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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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번역 사업의 발전

245 루터가 봉하여진 성경을 독일 백성들에게 열어 주고 있는 동안 틴덜(Tyndale)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영국에서 같은 일을 하였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위클리프가 라틴어 성경에서 이미 성경을 번역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잘못 번역된 데가 많았다. 그것은 또한 인쇄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격이 대단히 비싸서 부자나 귀족이 아니면 가질 수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교회에서 그 성경을 엄격하게 금지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좁은 범위에 걸쳐서 보급되었다. 1516년, 곧 루터가 95개조를 공개하기 일 년 전에 에라스무스가 헬라어와 라틴어의 신약 성경을 발행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으로 원어(original tongue)로 출판된 일이었다. 이 성경으로 말미암아 그전에 번역된 성경에서 잘못된 점이 정정되고 의미가 훨씬 더 분명하여졌다. 그리하여 교양 있는 사람들이 더욱 철저하게 진리의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고, 개혁 사업에 대하여 새로운 자극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부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자기 나라의 백성들에게 성경을 보급함으로써 위클리프의 사업을 완성시키고자 한 사람이 곧 틴덜이었다.

근면한 학도요, 열렬한 진리의 탐구자였던 그는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는 깨달은 바를 두려움 없이 전파하고, 모든 교리를 성경에 비추어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교회가 성경을 주었기 때문에 오직 교회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법왕교도들의 주장에 대하여 틴덜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246 “너희는 누가 독수리에게 먹을 것을 찾도록 가르쳐 주었는지 아느냐?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굶주린 자녀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의 아버지를 찾아내도록 가르쳐 주신다. 그런데 성경을 우리에게 주기는커녕 우리에게서 감추고 있는 사람들은 너희들이다. 우리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을 화형시키는 사람들은 너희들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할 수만 있으면 성경 자체까지도 불살라 버릴 것이다”(D’Aubigne, History of 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 b.18, ch.4).

틴덜의 영어 신약 성경

틴덜의 설교는 큰 흥미를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부들도 끊임없이 경성하여 그가 전도하던 장소를 떠나기만 하면 곧 위협과 무고(誣告)로써 그의 사업을 무너뜨렸다. 그리하여 여러 번 그들은 그 일에 성공하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그는 부르짖었다. “내가 한 곳에서 씨를 뿌리고 있는 동안 원수는 이미 씨를 뿌린 밭을 망가뜨려 버린다. 나는 동시에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나라의 말로 된 성경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런 궤변자들을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이 없이는 일반 신자들을 진리 안에 굳게 세울 수 없다”(D’Aubigne, History of 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 b.18, ch.4).

이제 새로운 목적이 그의 마음을 점령하게 되었다. 그는 말하였다. “이스라엘 사람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시편을 송영한 것은 이스라엘 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영국 말로 복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가?…교회는 대낮에 새벽빛보다 더 희미한 빛을 가져야 할 것인가?…그리스도인들은 신약 성경을 반드시 자국어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의 박사들과 교사들 사이에서도 서로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오직 성경으로써만 사람들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박사의 의견을, 다른 사람은 저 박사의 의견을 지지한다. …저자(著者)들은 피차에 의견이 합하지 않는다. 248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누가 바르고 누가 그릇된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써이다”(D’Aubigne, History of 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 b.18, ch.4).

246 그 일 후 오래지 않아서 학식 있는 로마교의 한 박사는 그로 더불어 논쟁하면서 “우리는 법왕의 율법을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틴덜은 “나는 법왕과 그의 모든 율법을 무시한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보전하여 주신다면 오래지 아니하여 나는 밭을 갈고 있는 소년이 그대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도록 할 것이다”(Ander-son, Annals of the English Bible, p.19)고 대답하였다.

자기 나라의 말로 된 신약 성경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마음속에 간직하기 시작했던 틴덜의 목적은 한층 더 굳어졌다. 247 그리하여 그는 곧 그 사업에 몰두하였다. 그는 박해로 인하여 집에서 쫓겨나서 런던으로 갔다. 그는 얼마 동안 그 곳에서 아무런 방해 없이 그의 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는 법왕교도들의 폭동으로 다시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온 영국이 그에 대하여 봉쇄된 듯하였으므로 그는 독일에서 피난처를 찾고자 결심하였다. 거기서 그는 영어 신약 성경의 인쇄를 시작하였다. 두 번이나 그의 사업은 정지를 당하였으나 이 도시에서 인쇄할 수 없으면 저 도시로 가고, 저 도시에서 인쇄할 수 없으면 또 다른 도시로 갔다. 마침내 그는 보름스를 향하여 갔는데, 그 곳은 몇 년 전에 국회에서 루터가 복음을 옹호한 곳이었다. 이 고대 도시에는 개혁 사업의 친구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틴덜은 더 이상의 방해를 받지 않고 그의 사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3천부의 신약 성경이 출판되었으며, 같은 해에 다시 재판까지 하게 되었다.

그는 큰 열심과 인내로써 사업을 계속하였다. 영국 당국자들이 물샐틈없이 각 항구를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런던으로 몰래 건너가게 되었고, 거기서 다시 전국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법왕교도들은 진리를 억압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지마는 모두 허사가 되었다. 한 번은 더햄(Durham)의 감독이 성경을 판매하는 틴덜의 동료로부터 성경을 있는 대로 다 샀다. 그는 그 성경들을 없애 버림으로 개혁 사업을 크게 방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그 감독이 낸 돈이 아니었다면 발행할 수 없었던 새롭고 더욱 좋은 신판을 낼 수 있는 재료를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후에 틴덜이 체포당하였을 때, 그는 성경 인쇄의 비용을 대어 준 사람의 이름을 알려 주면 석방시켜 주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욱 많은 보조를 해준 사람이 더햄의 감독이었다고 대답하였다. 그 감독이 막대한 금액으로 성경을 사들인 까닭에 틴덜은 한층 용기를 얻어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틴덜은 배반자로 인하여 원수들의 손에 잡히어 여러 달 동안 감옥에서 고생을 하였다. 그는 마침내 순교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그가 마련해준 무기는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를 통하여 복음의 군병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전쟁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훌륭한 개혁자들이 많이 나옴

248 래티머(Latimer)는 성경을 자기 나라의 말로 읽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설교단에서 힘있게 주장하였다. 그는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 자신이며”, 성경은 그 저자의 능력과 영원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어떤 왕이나 황제나 장관이나 통치자든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순종할 의무에서 벗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곁길로 들어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를 받도록 하자.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간 길이나 행한 일을 따르거나 행하고자 할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을 하여야 한다”(Hugh Latimer, “First Sermon Preached Before King Edward VI”).

틴덜의 친구 반즈(Barnes)와 프리드(Frith)가 진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일어났다. 그리고 리들리즈(Ridleys)와 크랜머(Cranmer)가 또 그 뒤를 이어 일어났다. 영국의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은 학식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들 중의 대부분이 로마교에서 열성과 경건으로 크게 존경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법왕교를 반대하게 된 것은 법왕청의 잘못을 안 결과였다. 그들은 바벨론의 비밀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더욱 큰 능력으로 그것에 항거하는 증언을 하였다.

래티머는 말하였다. “나는 지금 하나의 이상한 질문을 하겠다. 온 영국에서 누가 가장 충성스러운 주교이며 감독이냐?…내가 부르는 사람의 이름을 명심해서 들어라. …나는 말하노니 그는 악마이다. …그는 그의 교구 밖을 결코 나가지 않는다. 언제든지 부르고 싶을 때에 그를 불러보라. 그는 항상 집에 있다. …그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다. 그대는 그가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을 결코 볼 수 없으리라고 나는 보증한다. …악마가 사는 곳에서는…책을 치워 버리고 촛대를 놓고 있으며 성경을 치워 버리고 염주를 세고 있으며 복음의 빛을 버리고 대낮에도 촛불을 높이 들며,…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넘어뜨리고 돈을 빼앗는 연옥(煉獄)을 세우며,…헐벗고,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에게 옷을 입히는 대신에 여러 가지 재료와 보석으로 우상을 장식하며, 하나님의 전통과 그분의 가장 거룩한 말씀을 버리고 사람의 유전과 율법을 높인다. …아! 우리의 승려들도 마치 사단이 잡초와 가라지를 뿌리려고 부지런히 애쓰는 것처럼 좋은 교리의 씨를 부지런히 뿌린다면 얼마나 좋을까!”(Hugh Latimer, “Sermon of the plough”).

249 그 개혁자들이 주장한 위대한 원칙은 왈덴스인들과 위클리프와 얀 후스와 루터와 츠빙글리와 그들과 연합했던 동지들이 주장한 원칙들과 똑같은 것으로, 그것은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 되는 성경이 절대무류(絶對無謬)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원칙이었다. 그들은 법왕과 종교 회의와 교부들과 왕들이 종교 문제로 사람의 양심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였다. 그들의 권위는 성경이었으므로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여 모든 교리와 모든 주장을 시험하였다. 그 거룩한 사람들은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하나님과 성경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지탱되었다. 래티머는 그와 함께 곧 화형에 처해질 그의 동료에게 이렇게 부르짖었다. “안심하라. 내가 믿기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국에서 결단코 소멸되지 않을 촛불을 우리는 켤 것이다”(Works of Hugh Latimer, vol.1, p.Xiii).

스코틀랜드 종교계의 형편

콜룸바(Columba)와 그의 동역자들로 말미암아 스코틀랜드에 뿌려진 진리의 씨는 완전히 멸절되지 아니하였다. 영국의 교회들이 로마 법왕에게 복종한 이후에도 수백 년 동안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2세기에 이르러 법왕교가 이 나라에 세워지게 되자 다른 어떤 나라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절대권을 휘둘렀다. 이곳처럼 암흑이 심한 곳은 다른 어떤 곳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도 빛이 비치어 가려진 암흑을 뚫고 내일을 약속해 주었다. 성경과 위클리프의 교리를 가지고 영국에서 온 롤라드인들(Lollards)은 복음의 지식을 보존하게 하는 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여러 세기 동안 복음의 증거자와 순교자를 배출해 내게 되었다.

대종교 개혁이 시작됨과 동시에 루터의 저서가 들어오고, 다시 틴덜의 영어 신약 성경이 전해졌다. 이러한 저서들은 교권의 감시를 받지 않고 조용히 산과 골짜기들을 넘어서 스코틀랜드에서 거의 꺼져가던 진리의 등불에 새로운 생기를 주었다. 그리하여 4백 년간의 압박이 이루어 놓은 로마의 사업을 무너뜨렸다.

또한 순교자의 피가 그 운동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법왕교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사업이 위협을 당하게 된 것을 깨닫자, 즉시로 스코틀랜드의 가장 고귀하고 명망 있는 사람 중의 몇을 화형에 처하였다. 250 그런데 로마교의 당국자들은 그들에게 강단(講壇)을 만들어 주었으며, 거기서 나오는 죽어가는 증인들의 임종의 말이 온 나라에 울려 퍼져서 사람들의 마음에 로마의 굴레를 벗어나야겠다는 불멸의 목적을 갖게 해주었다.

해밀턴(Hamilton)과 위샤트(Wishart) 두 사람은 가문도 좋고 인격도 고상한 사람들이었는데 겸손한 많은 제자들과 함께 화형주에서 그들의 생명을 마쳤다. 그러나 위샤트의 화형주로부터 불꽃으로도 침묵시킬 수 없는 사람, 곧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스코틀랜드의 법왕교를 몰락시킬 한 인물이 나타났다.

존 녹스(John Knox)는 로마교의 전설과 신비주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위샤트의 가르침을 통하여 로마교를 벗어나고자 확고하게 결심하고 박해를 받는 개혁자들에게 가담하게 되었다.

개혁의 선봉자 녹스

그는 동료들로부터 복음의 사자가 되라는 권고를 받았을 때에 그 책임의 중요성을 두려워하여 오랫동안 주저하였다. 그는 여러 날을 집안에 틀어박혀 생각하고 번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단 그 일을 맡게 되자 그는 확고한 결심과 불굴의 용기로써 생명이 다할 때까지 전진하였다. 이 충성되고 열렬한 개혁자는 사람의 낯을 전연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박해의 불꽃은 그의 열성을 더욱 가중시키는 촉진제가 될 뿐이었다. 압제자의 도끼가 그의 머리를 위협하면서 들려 있을지라도 그는 자기의 자리에 굳게 서서, 바른손으로는 강한 타격을 주고, 왼손으로는 우상 숭배를 분쇄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여왕을 직접 대면했을 때 개혁파의 지도자들 중에는 그들의 열성을 죽여 버린 자가 적지 않았으나 존 녹스는 진리를 위하여 확고히 증거하였다. 그는 무마책으로 매수당하지 않았고, 위협으로 위축당하지도 않았다. 여왕은 그에게 이단자라는 죄를 선고하였다. 여왕은 그가 국가에서 금지하는 종교를 받아들이도록 사람들을 가르쳤으며, 그로 인하여 위에 있는 자를 순종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녹스는 확실하게 대답하였다.

“바른 종교는 세상 임금에게서 세력이나 권위를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므로 어떤 백성들도 자기들의 종교를 임금의 기호에 따라 정할 수는 없습니다. 251 그 이유는 임금들 중에는 하나님의 참 종교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보다도 한층 더 무지한 사람이 흔히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의 후손이 모두 오랫동안 속하여 있던 바로의 종교를 받아들였을 것 같으면 이 세상에는 어떠한 종교가 남아 있겠습니까? 혹은 사도 시대의 모든 사람이 로마 황제의 종교를 받아들였다면 오늘날의 세상에는 어떠한 종교가 있게 되었겠습니까? …비록 백성들은 임금들에게 순종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을지라도 여왕 전하여, 신교(信敎)에 있어서는 백성들이 그 왕들의 종교에 매여 있지 않음을 인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왕 메리는 말하였다. “너는 성경을 이런 의미로 해석하고, 그들(로마교의 교사들)은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면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하며, 누가 판단을 해줄 것인가?”

“여왕 전하께서는 성경이 밝히 말한 하나님을 믿으시면 그만입니다. 거룩한 말씀이 여왕을 가르치는 것 이외에는 이편 말이나 저편 말이나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분명합니다. 만일 애매한 점이 있는 것처럼 생각될 경우에라도 하나님과 결코 상치되지 않는 성령께서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그 점을 분명히 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짐짓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무지한 데 묻히지 않는 한 의심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David Laing, The Collected Works of John Knox, vol.2, pp.281, 284).

그 개혁자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의 앞에서 그와 같은 진리를 말하였다. 그는 똑같은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목적을 향하여 나아갔고, 스코틀랜드가 법왕권으로부터 해방되는 날까지 기도하면서 거룩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개혁 운동에 호의를 보인 영국

영국에서는 개신교를 국교로 한 결과 박해의 세력이 미약하여지기는 하였으나 전연 없어지지는 않았다. 로마교의 교리는 대부분 폐지되었으나 그 형식들이 적지 않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법왕의 절대권은 부인되었으나 그 대신에 임금이 교회의 머리가 되었다. 교회의 예배는 여전히 복음의 순결성과 단순성에서 멀리 떠나 있었다. 종교 자유의 대원칙도 아직까지 이해되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국왕들은 로마교가 일찍이 이단에 대하여 과한 그러한 잔혹한 일은 하지 않았을지라도 각 사람이 자기의 양심의 지시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에는 이르지 아니하였다. 252 모든 사람은 국교가 정한 교리를 인정하고 그 예배 형식을 준수하도록 요구를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박해로 인하여 적지 않은 고난을 당했다.

17세기에는 수천 명의 목사들이 해직되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인정한 것 이외의 어떠한 종교 집회에도 참석하지 못하도록 금지당하였는데, 그 일을 범하는 때에는 중한 벌금과 투옥과 추방의 어려움을 당하였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모이는 것을 회피할 수 없었던 충성된 사람들은 어두운 뒷골목, 침침한 다락, 밤중의 수풀 속 등에서 모일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박해를 받던 주님의 자녀들은 깊은 산림 속, 곧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성전에 모여 그들의 마음을 열어 놓고 기도하며 찬미를 불렀다. 그러나 그처럼 조심하였지만 많은 사람이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감옥은 꽉 찼고, 가족들은 헤어졌다. 또 많은 사람들이 외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셨다. 그러므로 핍박이 그들의 증언을 침묵시킬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대서양 건너편 미국으로 쫓겨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곳에서 지금껏 그 나라의 영광과 보루로 삼아온 정치와 종교의 자유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

사도 시대와 같이 박해는 다시금 복음의 발전을 돕는 수단이 되었다. 온갖 방탕자와 무서운 죄인들이 섞여 있는 누추한 옥중에서도 존 번연(John Bunyan)은 바로 천국의 분위기를 호흡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멸망의 세상에서 천국 도성에까지 이르는 순례자의 여행에 관한 위대한 이야기를 저술하였다. 그 후 2백년이 넘도록 베드포드(Bedford) 옥중에서 나온 그 소리는 큰 능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다. 번연의 두 저서 “천로역정”과 “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는 많은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

박스터(Baxter), 플래블(Flavel), 올린(Alleine), 그 밖에 재능 있고 교양 있고 깊은 그리스도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수호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일어섰다. 253 그 사람들이 이룬 업적은 비록 이 세상의 위정자들에게서는 배척을 받고 도외시되어도 결코 없어질 수 없다. 플래블이 저술한 “생명의 샘”과 “은혜의 역사”는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심령을 그리스도께 계속적으로 바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박스터의 저서 “개혁 목사”는 하나님의 사업의 부흥을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으로 인정되었고, 또한 그의 저서 “성도의 영원한 안식”은 영혼들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남겨 둔 안식”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웨슬리 형제

그로부터 백년 후, 곧 영적 암흑시대에 휫필드(Whitefield)와 웨슬리(Wesley) 형제는 하나님의 빛을 전하는 사람들로 나타났다. 당시의 영국 사람들은 국교회(國敎會)의 통제 아래 이교도와 거의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종교적으로 쇠퇴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성직자는 자연 종교를 즐겨 연구하였으므로 그들의 대부분의 신학은 그런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상류 계급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을 냉소하였고, 소위 그들이 광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위에 있다고 자랑하였다. 하류 계급은 심한 무지 상태에서 부도덕에 빠져 있었다. 그와 반면에 교회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진리의 사업을 지탱할 힘이나 믿음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루터가 그렇게도 분명히 가르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는 이제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로마교의 교리가 그 대신 자리를 차지하였다. 국교회의 교인이었던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찾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경건한 생활과 종교적 의식을 모두 행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한 번은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가 병이 들어 죽음이 다가오는 것처럼 생각되었을 때, 그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무엇에다 두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나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다”고 대답하였다. 그 질문을 한 친구가 그 대답에 완전히 만족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자,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254 “나의 노력이 소망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못 된다는 말인가? 나의 노력을 하나님께서 절취하신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달리 신뢰할 만한 것이 없다”(John Whitehead, Life of the Rev.John Wesley, p.102). 그와 같이 짙은 암흑이 교회를 덮고 있었으므로, 속죄를 가려 버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빼앗고, 사람들의 마음을 구원의 유일한 희망, 곧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의 피에서 떠나가게 하였다.

웨슬리와 그의 동료들은 참된 종교는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은 말과 행동에는 물론이요, 생각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외부에 나타나는 행위의 바름뿐 아니라 마음의 성결이 또한 필요한 것을 확신하였으므로 새 생애에 들어가기를 힘썼다. 그들은 가장 근면하고 경건한 노력으로 그들의 육신적 마음의 사악함을 극복하고자 애를 썼다. 그들은 극기와 박애와 겸비의 생애를 살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게 해주는 성결, 곧 그들의 가장 열망하는 것을 얻는 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방법을 매우 엄밀하고 정확하게 준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였다. 정죄의 상태에서 놓여나고 죄의 세력을 깨뜨리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허지로 돌아갔다. 그것은 바로 루터가 에르푸르트의 외로운 방에서 경험한 것과 똑같은 투쟁이었다. 그것은 그의 심령을 괴롭게 했던 문제, 곧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2)고 한 바로 그 문제였다.

개신교의 제단에서 거의 꺼져간 거룩한 진리의 불꽃은 보헤미아의 그리스도인들로 말미암아 여러 세대 동안 전하여 내려온 고대의 횃불로부터 다시 밝혀져야 했다. 종교개혁 후에 보헤미아의 개신교는 로마의 세력에 여지없이 짓밟혔다. 그리하여 진리를 포기하기를 거절한 모든 사람들은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의 더러는 작센에서 피난처를 찾았고, 거기서 옛날의 신앙을 보전하였다. 웨슬리와 그의 동료들이 진리의 빛을 받은 것은 바로 이 그리스도인들의 후손으로부터였다.

미국으로 가는 배에서 생긴 일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는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선교 사업을 위하여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모라비아 교도들과 일행이 되어 배를 타게 되었다. 그들은 항해 중에 심한 폭풍우를 만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웨슬리는 그 때에 아직 자기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의 보증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자기가 맛보지 못한 신뢰와 평안을 그 독일인들은 나타냈다.

255 그는 말하였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들의 진실한 태도를 관찰하였다. 그들은 다른 여객들을 위하여 영국 사람은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아니할 비천한 일들을 함으로 항상 겸손의 증거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일에 대하여 아무런 보수도 원치 아니하였고, 그것은 자기들의 교만한 마음을 위하여 유익한 것이라고 하며 그들의 사랑하는 구주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더욱 큰 일을 행하셨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매일 어떠한 장애를 만날지라도 거기에 동요되지 않는 유순한 태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만일 밀침을 당하든지, 매를 맞든지, 넘어뜨림을 당하게 되면 그들은 다시 일어나서 가 버릴 뿐이요, 한 마디의 불평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교만과 분노와 복수의 정신에서는 물론이요 공포심에서 놓여났는지의 여부를 시험해 볼 기회가 왔다. 그들이 언제든지 예배를 시작할 때에 시편을 송영하던 그대로 시편을 읽고 있을 때 바다가 거칠어지고, 큰 돛이 찢어지고, 파도는 배를 삼키려는 듯이 간판 위를 휩쓸었다. 이때에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떠들고 부르짖는 소리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 독일인들은 조용히 송영을 계속하고 있었다. 후에 나는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당신들은 무섭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또 ‘그러나 부인들과 아이들은 무서워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아니요, 우리의 부녀들과 아이들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고 대답하였다”(John Whit-ehead, Life of the Rev.John Wesley, p.10).

사반나(Savannah)에 도착한 후, 웨슬리는 얼마 동안 그 모라비아 교도들과 함께 지냈는데, 그들의 그리스도인적 행동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생명이 없는 형식적인 영국 교회와는 현저하게 다른 그들의 예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매우 단순하면서 엄숙한 그 예배는 모두 나로 하여금 1700년의 시간적 거리를 잊어버리게 하고 형식과 의식은 없을지라도 천막 제조자 바울과 어부 베드로가 지도하였지마는 성령과 능력이 나타났던 당시의 어떤 회집에 참석한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하였다”(John Whitehead, Life of the Rev.John Wesley, pp.11, 12).

웨슬리의 회심 전후 영국으로 돌아오자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의 전도자의 교훈 아래 성경상 신앙을 더욱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자기의 행함을 의지하던 것을 모두 버리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온전히 신뢰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256 런던에서 있은 모라비아 교도들의 한 집회에서 하나님의 영이 믿는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여 변화를 일으킨다는 내용으로 된 루터의 글이 낭독되었다. 그 말을 듣자 웨슬리의 마음속에는 신앙의 불이 타올랐다. 그는 말하였다. “나는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때에 한 가지 확증 곧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심지어 내 자신까지도 제거해 버리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여 주신 데 대한 확증을 얻었다”(John Whitehead, Life of the Rev.John Wesley, p.52).

괴롭고 쓸쓸한 고투의 긴 세월, 엄격한 극기와 자책과 겸비의 긴 세월을 통하여 웨슬리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한 가지의 목적에 굳게 사로잡혀 있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기도와 금식과 자선 사업과 자기희생으로 얻으려고 애쓴 은혜가 실상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임을 깨달았다.

일단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굳게 서자 그의 온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관한 지식을 어느 곳에든지 전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불탔다. 그는 “나는 온 세계를 나의 교구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지방에서든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나의 본분이라고 생각한다”(John Whitehead, Life of the Rev.John Wesley, p.74).

그는 엄격한 극기의 생애를 계속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신앙의 근거가 아니고 결과였으며 성결의 기초가 아니고 열매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기초이며, 그 은혜는 순종으로 나타날 것이다. 웨슬리의 생애는 그가 받은 위대한 진리, 곧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새롭게 하는 능력,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 생애에 이루어지는 열매 등에 관한 진리를 전하는 일에 바쳤다.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는 자기들의 소망 없는 상태에 대하여 오랫동안 심각하게 느낌으로써 그들의 사업을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257 그들이 대학 시절과 전도 사업을 착수한 당시에 받은 멸시와 조롱과 박해의 격렬한 시련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군병으로서 어려움을 견딜 수 있게 하였다. 그들과 그들에게 동조했던 소수의 다른 사람들은 경건치 않은 동료 학생들로부터 메소디스트(Methodists - 규칙 준수자)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칭호가 영국과 미국에서 가장 세력 있는 교파의 하나로 명예로운 이름이 되었다.

웨슬리와 하나님의 기적적 보호

그들은 영국 국교회의 교인으로서 그 교회의 예배 형식에 매우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더욱 높은 표준을 그들에게 제시하셨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전하라고 그들을 강권하셨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권능이 그들의 활동에 함께 하였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였다. 그리하여 그 양들을 약탈하려는 이리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새로운 교파를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감리교(Methodist Connection)라는 명칭으로 한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그 전도자들은 국교로부터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심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 국교 자체에서 개혁을 일으키는 사건들이 일어나게 하셨다. 그것이 전혀 외부로부터 왔었더라면 그것은 그것을 매우 필요로 하는 내부에까지 침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흥을 주장하는 전도자들은 교인들이었으므로, 기회만 얻으면 교회의 내부에서 일을 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방법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문들을 통하여 진리가 들어가게 되었다. 어떤 성직자들은 도덕적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서 자기들의 교구에서 열렬한 전도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형식주의로 마비되었던 교회들이 생기를 되찾았다.

웨슬리의 시대에 있어서는 각 시대의 교회 역사가가 실증하는 바와 같이 각각 같지 않은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이 맡은 직무를 감당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르치는 교리들은 모든 점에 있어서 일치되지는 않았으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을 받고 있었으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목적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와의 견해 차이는 한 때 서로 분리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258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온유를 배웠으므로 상호간의 인내와 사랑으로 화목해졌다. 오류와 불법이 도처에 충만하고, 죄인들이 멸망으로 빠져가고 있는 동안 그들은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종들은 험한 길을 걸었다. 세력 있고 학식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대적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얼마 후에는 많은 성직자들이 분명한 적의를 나타내었고, 순결한 믿음과 그 믿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교회의 문들을 닫아 버렸다. 강단 위에서 그들을 비난하는 성직자들의 행동은 암흑과 무지와 불법을 자아내는 요소가 되었다. 여러 번 존 웨슬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이적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격노한 폭도의 무리가 그를 습격하여 피할 길이 없는 듯이 보였을 때 사람의 모양을 한 천사가 그의 곁에 나타났다. 그러자 폭도들은 물러가고, 그리스도의 종은 그 위험한 장소에서 무사히 피해 갔다.

격노한 폭도들에게서 건짐을 받은 경우들 중의 한 가지에 대하여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미끄러지기 쉬운 비탈길을 통하여 걸어 내려가고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아래로 떨어뜨리고자 애를 썼다. 만일 내가 일단 넘어졌을 것 같으면, 아마도 나는 다시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비틀거리거나 미끄러지지 않고 완전히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나의 칼라와 옷을 붙잡고 넘어뜨리려고 애를 썼으나 그들은 결국 단단히 붙들 수 없었다. 오직 한 사람이 나의 호주머니 뚜껑을 단단히 붙잡았는데 그 부분만 그의 손에 뜯겨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른 쪽 호주머니에는 은행 수표가 들어 있었는데, 주머니 뚜껑의 절반만이 찢어지고 말았다. …바로 내 뒤에 있던 건장한 사람이 큰 참나무 몽둥이로 나를 여러 차례 때렸다. 그가 만일 그것으로 나의 뒤통수를 때렸던들 나는 그만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때릴 때마다 그 몽둥이는 빗나갔다. 나는 그 때에 좌로나 우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었다. 또 한 사람이 군중을 헤치고 달려와서 주먹으로 나를 후려쳤다. 그러나 그의 주먹은 겨우 나의 머리를 조금 스쳤을 뿐이었다. 그는 ‘이 사람의 머리칼이 어찌 이렇게도 부드러울까’라고 말하였다. …바로 처음으로 회개한 사람들은 그 시가의 깡패 두목들이며, 그들 중의 한 사람은 시끄러운 사태가 생길 때에 돈을 받고 싸우는 일을 지금껏 해오고 있었다.

259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준비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부드러운 방법을 사용하시는지! 2년 전에는 한 개의 벽돌 조각이 나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후 1년이 지나서는 돌이 나의 양미간을 맞혔다. 지난달에는 한 번 매를 맞고 오늘 저녁에는 성에 들어오면서 한 번, 나가면서 한 번, 두 번을 맞았으나 모두 아무런 일이 없었다. 한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서 나의 가슴을 쳤고, 또 다른 사람은 피가 쏟아지리 만큼 힘 있게 나의 입을 쳤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것에 대하여서도 다만 볏짚으로 나를 치는 정도 이상의 아픔은 느끼지 않았다”(John Wesley, Works, Vol.3, pp.297, 298).

초대 메소디스트들의 고투

초창기의 메소디스트 교인들은 전도자들과 일반 신도들을 막론하고 국교인들과 혹은 국교인들의 무고로 말미암아 격분한 불신자들로부터 조롱과 박해를 받고 그것을 견디었다. 그들은 법정에도 이끌려 나갔는데, 당시의 법정은 유명무실하여 정당한 재판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박해자들의 폭행으로 자주 고통을 당하였다. 폭도들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기구와 물품들을 파괴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약탈하였고, 남녀들과 어린이들을 잔인하게 취급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메소디스트들의 집을 파괴하고 약탈하려는 자는 어느 때 어느 곳으로 모이라는 광고를 공공연하게 써 붙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공공연하게 국가의 법률과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여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아니하였다. 메소디스트들은 죄인들을 멸망의 길에서 성결의 길로 돌이키고자 힘을 썼기 때문에 이처럼 철저한 박해를 받았다.

존 웨슬리는 자기와 자기의 동료들을 비난하는 데 대하여 말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가르치는 교리가 허위요, 오류요, 광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것들이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한 새로운 교리이며, 퀘이커주의요 광신이며 법왕교라고 한다. 그 모든 구실들은 이미 그 뿌리까지 모두 뽑힌 것이다. 이 교리의 모든 부분은 우리 자신들의 교회가 해석하는 성경의 분명한 교리이다. 그러므로 만일 성경이 참된 것이라면 그 교리가 허위나 오류일 수는 없다. 260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의 교리가 너무 엄격하여 하늘로 가는 길을 지나치게 좁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근본적인 반대 이론이며(오랫동안 이 문제로 공격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은연중에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 많은 반대 이론의 기초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 주님과 그분의 사도들이 만든 이상으로 하늘가는 길을 좁게 만들었는가? 과연 그들의 교리가 성경의 가르침보다도 더욱 엄격한가? 몇 구절의 명백한 성경절들을 생각해 보자.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사람이 무슨 망령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로 인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다.

만일 그들의 교리가 이보다 더욱 엄격할 것 같으면, 그들은 책망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대들은 그대들의 양심에 비추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또한 누가 능히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지 않고 그 엄격함을 조금이라도 늦추어 놓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맡은 어떤 청지기라도 그 거룩한 위탁물의 어떤 부분을 변경할 것 같으면 그를 충실한 청지기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청지기는 하나도 감할 수가 없고 약화시킬 수도 없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나는 그대들의 기호에 맞도록 성경의 표준을 낮출 수는 없다. 그대들은 반드시 그 표준에까지 올라가야 할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할 것뿐이다’라고 선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일반적으로 ‘이 사람들은 사랑이 없다’고 평가하는 참된 이유이다. 과연 그들은 사랑이 없는가? 그렇다면 어떤 점에 있어서 그러한가? 그들이 주린 사람들을 먹이지 않고 헐벗은 사람들을 입히지 않는가? ‘그것은 전혀 문제로 삼을 것이 없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아무런 부족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판단력에 있어서 너무나 냉정하다. 그들은 그들의 방법대로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John Wesley, Works, Vol.3, pp.152, 153).

웨슬리 시대 직전에 영국에 나타난 영적 쇠퇴는 대체로 율법 무용론의 교리가 빚어 낸 결과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도덕률을 폐지하셨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지킬 의무에서 벗어났고, “선을 행해야 할 책임감”에서도 해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율법의 영원성을 인정하면서도 목사들이 사람들에게 율법을 순종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무용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261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택한 사람들은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과 덕성을 실천하게 되고, 이와 반대로 영원히 버림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능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택함을 받은 자들은 은혜를 받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은총을 박탈당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이 범하는 악행은 참된 범죄가 아니며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으로 여길 것도 아니므로 그런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고백하거나 회개로써 그런 죄를 끊어버릴 필요도 없다”(Mclintock and Strong, Encyclopedia, art. “Antinomians”)고 하는 매우 두려운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그들은 일종의 가장 비열한 죄, 곧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큰 위반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라도” 만일 택함을 입은 자가 범한 것일 때에는 “하나님께서 죄로 간주하지 아니하신다”고 역설하였다. 왜냐하면 “택함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거나 율법에 금지된 것은 어떤 것이나 행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본질적이요 뚜렷한 특징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 괴상한 교리는 본질적으로 후세의 일반 교육자와 신학자의 가르침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의의 표준인 하나님의 율법이 결코 불변(不變)의 것이 아니라 도덕의 표준이 사회 자체의 현실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항상 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모든 사상은 다 사단의 정신에서 온 것이며, 그는 죄 없는 하늘의 거민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율법의 정당한 제재를 없애 버리기 위한 그의 사업을 착수하였던 것이다.

사람의 성격을 변경할 수 없도록 고정시켰다는 하나님의 선고에 대한 교리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실상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웨슬리는 그와 같은 율법 무용론자들의 그릇된 의견을 단호하게 반대하고, 율법 무용론으로 이끌어가는 교리는 성경과 배치된 것임을 증명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딛 2:11; 딤전 2:3~6). 262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성령은 값없이 주어졌다. “참 빛”, 곧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요 1:9)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생명의 선물을 스스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율법과 복음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의문의 율법과 함께 십계명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하여 웨슬리는 말하였다. “십계명이 포함되어 있고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견고하여진 도덕적 율법은 주님께서 결코 폐지하지 아니하셨다. 그분께서 오신 것은 그 율법의 어떤 부분을 삭제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이 율법은 결코 폐할 수 없는 것이며, ‘충실한 증거자로서 하늘에 굳게 설 것’이다. …그 율법은 태초부터 있었는데, 그것은 ‘석판에 새기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인류의 자녀들이 창조자의 손에서 나올 때 그들의 마음에 모두 새겨졌다. 그리고 한 때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문자로 기록되기까지 하였지마는 오늘날에는 죄로 말미암아 그것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선악에 대한 의식이 다소나마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한 그 율법은 완전히 폐지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율법의 모든 부분은 각 시대의 온 인류가 지켜야 할 의무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은 시간과 장소와 환경에 따라 좌우될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 그리고 그 상호간의 변경될 수 없는 관계에 의하여 좌우되어야 한다.”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함이로다.’ 그 말의 뜻은 의심할 여지없이 다음과 같다. 나는 사람의 온갖 곡해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것을 완전케 하러 왔다. 그 속에 있는 모든 애매하고 분명치 않은 점들을 완전히 천명하러 왔다. 그 모든 부분의 진정하고 완전한 의미를 선포하고,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각 조목의 범위, 곧 그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각 항목에 들어있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순결과 영적 성질 등을 나타내기 위하여 왔다”(Wes-ley’s Sermon 25).

263 웨슬리는 율법과 복음의 완전한 조화를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율법은 끊임없이 복음을 위한 길을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로 가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복음은 항상 우리를 인도하여 율법을 더욱 정확히 성취시키도록 한다. 예컨대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온유하고 겸손하고 성결하기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모든 요구에 대하여 부족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으로는 불가능하지마는 이처럼 사랑을 주고, 겸손하고 성결케 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게 된다. 우리는 복음, 곧 기쁜 소식을 붙들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어진다. 곧 ‘율법의 의’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게 된다.”

또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장 큰 원수 가운데는 ‘율법을 기탄없이 공격하고’, ‘율법을 악한 것으로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깨뜨리도록(율법에 대한 의무를 폐기하는 것) 가르치되, 율법의 가장 큰 조항이나 가장 작은 조항뿐 아니라 율법 전체를 온전히 깨뜨리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이러한 허망한 일 가운데도 가장 놀라운 일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율법을 전복하면서도 그것을 높이는 줄로 믿고, 그분의 교훈을 폐하여 버리면서도 그분의 사업을 확장시키고 있는 줄로 여기는 일이다. ‘주여 평안하니이까’라고 말하면서 입을 맞춘 유다와 같이 행동한 그들이 예수님을 과연 높이고 있는가.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네가 입맞춤으로써 인자를 파느냐’고 말씀하실 것이다. 주님의 보혈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분의 면류관을 벗기는 일과 그분의 복음 사업을 발전시키는 체 하면서 그분의 율법의 어느 부분을 삭제해 버리는 일은 입맞춤으로 그분을 배신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믿음을 전하는 자로서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순종하여야 할 어떤 적은 부분이라도 제해 버리려는 태도를 취하거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을 조금이라도 약하게 하거나 무효로 만드는 자는 유다에게 한 정죄의 비난을 면할 수 없다”(Wesley’s Sermon 35).

264 “복음을 전하면 율법의 모든 목적을 다하는 것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그것을 전연 부인한다. 복음은 소위 율법의 첫째 목적, 곧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아직도 음부의 구덩이에서 그냥 잠자고 있는 자들을 깨우는 일을 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죄를 깨닫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속량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진정으로 느끼지 아니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건강한 자, 혹은 스스로 건강한 줄로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의원을 부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대들은 먼저 그들에게 그들이 병든 사람인 것을 깨닫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그대들의 수고에 대하여 그들은 감사히 여기지 아니할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가 완전하다고 생각하고 아직 그 마음을 깨뜨리지 아니한 자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Wesley’s Sermon 35).

웨슬리의 위대한 공적

웨슬리는 그의 주님처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한편 “율법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업을 충실히 감당하였으므로 영광스러운 결과를 보게 되었다. 그는 나이 80세가 넘은 만년에 가서, 곧 반세기 이상의 봉사의 생애를 통하여 50만명 이상의 영혼들을 신자로 얻었다. 그리고 그의 봉사를 통하여 타락과 멸망의 구덩이에서 고상하고 순결한 생애로 들어간 무리들과 그의 교훈으로 말미암아 더욱 깊고 풍부한 체험을 얻은 사람들의 수는 구속받은 가족이 하나님의 나라에 모일 그 때에 가서야 비로소 밝히 알려질 것이다. 그의 생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교훈을 준다.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종의 신앙과 겸손, 불굴의 열성, 극기, 헌신은 오늘날의 교회에 그대로 반영되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