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뽑은 기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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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구원의 기본적인 요소는 엘렌G.화잇의 거의 모든 책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기 간행물의 기사에 이런 저런 형태로 제시되어 있다. 1888년 미네아폴리스 대총회 당시의 성경 연구와 토론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구원의 요소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는 많은 목사들과 평신도를 양자가 크게 망각하여 왔던 진리였다. 가려뽑은 기별 1권, 51쪽 “그리스도 우리의 의” 부(部)에 미네아폴리스를 배경으로 이 문제가 강조되어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이 위대한 기본적 진리가 이 총회에서 현저하게 대두되고 다른 이들과 함께 이 복된 기별을 교회들에게 전하게 되었을 때 엘렌G.화잇은 얼마나 즐거워했던가! 어쨌든 이것은 해를 계속하며 그의 설교와 저술에 포함되었으며 항상 균형 잡힌 모양으로 제시된 진리였다. 이것은 1881년부터 1902년까지의 강론과 기사를 담은 엘렌G.화잇의 믿음과 행함이라는 책을 구성하는 몇몇의 제시에 의해 입증되었다.

이 장은 3장안에 믿음과 행함에 관계된 중요한 진리를 결집시키고 있다. 그 첫 장은 1820년부터 1888년까지 엘렌G.화잇에 의해 쓰여진 전형적인 진술에 할애되었는데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균형 잡힌 제시를 통하여 그의 명백한 입장을 보여 준다. 그 셋째 장은 그의 일관성 있는 선언을 보여 주는데 그의 전 봉사를 통한 가르침의 통일성을 드러내 준다. 복음의 정수인 이 중요한 진리를 제시함에 있어서의 그의 일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자 약간의 진술이 포함되었다. 그 둘째 장은 그 성격이 역사적인데 미네아폴리스 대총회의 경험과 그 총회 이후 몇 달 동안의 이 경험과 관련된 그의 역할에 대한 회상을 제시한다. 이 장은 그의 역사적 회상에 배경을 제공하기 위한 다소 긴 서론을 가진다.―화잇 유산 관리 위원회.

145 시선을 자신으로부터 예수께로 돌리라-1850 ― “하나님을 믿으라”고 천사가 말했다. 나는 어떤 이들이 믿기 위하여 너무 힘들게 애쓰는 것을 보았다. 믿음은 매우 간단한데 그대들은 그 위를 쳐다본다. 사단은 어떤 정직한 자녀들을 속이기 위하여 애썼으며 그들로 하여금 가치를 찾기 위하여 자신을 보도록 하였다. 나는 그들이 시선을 자신으로부터 예수의 가치로 돌려야 하며 의존적이고 무가치한 그대로의 자신들을 그분의 긍휼하심에 맡기고 믿음을 통하여 그분으로부터 힘과 영양분을 이끌어 내야 함을 보았다.­서신 8, 1850.

오로지 예수의 공로를 의지하라-1862 ― 가족의 모든 구성원마다 교활한 원수를 대항하기 위하여 그들 모두가 할 수 있는 바로 그 만큼의 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하며 각자는 진지한 기도와 불굴의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의지하며 그분의 구원하는 능력을 요청해야만 한다.

흑암의 세력이 영혼의 주변에 몰려와 우리의 시야에서 예수를 가리며 때때로 우리는 슬픔과 놀라움 가운데서 구름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릴 도리밖에 없다. 이러한 기간은 때때로 가공스럽다.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이 두려운 시간에 우리는 오직 속죄의 공로를 믿고 의존하는 것을 배우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주의 공로에 우리의 모든 속절없는 무가치함 속에서 우리 자신을 맡겨야만 한다. 이렇게 하는 한 우리는 결코 멸절되지 않을 것이다-결코!­교회증언 1권, 309, 310(1862).

146 생애를 거룩하게 하는 진리-1869 ― P 형제와 자매는 그들 자신의 집과 마음을 정돈하기 위하여 할 일이 있다…. 그(P 형제)는 생애, 말 그리고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의 성령이 마음에 필요함을 알지도 느끼지도 못해 왔다. 그의 종교적인 경험은 너무나 형식적인 것이었다.

그는 진리의 이론은 알고 인정하였으나 진리를 통한 성화의 특별한 역사는 잘 알지 못하였다. 자아가 나타났다. 만약 집회에서 그의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 어떤 것이 말하여진다면 그는 사랑과 겸손으로가 아니라 심히 통렬한 말로 거칠게 책망하였다. 이 강한 언사는 어떤 그리스도인이 사용하기에도 부적합한 것으로서 그 자신이 보다 훨씬 큰 경험을 필요로 하고 있고 고쳐야 할 잘못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는 자에게 있어 특히 부적합하다.­원고 2, 1869.

참된 성화가 맺는 열매-1874 ― 그대는 올바른 품질의 열매를 맺는 진품이 아닌 성화와 거룩함에 대한 견해를 품어 왔다. 성화는 외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집회에서의 기도나 권면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생애 그 자체를 취하여 말과 행동을 꼴 짓고 품성을 변화시킨다….

주님의 영을 가진, 진실로 성화된 사람에 의하여 채워질 필요가 있는 중요한 자리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일과 노력이 품성의 결함으로 인해 손상되지 않도록 자아를 극복해야 할 가장 강력한 필요가 있다.­원고 6, 1874.

에녹과 엘리야에 의해 완성된 품성-1874 ― 아담 이후로 매 세대마다 다소의 사람들이 그의 모든 책략을 대항하고 인간의 능력 안에서 행하고 되어지는 것에 대한 고상한 대표자로 나섰다-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노력에 협력하셔서 사단의 능력을 극복하는 것을 도우셨다. 에녹과 엘리야는 인간이 선택만 한다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인류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올바른 대표자들이다. 147 사단은 이들 고상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싼 도덕적 오염 중에서도 오점이 없이 섰으며 의의 품성을 완성하였고 하늘로 승천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 사실 때문에 크게 당황하였다. 사단의 유혹을 극복하였으며 도덕적 능력에서, 고상한 정직성에서 뛰어나므로 그는 그들을 죽음의 권세 아래로 끌어들일 수 없었다. 그는 그의 유혹으로 모세를 정복할 능력을 가졌으며 그의 탁월한 품성을 손상시킬 수 있었고 그로 하여금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께 속한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는 죄를 범하도록 유도할 수 있었음으로 승리하였다.­리뷰 앤드 헤랄드, 1874년 3월3일자.

구원에 있어서의 믿음과 행함-1878 ― 그대의 모든 선한 행위가 그대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대가 선한 행위 없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희생이 그대의 영원한 이득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리뷰 앤드 헤랄드, 1878년 3월21일자.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필수적임-1879 ― 그대의 믿음이 간혹 약하였고 전망이 혼란스러웠으나 그대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왔다. 예수는 그대의 구주이다. 그분은 그대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대가 그분을 필요로 하고 있고 그대가 불완전한 중에 그분을 의지하여 왔기 때문에 그대를 구원하는 것이다. 나의 귀중한 자녀여,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사랑하신다. 그대는 “당신의 보좌의 그늘 아래서 우리는 안전히 거할 수 있네, 당신의 팔만으로도 충분하네, 우리의 방비는 안전하네”라고 노래할 수 있다.­서신 46, 1879.

의의 행동이 심판 날에 달려짐-1881 ― 목사들은 간혹 백성들에게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단지 믿기만 하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모든 일을 행하셨고 그들 자신의 행위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 때에 저울 눈금이 정확하게 가리킬 것과 심판은 제출된 증거에 기초할 것임을 명백하게 진술한다.

한 사람은 열 도시의 치리자가 되고 다른 이는 다섯, 또 다른 이는 둘, 각자는 경영하도록 그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그가 증가시킨 비례를 따라 정확하게 받는다. 의로운 행위에 있어서, 우리 자신을 위해 그리고 영혼의 구원을 위해 드려진 우리의 노력은 우리의 보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리뷰 앤드 헤랄드, 1881년 10월25일자.

148 그리스도 안에서의 엘렌G.화잇의 유일한 소망-1881 ― 최근의 사별을 통해 나는 영원을 가까이 볼 수 있었다. 나는 크고 흰 보좌 앞으로 이끌려 가는 것 같았으며 나의 생애를 장래 거기에 나타날 그대로 보았다. 나는 자랑할 것이나 청원할 공로를 발견할 수 없다.

“오 나의 하나님, 당신의 호감을 전혀 살 수 없을 만큼 무가치, 무가치합니다”라는 것이 나의 부르짖음이다. 나의 유일한 희망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 있다. 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요청한다. 예수는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김 없이 구원하실 것이다.­리뷰 앤드 헤랄드, 1881년 11월1일자.

품성의 완성을 위하여 투쟁함-1882 ― 우리의 영혼에 점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평강 중에 주님을 뵐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녀야만 한다. 모든 생각마다 그리스도의 뜻의 지배를 받아야만 한다. 위대한 사도에 의하여 표현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진지한 노력 없이는 결코 획득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 품성의 완전에 이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매일 외적인 악과 내적인 죄를 대항하여 투쟁해야 한다.­리뷰 앤드 헤랄드, 1882년 5월30일자.

서론적 언급: 미시간 주 배틀크릭에서 1883년에 열린 대총회 기간 중에 엘렌G.화잇은 아침 집회 시에 연속 13 회에 걸쳐 목사들에게 기별을 전했으며 마치는 안식일에는 총회 앞에서 설교하였다. 그 다음해에 리뷰 앤드 헤랄드 지는 그 모든 연속 설교를 실었다. 4차례의 기별을 통하여 그는 아래에 나오는 발췌문에서 제시된 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원리들을 제시하였다. 이 집회들의 관문이 된, 좀 더 기본적인 기별, “그리스도 우리의 의”는 1893년판 복음교역자, 411쪽에 처음으로 실렸으며 가려뽑은 기별 1권, 350-354쪽과 믿음과 행함, 35-39쪽에 다시 실렸다.-편집자 주.

금요일, 1883년 11월 9일-예수를 보라 ― 오늘 아침 주님께서 당신을 우리 중에 힘있게 나타내기 위하여 진지한 중보의 영이 임했다. 기도를 통하여 나의 마음이 특별히 토로되었고 주님께서는 들으시고 우리를 축복하셨다. 실망한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였는데 그들은 그들의 불완전함이 너무 크므로 주님께서 그들을 당신의 사업에 사용하실 수 없다고 느꼈다. 이것은 불신의 말이었다.

149 나는 이 귀한 영혼들에게 우리의 피난처시요 필요할 때마다 즉시 도우시는 도움이신 예수를 지적해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분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우리를 포기하지는 않으신다. 우리는 잘못을 범하고 그분의 영을 슬프게 해 드릴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그분께 나오면 그분은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다….

안식일, 1883년 11월 10일 ― 있는 그대로 나오라-나는 이런 증언을 들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빛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나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이런 증언은 불신과 흑암을 나타낼 뿐이다.

그대는 그대의 공로로 하나님의 호감을 살 것과 또한 그분의 구원의 능력을 신뢰하기 전에 죄로부터 벗어나야만 할 것을 기대하는가? 이것이 그대의 마음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투쟁이라면 나는 그대가 아무 힘도 얻지 못하고 결국은 절망하게 될까 두렵다. 광야에서 구리 뱀이 들려진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이끄시기 위하여 들리셨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방법인 그 뱀을 쳐다보는 모든 자들은 고침을 받았다. 이와같이 우리의 죄중에, 우리의 큰 필요 중에, 우리는 “보고 살”아야만 한다.

그리스도가 없는 속수무책의 우리들의 상태를 깨달을 때에 좌절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구주의 공로를 의지해야만 한다. 죄로 병들고 불쌍한, 실망한 영혼은 보고 산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서약하셨다. 그분은 그분에게 오는 모든 자를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와서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자.

예수는 오늘날 우리의 구주이다. 그분은 하늘 성소의 지성소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며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다. 확실한 기초를 의지하듯이 하나님을 의심 없이 의지하는 것과 그분에게 나오기 전에 우리 스스로의 속에서 어떤 의를 찾고자 노력하는 것과는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 상황을 완전히 다르게 만든다. 자신으로부터 눈을 돌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의심하는 것은 죄다. 지극히 적은 불신이라도 그것을 마음에 품는다면 영혼을 죄에 몰아 넣을 것이며 큰 흑암과 좌절을 가져 올 것이다….

150 어떤 이들은 그들이 시험 중에 있으며 그분의 축복을 요청하기 전에 그들이 개선되었음을 주님께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귀한 영혼들은 바로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요청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연약함을 돕도록 그분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영을 가져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형성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죄된, 무력한, 의존적인 상태로 그분께 나오는 것을 좋아하신다. 우리는 밤과 어두움의 자녀가 아니라 빛의 자녀라고 공언된다. 믿지 않을 무슨 권리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가?­리뷰 앤드 헤랄드, 1884년 4월22일자.

수요일, 1883년 11월 14일-참된 종교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함을 의미함 ― 어떤 이들은 항상 예수를 바라보기보다 자신을 바라본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을 필요가 있다. 만약 그대가 그대 자신의 의를 의지한다면 그대는 정말로 약하다. 이는 그대가 사단의 창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대가 지금 누리는 특권 후에 그대는 심한 투쟁을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너무 냉랭하다. 예수님의 마음속에서 불타던 그 사랑이 그대에게 부족하기 때문에 사업은 방해를 받는다. 그대는 너무 믿음이 적다. 그대는 적게 기대하므로 적게 받으며 매우 작은 성공으로 만족해 한다. 그대는 자칫 스스로 속거나 경건의 모양으로 만족하며 쉴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마음속에 산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진리가 하늘로부터 온 능력으로 전파되어야만 한다. 예수께서 그대의 노력을 통하여 역사하셔야만 그대는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샘은 열려 있다. 우리는 새롭게 될 수 있으며 다른 이들을 새롭게 할 수 있다. 만약 그대 자신의 영혼이 그대가 전파하는 엄숙하고 명백한 진리에 의해 활력을 얻는다면 냉랭한 마음, 늘쩍지근함, 나태함은 사라질 것이며 다른 이들이 그대의 열심과 진지함의 영향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참된 종교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데 미달하거나 그분이 명령한 모든 것에 대해 순종하는 데에 못 미치는 그러한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주며 그리스도의 의를 입혀 주며 마음과 정서의 최상의 기능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발휘되도록 증진시켜 준다. 가장 가난한 사람과 가장 죄된 사람도 무한한 가치의 선물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의 매우 단순한 조건 아래, 무한한 부, 영생의 영광과 축복이 우리에게 부여된다. 151 우리는 순종하고 믿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 그분의 요구에 대한 순종은 금생에서라도 우리의 행복에 필수적이다.­리뷰 앤드 헤랄드, 1884년 5월 27일자.

월요일, 1883년 11월 19일-그를 보고 살라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룩함의 좁은 길을 걷는 고된 일을 하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이 축복된 길의 평화와 안식은 과거의 여러 해 동안 그랬던 것보다 오늘날 더 가까워지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가까운 것을 멀리 본다. 그들은 예수께서 매우 단순하게 해 놓으신 것을 복잡하게 만든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구원의 계획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세상의 지혜는 너무 많이, 그리스도의 의의 지혜는 너무 적게 추구되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사랑 가운데 안식할 수 있었던 영혼들이 의심하고 많은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였다.

여기에 증거된 증언들은 위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다른 이들을 용서하실 것을 믿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각자가 스스로 산 믿음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그리스도께서 그대들을 기꺼이 받아들임에 대하여 의심을 표현하는 것이 유익한가? 나는 그대들이 느낌을 너무 많이 의존하고 그것을 척도로 삼는 것에 대하여 우려한다. 그대들은 이 노선을 택하므로 많은 것을 상실할 것이다. 그대들은 자신들의 영혼 뿐 아니라 그대들을 바라보는 자들의 영혼도 약화시킨다.

그대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들의 것으로 하면서 스스로 예수를 신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그분에 대한 겸손하고 거룩한 신뢰를 가지도록 교육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의무를 등한히 하여 왔으며 마땅히 기도하여야 할만큼 기도하지 않았음을 느낀다.

그대는 예수로부터 얼마간 떨어져 있으며 그분이 그대로부터 물러가셨다고 생각하나 그분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은 바로 당신이다. 그분은 그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분은 통회하는 마음을 받으실 것이다. 그분의 입술은, 부모가 그 자녀에게 좋은 선물 주기를 원하는 것보다도 더 그분에게 요청하는 자들에게 성령 주시기를 바라신다고 확약하셨다.

152 우리는 죄에 의하여 상처를 입고 오염되었다. 그 문둥병으로부터 치유함을 받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대의 능력 안에 있는 이상, 영혼의 성전을 모든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하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을 보라.

그대가 그대의 필요를 인식한다면 그대의 모든 힘을 그것들을 묘사하고 슬퍼하는 일에 쏟지 말고 바라보고 살라. 예수는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시다. 치료를 받아야 할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분이 제공하는 은혜를 거절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공로를 신뢰하는 자는 단 하나라도 멸망되도록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왜 그대는 예수께로 와서 안식과 평화를 받기를 거절하는가? 그대는 오늘 아침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사단은 그대가 무력하며 스스로를 축복할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대는 무력하다. 그러나 그의 앞에 예수를 높이라. “내게는 구주가 있다. 나는 그분을 신뢰한다. 그분은 결코 나를 당황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의 이름으로 나는 승리한다. 그분은 나의 의이며 기쁨의 면류관이시다.” 오늘 여기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도 자신의 경우가 절망적이라고 생각지 말라. 그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죄되고 파멸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 이유로 그대에게 구주가 필요한 것이다. 고백해야 할 죄를 가지고 있다면 시간을 잃지 말라. 이 순간은 금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채워질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고귀한 주님! 그분의 팔은 우리를 맞기 위하여 열려 있으며 그분의 사랑의 위대한 마음은 우리를 축복하시려고 기다리신다.­리뷰 앤드 헤랄드, 1884년 7월1일자.

거짓 성화-1885년 ― 아마도 그대가 알지 모르지만,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교인이 아닌 브라운이라는 목사가 있었다.* 그는 거룩하다고 주장하였다. 153 그는 “회개의 개념은 성경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 나는 그가 침례를 받았든 그렇지 않든 바로 입교시키겠다. 나는 상당한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였다.”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나는 6년 동안 한 가지의 죄도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성화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 배에 얼마간 타고 있다. 이것을 가르치는 화잇이라는 한 여인이 이 배에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것을 들었으며 그에게로 다가가서 말하였다. “브라운 목사여, 지금 곧 멈추십시오. 나는 그러한 진술이 계속되도록 허용할 수가 없습니다. 화잇 여사는 그의 저서 어디에서고 결코 그러한 것을 기록한 바가 없으며 그러한 것을 말한 바도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율법이 어느 누구도 성화시킨다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만 하며 그렇지 않으면 하늘 왕국에 구원되지 못할 것임을 믿습니다. 범법자는 영광의 왕국에 구원될 수 없습니다. 율법은 서서 ‘그대의 죄가 도말되도록 회개하라’고 부르짖는 것이므로 어느 누구를 성화시키거나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후에 죄인이 예수께로 나아가서 죄인으로서 그가 율법의 요구를 순종하겠다고 약속하게 될 때에 그분은 그들의 죄된 흠을 도말하시고 자유롭게 하시며 그들에게 하나님과 함께 능력을 베푸는 것입니다.”­원고 5, 1885.

계명을 범할 자유, 하나의 기만-1886 ― 그대는 “단지 믿기만 하라”는 외침을 들을 것이다. 사단도 믿고 떨었다. 우리는 사랑으로 역사하며 마음을 정결케 하는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해 놓으셨으므로 우리는 계명을 계속 범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보급된다. 이것은 원수가 일찍이 고안한 기만 중에 최대의 기만이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계명을 범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택하여야만 하며 다른 이들에게 영적 사물을 교훈할 수 있도록 그러한 영적 상태 안에 있어야 한다.­원고 44, 1886.

예수를 통한 도덕적 힘-1886 ― 그리스도는 사람이 그분의 도움이 없이는 승리할 수 없음을 아셨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부요하게 되도록 그분의 왕복을 벗고 그분의 신성을 인성으로 옷 입으시는 것에 동의하였다. 154 그분은 이 세상에 오셨으며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우리를 어떻게 동정하실 줄을 제대로 아시며 극복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를 도우실 줄을 아신다. 그분은 사람에게 도덕적 능력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지 사람에게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음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다. 이는 각자가 스스로 할 일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의 공로를 통해 우리가 죄와 마귀를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원고 46, 1886.

선량한 체하는 종교는 죄를 경시함-1887 ―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둘 것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세상에서 거두어지고 있으며 큰 빛과 기회를 가졌으나 그것들을 증진시키지 않았던 자들에게서 먼저 거두어질 것임을 나는 전적으로 믿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을 슬프시게 하여 떠나게 하였다. 사람들의 마음과 교회와 국가에 현재 역사하고 있는 사단의 활동은 예언을 연구하는 모든 자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끝은 가깝다. 우리 교회들을 일깨우라. 하나님의 회심시키는 능력이 교인 개인의 마음에 경험되도록 하라.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깊은 감동을 보게 될 것이다. 단지 죄에 대한 용서는 예수의 죽음의 유일한 결과가 아니다. 그분은 죄가 옮겨지는 것 뿐 아니라 인성이 회복되고 다시 아름답게 되며 그 파멸로부터 재건되어 하나님의 존전에 적합하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 무한한 희생을 하셨다….

그리스도는 그 아래가 땅에 놓여졌고 그 꼭대기가 가장 높은 하늘에 닿았던 야곱이 본 사다리이다. 이것은 구원의 지정된 방법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사다리의 계단을 하나 하나 올라가야 한다. 우리 중 누구든지 마침내 구원을 받는 것은 사다리의 계단처럼 예수께 매달림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의 지혜와 의, 성화와 속죄가 되셨다….

진리를 가졌으므로 든든히 선다고 생각하나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것처럼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 비참하게 무너지는 일이 있을 것이다. 순간의 부주의가 영혼을 돌이킬 수 없는 멸망으로 던져 넣을 수 있다. 하나의 죄가 두 번째 죄로 인도하고 두 번째 죄는 세 번째를 위한 길을 예비하며 그렇게 계속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충실한 사자들로서 계속하여 그분에게 그분의 능력에 의하여 유지될 것을 청원해야만 한다. 155 만약 우리가 의무로부터 한 치라도 빗나간다면 우리는 그 종말이 파멸인 죄의 길을 따를 위험이 있다.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붙들어 매며 그분의 품성의 완전을 획득하는 일에 전력을 투구하는 이 한 길 안에서만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있다.

죄를 경하게 여기며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늘 말하는, 이 선량한 체하는 종교는 죄인 줄을 알면서도 죄를 계속하여 짓고 있는 그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도록 죄인을 부추긴다. 이것이 현대 진리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방법이다. 진리가 그들의 생애와 분리된다. 이것이 진리가 영혼으로 하여금 죄를 느끼고 회개하게 하는 더 이상의 능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이다. 세상, 그 관습, 그 행습, 그 유행을 떠나고자 하는 모든 신경, 영혼, 근육의 당김이 있어야만 한다….

만약 그대가 죄를 버리고 산 믿음을 행사하면 하늘 축복의 부요함이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서신 53, 1887.

재림이 영혼의 준비를 끝냄-1888 ― 그대의 품성의 두루마기는 모든 더러움을 위하여 열린 샘에서 점이 없기까지 빨아야 한다. 그대의 도덕적 가치는 성소의 저울에 의해 달릴 것이며 부족한 것이 드러나면 그대는 영원히 손실될 것이다. 모든 야비함, 모든 거친 것들이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그대의 품성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이는 그가 오실 때 모든 영혼들의 준비는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질투, 시기, 서로 간의 미움들을 버리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대는 동일한 성질을 지니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르러 올 세계에는 이런 성품은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사랑과 기쁨과 조화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보다 빛나는 면류관을 가질 것이나 구원을 받은 자들 중의 어느 마음에도 질투의 생각은 없을 것이다. 각자는 온전히 만족하게 될 것이며 모두가 그들의 행위를 따라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영문 시조, 1888년 2월 10일자.

156 이 장은 1888년 대총회가 끝난 지 수 주 후에 엘렌G.화잇에 의해 작성된 진술을 제시한다. 그는 장면을 되돌아보고 일어난 일을 묘사한다. 미네아폴리스에서의 집회는 달이 갈수록 보다 나은 전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엘렌G.화잇의 진술은 가장 계몽적이며 중요하다. 역사적 상황에 대해 개략적으로 재음미하는 것이 적절하다.

미네아폴리스 대총회는 갈라디아서의 율법에 대한, 그리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성경 연구와 토론으로 유명하다.

91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이 총회는 미네소타 주 미네아폴리스에 새로 새워진 우리 교회당에서 10월 17일부터 11월 4일까지 열렸다. 관습에 따라 대표가 아닌 일단의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교인들도 참석하였다. 이 총회에 앞서 10월 10일부터 10월 16일까지 7 일간의 목회 강좌가 열렸다. 목회 강좌에서 시작된 성경 연구는 총회의 성경 연구 시간에 할당되어 총회 기간까지 연장되는 경우가 있었다.

엘렌G.화잇은 강좌와 19 일간의 총회 둘 다 출석하고 참여하였다. 총회 그 자체는 상당히 판에 박힌 듯하나 건설적이다. 보고들이 받아들여지고 안식일학교부, 건강절제부, 출판전도부와 같은 각종 부서들의 모임이 열렸다. 157 교역의 분야들이 목사들에게 배당되고 사업의 발전을 위한 계획이 놓여지고 임원들이 선출되고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총회가 끝나기 이틀 전에 남쪽 주들에서 일하고 있는 동료 목사에게 써 보낸 W.C.화잇의 펜으로부터 성취와 감상에 대한 현장에서의 회고가 우리에게 전달된다.

“우리는 또 하나의 대총회를 끝내려 하고 있습니다. 며칠 후면 대표자들이 각자의 임지로 흩어질 것이요, 또 다른 년도의 사업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번 총회는 매우 흥미 있는 총회였으며, 가끔 나타나던 그 모든 평화와 조화가 따르지는 않았으나 과거에 열렸던 회집만큼은 유익했던 것 같습니다. 이는 많은 중요한 원칙들이 돌출되었으며 장래 우리의 사업에 영향을 미칠 때에 큰 가치를 발휘할 결론도 얼마간 도출되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모임을 통해 이전에는 결코 해 본 적이 없는 그런 방법으로 성경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더욱 분명한 설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보고서에서 보아 명백히 아시는 대로 우리의 해외 선교 사업에 많은 진척이 있었으며 남부의 사업의 발전을 위한 얼마간의 좋은 활동이 있었습니다.”­스미스 샤프에게 보내는 W.C.화잇의 편지, 1888년 11월 2일에 미네소타 주 미네아폴리스에서 기록.

발전에 대한 보고와 함께 화잇 장로의 “가끔 나타났던 평화와 조화”가 우리 대총회에 결핍했던 것에 대한 언급이 관찰될 것이다. 여기서 그는 1888년 모임을 재림 교단 역사상 어떤 다른 총회와도 다르게 만든 신학적 토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토론은 한 주일간의 목회 강좌에서 시작되었는데 의사 일정에 따르면 그 때에는 열 왕국, 그리스도의 신성, 치명적인 상처의 치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등의 주제가 고려되도록 되어 있었다. 열 왕국에 대한 토론이 격심해져서 어처구니없이 많은 시간이 소비되었다. 계획된 몇 주제들이 한꺼번에 제외되었다. 158 강좌가 끝날 무렵에 시조의 부편집인인 E.J.와그너 장로가 갈라디아서의 율법에 대한 일련의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그것은 점차 그리스도인 믿음과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그의 제시로 바뀌었다. 이것은 대총회 기간의 첫 주 내내 계속되었다.

후에 따른 논쟁을 유발시킨 것은 이 일련의 성경 공부, 특히 갈라디아서의 율법의 논쟁적 주제를 건드린 그 공부였다. 토론의 사본은 만들어지지 않았으나 한두 대표의 개략적 필기와 엘렌G.화잇의 기록, 그리고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의 회상은 논쟁의 격심함과 몇몇 유명한 교회 지도자들의 부정적인 태도의 해로운 영향을 보여 주고 있다.

대표들이 미네아폴리스에 모이기 전부터도 몇 해 동안 이 중요한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또한 이미 엘렌G.화잇의 경고와 책망의 기별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는 태도가 어떤 이들의 마음에 형성되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일부 지도적 목사들이 그에게 나타내는 이상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감지하고 있었다.

E.J.와그너가 갈라디아서의 율법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연구로 들어갈 때에 논쟁적 정신이 토론에서 어떤 이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것은 엘렌G.화잇을 크게 근심시켰다. 비록 갈라디아의 율법에 대해 와그너가 제시한 모든 훌륭한 요점에 와그너 장로와 즉각 동의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으나 그의 마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원칙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얻어지는 의에 대한 그의 명백한 공표에 의해 뜨거워졌다. 그는 미네아폴리스에서 스무 번 설교하였는데 특히 새벽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그는 편견 없는 성경 연구에 대해 호소하였다. 그 자신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주제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이 중요한 진리를 강조할 때에 그에 대한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1893년 대총회에서 A.T.존스는 미네아폴리스에서 제시된 이 진리를 받아들임에 대해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거기 있던 어떤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였으며 다른 이들은 전적으로 거절하였음을 나는 안다. 여러분도 같은 사실을 알 것이다. 다른 이들은 중간 지점에 서려고 애썼으며 그것을 그렇게 받아 들였다.”­대총회 보고서, 1893, 185.

159 토론은 간혹 뜨거워졌다. 어떤 이들은 이 새로운 강조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특히 안식일 진리에 대한 교회의 강력한 입장을 약화시킬 것을 우려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에 대하여 강하게 반발하였다. 성경 연구에서 제시된 이런 저런 논점에 대해 총회는 어떤 의결도 하지 않았다.

엘렌G.화잇은 총회가 마치는 날 기록한 편지, 이 부(部)에 실린 편지에서, 그들이 통과한 “거의 이해하기 힘든 전쟁의 줄다리기에도 불구하고 나의 믿음과 용기는 양호하다”고 보고하였으며 가까이서 그것을 보고는 “집회는 크게 좋은 결과를 낼 것이”(서신 82, 1888)라는 확신을 표명하였다. 수 주 후에 그는 미네아폴리스 대총회에서의 일을 회상하는 진술을 기록하였는데 그 대부분이 이 부(部)에 포함되었다.

총회가 끝나고 몇 주와 몇 달이 지나는 동안 반대의 단단한 덩어리가 교단의 총본부이며 그 주된 기관들 중의 셋이 위치한 배틀크릭에서 생겨났다. 엘렌G.화잇은 그 기별을 교회들에 전하기 위하여 일선으로 나가느라 배틀크릭을 자주 비웠다. 때때로 그는, 세 사람이 모두 복음의 귀중한 진리를 제시하는 일에 종사하였으므로, 존스 및 와그너 장로와 함께 일했다. 그는 1889년 1월 남 랭카스터에서 열린 우리 목사들의 중요하고도 성공적인 집회를 인도하였는데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크게 축복을 받았다.” 한 보고가 이 장(章)에 포함되어 있다.

엘렌G.화잇의 서류철은 1889년 5월 11일 캔자스 주 오타와의 장막 집회에서 주어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본 원리들에 대한 강력한 기별을 담고 있다. 이것과 그 반응에 대한 그의 보고가 그의 책 믿음과 행함, 63-84쪽에 나타난다.

시카고, 덴버, 콜로라도에서는 승리하였는데, 이곳에서 1889년 9월에 열린 장막 집회에서 그는 교역자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진정한 이해의 필요에 대해 말했다. 덴버의 기별이 이 부에 나타난다.

160 미네아폴리스 집회 이후 꼭 일년만에 열린 1889년 대총회에 참석하는 동안 그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우리는 가장 뛰어난 집회를 열고 있다. 미네아폴리스 집회에 있었던 정신은 여기에는 없다. 모든 것이 조화롭게 진행된다. 대표들이 많이 참석한다. 아침 5시 집회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며 집회들은 훌륭하다. 내가 들은 모든 간증들은 고양시키는 성격의 것이었다. 그들은 작년이 그들의 생애에 있어서 최상의 해였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비춰 나오는 빛-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그리스도 우리의 의는 명백하고 뚜렷하였다. 그 경험은 매우 흥미로웠다.”­원고 10, 1889(가려뽑은 기별 1권, 361).

1890년 2월 3일, 목회 강좌를 위해 배틀크릭에 모인 목사들에게 기별을 전하면서 그는 1889년 한해 동안 겪은 그의 경험을 회고하였다. 그의 진술이 이 서론의 한 부분을 적절하게 형성한다.

“내가 알기로 그분의 백성들을 위한 기별을 가진, 그분의 사자들인 그 하나님의 사자들과 내가 함께 설 수 있도록 우리는 그 모든 여러 집회의 장소를 내내 함께 여행하였다. 나는 그들과 함께, 그들이 증거하고 있는 바로 그 기별과 정확히 조화를 이루는 나의 기별을 전했다. 우리는 무엇을 보았던가?

우리는 그 기별에 능력이 함께 하는 것을 보았다. 매 번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안다. 시카고에서는 형제들의 마음에 이 개념을 심어 주고자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꼬박 일주일인가를 일했다고 생각한다.

마귀는 이 개념 전체를 말살하기 위하여 일년 내내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오랜 의견을 바꾸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으며 그것을 그들의 생활과 그들의 품성에 이끌어 들이지 않고 그들 자신의 의와 자신의 행위를 신뢰해야만 하며 계속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일주일을 일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깨짐이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은 밀물의 파도처럼 그 회중 위에 굽이쳤다. 161 정말이지 그것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들에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가리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남 랭카스터에서는 강력한 하나님의 영의 감동이 있었다. 여기 있는 분 중에 어떤 분은 그 집회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셨으며 대학의 모든 학생들은 깨우치고 회개하였으며 하나님의 영의 감동이 거기에 있었다.

이렇게 여기 저기를 다녔다. 우리가 간 모든 곳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보았다.

그대는 내가 열 문둥이들처럼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나의 목소리를 높여서 하나님의 의를 노래하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내가 본 증거들을 그대들이 볼 수 있도록 그것을 그대들에게 제시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말들은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 언제까지 이와 같아야 하는가? 사업의 중심에 있는 백성들이 언제까지 하나님을 대적하겠는가?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 있는 사람들이 이 일을 함에 있어서 자신을 떠받치겠는가? 형제들이여 그 길에서 떠나라. 하나님의 법궤에서 손을 떼고 하나님의 영을 들어오게 하여 강력한 힘으로 역사하게 하라.”­원고 9, 1890.

막 인용한 마지막 문단의 감정을 주목하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기별을 받아들이는 것을 미네아폴리스 대총회에 참석한 어떤 이들은 저항하고 그 후에 다른 이들은 받아들이는 동안, 그 사업의 중심부에서는 저항이 신속하게 형성되었다. 일선 교인들 중에서의 받아들임은 엘렌G.화잇의 보고처럼 이와는 아주 달랐다. 교회의 바로 그 본부에서 “어떤 이들”(목사들에게 보내는 증언, 363쪽 참조)이 나타낸 완고한 저항은 주님께서 성취되도록 의도하신 사업을 크게 지연시켰다.

1890년이 마쳐질 즈음 엘렌G.화잇은 이에 대해 기록하였다. “미네아폴리스에서 편만했던 그 편견과 의견은 전혀 죽지 않았다. 거기에서 어떤 이들의 마음에 뿌려진 씨는 곧장 싹터서 살아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에 따르는 수확을 할 것이다”(목사들에게 보내는 증언, 467).

이와 관련하여 그는 기록하였다. “어떤 이들은 순수한 금과 단지 번쩍이는 것을 구별하는 일에 실패하였다”-전게서. 162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공로를 통한 유일한 용서를 가르치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옹호하는 참된 종교, 성경의 유일한 종교는 경시되었으며, 반박되었으며, 조롱을 받았으며, 거절되었다.”­전게서, 468.

A.V.올손은 그의 책 위기를 통과하여 승리로에서 미네아폴리스 이후 5 내지 6년 동안에 잇따라 일어난 보다 나은 상태로의 점차적인 변화의 역사와 증거들을 기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업의 진전에 있어서 비극적인 방해가 있었다. 엘렌G.화잇은 이것을 인식했으며 간혹 이를 언급했는데 통상적으로 부수적인 진술에서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경우에도 1888년 대총회에서 주목을 끌었던 그 귀한 기별에 대해 교회 지도자들이 공식적으로 거절했음을 암시하거나 선언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 유명한 총회 후 꼭 4년만인 1892년 12월 19일, “대총회의 친애하는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의기양양하게 선언하였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여기까지 전진한 모든 발자국을 따라 여행해 온 우리의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볼 때에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을 보면서 놀라움과 인도자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로 가득 찬다. 우리는 주님이 과거 우리의 역사에서 우리를 인도하신 방법과 그분의 가르침을 잊는 것 외에는 미래에 대하여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신뢰를 주님께 둔다면 우리는 지금 강한 백성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강력한 진리를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께 감사할 것 뿐이다.”­대총회 보고서, 1893, 24(엘렌G.화잇 자서전, 196; 목사들에게 보내는 증언, 31쪽 참조).

1907년 그는 다시 기록하였다. “교회는 활동을 증가시키고 그 지경을 넓혀야 한다…. 우리의 독특한 성격을 유지하려는 노력에 있어서 격렬한 논쟁이 있어 왔으나 우리는 늘 성서적 그리스도인으로서 세력을 넓혀 왔다.”­서신 170, 1907(가려뽑은 기별 2권, 396, 397).

163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우리는 이 부의 역사적 장들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린 대총회에 참석할 목적으로 록키 산맥을 넘는 모험을 한 것은 믿음으로 한 것이다….

미네아폴리스에서 우리는 목사 대표자들을 많이 만났다. 나는 집회가 시작되는 바로 그 때에 이미 내게 부담을 주는 정신을 감지하였다. 백성들이 매우 필요로 하던 음식을 제공하지 못하는 설교들이 주어졌다. 추억의 전당에 걸도록 그림의 캄캄하고 어두운 면이 그들에게 제시되었다. 이것은 빛과 영적 자유가 아니라 실망을 가져 올 것이었다.

나는 안식일 오후(1888년 10월 13일)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나타내시는 사랑에 대하여 거기 참석한 백성의 마음을 상기시키라는 성령의 깊은 감동을 받는 것을 느꼈다. 마음은 우리 믿음의 가장 불쾌한 모습에 계속 머무르도록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장미와 백합과 석죽이 가득한 정원으로 표상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귀한 약속을 꺾어 그 약속들을 우리 자신의 마음의 것으로 삼고 용기를 낼 수 있다. 그렇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가시와 엉겅퀴에 고정시키고 우리 자신을 크게 상하게 하며 우리의 힘든 몫을 슬퍼하게 될 지 모른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추억의 전당에 어둡고 고통스러운 그림을 거는 것을 즐겨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모든 영혼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정원에 온통 피어나는 하나님의 귀한 약속을 추억의 전당에 걸면서 장미와 백합과 석죽을 꺾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곰곰이 생각하게 하시며 우리의 감각을 예민하고 확실하게 하시고 우리가 그것들을 그 충만함 가운데서 취하여 들이며 우리 앞에 놓인 기쁨에 대하여 말하게 하신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처하여 사나 속하여 살지 않고 우리의 애정을 영원한 사물에 붙들어 두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분이 마련하여 두신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끌 것이며 우리의 희망과 기대를 일깨우고 이 세상의 투쟁과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을 강화시킬 것이다. 164 우리가 이 장면을 곰곰이 생각할 때, 주님은 우리의 믿음과 확신을 격려하실 것이다. 그분은 베일을 걷고 우리에게 성도들이 받을 유산의 모습을 보여 주실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선하심, 사랑, 부드러운 애정을 제시할 때에 주님의 영이 나에게만 아니라 백성에게도 임하는 것을 느꼈다. 빛과 자유와 축복이 청중에게 이르러 왔으며 발해진 말씀에 대한 전적인 반응이 있었다. 뒤이어 따른 기도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청중들의 마음에 자리잡았다는 것을 증거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이 그들의 생애의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간증하였으며 그 시간은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다. 이는 주 예수께서 축복하시기 위하여 회중 가운데 임재하셨음을 우리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의심을 잠재울 목적으로, 그리고 화잇 자매와 그에게 주님이 하라고 주신 일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에 용납된 불신의 밀물을 밀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특별한 계시가 주어졌음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움을 얻었으나 전부는 아님 ―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새롭게 되는 시간이었으나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임하지 않았다. 화잇 자매가 그들의 모든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 총회에서 표결된 제안이나 결의와 조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이 받았던 증거가 마치 예수께서 회당에서 나사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그랬던 것처럼 가벼워지고 말았다. 그들(나사렛의 청중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감동되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거룩한 영향을 보고 느꼈으며 모두가 그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사단은 그의 불신을 가지고 그들 편에 섰으며 그들은 의문과 의심을 용납하였고 불신이 따랐다. 하나님의 영은 꺼지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분노가 그분을 해치지 못하도록 그분을 보호하지 않으셨더라면 그들은 격노하여 예수를 낭떠러지에 집어 던졌을 것이다. 일단 사단이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되던 자들을 어리석고 악랄하게 만든다. 편견, 자만, 완고함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비참한 요소들이다.

165 엘렌G.화잇이 지도자들 중의 어떤 이들을 충고함 ― 나는 버틀러 장로*로부터 긴 편지를 받아서 주의 깊이 읽었다. 나는 그 내용에 놀랐다. 나는 이 편지를 어찌해야 할지 몰랐으나 거기에 나타난 동일한 생각이 일어나며 내 형제 목사들을 지배하는 듯하므로 나는 그들 중의 몇을 윗방으로 불러모으고 이 편지를 그들에게 읽어 주었다. 그들 중의 어느 누구도 그 내용에 대하여 놀라는 것 같지 않았으며 그들 중 몇은 버틀러 장로가 그 동일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이것이 그의 마음임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 때 나는 여러 가지를 설명하였다. 나는 형제들마다에게 내가 알고 있는 바 성경 연구 활동에 있어서 따라야 할 바르고 옳은 노선을 설명하였다. 나는 내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모든 사물을 올바른 빛 가운데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많은 것을 설명하였다. 나의 모든 진술은 따라서 행해야 할 올바른 원칙을 제시하였으나 내 말은 그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사물을 그들 자신의 방법대로 이해했으며 내게 주어져서 내가 그들에게 말한 그 빛은 그들에게 쓸모 없는 이야기였다.

아침 집회에서의 호소 ― 나는 일의 형편에 대하여 마음에 매우 큰 고통을 느낀다. 나는 아침 집회에 모인 나의 형제 자매들에게 가장 진지한 호소를 하였으며 이 기회를 유익한 기간, 마음에 겸손을 가지고 함께 성경을 연구하는 기간으로 삼자고 탄원하였다. 나는 그들이 거의 알고 있지 못한 문제에 대하여 그렇게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탄원하였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울 필요가 있었다.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고 초청하셨다. 166 만약 우리가 매일 겸손과 마음을 낮추는 공과를 배운다면 이 집회에 존재하는 그러한 감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 얼마간의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날카롭고 거친 감정의 이유인가? 질투와 악한 추측과 상상, 악한 의심, 미움, 시기들이 마음을 지배해야 하겠는가? 이 모든 것들은 악하고 악할 뿐이다. 우리의 도움은 오로지 하나님께 있다. 배우기를 열망하며, 잘못에 처할 수도 있는 문제에 있어서는 기꺼이 고침을 받거나 속임을 당하지 않겠다는 올바른 정신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는데 시간을 많이 사용하도록 하자. 만약 예수께서 우리 중에 계시고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사랑에 의하여 녹아 부드럽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일찍이 참석했던 최상의 총회들 중의 하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분주하고 중요한 총회 기간 ―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사업은 커졌다. 새로운 대회들이 생겨나고 새로운 교회들이 조직되었다. 모두가 조화를 이루며 넓은 추수장에서 일하는 형제들처럼 자유롭게 의논하며 모두가 흥미를 가지고 사업의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하면서 주님의 사업이 어떻게 최선껏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이기심 없이 생각해야 하였다. 한 총회의 기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의 특별한 은혜와 계몽을 필요로 한 때가 일찍이 있었다면 바로 이 집회 때였다. 우리 나라의 헌법과 법률을 바꾸려고 대리자들을 움직이는 땅의 세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넷째 계명에 제7일로 명시된 성경의 안식일을 지키는 모든 자들의 양심을 구속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 백성들과 세상 앞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지하고 옹호하기 위하여 능력껏 그의 의무를 다하며 주어진 재주와 재능껏 일해야 할 때가 왔다. 많은 사람들이 눈이 멀었으며 복음의 교역자들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의하여 속임을 받고 있는데 그들은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것이 사단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167 사단의 분열시키는 전략 ― 이제 사단은 어떻게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의 펜과 목소리를 침묵시킬 것인지에 대한 모임을 가졌다. 만약 그가 그들의 주의를 끌며 그들을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그들의 힘을 전환시킬 수만 있다면 그의 앞길은 순조롭게 될 것이다.

사단은 얼마간 성공적으로 그의 일을 해 왔다. 감정의 불화와 분열이 존재해 왔다. 많은 시기와 악한 추측도 있었다. 거룩하지 못한 말과 암시와 언급이 있었다. 심령을 다하여 일해야 하며 바로 이 때에 하나님을 위하여 강력히 일할 준비를 해야 할 사람들의 마음이 거의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몰두되어 있다. 중요한 질문이 아닌, 미미한 생각과 이론을 포함하는 교리의 모든 점에 있어서 어떤 이들의 생각이 그들 자신의 생각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 그들이 매우 깊이 연루되어 있는 이 나라의 종교 자유의 중대한 문제는 많은 이들에게 거의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지 못하다.

사단은 자신의 생각대로 사물을 조정해 왔으나 주님은 사람들을 일으켜 그들에게 그분의 백성들에게 증거할 엄숙한 기별을 주셨다. 이는 전쟁, 즉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날을 위해 예비하도록 용사들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사단은 이 기별을 아무 효력이 없게 하기 위해 애썼다. 모든 목소리와 펜이 사단의 역사과 능력을 이겨내기 위하여 집중적으로 일해야 할 때에 분리가 존재했다. 견해의 차이들이 있었다. 이것은 전혀 주님의 길이 아니었다.

의견 차이의 한 논점인 갈라디아서의 율법 ― 이 집회에서 갈라디아서의 율법의 주제가 목사들 앞에 제시되었다. 이 주제는 3년 전에 총회 앞에 제시된 바가 있었다….

만약 모두가 순복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지배되는 마음으로 성경에 접근한다면 편견과 의견의 교만에서 벗어난 조용한 마음으로 성경을 연구하게 될 것이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빛이 그분의 말씀 위에 비칠 것이며 진리가 계시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하나되심같이 그분의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그리스도의 기도에 응답하려면 기도하며 고통을 감내하는 노력과 많은 인내가 있어야 할 것이다. 168 열렬하고 진지한 기도는 주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이다. 성령은 마음의 기능들을 일깨울 것이며 눈은 통찰력을 갖게 될 것이다.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

칭의와 그리스도의 의가 제시됨 ― E.J.위그너 장로에게 율법과 연관하여 그리스도의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그의 견해를 제시하며 명백하게 말할 수 있는 특권이 허락되었다. 이것은 새 빛이 아니다. 오히려 셋째 천사의 기별에 마땅한 자리를 차지한 옛 빛이다…. 그 기별의 취지는 무엇인가? 요한은 한 백성을 본다. 그는 말한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요한은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을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14절)진 인자를 보기 직전에 이 백성을 본다.

예수 믿음은 간과되고 무관심하고 부주의하게 취급되어 왔다. 그것은 요한에게 계시되었을 때의 그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해 왔다. 죄인의 유일한 희망으로서의 예수를 믿는 믿음은 행해진 설교에서뿐만 아니라 셋째 천사의 기별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매우 많은 사람들의 종교적 경험에서도 널리 배제되어 왔다.

1844년 이후 엘렌G.화잇이 제시해 왔던 진리 ― 이 집회에서 나는 율법과 연관된 그리스도의 의의 위대한 주제를 제시함을 통해 가장 고귀한 빛이 성경으로부터 비춰 나왔으며 그것은 죄인의 앞에 구원의 유일한 희망으로서 끊임없이 제시되어야 함을 증언했다. 이것은 내게 새 빛이 아니었다. 이는 내게 지난 44년 동안 보다 높은 권위자로부터 이것이 주어졌기 때문이며 나는 그분의 영의 증언을 통하여 펜과 목소리로 우리 백성에게 이것을 제시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한 증언에 동의한 몇 사람들 외에는 이에 대해 호응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이 위대한 문제에 대하여 말해지고 쓰여진 것이 매우 적다. 어떤 이들의 설교는 그리스도가 없는 가인의 제물과 같다고 묘사해야 옳을 것이다.

169 경건의 비밀 ― 품성을 재는 표준은 임금의 계명이다. 계명은 죄를 찾아낸다. 계명에 의하여 죄를 알게 된다. 그러나 죄인은 항상 십자가에서 치욕적인 죽음을 당하시고자 그분 자신을 낮추신 그분의 놀라운 사랑의 표현에 의하여 예수께로 이끌린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연구 주제인가! 천사도 이 놀라운 비밀을 들여다보기를 간절히 원하며 애쓴다. 그것은 가장 높은 인간의 지성에라도 부담을 지울 수 있고, 사단의 편을 택함으로 타락하고 속임을 당한 인간으로 하여금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에 일치할 수 있게 하는 연구이다. 사람이 그분과 같아질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타락했으나 구원함을 받은 인간을 그분의 아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랑하실 것이다. 이것을 살아 있는 말씀으로부터 바로 읽으라.

이것이 경건의 비밀이다. 이 장면이 모든 설교에 자리잡아야 할 최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추억의 전당에 걸려야 하며 인간의 입술로 발해져야 하며 주님이 선하심을 맛보아 안 사람들에 의해 추적되어야 하며 명상되어야 하며 모든 설교의 기초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건조한 이론이 제시되었으며 귀한 영혼들은 생명의 떡이 없어 굶주리고 있다. 이것은 필요되거나 하늘의 하나님이 받아들이실 설교가 아니다. 이는 거기에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모습이 백성들 앞에 계속 제시되어야 한다. 그분은 하늘 태양 가운데 서 있는 그 천사이다. 그에게는 그림자가 없다. 신성으로 옷 입혀지고, 신성의 영광으로 둘러싸이고, 무한한 하나님의 형상 안에 계신 그분은 사람들 앞에 높여져야 한다. 이것이 백성들 앞에 계속 제시될 때 피조물의 공로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침잠할 것이다. 눈으로 그분을 쳐다볼수록, 그분의 생애, 그분의 가르침, 그분의 품성의 완전함을 공부할수록, 죄는 더욱 죄되고 증오스럽게 될 것이다.

바라봄을 통하여 인간은 찬탄할 수밖에 없게 되며 그분께 더욱 끌리게 되고, 더욱 매료되고, 그분의 형상에 동화되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되기까지 그리스도와 같아지기를 더욱 소망하게 될 것이다. 170 에녹처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다. 그의 마음은 예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다. 그분은 최상의 친구이다….

우리의 모본이신 예수를 연구함 ―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그리스도를 연구하라. 그분의 품성을 한 면 한 면 연구하라.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생애와 품성에서 모방해야 할 우리의 모본이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를 대표하는 일에 실패할 것이며 세상에 사이비 사본을 제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인간도 모방하지 말라. 이는 사람들이 습관과 말과 예모와 품성에 흠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들 앞에 인간 그리스도 예수를 제시한다. 그대는 그분을 그대의 모본이요 실례로 연구할 수 있기 전에 개인적으로 그분을 그대의 구주로 알아야 한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6-19)고 말하였다.

마음들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고조됨을 감사함 ― 우리는 마음들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고조되어 살아 있는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단지 말로만 아니라 실제로 그분을 세상에 대표함을 인해 하나님께 엄숙하고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분의 발걸음을 따를 의무를 가지며, 그분의 영에 감화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아버지를 대표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제시하여야 한다는 성경의 요구를 본다.

그리스도를 대표함으로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을 대표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앞에 그리스도의 품성을 반사하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자.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보다 깊은 연구가 크게 필요된다. 171 그리스도의 의를 율법 가운데 놓는 것은 하나님의 참된 품성을 명료하게 계시하며 율법이 그 진정한 속성에서 볼 때에 진정 공정하며 선하며 영광스럽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목회직에 종사하는 우리의 모든 형제들이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서로를 존경하며, 진정한 그리스도인 예모를 갖추고 성경에 함께 접근하였다면 주님께서 그들의 교사가 되셨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사단이 그렇게 큰 능력을 행사하고 있는 마음들 위에 감동을 줄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인간적 판단에 조화되지 않는 모든 것은 그늘과 어두운 윤곽 속에 나타날 것이다….

많은 사람의 정신이 엘렌G.화잇에게 짐이 됨 ― 집회가 진행되는 중에 나의 짐은 내 형제들 앞에 예수와 그의 사랑을 제시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지 않았다는 뚜렷한 증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마음은 평화로웠고 하나님께 머물고 있었으나 다른 정신이 우리 형제 목사들의 경험 속에 흘러 든 것과 그것이 장막을 물들이는 것을 볼 때에 나는 슬픔을 느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현저히 눈멀었으므로 어디에 하나님의 영이 계시는지, 무엇이 참된 그리스도인 경험을 이루는지 분별하지 못함을 나는 알았다. 이들이 하나님의 양떼를 보호할 책임을 맡고 있음을 생각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진지한 기도로 들려지지 않았으므로 참된 믿음은 황폐되었고 손들은 축 늘어졌다!

어떤 이들은 기도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판단이 충분하다고 느꼈으며 모든 선한 것의 원수가 그들의 판단을 인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들은 무장하지도 않고 갑옷도 입지 않은 채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와 같았다. 생명의 생수가 막힌 통로를 통하여 흐를 수가 없고 하늘의 빛이 뜨뜻미지근함과 죄됨의 짙은 안개를 통과할 수 없으니 설교가 생기 없다고 해서 놀랄 일인가?

나는 겨우 몇 시간밖에 잘 수 없었다. 나는 아침 내내 글을 쓰고 있었다. 나는 자주 새벽 2시나 3시에 일어나서 내게 제시된 주제에 대하여 글을 쓰면서 내 마음의 고통을 완화시켰다. 목회직에 종사하는 우리 형제들 중의 어떤 이들을 지배하는 정신을 볼 때 내 마음은 아프다. 이 정신은 전염성이 있는 것 같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172 그가 보증할 수 있는 진리의 제시 ― 내가 E.J.와그너의 견해를 처음으로 들었다는 사실을 내 형제들 앞에 진술했을 때 어떤 이들은 믿지 않았다. 나는 내 온 마음을 다해 응할 수 있는 고귀한 진리가 발해지는 것을 들은 사실을 진술하였다. 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진리가 그리스도의 의와 사람을 위해 드려진 모든 희생을 하나님의 영에 의해 내 마음에 지울 수 없게 찍지 않았는가? 이 주제가 증언 가운데 반복하여 제시되지 않았는가? 주님께서 내 형제들에게 이 기별을 선포할 일감을 주셨을 때 나는 하나님께 말할 수 없는 감사를 느꼈다. 이는 그 기별이 이 때를 위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셋째 천사의 기별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선포되어 왔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같은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교인들에 의하여 선포되어 오지 못했다. 율법과 복음은 함께 나아간다. 나는 이 주제를 완전히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한다.

“예수 믿음”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되었으나 이해되지는 못했다. 셋째 천사의 기별에 속한 그 무엇이 예수 믿음을 구성하는가? 예수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구주가 되기 위하여 우리의 죄를 지는 자가 되었다. 그는 우리가 받아야 할 취급을 받았다. 그는 이 세상에 와서 우리가 그분의 의를 취할 수 있도록 우리의 죄를 취하였다. 우리를 충분히, 완전히, 전체적으로 구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예수 믿음이다.

이스라엘을 위한 유일한 안전은 문설주에 바른 피였다. 하나님께서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출 12:13)라고 말씀하셨다. 안전을 위한 다른 모든 방법은 다 소용이 없었다. 문설주의 피 외에는 죽음의 천사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길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서만 죄인을 위한 구원이 있다. 그 피는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 173 계발된 지성을 가진 사람은 광범한 지식을 쌓을 수 있으며 신학적 사색에 종사할 수도 있고 위대하며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을 수도 있고 지식의 보고로 생각될 수도 있으나 그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들지 않는다면, 그는 잃어버린 바 된다. 그리스도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음”이 현재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며 영원한 우리의 찬송이다.

편견과 거짓 비난을 대항해 투쟁함 ― 내가 명백하게 나의 믿음을 진술했을 때 나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그들은 화잇 자매가 변했다고, 즉 화잇 자매가 그의 아들 W.C.화잇과 A.T.존스 장로에 의하여 영향을 입었다고 보고하였다. 물론 여러 해 동안 나와 알고 지냈으며 셋째 천사의 기별과 함께 자라났고 우리 백성들의 신뢰와 믿음에 의해 존경을 받아 온 그들의 입술에서 나온 그러한 진술은 영향력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나는 논평과 비평의 대상이 되었으나 우리 형제 중의 아무도 내게 와서 묻거나 설명을 구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집에 유숙하고 있는 우리 모든 목회에 종사하는 형제들을 빈방으로 모아 우리 기도에 함께 연합하도록 가장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두세 번을 제외하고는 이 일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방으로 가서 서로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들끼리 기도하였다. 굳고 단호한 그 편견을 무너뜨릴 기회와 나와 내 아들과 E.J.와그너와 A.T.존스에 대한 오해를 제거할 기회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다른 노력을 시도하였다. 나는 우리 형제들 앞에 제시될 것을 그 날 아침 일찍 기록하였다. 이는 그렇게 할 때에 내 말이 잘못 진술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도적 책임을 진 자들이 꽤 참석하였으나 나는 보다 많은 수효가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음을 한탄하였다. 이는 참석한 자들 중의 어떤 이들이 새로운 빛으로 사물을 보기 시작했으며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을 들을 기회를 가졌다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받았을 것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174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으며 나의 설명과 내가 그들에게 제시한 “주가 이르시기를”에 의해 유익을 얻지 못하였다.

당시에 질문들이 주어졌다. “화잇 자매여, 주님께서 한 백성으로서의 우리를 위한 새롭고도 증가된 빛을 가지고 계시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확실히 그렇습니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납득할 수 있도록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준비의 날에 서야 할 백성들이라면 우리에게 펼쳐져야 할 귀한 진리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엘렌G.화잇이 마음을 연 연구를 격려함 ― 와그너 형제가 갈라디아서의 율법에 대한 그의 견해를 진술한 후에 내가 그 문제를 그냥 그 상태로 놓아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양측을 모두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집회에 나타난 내가 본 그 정신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었음을 진술했다. 나는 올바른 정신,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 E, J.와그너가 그의 견해를 제시하는 동안 내내 보여 준 그런 정신이 있어야 함을 주장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이런 문제는 논쟁 형식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해야 하였다. 이런 문제는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으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내가 주장한 이유는 그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그들의 형제들을 억지로 밀어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데 있었다. E.J.와그너가 그리스도인 신사처럼 행동하였으므로 그들도 문제에 있어서의 그들 쪽의 논증을 솔직하게 제시하면서 동일하게 행동했어야 했다….

갈라디아서의 율법 문제는 필수적인 것이 아님 ― “갈라디아서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우리는 셋째 천사의 기별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며 우리의 입지는 와해되는 것이며 우리의 믿음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의견이 주어졌다.

나는 말했다. “형제들이여, 이것이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해 오던 바로 그것입니다. 이 진술은 참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나치고 과장된 진술입니다. 만약 이 문제에 대한 토론중에 그 진술이 발해진다면 나는 모인 모든 사람 앞에서 이 문제를 제시할 의무를 느끼며 그들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그 진술이 바르지 못함을 그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175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는 필수적인 문제가 아니므로 그렇게 취급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주제의 놀라운 중요성과 위대성은 과장되었고 그 이유로, 즉 오해와 왜곡된 생각 때문에 우리는 이 집회에 편만한 정신을 보게 되는데 이 정신은 비그리스도적이며 형제들 사이에서 결코 나타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사이에 바리새인의 정신이 들어왔으며 나는 그것이 어디에 나타나든지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일 것입니다.…”

현명한 분별과 좋은 판단이 크게 결핍됨을 볼 수 있었다. 그러한 것들의 해악이 흔히 내게 제시되었다.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의견의 차이가 뚜렷해졌다. 이러한 일들은 나의 형제들이 큰 변화를 만났다는 사실을 내가 느끼도록 내 마음에 인상을 끼쳤다. 이 문제는 내가 유럽에 있을 동안에 표상과 상징으로 내게 제시되었으나 그 후에 내가 우리 교회들과 목회 일에 종사하는 우리 형제들의 형편에 관하여 어두운 상태로 남아 있지 않도록 설명이 내게 주어졌다….

나는 내가 추구해야 할 최선의 노선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내 방으로 돌아왔다. 갈라디아의 율법에 대한 기도로 그날 밤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것은 단지 티에 불과했다. “주께서 가라사대”에 맞는 길이 무엇이든 간에 나의 영혼은 아멘, 아멘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은 예수의 정신과는 너무나 판이했으며 피차간에 행사해야 할 정신과는 너무 반대되었으므로 나의 영혼은 고뇌로 차게 되었다.

내게는 다음 날 아침 목회자를 위한 집회에서 형제들에게 말해야 할 명백한 것이 있었는데 나는 감히 이것을 보류할 수 없었다. 소금은 그 맛을 잃었으며 정금이 희미하게 되었다. 영적 흑암이 백성들 위에 임하여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아래로부터 이르러 온 세력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있음을 입증하였는데 이는 그 결과가 그들이 하나님의 영의 조명 아래 있지 않은 경우와 흡사하였기 때문이었다.

기록하는 천사에 의해 작성되는 역사의 장이 어떠할 것인가! 누룩은 실로 신속하게 작용하였으며 거의 모든 덩어리를 부풀게 하였다. 176 나는 분명 내 형제들을 위한 책망과 경고의 기별을 가지고 있다. 나의 영혼은 고뇌로 눌려 있다. 이것을 내 형제들에게 말하는 것은 그것을 제시받은 사람들에게 그것이 일으키는 그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내게 일으킨다. 나는 먼 눈들을 주님께서 열어 주시기를 희망하고 기도하면서, 목회를 하는 내 형제들 앞에 주님의 이름으로 서도록 강권하는 거룩한 능력을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경험하였다. 나는 나의 비서가 속기로 기록한 그 말들을 말할 힘을 얻었다.­원고 24, 1888.

실험장이 된 미네아폴리스 ― 주님께서는 큰 빛을 받아 왔던 당신의 백성들이 그것을 따라 사는지 혹은 유혹 아래서 그것을 떠나는지 시험하고, 실험하고 계셨다. 이는 행동을 유발시키는 정신이 환경에 의하여 시험을 받기 전에는 그들이 어떤 모양의 정신에 속해 있는지를 깨닫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타고난 마음은 그들을 지배하는 힘이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과 편견이 그들의 마음에 숨겨진 손님으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말과 행동에 있어서 진리와 빛에 반대로 행한다. 하나님의 사업과 일에 있어서 지도적 지위를 차지해 온 우리 형제들은 빛을 어두움이라고, 어두움을 빛이라고 하지 않을 만큼 모든 빛의 근원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었어야 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을 격하시키지 않음 ―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힘의 근원으로 높이며 인간의 죄책을 그분에게 부과함과 그분 자신의 의를 인간에게 입혀 줌을 통하여 그분의 비할 데 없는 사랑을 제시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율법을 폐기하거나 그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율법을 올바른 빛이 비취는 곳에 놓고 영화롭게 한다. 이것은 갈바리의 십자가로부터 반사되는 빛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율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주로부터 비추는 빛 안에서 제시될 때에만 구원의 위대한 계획에 있어서 완전하고 충만하다. 이것은 영적으로라야만 분별될 수 있다. 그것은 바라보는 자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의라는 열렬한 믿음, 소망, 기쁨을 불붙인다. 이 기쁨은 예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는 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177 나의 형제들이 빛 안에 있었다면, 주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내게 주신 말씀은 내가 위하여 일한 그들의 마음에서 반응을 발견했을 것이다. 내가 조화를 이루고자 열망했던 마음들이 편견과 불신으로 잠겨진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들을 떠나는 것이 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주일 중 첫날에 미네아폴리스를 떠나는 것이 나의 목적이었다….

나는 어떤 방법으로 성경의 빛 가운데서 죄와 대속의 주제를 백성들 앞에 제시하는 일을 할 수 있을까를 알기 위하여 명상하고 기도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빛을 전하고 하나님의 양떼의 양들을 우리로 모아들이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는 특권을 가지기 위하여 이런 종류의 가르침을 매우 필요로 하고 있었다. 단지 율법적인 종교를 가진 냉랭한 마음들이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보다 나은 사물인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보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능력을 가져야만 할 것인가! 마른 뼈에 생명을 주려면 생명을 주는 기별이 필요했다.­원고 24, 1888.

(1888년 11월 4일, 가족 중의 한 사람에게 보냄)

우리의 집회(미네아폴리스 대총회)는 끝났다. 마지막 안식일에 나는 나의 마지막 설교를 했다. 회중들이 처음으로 상당한 감동을 받는 것 같았다. 교회당이 꽉 찼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에게 기도를 위해 앞으로 나올 것을 요청했다. 상당수가 앞으로 나왔다. 주님께서는 내게 탄원의 영을 주셨고 그분의 축복이 내게 임했다. 나는 오늘 아침 집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이것은 윌리에게 가장 고된 집회였으며 나는 미래의 사업에 해가 되는 안이 동의되거나 결의되지 않도록 모든 점을 지켜보아야만 하였다.

나는 매우 자유롭게 20회 가까이 말했으며 우리는 이 집회가 매우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믿는다. 우리는 미래를 모르지만 예수께서 키를 잡고 계심을 느끼며 파선하지 않을 것이다. 178 우리 백성들 가운데서 우리가 경험했던 것 중에 가장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결전(決戰)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용기와 믿음은 훌륭했으며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많은 분량을 기록하지 않고는 그 일을 글로써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므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올슨 장로가 대총회장이 될 것이며 캔자스의 단 존스 형제가 그를 돕도록 되어 있다. 올슨 형제가 유럽에서 돌아올 때까지* 하스켈 장로가 봉사할 것이다.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말을 할 수 없지만 우리는 배틀크릭에서 약 4 주간 머무를 것이며 지체없이 지금 곧 말해야 할 증언을 발하게 될 것이다. 그 후에 우리는 사업의 이 큰 중심부에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비상 사태의 때에 이 백성들을 돕기 위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결심이다.

한 병든 자의 마음이 대총회 회의에 지배적인 능력을 행사하였으며 교역자들은 대부분 그것이 건전하고 사업에 좋은 것이라 하여 버틀러 장로의 그림자와 메아리였다. 시기, 악한 추측, 질투가 누룩처럼 작용하여 온 덩어리가 발효된 듯하였다….

일요일인 오늘 나는 집회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상당한 방문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나의 증언이 내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더 감화를 끼치지 못했지만 증언을 할 때 그분의 영의 능력과 자유로움과 힘을 주셨음에 대해 나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사단은 나의 사업을 놀라울 정도로 방해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여기에 없었더라면 이 집회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떤다. 하나님께서 이 정신이 집회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지배적인 능력을 가지시고 어떤 방법으론가 일해 오셨다. 우리는 조금도 낙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신뢰한다. 진리는 승리할 것이며 우리는 그것과 함께 승리하고자 한다.

179 우리는 집에 있는 그대들 모두를 생각하며 그대들과 함께 있기를 바라지만 우리의 소원이 고려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인도자이시며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의 노선을 지도하시게 하고 우리는 그분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갈 것이다.­서신 82, 1888.

이제 우리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거룩한 삶에 있어서 어떻게 우리가 전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변명을 듣는다. 나는 이렇게 혹은 저렇게 살 수 없다.

이렇게 저렇게라니,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대는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갈바리에서 드려진 것이 불완전한 희생이었으며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성적 결함과 경향을 떠나서 행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와 능력이 불충분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분이 온전한 구주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고자 하는가?

혹은 그대는 하나님께 비난을 돌리려는가? 자, 그대는 그것이 아담의 죄였다고 말한다. 그대는 나는 그것에 대해 죄가 없으며 그의 죄와 타락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여기 이 모든 본성적인 경향이 내 안에 있으므로 이 본성적 경향을 행동으로 표출한다 해도 나는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누가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인가?

왜 하나님께서는 사단으로 하여금 인간의 본성 위에 이러한 능력을 가지도록 허락하셨는가? 이것이 하늘의 하나님께 대한 비난이며 그분은 그대가 원한다면 마침내 그분에 대한 그대의 비난을 제기할 기회를 주실 것이다. 그 후에 그분은 그대가 그분의 심판의 법정에 서게 될 때 그대에 대한 그분의 비난을 제기하게 될 것이다.­원고 8, 1888, 안식일, 1888년 10월 20일.* 만약 하나님께서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맞추기 위하여 그분의 율법을 변경시킬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다. 율법이 바꾸어지고 변개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독생자를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죽도록 보내셨다. 180 구주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율법을 계속적으로 범하게 하기 위하여 인간의 죄과를 당신에게 부과시키고 당신의 의를 그들에게 입혀 주셨는가? 아니다,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그 자신의 힘으로는 율법을 지킬 가능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오셨다. 그분은 율법의 가르침을 순종할 힘을 인간에게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하여 죄인은 그의 범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나아와 “오 아버지여, 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주의 공로를 통하여 용서를 간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나아 오는 모든 이들을 받아 주실 것이다.­원고 16, 1888, 일요일, 1888년 10월 21일.

우리가 우리의 최선을 다할 때 ― 잘못을 바로잡기에 너무 늦지 않았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정신을 보시며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짐을 지고 가는 것을 보실 때, 그분의 완전한 거룩함이 우리의 부족을 보상한다. 우리가 우리의 최선을 다할 때, 그분은 우리의 의가 되신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빛이 되게 하는 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모든 광선이 필요된다.­서신 22, 1889(가려뽑은 기별 1권, 368쪽에 출간됨).

1월 11일(1889년) 금요일에 남 랭카스터에서 특별한 집회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 집회로부터 유익을 얻기 위해 온 자들로 교회가 가득 찬 것을 보고 기뻤다.* …메인, 코네티컷, 매사추세츠 그리고 다른 주들에서 대표가 참석하였다. 우리는 사태를 바로잡는 데 있어서 해야 할 일이 있음과 이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인간의 최대의 노력으로도 성취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여 주옵소서 하는 하나님께로 향한 진지한 탄원이 우리의 마음에서 흘러 나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보내신 하늘의 고귀한 광선에 대하여 저들의 마음을 닫지 않았으면 하는, 다른 이들에게 진리의 기별을 증거하여 온 자들을 위한 부담을 느꼈다. 181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이 당신의 진리의 기별을 받아들일 때 기뻐하셨다….

안식일 오후에 많은 심령이 감동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으로 배불리었다. 강의가 끝난 후 우리는 귀중한 친목의 시간을 가졌다. 주님께서 매우 가까이 오셨으며 영혼들에게 당신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그들의 큰 필요를 자각하게 해 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곁에 계신 구주로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할 때에 그 열매는 죄를 자백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데서 보여진다. 전 집회를 통하여, 백성들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이르고자 할 때에, 그들은 말이나 행동으로 서로 잘못한 것을 피차 고백함으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비록 목사들 중에서도, 전에 결코 진리를 검토해 보지 못한 그 빛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 그대로를 보았다. 그들은 죄를 용서하시는 구주로서의 구주를, 영혼을 성화시키는 것으로서의 진리를 보았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많은 사람들이 왜곡된 관점을 가짐 ―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나아 올 수 있기 전에 그들 스스로 큰 일을 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투쟁 막판에 개입하시며 그들의 종신 사업에 마무리 손질을 베풂으로써 그들에게 도움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구주이시며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 오는 모든 자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듯 보인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믿음의 완전한 신뢰를 가지고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는 그분의 보혈의 효험만을 믿으며 그리스도께 개인적으로 의지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수 있다고 약속한 것을 믿는 가운데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제시된 바로 그 기별 ― 마음을 빛에 대하여 엶에 따라 우리의 형제 자매들은 믿음의 구성에 대한 보다 나은 지식을 얻었다. 182 주님은 매우 귀하셨다. 그분은 언제라도 당신의 백성에게 힘을 주실 준비를 갖추고 계셨다. 그 집회는 그 처음 정해진 날짜를 넘겨 한 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학업은 중단되었으며 모두가 주님을 찾는 일에 진지한 노력을 기울였다. 존스 장로가 보스턴에서 왔으며 하루에 두 번, 때로는 세 번씩 강의하면서 가장 진지하게 백성을 위하여 일하였다. 하나님의 양떼들이 영혼을 살찌우는 음식을 먹었다. 주님께서 이 시대의 백성에게 보내신 바로 그 기별이 강의를 통하여 제시되었다. 집회는 아침 일찍부터 밤중까지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는 크게 만족스러웠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을 널리 나누었다. 하나님의 영의 깊은 감동이 거의 모든 심령에 느껴졌다. 그 집회에 참석한 자들은 그들이 이전에 알았던 그 어떤 것도 능가하는 그런 경험을 얻었다는 일반적인 증언을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그들의 기쁨을 증거하였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채워졌다. 감미로운 평화가 그들의 심령에 존재하였다. 그들은 모두를 사랑하였으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쉴 수 있음을 느꼈다.

나는 모든 합당하지 않은 흥분에 휩쓸리지 않은 채 이렇게 완벽하게 부흥의 일이 진전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살피는 진리가 제시됨에 따라 율법의 빛을 통하여 자신이 범죄자라는 자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증거를 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의를 의지해 왔었다. 이제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께 유일하게 받아들여질 만한 그리스도의 의와 비교해 볼 때 더러운 옷임을 보았다.

공개적인 범법자는 아닐지언정 그들은 스스로가 심령에 있어서 사악하고 타락했음을 보았다. 그들은 하늘 아버지의 자리에 다른 신들을 대치하였다. 그들은 죄를 억제하려고 투쟁하였으나 자신의 힘을 의존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서 있는 그대로 예수께로 나아가 우리의 속절없는 영혼을 우리의 자비로운 구속자에게 내던져야 한다.­리뷰 앤드 헤랄드, 1889년 3월5일자.

183 초청에 의하여 나는 목사들의 장막*에서 목사들에게 몇 마디 의견을 말하였다. 우리는 가정 신앙에 관하여 여기 바로 이 지상에서 백성들을 교육하도록 마련되어야 할 가장 좋은 계획에 대하여 얼마간 이야기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믿음을 구성하는지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흑암과 낙망에 대하여 불평한다. 나는 질문했다. “그대들의 얼굴이 예수께로 향해 있는가? 그대들은 의의 태양이신 그분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대들은 교회에 믿음의 문제와 그리스도의 의를 온전히 의존하는 문제를 명백하게 정의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대들의 말과 기도에는 그리스도, 그의 비할 데 없는 사랑,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그분의 위대한 희생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으므로 사단이 우리가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져야 하며 가지지 않으면 안되는 견해를 거의 어둡게 하였다. 우리는 영적인 도움을 위하여 인간을 덜 신뢰해야만 하며 훨씬 더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워지는 것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는 단호한 목적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 속성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할 수 있으며, 그분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그분의 긍휼을 말하고 노래하며, 그분을 우리의 개인적인 구주로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을 사랑하며, 그리스도께서 미워하신 죄를 미워한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말하며 곰곰이 생각해야만 한다.”

나는 목사들에게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해 강조하면서 백성들을 한 발 한 발 그들이 산 믿음을 통하여 예수를 있는 그대로-그분을 그분의 충만함 속에 있는 대로, 죄를 용서하시는 구주로, 우리의 모든 범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으로 볼 수 있을 때까지 인도하라. 우리가 그분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은 바라봄을 통해서이다. 이것이 현대 진리이다. 우리는 율법을 말해 왔다. 그것은 옳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어쩌다가 그리스도를 죄를 용서하시는 구주로 받들어 올렸을 뿐이다.

우리는 늘 우리 마음에 죄를 용서하시는 구주를 간직해야 한다. 184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하나님의 율법을 크게 하며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돌아가시려고 오셨으나 한편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주의 보혈의 공로에 온전히 의존하는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기 위해 오신 분으로 올바른 위치에서 제시하여야 한다. 이 점이 명백하게 되어 있지 않다.

영혼을 구원하는 기별, 셋째 천사의 기별이 세상에 주어져야 할 기별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예수의 믿음이 둘 다 대단히 중요하며 동등한 힘과 능력으로 주어져야만 한다. 대개 그 기별의 첫 부분에 생각을 집중하여 왔으며 마지막 부분은 이따금 생각하여 왔다. 예수의 믿음이 이해되지 못하였다. 우리는 그것을 말하고, 그것으로 살고, 그것을 기도해야만 하며 기별의 이 부분을 그들의 가정 생활에 적용하도록 백성을 교훈 해야 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리스도로 채워진 설교가 필요함 ― 전 설교에 예수의 이름이 거의 불리워지지 않는 건조하고 그리스도가 없는 설교가 행해져 왔다. 설교자의 마음이 예수의 사랑에 굴복되고 녹아지지 않았다. 그는 건조한 이론에 집중한다. 큰 감동이 일지 않는다. 설교자가 거룩한 열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니 어떻게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회개하고 돌이킬 필요가 있다. 그렇다! 설교자들이 돌이켜야 한다.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그들 앞에 높이고 “바라보고 살”도록 간청함을 받아야만 한다.

왜 우리의 입술은 그리스도의 의의 주제와 세상을 위한 그분의 사랑에 대하여 그렇게 침묵하는가? 왜 우리는 백성들을 새로운 삶으로 되살리고 일깨우는 그 어떤 것을 그들에게 주지 않는가?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외칠 때 기쁨과 숭경으로 가득 찼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

18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11).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4-17).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형성되지 않았으므로 설교에서 크게 제외된 채 버려진 웅대한 하늘의 주제이다. 그리고 사단은 그의 방법을 사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숙고와 숭경의 주제가 되지 못하게 하여 왔다. 매우 강력하고 매우 필수적인 이 이름이 모든 이들의 입술에 있어야 한다.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5-29).

여기 그리스도의 목사들이 할 일이 있다.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즉 그리스도와 그의 품성이, 그분의 말과 사업이 백성들 앞에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의 신앙적 상태는 그들을 가르치는 자들을 거스려 증거한다. 186 그리스도가 거의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지경에 처해 있다. 그들은 영적 생애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에 대한 두려움 ― 백성의 교사들은 산 경험을 통하여 그들의 신뢰의 근원, 힘의 근원과 친숙하게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들을 일으켜서 백성들에게 전할, 바로 이 시대를 위한 기별-새로운 진리가 아니라 바울이 가르치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치신 그 기별-과 함께 보내실 때에 그것은 그들에게 낯선 교리가 된다. 그들은 백성들-그들 앞에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을 통하여 힘을 얻는 경험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 죽게 된 백성들-에게 주의를 주기 시작한다. “너무 서두르지 말라. 기다리면서 그대가 그것에 대하여 좀 더 알게 될 때까지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목사는 백성이 신선한 만나를 필요로 하고 있을 때에 그 동일하고 건조한 이론을 설교한다.

그리스도의 품성은 무한히 완전한 품성이며 그분은 높임을 받으셔야만 하고 시야에 두드러지게 드러나야 한다. 이는 그분은 그분을 믿는 모든 자들의 힘, 능, 성화와 의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적 정신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보낸 기별에 참여하지 않아도 옛날의 좋은 이론만을 붙들면 좋고 안전한 자리에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옛날의 바리새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으며 그들의 실례는 자기 만족의 자리를 떠나도록 목사들을 경고해야만 한다.

복음의 영감적인 주제를 제시함 ― 우리에게는 지금 우리에게 이르러 와서 근면과 진지한 믿음을 가지도록 우리를 분기시키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 후에 우리는 성령의 침례를 받고 영광의 소망인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형성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믿음과 사랑의 거룩한 대상으로 드러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할 것이며 그리스도께,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백성 앞에 그분의 기적, 그분의 자아 부정, 그분의 자아 희생, 그분의 고난, 그분의 십자가에서의 돌아가심, 그분의 부활과 승리의 승천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모든 마음에 사랑과 강렬한 열정을 일깨우는 복음의 영감적인 주제들이다. 187 여기에 지혜와 지식의 보물,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다. 그대가 더욱더 이 경험을 추구할수록 그대의 삶의 가치는 더욱더 커질 것이다.

생수를 샘물에서 퍼내지만 공급의 감소는 일어나지 않는다. 복음의 목사들이 주님을 항상 그들 앞에 모시고 그분의 숭경할 만한 품성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바친다면 그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일을 행한다면, 배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요 그들의 방자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불명예스럽게 하고 예수를 공개적으로 치욕스럽게 함으로 총회로부터 분리되는 자가 하나도 없게 될 것이다. 모든 복음의 목사들의 능력은 믿는 교회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바로 그들의 삶에 이끌어 들여서 예수를 배우고 예수를 믿으며 예수를 높이기 위하여 그분을 모본으로 삼도록 교육하는 일에 쓰여져야 한다. 목사는 그 자신이 친히 그리스도의 품성을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그는 진리를 숙고하며 구속의 비밀, 특별히 이 때를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명상하여야 한다.

성육신과 대속에 대하여 좀 더 집중함 ―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만유이시며 만유 안에 계시다면, 왜 그분의 성육신과 대속의 희생이 교회 안에서 좀 더 집중적으로 이야기되지 않는가? 왜 마음과 혀가 구원자를 찬양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가? 영원한 세대를 통하여 구원받은 자들의 힘이 이 일에 쓰여질 것이다.

예수를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과 산 관계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런 후에 우리는 경험과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무엇인지에 대한 살아 있는 개인적인 경험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으며 우리 속에 머무는 능력을 거룩한 성실함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백성들은 그리스도께 이끌려야만 한다. 그분의 구원하는 효험에 탁월성이 주어져야만 한다.

참된 제자는 그리스도의 발 앞에 앉아 우리 구주께서 발하시는 진리의 귀한 보석을 발견하며 그것들의 귀중함을 분별하고 그 가치를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겸손하고 가르침을 잘 받는 자가 됨에 따라 점점 더 그들의 이해력은 그분의 율법으로부터 놀라운 것들을 발견하도록 열리게 될 것인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것들을 명명백백하게 제시하셨기 때문이다.

188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와 구원의 교리는 교회 녹명책에 그 이름이 올라 있는 다수에게 불가사의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셔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면 그들의 이해의 더딤을 책망하실 것이다. 그분은 더디고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나는 그대의 수중에 그대가 그 가치를 알아채지 못하는, 그대의 구원에 관계되는 진리를 맡겨 두었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5)라는 말씀이 교회들과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목사들에게 발하여질 수만 있다면!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대들에게 말한다. 이 시간까지 구원의 위대한 계획과 연관된 성경 진리는 희미하게 이해되었을 뿐이다. 그 진리는 계속적으로 열려지고 확장되고 발전할 것인데 이는 그것이 그것의 저자처럼 거룩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백성들을 가르치신 방법 ― 예수께서는 교리에 대한 전반적인 언급이나 계속적인 강론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흔히 짧은 문장으로, 하늘 교리의 낟알을, 마치 식별력 있는 일꾼에 의해 모아져야 할 필요가 있는 진주처럼 파종하셨다. 그분이 가르치시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믿음과 은혜의 교리가 드러났다. 오, 어찌하여 목사들은 영적 건강과 활력을 줄 수 있는 바로 그 음식을 교회에 주지 않는가? 그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실제적으로 순종하는 부요한 경험이 될 것이다. 왜 목사들은 거의 죽게 된 그 남아 있는 것들을 강하게 하지 않는가?

제자들을 떠날 즈음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위안을 추구하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사람의 인간적 노력과 결합하도록 하기 위하여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셨다. 성령의 약속보다 교회에 적게 경험되었고 적게 성취된 약속이 어디 있는가? 그에 잇따라 모든 축복을 가져오는 이 축복이 제외되는 분명한 결과는 영적 기근이다. 이것이 설교자들에게 떨어지는 책망이다. 189 교회는 일어나야 하며 더 이상 미미한 이슬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성령에 대한 우리의 필요 ― 오, 왜 우리 교회의 신자들은 그들의 특권에 못 미치는 곳에 멈추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감화의 필요성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민감하지 못하다. 교회는 마리아처럼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요 20:13)라고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현대 진리를 설파하는 목사들은 죄의 자각과 영혼들의 개종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의 감화가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이 감화가 말씀의 설파에 따라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 대한 깊고 실제적인 지식을 충분히 가질 만큼 그 중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 자신의 마음에 진리의 거룩한 감화의 능력과 은혜가 부족함으로 그들은 영적인 사물을 분별하지 못하고 교회에 그것의 분명한 필요성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절면서 나아가고 영적 성장에 있어서 위축되는데 이는 그들이 그들의 봉사에 있어서 명목상의 신앙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은 생생하고 효과적인 필요성, 지속적인 원리로서 느껴지지 않는다.

오, 모두가 이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기별을 받아들였으면! 그분은 사람들 눈에 감취어져서 형식의 쓰레기 밑에 파묻힌 진리를 제시하도록 그분의 종들을 일으키셨는데 이는 그것이 십자가를 높이는 일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탈환되어서 현대 진리의 뼈대 속에 다시 놓여져야만 한다. 그것의 요구는 주장되어져야 하며 세천사의 기별 속에서 그것에게 주어진 위치 역시 주장되어져야만 한다.

많은 그리스도의 목사들로 하여금 금식을 선포하고 거룩한 성회를 열어 그분을 만날 만한 때에 하나님을 찾게 하라. 그대가 지금 갈바리의 십자가 밑에 엎드려 있을 때에 그분을 부르라. 스스로 모든 자만을 벗어 버리고 교회를 대표하는 파수꾼으로서 낭실과 단 사이에서 애통하면서 “주님, 당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 당신의 기업으로 욕되게 마옵소서. 당신의 뜻대로 취하시되 당신의 백성인 우리에게서 성령을 거두지 마소서”라고 부르짖으라. 오, 기도하라.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시도록 기도하라!­원고 27, 1889.

190 구원을 위한 준비 ― 진지한 회개가 없는 참회, 육체의 고행, 계속적인 죄의 고백, 그리고 참된 헌신이 따르지 않는, 금식, 축제, 외적인 율법 준수-이 모든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아무 가치가 없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충분하다. 그분은 하나님께 완전하고 효력 있는 제물을 드리셨다. 그리스도의 공로가 없는 인간의 노력은 무가치하다. 우리는 이 노선을 택함으로써 하나님께 욕을 돌릴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유용성을 파괴한다. 그리스도의 제물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면 영향력은 저하된다. 그것은 우리의 기대를 좌절시키고 우리를 우리의 특권에 못 미치게 한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무한한 값을 치르고 얻어진 구원에 대하여 건전하지 못하고 위험한 이론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유도한다. 구원의 계획은 인간의 노력이 온전히 성공적인 것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것을 통하여 거룩한 능력이 인간에게 이르러 오는 그러한 것으로 이해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시는 그런 방법으로 용서를 받는 것은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바로 마음, 가슴, 혼에 찍힌다.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고전 2:16)다고 말한다. 191 거룩한 능력을 통하여서만 이르러 올 수 있는 변화의 과정이 없이는 타고난 죄로 향하는 경향이 온전히 마음에 남아 새로운 사슬을 형성하게 되고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깨뜨릴 수 없는 노예의 상태를 부과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옛 취향, 경향, 우상, 생각, 이론을 가지고는 결코 하늘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늘은 그들에게 전혀 기쁨의 장소가 되지 못할 것인데 이는 모든 것이 그들의 취향, 식욕, 경향과 충돌될 것이요, 그들의 본성적 그리고 후천적 품성의 기질과 고통스럽게 반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거룩함과 하나님의 뜻에의 일치의 결과이다. 하늘에서 성도가 될 사람들은 먼저 지상에서 성도가 되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이 지구를 떠날 때 우리의 품성을 가지고 갈 것이며 이는 단지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누어진 하늘의 요소들 중 어떤 것을 가지고 가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리뷰 앤드 헤랄드, 1890년 8월19일자.

믿음으로 성취되는 칭의와 성화 ― 1890 ―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일 때,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율법을 범함으로 규정된 형벌을 되돌리신다. 그 때 죄인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서게 되며 하늘의 호의를 받게 되고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 후에 성취되어야 할 다른 일이 남아 있는데 이 일은 점진적인 성격의 것이다. 영혼이 진리를 통하여 성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일 역시 믿음으로 성취된다. 이는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받는 그리스도의 은혜로서만이 우리의 품성이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속성을 명백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주이신 것과 복음은 참되며 구원의 계획을 드러낸다고 믿는 자가 많으나 그들은 구원하는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적으로 진리를 확신하나 이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의롭게 되기 위하여 죄인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그 자신의 영혼의 것으로 하는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마귀들도 “믿고 떤”다는 기록을 볼 수 있으나 그들의 믿음이 그들에게 의를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 192 성경의 진리에 단지 지적으로 동의하는 자들의 믿음 역시 그들에게 구원의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이 믿음은 생명을 얻는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는데 이는 진리가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며 품성을 변화시키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순수하며 구원하는 믿음에는 갈바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이루어진 위대한 구원의 희생을 믿는 믿음을 통한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있다. 의롭게 된 신자는 그의 유일한 희망과 구원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본다. 신뢰가 없이도 믿음이 존재할 수 있으나 신뢰의 결과로 일어나는 확신은 믿음이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능력에로 이끌림을 받은 죄인마다 경험 가운데 전진할수록 더욱 높은 신뢰도를 나타낼 것이다.­영문 시조, 1890년 11월 3일자.

유혹을 대항함-1891 ― 많은 사람들이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들은 유혹을 극복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과 용기 대신 실망과 의심을 말함으로 하나님께 그들의 입술로 범죄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점에서 우리처럼 유혹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셨다. 그분은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악의 임금이 그의 유혹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유리한 위치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그와 같을 수 있다.­리뷰 앤드 헤랄드, 1891년 5월10일자.

완전은 단번에 도달할 수 없음-1891 ― 우리는 시간의 경계 너머를 바라본다. 우리는 영원을 바라본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그런 모양으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자, 우리 모두 그러한 방법으로 살자. 우리는 실수할 수도 있으며 잘못을 범할 수도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잘못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우리는 희망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을 붙들도록 하자. 하나님의 정원은 풍성한 약속으로 가득하다. 오, 그것들을 모아서 집으로 가지고 오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도록 하자. 그분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그분을 의심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자.

193 자라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우리는 움직이지 않고 서 있어서는 안 된다. 매일 좀 더 신뢰하기를 배우며 좀 더 예수를 온전히 의지하면서 어제의 우리보다 오늘의 우리는 전진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자라나야 한다. 완전의 자리에 단번에 뛰어 오를 수는 없다. 성화는 일생의 사업이다….

나는 1843년도에 한 남자와 그의 아내를 기억한다. …그들은 1844년에 주님이 오실 것을 기대하였으며 기다리고 경계하였다. 매일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서로 잠자리 인사를 하기 전 그들은 “우리가 잠잘 때에 주님이 오실지라도 우리는 준비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남편은 그의 아내에게 그가 그날 낮 동안 그의 아내의 생각에 그들이 고백하고 있는 진리와 믿음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말을 했는지를 묻곤 하였다. 그리고 그 아내는 그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곤 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이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있어서 범죄하였는가를 여쭙고 만약 그렇다면 그들의 범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곤 하였다. 자, 우리는 이처럼 단순한 것을 필요로 한다.

그대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구주의 공로에 매어 달리는 작은아이들같이 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될 때에 그대는 굳세게 될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하나님의 천사들이 불꽃 벽처럼 그대를 두를 것이다. 그대가 요청한 그리스도의 의가 그대 앞에 행해질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그대의 뒤를 따를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하늘의 주제에 머물도록, 그리하여 우리가 그 지식과 빛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하나님은 언어를 거룩하게 하시며 생각을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거룩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전진을 해야 하며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그대를 도우사 그대의 의무에 있어서 최선을 이루기를 바란다.­원고 9, 1891.

칭의가 설명됨-1891 ―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가사의다. 죄인이 그의 죄를 회개할 때 그는 하나님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 그는 갈바리의 십자가 위에 달린 예수를 본다. 왜 이 모든 고난이 있게 되었는가? 여호와의 율법이 범해졌다. 하늘과 땅에서 하나님의 정부의 법이 범해졌으며 그 범죄의 형벌은 죽음이라고 선고되었다. 194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셨다. 오, 이 얼마나, 이 얼마나 비할 데 없는 사랑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죄된 인간을 위하여 돌아가셨다!

죄인은 하나님의 율법의 신령함과 그 영원한 구속력을 본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죄된 인간을 위한 대치물과 담보를 마련하신 것에서 보게 되는 바 그 대치물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다. 세상에 대한 구원의 선물을 통한 이러한 은혜의 나타남은 죄인을 놀라움으로 차게 한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이 사랑은 모든 장벽을 허물어 버린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당신에게로 이끄셨으므로 그는 신성과 인성 가운데 놓인 십자가로 와서 그의 범한 죄를 회개한다. 그는 율법이 그를 죄에서 깨끗하게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데 이는 율법 안에는 율법을 범한 자를 구원하기 위한 용서의 속성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정부의 율법이 범해졌으므로 그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회개를 통하여, 그리고 모든 범죄로부터 죄인을 구하여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분으로서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대속의 희생을 그의 유일한 희망으로 기대한다.

그리스도의 중보의 사역은 인간이 범죄자가 되자마자, 인간의 죄책과 고난 그리고 불행과 함께 시작되었다. 율법은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과 연합시키기 위하여 폐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하나이신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인간을 위한 죄가 되심으로 담보와 구원자의 직을 취하셨다. 죄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며 그들이 받을 바 처벌을 면제하시며 그들이 진정 의로우며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취급하시며 그들에게 하늘의 호의를 베푸사 그들이 의로운 것처럼 취급하실 때에 하나님에 의해서만 의로워질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입혀 주시는 의를 통해서만 의로워진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받으시며 그분의 아들의 속죄의 희생을 통하여 죄인을 받아들이신다.

일반적인 믿음은 충분하지 않음 ―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인 믿음을 마음에 품으며 기독교가 멸망하여 가는 영혼을 위한 유일한 희망임에 대하여 동의한다. 195 그러나 이것을 지적으로 믿는 것은 영혼을 구하는 일에 있어서 충분하지 못하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신뢰가 필요하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믿음, 그 열매를 내는 믿음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약 2:23)다. 그의 나라를 떠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던 그 동일한 음성이 그의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셨다. 진실로 오늘날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과 동일하게 아브라함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의롭게 하는 믿음은 항상 우선 진정한 회개를 내며 그 후에 선한 행실을 내는데 이것이 그 믿음의 열매이다. 구원하는 믿음이 선한 열매를 내지 않는 법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대치물이 되도록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주셨다. 값비싼 이 속죄의 희생의 공로에 대한 참된 믿음이 역사하면서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주장하는 그 순간, 죄인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데 이는 그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1891 ―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백성들에게 가리켰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외쳤다. “지고 가는”이라는 말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다. 문제는 정복하는 것이 우리에게 불가능하다는 듯이 우리는 계속 죄를 지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정복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정복하신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유일한 길이다. 그분은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우리도 그 동일한 일을 할 수 있다…. 잘못된 것을 말하고 잘못된 것을 행할 유혹을 받을 때에는 사단을 대항하며 나는 나의 의지를 너의 지배에 굴복시키지 않겠다고 말하라. 나는 거룩한 능력과 협력하며 은혜를 통하여 승리자가 되리라고 말하라.­원고 83, 1891.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불가피한 부족을 보충하심-1891 ― 잘못을 범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신다. 그들은 예수께 속하며 우리는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산 자들로 취급해야 한다. 그들을 향하여 추구된 어떤 비이성적인 노선도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한 것으로서 책에 기록된다. 그분은 그들을 계속하여 주시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면서 그들의 최선을 다할 때에는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그 봉사가 받아들여질 것임이 확실하다.

196 예수는 완전하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 입혀지며 그분은 “더러운 옷을 그로부터 벗기고 새 옷을 입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우리의 피할 수 없는 부족을 보충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이 피차에게 신실하며 주님의 군대의 대장에게 진실하며 충성되고 원수의 손에 그들의 신뢰를 배반하여 팔지 않으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품성으로 변화될 것이다. 예수는 믿음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거하실 것이다.­서신 17A.1891(믿음과 행함, 50쪽에 기술된 비슷한 기사를 보라).

죄가 범해지는 즉시 그리스도에게 피하라-1892 ―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다. 그들은 죄에 대한 정죄에 눌림을 느끼며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만한 어떤 일을 하거나 그들의 죄를 하나님이 망각하기 전에는 하나님께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나는 진노나 의심이 없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손들을 쳐들 수 없으므로 갈 수 없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있게 되며 그렇게 하는 동안 언제나 죄를 저지르게 되는데 이는 그분 없이 그대는 악밖에는 아무것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를 저지르자마자 그대는 은혜의 보좌로 피하여 예수께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 그대는 죄에 대한 슬픔으로 차야 마땅하다. 이는 죄를 통하여 그대는 그대 자신의 영성을 약화시켰으며 하늘 천사를 슬프게 하였고 그대의 구원자의 사랑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그것을 아프게 하였기 때문이다. 영혼의 통회 가운데 예수께 용서를 구했다면 그분이 그대를 용서하였다는 사실을 믿으라. 그분의 거룩한 긍휼을 의심하거나 그분의 무한한 사랑의 위안을 거절하지 말라.­성경 메아리, 1892년 2월 1일자(1891년 12월 19일에 호주 멜버른에서 설교됨).

용서를 받은 후에 우리가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1892 ― 우리에게 회개를 나누어주시는 분은 성령이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거룩한 영의 작용을 통하여 우리를 그분께로 이끄시며 그분의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죄로부터 깨끗함을 입는데 이는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일 1:7)기 때문이다. 197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9절).

그러나 우리가 용서를 받은 후에,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죄를 범했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실망해야 하겠는가? 아니다. 요한은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고 기록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법정에서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께 간구하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기도가 아버지께 받으실 만한 것이 되도록 우리의 기도에 그분 자신의 고귀한 공로의 향을 섞어서 드리신다. 그분은 우리의 기도에 향을 넣으신다. 그리고 아버지는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바로 그것을 간구하기 때문에 우리를 들으시며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가 된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려고 오신 것은 그분의 의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려 함이다.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이니 거룩한 품성의 참여자가 됨에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우리와 같지 않다고, 그분은 세상에 있는 우리와 같지 않다고, 그분은 거룩하다고, 우리는 그분이 승리하신 것처럼 승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는 실로 천사의 속성을 입으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입으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를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6-18;영문 성경 참조)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 16). 예수께서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고 말씀하신다.

198 예수께서는 인류를 그분의 인성으로 감싸셨으며 신성과 인성을 결합하셨다. 그리하여 예수의 공로를 통하여 인간에게 도덕적 힘이 이르러 온다. 그분의 은혜를 통하여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자들은 그들과 사귀는 모든 자들에게 거룩하게 하는 감화를 행사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성화시켜야 한다.­리뷰 앤드 헤랄드, 1892년 3월1일자.

우리의 손을 거둘 때가 아님-1892 ―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완전히 의존해야 함을 느끼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손을 거두며 “내게는 할 일이 없다. 나는 구원을 받았다. 예수께서 그 모든 일을 이루어 주셨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거룩한 속성의 참여자가 되기 위하여 모든 힘을 다 경주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계속하여 경성하며, 기다리며, 기도하며, 일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 해도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위한 대속금을 치를 수 없다. 우리는 믿음을 생성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이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그것을 완전하게 할 수도 없는데 이는 우리 믿음의 완성자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모든 갈망은 그리스도로부터 이르러 오는 것인 바 그것은 그분이 그대를 그분께로 이끌고 계시다는 증거이며 그대가 그분의 이끄시는 힘에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성경 메아리, 1892년 5월 15일자.

그리스도의 품성이 우리 속에 심어짐-1894 ― 진리, 귀한 진리는 성화시키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성령의 작용에 의한 영혼의 성화는 그리스도의 품성을 인성에 심는 것이다. 그것은 품성에 나타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선한 행실에 활성적으로 행사되는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그리하여 품성은 점점 더 완전하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진정한 거룩함 속에서 변화된다. 거룩한 진리가 선한 행실의 한 선(線)에서 다른 선으로 확장되어야 할 광범위한 필요가 있다. 복음의 진리는 단절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행실에서처럼 하늘 보석의 한 줄을 형성하도록 연합되며 금실처럼 그리스도인 행실과 경험을 관통한다.

그리스도는 진리의 완전한 체계이다. 199 그분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참된 신자는 그리스도께 집중하며, 그들의 품성은 그리스도에 의해 비췸을 받는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순환한다. 모든 도덕적 오염으로부터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진리가 이르러 온다. 그것은 자선적인 행위와 궁핍한 자들, 괴로움을 당하는 자들, 고난을 당하는 자들에 대한 친절하고, 부드럽고, 사려 깊은 사랑으로 이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실제적인 순종이다.­원고 34, 1894.

사단이 성화되었다고 주장하였음-1894 ― 사단은 성화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하늘 궁정에서조차 자신을 하나님 위에 높였다. 그의 기만적인 힘이 매우 컸으므로 그는 다수의 천사를 타락시켰으며 그들의 동정을 그의 이기적인 관심에 동원하였다.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유혹하였을 때 그는 자신이 성화되었으며 하늘 궁정에서 온 순결한 천사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가장에 속지 않으셨으며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의하여 사는 자들 역시 속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의적이고 불완전한 순종은 받지 않으실 것이다. 성화되었다고 주장하나 그들의 귀를 계명을 듣는 일에서 돌이키는 자들은 스스로가 불순종의 자녀임을 입증하는데, 그들의 육욕적인 마음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복하지 않으며 진정 순복할 수도 없다.­원고 40, 1894.

믿음과 선행-1895 ―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분명 오직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을 통해서이며 선행은 그분의 죄를 용서하는 사랑이 작용한 결과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공이 되지 못하며 우리 영혼의 구원에 있어서 한 부분으로 주장할 수 있는, 우리의 선한 행실로 인해 우리에게 부여된 어떤 것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구원은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로서 오로지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에게 주어진다. 곤란을 당하는 영혼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을 통하여 평화를 찾을 수 있으며 그의 평화는 그의 믿음과 신뢰에 비례할 것이다. 그는 그의 영혼의 구원을 위한 간구로 그의 선한 행실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한 행실은 아무런 참된 가치도 없는가? 처벌을 받음 없이 매일 죄를 범하는 죄인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성실하게 행하려고 노력하는 자와 동일한 호의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보시겠는가? 200 성경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고 답변한다.

그분의 거룩한 섭리 가운데 그분의 과분한 호의를 통하여 주님은 선한 행실이 보상을 받도록 정하여 놓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통하여 받아들여지며 우리가 행한 긍휼의 행동들, 자선의 행위들은 믿음의 열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에게 축복이 된다. 이는 인간은 그들의 행위에 따라 보상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의 향기이며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상하시는 그 행위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그분의 은혜이다. 우리의 행위는 그 안에, 그 자체에 아무런 공로를 가지지 못한다.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한 후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무익한 종으로 간주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감사를 받을 자격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행했을 뿐이요, 우리의 행위는 우리 자신의 죄된 속성의 힘으로는 성취될 수 없었던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을 가까이 하도록 명하셨으며 그분은 우리에게 가까이 하신다. 그리고 그분께 가까이 함으로 우리는 그분의 손에서 보상을 받는 그 행위들을 할 수 있는 은혜를 받는다.­리뷰 앤드 헤랄드, 1895년 1월29일자.

하늘의 분위기로 둘리어 짐-1898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참된 회심, 참된 성화는 피차 간,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점과 감정에 있어서 변화를 일으킨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16절). 우리는 믿음에 있어서 증가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성화를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거룩한 영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도록 열렬한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본에 의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역자가 될 것이다.

혼과 몸과 영의 성화가 하늘의 분위기로 우리를 둘러쌀 것이다. 201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 전부터 택하셨다면 그것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우리의 양심이 죽은 행실로부터 정화되기 위함이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든 자아를 우리의 신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모든 죄악으로부터 깨끗하게 하고자 우리를 위하여 죽도록 그분 자신을 주셨다. 만약 우리가 그분에 의하여 우리 자신이 조정되도록 허락한다면 주님은 이 완전케 하시는 일을 수행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선을 위하여 그리고 그분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이 일을 수행하실 것이다.

단순하고 절대적인 믿음의 중요성 ― 우리는 백성들 앞에 믿음의 단순성을 제시하면서 그들에게 산 증언을 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며 그분이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행하실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만약 그분이 우리를 징벌하신다면 우리가 그분의 거룩한 성품의 동참자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 안에 매일의 성화를 수행하는 것이 그분의 의도와 모든 계획 속에 흐르고 있다. 우리의 일을 돌아보지 않겠는가? 다른 이들에게 그들의 의무,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나는 그들이 가진 특권을 제시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우리는 우리의 높은 부르심의 상의 푯대를 향하여 밀고 나아가지 않았다. 자아에게 너무나 넓은 자리를 내주었다. 오, 성령의 특별한 지도 아래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하라. 주님은 마음과 생명의 모든 능력을 요구하신다. 의지, 성격, 정신, 우리의 숙고에 있어서 그분과 일치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 의의 사업은 우리가 절대적인 믿음을 활용하기 전에는 수행될 수가 없다.

매일 하나님의 강력한 역동적 능력 아래 움직여라. 의의 열매는 영원한 평온과 확신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더욱 행사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지혜를 덜 신뢰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마음에 현저한 모양으로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셨을 것이다. 그분과의 연합, 살아 있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그분의 중보의 덕과 효력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며, 그분과 함께 생애의 새로움 가운데 동행한다.­서신 105, 1898.

202 참된 성화가 필요됨-1902 ― 이틀 전 밤에 나는 우리 백성들 중에 성령의 역사가 부족함에 대한 무거운 짐을 지고 10시에 깨었다. 나는 일어나서 방안을 거닐면서 주님께 그분의 백성에게 좀 더 가까이, 매우 가까이 오셔서 그들에게 능력을 주시사 그들이 그분의 일을 매우 강력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가 나타나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산상 설교에서 그리스도는 참된 성화에 대한 정의를 내리셨다. 그분은 거룩한 생애를 사셨다. 그분은 그분의 추종자들이 마땅히 어떻게 되어야 함에 대한 실물 교훈이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며 그와 함께 장사되고 그분의 성령으로 소생해야 한다. 그럴 때에 우리는 그분의 생명으로 채워질 것이다.

평생의 사업 ― 우리의 성화는 그분이 우리를 취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분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도록 영원 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그분을 주셨는데 이는 그분의 능력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온전하게 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그분은 하늘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살을 먹으며 그분의 피를 마시면 영생을 얻으리라고 선언하신다.

왜 우리는 이것을 더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가? 그 의미가 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그것이 쉽게 이해되도록 힘쓰지 않는가? 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도록 요구하는 그 사업을 보기 위하여 그들의 눈을 열지 않는가? 성화는 평생 동안의 점진적인 사업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고 선포하신다. 그대의 욕망과 경향을 거룩한 뜻에 일치시키고자 하는 것이 그대의 뜻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깨닫고 성취할 것과 세상에 우리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줄 것을 스스로 서약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의 제자들의 경건한 말과 행실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율법 ― 그분의 성품의 표현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이 율법은 우리에게 “더욱 거룩하라, 모쪼록 더욱더 거룩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의 메아리이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충만을 바라라. 203 그렇다, 의를 주리고 목마르게 사모하라. 약속하신 바는 “너희가 배부를 것임이요”이다. 그대의 마음을 이 의에 대한 간절한 소원으로 채우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하는 사업은 평화이며 그 효과는 영원한 평온과 확신이다.

거룩한 품성의 참여자 ―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거룩한 품성의 참여자가 되는 것이 우리의 특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할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그분은 명백하게 말씀하셨으며 이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가 거룩한 품성의 참여자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셨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영생을 위한 우리의 분투에서 성공할 수 있다. 능력은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다.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형상에 일치하기를 요구하신다. 거룩함이란 그분의 영광의 밝은 광채가 그분의 백성에게서 반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광채를 반사하기 위하여는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일해야 한다. 잘못으로 이끄는 모든 것이 가슴과 마음으로부터 비워져야 한다. 영적 힘을 얻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해야만 한다. 하늘의 양식이 우리 생애의 한 부분이 되도록 그것을 먹고 소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영생을 얻는다. 그 후에 주님의 기도가 응답된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서신 153, 1902.

의견과 행실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해야 함 ― 하나님의 수준으로 성화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이 있으나 그들은 의의 큰 표준이 그들에게 제시될 때에 크게 흥분하며 성화됨의 의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음을 입증하는 그런 정신을 나타낸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는 진실로 성화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며 그것이 그들에게 열려지자마자 즉시 순종하고 교리의 모든 점에 있어서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강한 소망을 나타낼 것이기 때문이다. 환희의 느낌은 성화의 증거가 아니다.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구원받았다”라는 주장은 그 영혼이 구원을 얻었거나 성화된 것을 입증하지 않는다.

204 크게 흥분한 많은 사람들이 성화되었다는 말을 듣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지적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못한데 이는 그들이 성경이나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아첨한다. 그러나 그들이 시험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경험에 대해 증언하게 될 때에 그들은 “나는 성화되었다”고 말하면서 진리를 듣는 일로부터 그들의 귀를 막는데 이로써 그 논쟁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성경을 살피거나 그들이 두렵게도 스스로 속고 있음을 입증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성화는 느낌의 상승 이상의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흥분은 성화가 아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에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만이 유일한 성화이며 하나님의 뜻은 그분의 거룩한 계명에 드러나 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이 성화이다. 그대들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로 입증하는 것이 성화이다. 인간의 의견이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야 한다.­리뷰 앤드 헤랄드, 1902년 3월25일자.

성화, 계속적인 성장 안에서의 경험 ― 1908 ― 만약 우리가 마음을 그리스도께 머물게 한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비처럼, 지상에 내리는 이른비와 늦은비처럼 오실 것이다. 의의 태양으로서 그분은 그분의 날개를 치며 치료와 함께 떠오를 것이다. 우리는 백합처럼 자라고, 곡식처럼 소생하며, 포도나무처럼 자랄 것이다.

우리의 개인의 구주로서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바라보고 모방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분에게 이르기까지 자라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자라날 것이며 우리의 양심은 성화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와 말에서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처럼 될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믿게 될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6:22, 23).­서신 106, 1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