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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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가볍게 접근하지 말라. - 겸손과 존경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태도를 특징지어야 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지만 그분께서 마치 우리와 같은 수준에 계시는 것처럼 주제넘고 뻔뻔스러운 태도로 그분께 가까이 나가서는 안 된다. 가까이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위대하시고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와 그들과 동등한 사람이나 그보다 못한 사람에게 하듯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상의 통치자의 알현실(謁見室)에서도 감히 하지 못할 행동을 하나님의 집에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이 스랍들이 경배하고 하늘의 천사들이 그분 앞에서 얼굴을 가리우는 분의 면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부조와 선지자, 252)

위선의 기도 - 불행을 조금도 느끼지 않으면서 우리의 모든 불행한 일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기도는 위선적인 기도이다.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기도는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의 기도이다. 260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기도는 하나님 편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구상된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과 조화되게 하는 것이다. 기도는 의무를 대신하지 못한다.(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247-248)

차가운 그늘에 내던져진 기도 - 개인 기도를 통하여 그들의 어려움을 하나님께 가져가지 않고 그것을 기도회를 위하여 남겨 두었다가 거기서 며칠 동안 기도를 하는 이들이 얼마간 있는 듯하다. 그러한 자들에게는 총회나 기도회의 방해자라는 이름을 붙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빛을 전혀 내지 못하며 아무에게도 덕을 세우지 못한다. 그들의 냉랭하고 얼음 같은 기도와 길고 퇴보적인 간증은 그늘만 드리운다. 그들의 기도나 간증이 끝나면, 모두가 기뻐한다. 그들의 기도와 훈계가 모임에 가져 온 냉기와 어둠을 벗어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내가 받은 빛에 의하면, 우리의 집회는 신령하고 화기 애애한 것이어야 하며 너무 길지 않아야 한다. 침묵, 교만, 허영, 그리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집에 두어야 한다. 사소한 불화나 편견은 이러한 집회에 가지고 오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빛을 가져옴으로써 원기가 회복되고 활력을 얻기 위하여 모이는 형제 자매들의 마음 속에는 연합한 가정에서처럼 단순과 온유 및 확신과 사랑이 깃들어야 한다.(교회증언 2권, 578-579)

우리의 기도가 항상 우리가 원하는 그대로 항상 응답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추측이다. - 믿음의 기도는 결코 잃어버린 바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가 기대한 그대로의 방법과 요구한 소원 그대로 응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추측이다.(교회증언 1권, 231)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듯한 때라도 우리는 그 허락을 굳게 붙잡아야 할 것이니 대개 응답의 시기가 확실히 오게 되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꼭 그 방식으로 응답되고 또한 우리가 원하는 꼭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지혜로우시므로 잘못하실 리가 없는 것이요, 지극히 선하심으로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261 그런즉 비록 기도가 즉시 응답되지 않을지라도 그를 의지하기를 의심하지 말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그의 확실한 허락을 믿으라.(정로의 계단, 96)

기도 자체에 죄로부터 정화되는 공효는 없다. - “이방인들은 그들의 기도 속에 죄를 속하는 공효(功效)가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기도를 오래 하면 할수록 공효가 더 커지는 줄 생각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거룩해질 수 있다면, 스스로 즐거워 할 수 있는 무엇, 곧 자랑할 어떤 근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도의 사상은 거짓 종교의 모든 제도의 기초를 이루는, 자력(自力)에 의한 속죄의 원리에서 생긴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기도에 있어서 이 이교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며,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사이에까지 퍼져 있다. 마음에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틀에 박히고 습관적인 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이방인의 “중언 부언”과 똑같은 성격을 가진다.

기도가 죄를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에는 아무런 효능과 공효가 없다. 우리가 멋대로 내뱉는 화려한 말은 모두 합해도 거룩한 소원 한 가지만 못하다. 가장 유창한 기도라 할지라도 마음의 진정한 뜻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면 무익한 말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상 친구에게 당연히 받을 것으로 믿고 은혜를 구할 때와 같이 진정한 마음으로 영혼의 단순한 소원을 아뢰며 드리는 기도, 이것은 믿음의 기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격식을 차린 찬양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나 상하고 억눌린 마음이, 죄가 많고 더없이 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부르짖는 무언의 절규는 무한히 자비하신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을 발견한다.(산상보훈, 86-87)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기도는 개심의 증거가 아니다. -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환희의 감정을 느낌으로 그들이 회심한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들의 경험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은 이전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생애는 선한 열매를 나타내지 못한다. 그들은 자주 그리고 길게 기도한다. 그리고 항상 어느어느 때 느낀 감정을 언급한다. 그러나 그들은 새 생애를 살지 않는다. 그들은 속았다. 262 감정 이상으로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그들은 모래 위에 집을 세운다. 그리하여 폭풍이 불어올 때에 그들의 집은 무너져 버린다.

불쌍한 많은 사람들은 흑암 중에 더듬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친히 경험하였다고 말한 감정을 찾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한 자는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는 회개하고 진정한 믿음을 나타내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마음은 마음과 생애 즉 전존재를 의미한다. 변화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모든 애착심을 버리고 그리스도에게 애정을 고착시키는 것을 뜻한다. 새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새 마음, 새 목적, 새 동기를 갖는 것이다. 새 마음을 가졌다는 표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변화한 생애이다. 날마다, 시간마다 이기심과 교만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71-72)

아주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자신의 성향을 따르고, 감히 그 문제에 대해서 기도하며, 당신께서 밝히신 뜻과는 반대되는 길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나님께 억지를 부린다. 주님은 이러한 기도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사단은 마치 에덴에서 하와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러한 인물들 편으로 다가와서 그들에게 인상을 끼친다. 그러면 그들은 정신을 작동하여 이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지극히 놀라운 체험으로 여기게 된다.(교회증언 3권, 72)(Review and Herald, July 27, 1886)

하나님과의 교통은 그분의 뜻에 대한 깊은 지식을 심령에 제공한다. 그러나 믿음을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회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아버지와의 교통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을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결코 느끼지 못했다. 기도하면서 죄를 짓고, 죄를 지으면서 기도하는, 그들의 생애는 악의와 속임과 질투와 시기와 이기심으로 충만해 있다. 이런 종류의 기도들은 하나님께 가증하다. 진실한 기도는 심령의 활력을 보증하고 생애를 감동시킨다. 그와 같이 자기의 소원들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자는 하늘 아래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마음이 비어 있음을 느낀다.(교회증언 4권, 534-535)

263 하나님의 허락이 이루어지는 데는 조건이 있다. 기도는 결코 의무를 대신할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 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고 말씀하셨다. 조건은 이행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약속만을 내세우고 간구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들은 약속의 성취를 받기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을 권위로 사용하지만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표시가 될만한 일들은 행하지 않는다.(실물교훈, 143)

기도는 마치 친구에게처럼 하나님께 마음을 펴 놓는 것이다. 믿음의 눈은 하나님이 매우 가까이 계심을 깨닫게 되고, 간구자는 그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에 대해 귀중한 증거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 많은 기도가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윗은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다른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가 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다시 그는 “마음을 다하여 내게 부르짖지 않은 어떤 사람들에 관하여 말한다. 그런 탄원은 형식화된 기도요, 입술만의 의식이기 때문에 주께서 받아주지 않으신다.(교회증언 4권, 533)

하늘은 의인들의 열렬한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도록 닫혀 있지 않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지만 주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가장 두드러진 방법으로 응답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께 능력을 얻지 못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되어야 한다. 만일 진리를 믿노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의 내면생활이 그들 앞에 제시될 것 같으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은혜 안에서 자라나고 있지 않다. 매우 급한 기도가 때때로 드려지지만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통은 없다.

거룩한 생애에서 향상하려면 기도를 많이 드려야 한다. 264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도를 드렸던가! 얼마나 자주 중보의 음성이 방에서, 헛간에서, 과수원이나 숲속에서 들렸는가. 빈번히 우리는 열렬한 기도로 여러 시간을 보내고, 두세 사람이 함께 약속을 주장했다. 때때로 우는 소리가 들리고, 감사의 음성과 찬양의 노래도 들렸다.(교회증언 5권, 161-162)

하나님은 이기적인 기도를 아주 싫어하신다. - 나는 주님을 기다린다고 공언하는 자들 중에 유다와 같은 자들이 있음을 보았다. 사단이 그들을 조롱하고 있으나 그들은 그것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탐욕과 이기심을 털끝만큼이라도 용인하실 수 없으시며 그러한 악한 경향에 빠져 있는 자들의 기도와 간구를 혐오하신다. 사단은 그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더욱 더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데로 이끌어 가고 있으며 저들이 인색함과 이기심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고 기뻐 어쩔 줄을 모른다. 만일 그러한 자들의 눈이 열릴 수 있다면 그들은 사단의 제안들을 받아들여 그의 함정에 빠져 있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승리의 환성을 지르며 기뻐 날뛰는 사단을 볼 수 있을 것이다.(초기문집, 268)

건조하고 형식적인 기도는 아무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 - 교회는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자들의 새롭고 산 경험을 요구한다. 그리스도를 표명하지 않는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인 간증이나 기도는 교인들에게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하나님의 자녀라 일컫는 모든 신자들이 믿음과 빛과 생명으로 충만해 있다면 진리를 들으러 온 자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증언을 하게 될 것이며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될 것인가! (교회증언 6권, 64)

천국의 모든 보화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탁하셨으므로 주님께서 부지런하고 끈기있게 찾는 자에게 이런 귀중한 선물들을 나누어 줄 수 있게 하셨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고전 1:30)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너무나 형식적인 것이어서 저들은 아무런 선한 감화도 끼치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되지 못한다.

265 만약 교사들이 하나님 앞에서 저희의 마음을 겸비케 하고 미래의 영생을 위하여 청소년들을 교육할 목적으로 맡은 바 책임을 인식한다면 저희들의 태도에 현저한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저들의 기도는 무미건조하거나 맥없는 것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위기를 인식하는 영혼의 열렬한 기도를 올릴 것이다.(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371-372)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기도를 향한 경고 -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탄원은 이기적인 뜻으로 가득찬 마음으로부터 나와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영광돌리게 될 그러한 선물들을 선택하시기를 권고하신다. 그분께서는 땅의 것 대신 하늘의 것을 선택하시기를 바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 앞에 하늘 교역의 가능성과 이점들을 열어 보이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높은 목표로 격려하시고 최고의 보물을 보증하신다. 세상의 소유들이 날아가 버릴 때 믿는 자들은 어떠한 땅의 재앙으로도 잃어버릴 수 없는 부, 하늘의 보물 안에서 기뻐할 것이다.(Sons and Daughters of God, 188)

진짜 기도와 가짜 기도는 대조되었다. -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하고 기도한 가련한 세리는 자신을 심히 큰 죄인으로 보았고 다른 사람들도 역시 그렇게 보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필요를 느끼고 그의 죄와 수치의 무거운 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였다. 그의 마음 문은 열려서 하나님의 신이 그 은혜로우신 역사를 할 수 있게 되고 그를 죄의 권세에게 벗어나게 하실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바리새교인의 교만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기도는 그의 마음이 성신의 감화를 막았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그는 하나님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완전함과 비교하여 그 자신이 더러운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는 도움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으매 아무것도 받지 못하였다.(정로의 계단, 30-31)

형식적인 기도와 믿음의 기도, 두 종류의 기도가 있다.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않을 때 습관적인 구절의 반복은 형식적인 기도이다... 266 우리의 모든 기도에서 마음의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과 우리가 의미하는 것만을 말하는지 극도로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명령에 모든 화사한 말들은 거룩한 소망과는 동등하지 않다. 만일 그들이 마음의 진실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가장 감명깊은 기도는 공허한 반복이다. 그러나 진실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기도는, 영혼의 단순한 소원이 그것이 허락될 것을 기대하며 마치 지상의 친구에게 호의를 구하는 것처럼 표현될 때, 그것은 믿음의 기도이다.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온 세리는 진실하고 헌신한 예배자의 좋은 모본이다. 그는 그가 죄임임을 느꼈고 그의 중대한 필요는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열정적인 갈망의 폭발로 이끌었다.(My Life Today, 19)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라고 말한다. 하늘의 왕께서 드린 이 중보에 비하면 하나님께 드려진 연약하고 무관심한 기도들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많은 사람들이 입술의 봉사로 만족한다. 그러므로 진지하고 열렬하고 애정어린 열망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는 별로 없다.

하나님과의 교통은 그분의 뜻에 대한 깊은 지식을 심령에 제공한다. 그러나 믿음을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회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아버지와의 교통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을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결코 느끼지 못했다. 기도하면서 죄를 짓고, 죄를 지으면서 기도하는, 그들의 생애는 악의와 속임과 질투와 시기와 이기심으로 충만해 있다. 이런 종류의 기도들은 하나님께 가증하다. 진실한 기도는 심령의 활력을 보증하고 생애를 감동시킨다. 그와 같이 자기의 소원들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자는 하늘 아래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마음이 비어 있음을 느낀다. 다윗은 말했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교회증언 4권, 534-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