력으로 비칠 다음번에도 이를 거절할 길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거절의 단계를 하나씩 지나게 되어, 마침내 빛이 그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하나님의 성령에 조금도 반응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네게 있는 빛”까지 어둡게 되어 버린다. 우리가 아는 진리도 완전히 왜곡되어, 영혼의 흑암이 더 심해진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태복음 6장 24절).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거나 섬기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대한 관심과 재물에 대한 관심은 서로 일치되거나 상통하지 않는다. 세속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참고 극기하고 더 이상 가지 말라고 경고하는 바로 그 선을 넘어 들어가 이기적인 성향을 마음껏 충족시킨다. 따라서 그 선을 중앙으로 하여 한쪽에는 극기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유행에 앞장서고, 경박한 일에 빠지고, 금지된 오락을 마음대로 즐기고, 방종에 빠지는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선 저쪽으로 갈 수 없다.

94 어떤 사람도 중립적 위치에 설 수 없다.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의의 원수도 섬기지 않는 중간 계층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인간 대리자들 안에 거하셔서 그들의 재능을 통해 일하시고 그들의 힘을 통해 활동하셔야 한다. 그들은 의지를 그분의 뜻에 굴복시키고 그분의 영과 더불어 활동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제 사는 것은 더 이상 그들이 아니요 그들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세력의 지배를 받고, 완전히 상이한 성격의 제안을 하는 다른 음성을 듣게 된다. 반만인 봉사를 하게 될 때, 인간 대리자는 흑암의 군대의 훌륭한 동맹자로서 원수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사단과 동맹하여 그의 편을 들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원수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들은 신성한 책임을 저버리게 된다. 그들이 사단과 참된 군사 사이에서 사슬 노릇을 하게 됨으로써, 원수는 이들 대리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군사들의 마음을 빼앗는 활동을 계속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악의 보루는 버림받은 죄인이나 타락한 부랑자의 부정한 생애가 아니라 밖으로는 덕망 있고 존경할 만하고 고상해 보이나 실제로는 죄를 품고 악이 깊숙이 침투해 있는 생애이다. 큰 유혹을 받고 이를 이기고자 은밀하게 투쟁하면서 절벽의 가장자리에서 떨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것이 죄를 짓게 하는 가장 강력한 미끼 중의 하나가 된다. 생명과 진리와 명예라는 숭고한 개념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하나라도 고의적으로 범한다면, 그것은 그분의 고상한 선물을 범죄의 유혹물로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재주와 재능과 동정은 물론, 관대하고 친절한 행동까지도 사단의 미끼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멸망의 절벽으로 유혹하여 이생과 장차 올 생애를 파멸로 이끌게 할 수도 있다.

9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한일서 2장 15, 16절).

“염려하지 말라”(마태복음 6장 25절).

생명을 주신 분께서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몸을 창조하신 분은 의복의 필요성에 대하여 무관심하지 않으시다. 그렇다면 이제 더욱 큰 선물을 주셨으니 그 선물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것 또한 주시지 않겠는가?

예수께서는 아무런 근심이 없이 즐거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새들을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청중들에게 가리키시며, 그들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지라도 크신 아버지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그분께서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물으신다.

“참새 한 마리도 예수님 몰래 떨어지는 일이 없고, 그분 몰래 아무도 머리 숙여 기도할 수 없다.

그분께서 어느 곳에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흘러내리는 괴로운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을 다 주시하신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을 결코, 결코,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언덕과 들판이 꽃으로 아름답게 덮여 있었다. 아침 이슬을 맞아 생기를 머금은 꽃들을 가리키시며, 예수께서는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고 말씀하셨다. 96 초목과 꽃의 아름다운 모양과 우아한 빛깔은 사람의 기술로 모사(模寫)될 수 있지만, 어느 붓이 꽃 한 송이, 풀잎 하나에까지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단 말인가? 길가에 있는 꽃 하나 하나도 하늘의 별 세계를 움직이는 바로 그 능력 덕택에 존재한다. 모든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심장의 맥박이 고동한다. 들의 꽃들은 그분의 손에 의하여 지금껏 세상의 그 어떤 임금이 입은 것보다 더욱 아름다운 옷으로 입혀진다. 그러므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새를 보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꽃을 지으시고 참새에게 노래를 주신 분이시다. 천연계의 아름다움 속에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학자들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이 배울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백합화의 꽃잎 위에 그대를 위한 기별을 불신과 이기심과 해로운 근심을 버릴 때만 읽을 수 있는 말로 기록하신다. 아버지의 마음에 흘러넘치는 사랑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분께서 생애의 여정을 밝고 즐겁게 해 주는 노래하는 새들과 피어나는 꽃들을 주시겠는가? 생존에 필요한 것만 생각하면 꽃들과 새들이 없어도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단지 생존에 필요한 것만 공급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그대를 향한 당신의 애틋한 마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 땅과 공중과 하늘을 아름다운 것으로 채우셨다. 모든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그분의 영광의 빛을 반사하는 것일 뿐이다. 97 그분께서 그대의 행복과 기쁨을 위하여 천연계 위에다 이처럼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신 것을 안다면 그분께서 온갖 필요와 축복을 그대에게 주실 것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햇빛을 향하여 꽃잎을 펼치는 꽃들도 모두 별을 움직이는 바로 그 법칙에 순종한다. 그러니, 그 생명이 얼마나 단순하고 아름답고 신선한 것이겠는가! 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하신다. 꽃을 그처럼 아름답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품성의 아름다움으로 옷 입기를 더없이 바라신다.

예수께서는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다시 말해 그 식물이 어떻게 차갑고 어두운 땅이나 강바닥의 진흙에서 피어올라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향기를 풍기는지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신다. 누가 백합의 거친 갈색 구근(球根)에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안에 감춰진 하나님의 생명이 그분의 부르심을 받고 비와 햇빛 속에서 피어날 때, 사람들은 그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생명은, 비와 햇빛처럼 만인에게 무상의 축복이 되는 그분의 은혜의 봉사 사업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피어날 것이다. 꽃을 창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바로 이 말씀이 그대의 마음속에 성령의 은혜가 충만케 할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그분께서는 그대가 이 세상에 있게 된 것은 단지 자신을 위해서만 탐구하고, 땅을 파고 집을 짓고, 수고하고 길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밝고 즐겁고 아름다운 삶을 삶으로써, 사랑의 봉사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생애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한 목적도 있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대를 아름다움으로 두르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들이여, 자녀들로 하여금 꽃에서 교훈을 얻게 하라. 그들을 정원과 들과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로 데리고 가서, 천연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기별을 읽도록 가르쳐 주라. 98 하나님을 새와 꽃과 나무와 관련지어 생각하게 하라. 자녀들로 하여금 온갖 즐겁고 아름다운 것에서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을 보게 하라. 스스로 즐거운 신앙생활을 하여 그들도 신앙을 가지게 하라. 친절의 법이 입술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자녀들에게 그들의 본성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으로 변화되어 그분의 품성과 조화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애가 꽃처럼 매력을 풍기는 아름다운 것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가르치라. 그들이 아름다운 꽃을 따 모을 때, 꽃을 만드신 분은 꽃보다 더욱 아름다운 분이심을 가르쳐 주라. 그렇게 하면 그들의 마음의 덩굴손이 그분을 감고 올라가게 될 것이다. “온전히 사랑스러우신” 분이 그들에게 매일의 동반자와 절친한 친구가 되실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애가 그분의 순결한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마태복음 6장 33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계속 조바심을 하며 이 세상 왕국에 대한 모종의 선언이 있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께서 하늘의 보화들을 소개하시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먼저 우리가 그분과 연합하면 세상에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세상의 것들을 가장 많이 생각했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이방 민족들처럼 되었으며, 따뜻한 사랑으로 당신의 피조물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활하였다고 지적하신다.

99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누가복음 12장 30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장 33절). 나는 너희에게 사랑과 의와 평화의 나라를 알려 주기 위해 왔노라. 마음을 열고 이 나라를 받아들이며, 이 나라를 위한 봉사에 최대의 관심을 쏟으라. 비록 이 나라가 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현실 생애를 위한 너희의 필요가 돌봄을 받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라.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중하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께서 너희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니라.

예수께서는 우리가 노력하지 않고 살게 놓아두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가 모든 일에 당신을 처음과 마지막 그리고 최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우리는, 품성과 생애를 통하여 그분의 의를 나타내는 데 방해가 되는 사업에 종사하지 말며, 그런 직업을 구하지 말며, 오락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주께 하듯 마음을 다해서 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항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만사를 아버지의 뜻에 맡김으로써 모든 세밀한 점에서까지 생애를 고상하게 하셨다. 그분의 모본을 따른다면, 이 땅의 생애에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리라”는 그분의 보증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가난과 부, 질병과 건강, 우둔과 지혜, 이 모든 것들은 그분의 은혜의 허락을 통하여 제공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연약한 영혼이라도 당신께 도움을 청하러 돌아오면 영원한 팔로 감싸 주신다. 100 산에서 나는 보석들은 없어질 것이나,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은 그분과 함께 거할 것이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한일서 2장 17절). 하나님의 성은 황금문을 열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실패와 고난 중에서 인도하심과 지혜 그리고 위로와 소망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운 자를 맞아들일 것이다. 천사들의 노래가 그 곳에서 그를 환영하며, 생명나무가 그를 위하여 열매를 맺을 것이다.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54장 10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태복음 6장 34절).

만일, 하나님의 사업에 종사하기 위해 자신을 그분께 바친 상태라면, 내일을 위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대를 종으로 삼으신 그분께서는 처음과 끝을 다 아신다. 미래의 사건들이 비록 그대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전능하신 그분의 눈에는 환히 다 보인다.

해야 할 일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처리하고 성공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지혜를 의지할 때는, 하나님께서 맡기지 않으신 짐을 지며 그분의 도움 없이 그것을 나르려고 애쓰게 된다. 하나님께 속한 책임을 우리가 짐으로써 사실상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는 것이다. 101 우리가 걱정하고 위험과 실패를 예측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우리에게 분명히 닥쳐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을 때는 장래를 위하여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사랑하는 부모를 의지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하면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삼켜지기 때문에 근심과 걱정이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내일 일을 오늘 질 때, 그리스도께서는 도움을 약속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린도후서 12장 9절)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처럼, 그분의 은혜는 그날의 필요를 위해 매일 주어진다. 순례 생활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아침마다 그날에 필요한 양만큼 하늘의 떡을 공급받을 수 있다.

우리에게 속한 것은 한 날뿐이며, 이 날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이 한 날 동안, 우리는 성실한 봉사를 통해 우리의 모든 목적과 계획을 그리스도의 손에 의탁하며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겨야 한다.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돌봐 주시기 때문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예레미야 29장 11절).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이사야 30장 15절).

매일 주님을 찾는 가운데 회개하고, 하나님 안에서 영적 선택을 자유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며, 그분의 영광스러운 초청에 기쁜 마음으로 응하여 그리스도의 멍에 곧 순종과 봉사의 멍에를 멘다면, 모든 불평이 없어지고, 모든 어려움이 제거되며, 현재 직면하고 있는 모든 복잡한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