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뽑은 기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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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60여년 동안 “리뷰 앤드 헤랄드”지에 2, 000회에 걸쳐 엘렌G.화잇 여사의 기사가 실렸다. 그 외에도 영문 “시조” 잡지에 2, 000회의 기사를 기고하였다. 또한 수백번에 달하는 기별들이 “유스 인스트락터” 및 건강 잡지들, 연합회의 기관지를 통하여 전하여졌다.

이러한 기사들의 내용 가운데는 실제적인 교훈, 교회를 위한 경고와 권면, 여행과 활동 상황에 대한 보고, 영혼 구원 사업을 위한 교훈,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교리 문제에 관한 설명 등 다양한 문제들을 취급하였다. 정기적인 형식으로 지면이 자유롭게 할애되어 다방면에 걸친 중대한 교리에 관한 문제들을 상세한 논법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하였다. 기회를 따라 같은 문제들이 거듭거듭 실려졌으며 매번 다른 면들을 강조하였다. 여사의 남겨 놓은 지시를 따라서 여사가 별세한 후에 이러한 많은 기사들을 책으로 묶어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기사들을 총합해서 출판해 달라는 일반의 요구가 없는 반면에 교리 문제만을 다룬 기사들을 특별히 선택하여 재판(再版)해 달라는 청원이 있었다. 이러한 기사들의 대부분이 재림기별의 중심적인 기별들을 설명한 것으로 탁월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매우 귀증한 기별들을 본래의 전체적인 내용 그대로 제5장에 다루어 독자들이 그 기별의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익을 얻게 하였다. 여기에 약간의 예외가 있음을 밝혀두고 싶은 것은 교리 설명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기사로서 그 내용의 분량이 많을 경우 그것들을 삭제하였으며 삭제된 부분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표시해 놓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학생은 선택된 교리 문제들을 재미있게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며 이 모든 문제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중심 문제로 다루었다.―편찬자

211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율법은 그 요구 조건의 한계가 광범위하다. 모든 원칙이 거룩하고 공정하며 선하다. 율법은 인간에게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지운다. 율법은 사상과 감정에 호소하며 또한 율법의 요구를 범한 사실을 깨닫는 모든 사람에게 죄에 대한 회오를 일으킨다. 만약 율법이 외형적인 행위에만 그 요구를 한정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그릇된 사상이나 악한 욕망과 음모 등에 대하여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영혼 자체가 순결하게 되고 정신이 거룩하게 되어 사상과 감정이 사랑과 의의 원칙과 일치하게 되기를 요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훈을 통하여 시내산에서 반포하신 율법의 원칙이 얼마나 원대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증명해 보이셨다. 주님께서는 영원토록 의의 위대한 표준이 될 율법의 원칙을 실제로 생애 가운데 적용하셨으며 그 표준은 심판이 베풀어지고 책들이 펴 있게 될 그 큰 날에 모든 인류를 심판할 표준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의를 성취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며 인류의 머리로서 인간 자신도 같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인간에게 증거해 보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원칙에 순종하셨다. 인간에게 공급된 주님의 은혜의 방편을 통하여 단 한 영혼도 천국을 상실할 필요가 없다. 212 누구든지 노력함으로써 품성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새 언약의 근븐적인 기초가 되게 하였다. 여호와의 율법은 나무이며 복음은 그 나무에 핀 향기로운 꽃봉오리들과 열매이다.

하나님의 영께서 율법의 밝은 뜻을 인간에게 나타내 보이실 때에 인간의 심령에 변화가 생긴다. 선지자 나단이 다윗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성실하게 묘사해 줌으로 다윗은 자신의 죄악을 깊이 깨닫고 죄들을 버리게 되었다 그는 온유한 정신으로 권고를 받아들였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겸비하게 하였다.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 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7-14) 라고 여호와의 율법을 찬양하였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증거는 다음과 같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죄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며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7-11).

213 죄가 율법을 죽인 것이 아니라 바울에게 있는 육신에 속한 정신을 죽인 것이다. 그는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울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롬 7:6)라고 말하였다. 또한 바울은 계속해서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롬 7:13).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청중의 관심을 범해진 율법에 집중시켰으며 저들이 어떤 점에서 범죄 하였는가를 증거해 보여주었다. 바울은 학교의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처럼 가르쳤고 저들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생애로 돌아가는 길을 보여 주었다.

율법을 범하는 생애 가운데는 안전함이 없고 평안과 정당성이 없다. 인간이 죄를 계속해서 짓고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무죄한 자로 서기를 바랄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할 수도 없다. 그는 범죄하는 생애를 그쳐야 하며 충성되고 진실하게 되어야 한다. 죄인이 도덕을 투영(投影) 시키는 큰 거울을 바라볼 때 그는 자기 품성의 결함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흠과 점이 많으며 더럽고 정죄를 받은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율법이 어떤 방법으로도 죄를 벗게 할 수도 없고 범죄자를 용서해 줄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죄인에게는 율법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율법은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는 학교 교사다. 죄인은 죄를 담당하신 구세주를 바라보아야 한다. 갈바리의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든 세상 사람들의 무거운 죄에 눌려 죽어가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에게 나타나 보이실 때에 성령께서는 죄를 회개하는 모든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태도를 보여 주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우리는 각자가 개인적으로 과거 어느 때보다도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는 성경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 불충성하며 거룩한 안식일을 모도하고 성경의 가장 이해하기 쉬운 말씀을 트집 잡으며 성경의 참 뜻을 왜곡하게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와 동시에 저들은 자신의 불순종하는 생애를 성경 말씀으로 합리화시키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214 그러나 진리의 말씀은 마치 그리스도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정죄한 것처럼 그러한 행위를 정죄하고 있다. 우리는 진리가 무엇임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바리새인들이 행한 것처럼 행해서 될 것인가? 또한 우리가 세상이 일찍이 알지 못했던 가장 위대하신 교사를 등지고 인간의 유전과 격언과 속담을 따라야 할 것인가?

인간이 함부로 용납해서는 안 될 여러 가지 신념들이 있다. 아담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모독이 되는 교활한 사단의 거짓말을 믿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 17). 사단은 하와를 유혹할 때에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창 3:1-5) 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 시조들이 갖기를 원치 아니하셨던 지식은 범죄에 대한 지식이었다. 저들이 거짓된 사단의 주장을 받아들였을 때 불순종과 범죄가 이 세상에 소개되었다. 하나님의 뚜렷한 명령에 대한 불순종과 사단의 거짓말을 믿는 이 신념은 이 세상에 저주의 수문(水門)을 활짝 열어 놓았다. 사단은 에덴 동산에서 시작한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사단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항하는 증거로서 자기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방심하지 않고 일하고 있다. 사단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과 같은 성품을 심어주기 위하여 노력하시는 일에 대적하여 일하고 있다.

거짓 것을 믿는 신념은 바울을 친절하고 온유하며 동정심이 깊은 인물로 만들지 못하였다. 215 그는 신앙적으로 열성적인 인물이었으나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반대하기 위하여 굉장히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는 남녀들을 옥에 잡아넣기 위하여 온 지방을 두루 헤매었다. 바울은 이 경험에 대하여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행 22:3, 4)라고 말하였다.

인간 가족은 하늘 아버지의 율법을 범함으로 난관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의 치유제를 보이실 때까지 죄인을 버려두시지 않으신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가 죽으셨다.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는 조건으로 우리를 위한 대치물과 담보로서 이 희생을 받아들이셨다. 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그분의 공로를 붙잡고 죄를 짊어지신 주님께 자신의 모든 죄를 자복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아야만 한다.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회개하고 믿는 죄인에게 전가(轉嫁)되었다. 그 죄인은 하늘 가족의 일원이 되며 하늘 임금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의 후사가 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유업을 받는 자가 될 것이다.

216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시 19:7)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를 궁구하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시 119:152)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라고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최고 통치자로서, 모든 생명이 있는 존재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천연계의 전체적인 운행을 위하여 지배의 법칙을 제정하셨다.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생물계나 무생물계를 막론하고 우주의 만물은 무시할 수 없는 고정된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 법칙에는 예외가 없으며 거룩한 손으로 만드신 것은 단 한 가지도 하나님께서 잊으신 것이 없으시다. 그러나 천연계의 모든 것이 자연 법칙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지만 오직 지적 존재인 인간만이 법칙의 요구를 이해할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도덕적인 율법에 순종할 수도 있다. 당신의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걸작품인 인간에게만 거룩한 율법의 신성한 요구들을 인식할 수 있는 양심과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율법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즉각적이며 완전한 순종이 요구되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억지로 순종하도록 강제하지 않으시며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로 대우하신다.

인간의 개인적 책임에 대한 문제를 이해하는 자가 극히 드물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중대한 문제이다. 217 우리는 각자가 순종하며 살 수도 있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며 당신의 권위를 무시하고 그런 생애에 따르는 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 때에 모든 영혼에게 심각한 질문이 있을 것인데 과연 내가 하늘로부터 들려 온 음성을 순종하고 시내산에서 반포된 십계명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허다한 무리들과 더불어 빛나는 율법을 짓밟을 것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분의 율법을 지키며 그분께서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는 것이 가장 고상한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율법을 미워하며 율법의 거룩한 주장에 대항하여 싸운다. 사람들은 거룩한 빛에 대하여 저들의 영혼의 문을 닫아버리며 거룩한 빛이 저들에게 비추일 때 빛 가운데 행하기를 거부한다. 저들은 이기적인 만족이나 세속적인 이득을 위하여 마음의 순결, 하나님의 은총 및 천국에 대한 저들의 소망을 희생시킨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시 19:7)다고 말하였다. 여호와의 율법의 그 단순성, 포괄성 및 그 완전성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스러운가! 율법의 내용이 너무나 간단 명료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든 계명을 쉽게 암기할 수 있으나 그 의미는 너무나 원대하며 하나님의 전체적인 섭리를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고 외형적인 행동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사상, 의도, 욕망 및 정서까지도 살핀다. 인간의 법률은 이같은 일을 할 수 없다. 인간의 법률은 다만 외형적인 행동만을 제재할 수 있다. 인간은 범죄자이면서도 자신의 악행이 인간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길 수 있다. 또한 도둑질, 살인, 혹은 간통죄를 범한 형사상(刑事上)의 범인이 되고서도 발견되지 않는 한 법률이 그를 범죄자로 정죄할 수 없다. 하나님의 율법은 마음 속에 들끓는 질투, 시기심, 증오심, 악의 원한, 정욕 및 야심 등을 주시(注視)하여 본다. 이러한 악의 씨들은 뜻은 있으나 기회가 없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을 뿐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행동으로 옮겨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죄악적인 감정은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전 12:14)실 그날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단순하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저들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믿는다고 거만하게 자랑하며 인간의 생애와 천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 가운데 가장 깊은 철학이나 가장 광범위한 연구력을 가지고도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것들이 있음을 잊어버리는 자들이 있다. 218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 가운데는 신비에 속한 것이 없다. 모든 사람들이 율법이 포함하고 있는 위대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가장 박약한 지능을 가진 사람도 이러한 규칙들을 파악할 수 있고 가장 무식한 사람이라도 생애를 규제할 수 있으며 거룩한 표준을 본받아 품성을 형성할 수 있다. 만약 인간의 자녀들이 최선의 능력을 다하여 이 율법을 순종한다면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더욱 밝히 깨달을 수 있는 정신력과 식별력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발전은 비단 이생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한 지식으로 발전할지라도 거기에는 항상 미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거룩한 율법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요구하신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없이는 가장 고상한 신앙의 고백도 한갖 위선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고 하셨다.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약 2:10)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대하여 불충성하지 않고는 열 계명 가운데 단 하나도 범할 수 없다. 율법의 요구에 대한 가장 작은 이탈 행위일지라도 무시하거나 고의적인 범죄를 하는것은 죄이며 모든 죄는 죄인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한다. 오직 순종만이 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각별하신 은총을 받는 백성이 되게 한 약속의 성취를 받는 조건이었다. 그 율법에 대한 순종은 히브리인들에게 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개인들과 국가에게 놀라운 축복을 가져올 것이다.

율법에 대한 순종은 우리의 구원만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우리의 행복과 우리와 관련된 모든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긴요한 것이다. 219 영감의 말씀은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시 119:165) 라고 말씀하였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은 창조주께서 친히 인간의 필요를 위하여 응용하신, 거룩하고 공의로우며 선한 자유의 율법을 어떤 인간도 짊어질 수 없는 속박의 멍에로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율법을 고통스러운 멍에로 여기는 사람은 죄인이며 율법의 교훈 가운데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은 율법을 범한 사람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롬 8:7)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롬 3:20) “죄는 불법이”(요일 3:4)기 때문이다. 인간이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은 율법이 있기 때문이며 저들이 구세주에 대한 필요를 느끼기 이전에 저들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게 될 죄인들임을 자각해야 한다. 사단은 죄의 가혹한 특성을 인간이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도록 계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저희 발로 짓밟는 자들은 큰 기만자의 일을 하고 있는데 저들은 죄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고 범죄자의 양심에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원칙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죄악적이지만 종종 가볍게 넘겨버리는 은밀한 목적들일지라도 실제에 있어서 그것들이 품성의 기초가 되고 시험 거리가 되므로 하나님의 율법은 그 은밀한 목적들을 엄밀히 살핀다. 율법은 죄인이 자신의 도덕적인 품성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고자 할 때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다. 죄인이 의의 큰 표준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이 정죄된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가 취해야 할 다음의 행동은 자신의 죄들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서를 구하는 일이다. 이 일에 실패함으로 많은 사람들은 저희 허물을 드러내는 거울을 깨려고 하며 저희 생애와 품성 가운데 있는 오점들을 지적하는 율법을 무력하게 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우리는 큰 죄악의 시대에 살고 있다. 허다한 인간들은 죄악적인 관습과 악한 습성의 노예가 되어 있으며 저들을 결박한 속박은 끊어 버리기 힘들다. 죄악은 홍수처럼 온 땅에 범람하고 있다. 매일 발생하는 범죄 사건은 언급하기조차 두려울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온성의 파수꾼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율법은 유대인만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며 복음 시대를 도래케 한 영광스러운 특권으로 말미암아 폐하여진 것이라고 가르칠 것이다. 220 불법과 범죄가 편만한 세상의 상태와 목사들과 신자들이 율법은 아무런 제어력이 없다고 주장하며 가르치는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율법의 정죄하는 권세는 우리가 행하는 일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지 않는 일에도 그 권세가 미친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행하라고 요구하신 일들을 소홀히 함으로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악을 그쳐야 할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만일 이러한 능력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분명히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그러한 죄악들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어 우리를 정죄하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행위가 순결하거나 선하지 못하며 향상되지 못하고 고귀하다고 기록되지 않은 사실은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재능을 계발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며 우리를 정죄할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존재하여 있었다. 이 율법은 거룩한 존재자들의 상태에 적용되도록 제정되었으며 천사들까지도 이 율법의 지배를 받았다. 인간이 범죄한 후에도 의의 원칙들은 변치 않았다. 율법에서 단 한 가지도 폐한 것이 없으며 율법의 거룩한 교훈에서 단 한가지도 개선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태초부터 이 율법이 존재하였던 것처럼 이 율법은 끊임없는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시편기자는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를 궁구하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 인줄을 알았나이다”(시 119:152) 라고 말하였다.

천사들을 지배하며 가장 은밀한 사상과 욕망과 기질에 순결성을 요구하며 “영원 무궁”(시 111:8)토록 존재할 이 울법으로 온 세상이 신속히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날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범죄자들은 스스로 지존자께서는 알지 못하시고 전능자께서는 생각지 않으시며 하나님께서 항상 저들을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불원간 저들은 저희 행위에 대한 보상 곧 죄의 값인 사망을 받게 될 것이며 율법을 지킨 의로운 백성은 하늘 도성의 진주문을 통하여 천국으로 인도될 것이며 하나님과 어린 양의 앞에서 불멸의 생명과 기쁨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221 나는 어제 밤 마음에 큰 부담을 안고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형제 자매들에게 기별을 전하고 있었으며 그 기별은 성령을 받는 문제와 인간 대리자를 통하여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그릇된 이론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일에 관한 경고와 교훈의 기별이었다.

나는 1844년의 시련기가 지난 후 우리들이 당면했던 꼭 같은 광신주의가 마지막 시대에 또다시 우리들 사이에 등장하게 될 것이며 우리가 초기 경험에서 단호하게 대처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결정적으로 이 악을 대처해야만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우리는 크고도 엄숙한 사건들의 문지방에 서있다. 예언들은 성취되고 있다. 이상스럽고 중대한 역사가 하늘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불원간 나타나리라고 예언된 사건들이 하나님의 크신 날을 앞질러 벌어지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태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다. 민족들은 분노하고 있으며 전쟁을 위한 큰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 나라와 왕국들은 서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 하나님의 큰 날은 급속히 다가오고 있다. 비록 국가들은 전쟁과 유혈의 참극을 위하여 저들의 모든 군사력을 총동원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종들이 그 이마에 인침을 받을 때까지 네 모퉁이에 서 있는 천사들에게 사방의 바람을 붙잡으라고 하신 명령은 아직도 그 효력을 나타내고 있다.

222 오늘날 이 세상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그 분명한 결과를 인식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업이 완성된 후에 주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쉬셨으며 당신께서 안식하신 날을 거룩하게 하셨고 그 날을 거룩히 구별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바치도록 제정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이 여호와의 율법을 전혀 무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안식일을 대신하여 다른 한 날이 제정되었다. 한 인간 대리자는 말씀의 적극적인 교훈에 대항하여 그의 방법과 그의 뜻을 대립시키고 있으며 온 세상은 반역과 죄 가운데로 뛰어들게 되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이러한 적대적인 행위는 덮는 그룹 천사였던 루스벨로 말미암아 하늘 궁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단은 하늘 총회의 으뜸이 되고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사단은 그의 지휘를 따르는 천사들과 더불어 반역의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저들 가운데 불만의 정신을 퍼뜨리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교묘한 기만적인 술책으로 일하였으므로 많은 천사들이 그의 목적을 완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그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였다. 충성된 천사들까지라도 사단의 성품을 충분히 식별할 수 없었으며 그가 하는 일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사단은 많은 천사들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일에 성공을 거둔 후 자기 주장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차지하고 계신 지위를 자기가 차지하는 것이 모든 천사들이 원하는 바라고 주장하였다.

마귀는 불평 불만의 정신이 적극적인 반란으로 성숙해질 때까지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때에 천국에는 전쟁이 있었으며 사단은 그에게 동조한 모든 천사들과 더불어 하늘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사단은 천국의 지배권을 얻기 위하여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명예와 최고의 권위를 그 이상 더 맡기실 수 없었으며 그는 하늘 정부에서 누렸던 지위마저 박탈당하고 말았다.

그 때로부터 사단과 그의 동맹한 군사들은 우리의 세상에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공공연한 원수들이 되었으며 진리와 의의 사업을 대적하여 계속적으로 전쟁을 걸어왔다. 사단은 과거에 그가 천사들에게 주장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거짓된 주장을 사람들에게 계속적으로 내세워 세상을 자기의 편으로 만들었다. 소위 그리스도 교회들 까지라도 첫 대 배도자의 편을 들었다.

223 사단은 자기 자신을 이 세상 왕국의 임금으로 대표하였으며 그는 이러한 특성을 가기고 광야에서 시도한 그의 세 가지 큰 시험 중에서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 접근하였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구세주에게 말하며 그가 예수님께 바라보게 한 세상의 모든 왕국을 가리켰다.

하늘 궁전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사단의 지배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는 사단의 권세를 맞아 정복해야 할 때가 올 것을 알고 계셨다. 그 시기가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당신의 왕관과 왕의 두루마기를 벗으시고 당신의 신성을 인성으로 입히시고 악의 임금을 맞아 정복하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셨다. 하늘 아버지 앞에서 인류의 중보자가 되시기 위하여 구세주께서는 모든 인간이 사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였으며 세상에서 당하는 역경과 슬픔과 시험을 받으셔야만 하였다. 베들레헴의 갓난아기로서 구세주께서는 인류와 하나가 되셔야 하였고 말구유로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흠없는 생애로서 그분은 인간이 회개의 생애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친히 보이셔야만 하였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구속하시는 은혜와 죄의 용서하심을 가져오셨다. 만일 인간이 충성심을 되찾고 그 이상 더 범죄하지 않으려 한다면, 저들은 용서를 받을 것이다.

연약한 인성을 쓰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천사들의 무리에게만 주셨던 보다 높은 특성에 속한 권세를 소유한 자의 시험을 맞이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었으며 이 능력을 힘입어 주님께서는 사단이 그에게 가져온 모든 유혹을 물리치셨으며 당신의 영혼을 죄로 더럽히지 않으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당신의 의로운 성품을 받아들이는 모든 아담의 아들 딸들에게 이길 수 있는 이 권세를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그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며 누구든지 그분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당신의 의로운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거해 보이셨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죄인이 회개와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믿음을 활용함으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고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해 보이셨다.

224 사단은 오늘날 그가 그리스도께 제시했던 동일한 유혹을 제시하며 우리들의 충성의 대가로 이 세상의 왕국들을 우리들에게 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사단의 유혹은 아무런 힘도 갖고 있지 못하다. 사단은 모든 면에 우리들과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가 없으신 주님의 고결하신 성품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독생자의 생명의 은사를 받는 사람은 유혹에 넘어갈 수 없다. 믿음으로 거룩한 성품을 굳게 붙잡을 때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는 기도하며 기도한 바를 믿을 것이다. 시험을 당하고 시련을 겪을 때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주시기 위하여 돌아가신 그 능력을 주장할 것이며 주님의 은혜를 통하여 승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죄인은 바로 이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어야 하며 구원하시는 능력과 그를 죄로부터 보호하시는 능력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본으로 보이신 그 은사에 대하여 우리들은 얼마나 감사해야 할 것인가!

인간이 꾸며 낸 깊은 이론들과 공론들이 아무리 편만할지라도 결국에 승리하는 사람은 거룩한 능력을 의존하기 위하여 매우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우리가 무한하신 분의 능력을 붙잡고 그리스도께 나아가 “제손에는 아무런 대가를 지불할 것이 없으며 오직 주님의 십자가에만 매달리나이다”라고 말할 때에 거룩한 능력이 생애를 성화시키고 순결케 하는데 우리들과 협력할 수 있다.

아무도 십자가를 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를 의지할 때에만 승리할 수 있다.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거룩한 능력이 우리 생애 가운데 역사할 수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화평과 친절하심의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말씀을 연구함으로 매일 인간의 심령 가운데 큰 사업이 성취되어야만 한다. 우리들은 참된 신앙의 단순성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연구에는 분명한 대가가 따를 것이다. 225 영적 이해력의 결정적인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자. 보배로운 말씀을 우리의 권고자로 삼자. 우리는 모든 순간마다 조심스럽게 행하며 그리스도와 밀접히 연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정신과 은혜가 생애 사운데 필요하며 사랑으로 역사하고 영혼을 순결케 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제시하신 거룩한 요구들을 밝히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성품의 사본인 율법을 아무도 몰라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친히 돌비에 쓰신 말씀들은 당신의 백성에 관한 섭리를 너무도 완전하게 나타냈으므로 아무도 오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왕국의 율법은 명확하게 알려졌으며 모든 민족과 방언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정부의 원칙으로서 후일에도 증거 될 것이다. 우리는 출애굽기 20장과 31장 12-18절에 기록된 율법들을 깊이 연구해야 할 것이다.

심판이 베풀어지고 책들이 펴지며 그 책들에 기록된 사실대로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게 될 그 때에, 그날까지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셨던 돌비가 의의 표준으로써 온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 때에 남녀들은 저희 구원의 선행 조건이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에 대한 순종임을 보게 될 것이다. 아무도 죄에 대한 핑계를 찾을 수 없다. 그 율법의 의로운 원칙에 의해서 사람들은 생명이나 사망의 언도를 받게 될 것이다.

226 이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범죄하는 경우 인류의 구속자가 되시기로 친히 서약하셨다. 아담이 타락하게 되자 세상이 있기 이전부터 하늘 아버지의 영광의 참여자이셨던 주님께서는 당신의 왕의 제복과 왕관을 벗어 놓으시고 베들레헴의 갓난아기가 되셔서 아담이 걸려 넘어진 땅을 밟으시기 위하여 높으신 권좌에서 내려오셔서 타락한 인류를 구속하여야 하셨다. 주님께서는 원수가 인간에게 가져오는 모든 유혹들을 스스로 당하시기로 작정하셨으나 사단의 모든 공격으로도 하늘 아버지께 대한 주님의 충성심을 변절케 할 수 없었다. 죄가 없으신 생애를 사심으로써 주님께서는 아담의 모든 아들과 딸도 이 세상에 처음으로 죄를 가져온 마귀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해 보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남녀들에게 이길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 주님께서는 한 인간으로서 인간 사회에 사시기 위하여 인간의 형체를 쓰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본성에 따르는 모든 부담들이 입증되어야 하고 시련을 당해야 할 것으로 여기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인성 가운데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가 되셨다. 당신의 성육신(成肉身)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새로운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칭호를 얻으셨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고 말하였다. 227 인간의 아들이면서도 주님께서는 새로운 의미에서 하나님의 독생자가 되셨다. 이렇게 하여 주님께서는 나시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인간으로 출생하심으로 인류와 연분을 맺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하지 않은 세계들과 타락한 세상의 주민들에게 인간으로서도 저희 창조주께 대하여 충성된 생애를 살 수 있도록 풍부한 섭리가 마련되어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인간의 형체를 쓰시고 오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시험하도록 사단이 허락받은 모든 유혹을 이겨내셨으며 사단의 모든 공격을 물리치셨다. 주님께서는 심한 고통을 당하셨으며 어려운 고난을 겪으셨으나 하나님께서는 모른 체 하고 예수님을 내버려두시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을 때 주님께서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렸고 하늘에서 한 음성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고 하였다. 이 선포를 듣자마자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들어가셨다. 마가는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막 1:12, 13) 라고 하였다.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눅 4:2)셨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시기 위하여 광야로 이끌려 가셨을 때 하나님의 영께서 주님을 인도하셨다. 주님께서 시험을 자청하신 것이 아니었다. 주님께서는 홀로 계시며 당신의 사명과 사업에 대하여 명상하시려고 광야로 가셨다. 금식과 기도를 통하여 그분께서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피묻은 길을 위해서 자기 자신에게 버티는 힘을 얻어야만 하였다. 멸망시키는 자로 말미암아 고통 가운데 사로잡힌 이들을 자유케 하시는 당신의 사업을 어떻게 시작하여야만 할까? 그분의 오랜 금식 기간 동안에 인류의 구원자로서의 당신의 전체적인 계획이 그분 앞에 펼쳐져 있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 들어가셨을 때 하늘 아버지의 영광으로 둘러싸였다.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시는 일에 몰두하신 주님께서는 인간적인 유약성을 초월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영광이 떠나게 되자 그분께서는 시험과 더불어 싸우기 위하여 홀로 남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매순간마다 시험은 주님을 세차게 공격하였다. 주님의 인간적인 본성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투쟁에서 움츠러들었다. 주님께서는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다. 228 굶주림으로 연약하여지고 몸이 수척해지신 주님께서는 지치시고 기진하셨고 정신적인 고뇌로 말미암아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사 52:14)다. 바로 이러한 순간이 사단이 노리고 있었던 기회였다. 사단은 이제 그가 그리스도를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 때에 사단은 마치 그리스도의 기도에 응답하기 위하여 나타난 빛의 천사처럼 가장하여 구세주에게 접근하였으며 그가 전한 기별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는 말씀으로 사단을 대적하셨다. 모든 시험에 있어서 주님께서 쓰신 전쟁의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사단은 주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표로써 이적을 행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모든 이적, 기사보다도 더욱 위대한 것, 즉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뢰심은 논박할 수 없는 하나의 표징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 위치를 확보하고 계시는 한, 유혹자는 결코 주님을 넘볼 수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해지는 것이 우리들의 유일한 희망이다.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는 사람들은 사단의 미혹을 하나님의 진리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원수가 제시하는 공론에 정복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문제들에 관하여 공론을 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다. 우리는 날마다 성경을 우리의 권고자로 삼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하늘 아버지와 연합하셨으며 주님께서 친히 인성을 쓰셨을 때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인류를 연합케 하는 고리이시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히 2:14)셨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이리하여 심령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다. 남녀들이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쓰셨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불멸을 나타내 보이셨다.

229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였을 때 저들은 저희 신앙의 기초를 거부하였다. 이와 반면에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주장하면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세계도 역시 기만당한 유대인들이 범한 것과 꼭 같은 과오를 범하고 있다. 그리스도께 매달리고 저들의 소망의 중심이 그리스도라고 공언하면서도 도덕적인 율법과 예언들에 대하여 경멸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은 믿지 않은 유대인들보다 더 안전한 위치에 놓여있지 못하다. 저들은 무엇에 대하여 회개할는지 완전히 설명할 수 없으므로 저들은 죄인들에게 알아들을 만하게 회개를 호소할 수 없다. 죄들을 버리라고 권고를 받은 죄인은 무엇이 죄인지 물어 볼 권리가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죄는 불법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것을 확증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롬 7:7)다고 말하였다.

오직 도덕적인 율법의 의무적인 요구들을 인정하는 사람들만이 대속(代贖)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중재하셔서 당신의 율법에 대한 인간의 충성을 회복시킴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율법에는 범죄자를 용서할 권한이 없다. 예수님께서만 홀로 죄인의 빚을 갚아 주실 수 있으시다. 예수님께서 회개한 죄인의 부채를 갚아 주셨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해도 좋다는 승락을 한 것이 아니라 그 때부터 회개한 죄인은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230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존재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담이 범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도 율법의 원칙들은 추호도 변치 않았으며 타락한 상태 가운데 있는 인류에게 적응되도록 명확하게 재정되고 표현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아버지와 의논하시는 가운데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도를 세우셨다. 사망이 즉각적으로 범죄자에게 이르게 하는 대신 하나님의 아들의 위대하고 완전하신 제물을 상징하는 희생 제물에게 사망이 옮겨지도록 하였다.

백성들의 죄는 제사를 거행하는 제사장 곧 백성들을 위한 중보자에게 상징적으로 옮겨지게 된다. 제사장 자신이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될 수 없으며 그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의 생명으로 대속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스스로 죽음을 맛보는 대신에 흠없는 어린 양을 죽였다. 죄의 벌이 무죄한 짐승에게 옮겨졌고 그 짐승은 즉시로 죄인을 대신하는 제물이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희생을 상징하였다. 이 희생 제물의 피를 통하여 인간은 세상의 죄를 대속하실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보았다.

만일 아담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지 않았다면 의문의 율법은 결코 제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선언을 하심으로 아담에게 처음으로 좋은 소식의 복음을 주셨으며 이 복음은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대대로 이어서 전해졌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지식과 구속의 경륜을 아담과 하와에게 가르쳐 주셨다. 저들은 조심스럽게 이 중대한 교훈을 간직하였으며 구전(口傳)으로 이 교훈을 저희 자녀와 그 자녀들의 후손에게 전해주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지식이 보존되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거의 천년이 가깝도록 장수하였으며 천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주신 교훈을 가지고 저들을 방문하였다. 231 희생 제물들을 통하여 드리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 제도가 세워졌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저희 죄를 인정하였고 감사함과 거룩한 신뢰심으로 샛별의 오심을 고대하였다. “샛별”이신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아담의 타락한 후손들을 하늘로 인도하실 것이다. 이처럼 모든 희생 제물이 드려질 때마다 복음이 전하여졌으며 신자들의 행위는 계속적으로 강림하실 구세주에 대한 저들의 믿음을 나타내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요 5:46, 47)고 말씀하셨다.

아담이 자기의 모본과 교훈으로 자신의 범죄가 인류에게 가져온 재앙의 물결을 막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불신의 사상이 인간의 심령 가운데 스며들었다. 아담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요구들에 관한 인간의 두 가지 노선에 대하여 최초의 모본을 나타내 보였다. 아벨은 희생 제물 가운데 상징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러나 가인은 희생 제물의 필요에 관하여 믿지 않는 자였다. 그는 죽임을 당한 어린 양으로 상징된 그리스도를 식별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짐승의 피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복음은 아벨에게만 전하여진 것이 아니라 가인에게도 꼭 같이 전하여졌다. 그러나 그 복음은 가인에게 있어서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었는데 그 까닭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대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희생 제물인 어린 양의 피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사망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가리킨 모든 예언들을 성취하셨으며 모든 예표와 표상된 그림자들의 실체이셨다. 주님께서는 도덕적 율법을 지키셨으며 인류의 대표자로서 율법의 요구에 응답하심으로 율법을 존중하셨다. 여호와께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표상적 희생 제사로 예표된 실체로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폐지되어야만 할 의문의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을 깨달을 수 있었다. 유대인의 제도를 너울처럼 덮어버린 어두움은 저들에게 있어서 마치 모세의 얼굴에 비친 영광을 덮은 수건과 같은 것이었다. 모세의 얼굴에 비친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그 빛을 반사하는 영광이었다.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산 위에 있을 때에 아담의 타락을 비롯하여 구속의 경륜이 가장 강력한 영상(映像)으로 그에게 계시되었다. 232 그 때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여행을 지휘하신 바로 그 천사가 육체로 나타나야 할 것을 알게 되었다. 하늘 아버지와 하나이셨던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께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도록 해야만 하였다. 모세는 희생 제물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에게 복음의 계획을 가르치셨고 복음의 영광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모세 자신은 자기 얼굴에 반사된 빛나는 영광을 의식할 수 없었고 그가 백성들에게 접근하였을 때에 이스라엘 자녀들이 그를 피하여 도망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모세는 저들을 그에게 가까이 불렀으나 저들은 감히 그 영광으로 빛나는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모세가 백성들이 자기 얼굴을 영광의 광채 때문에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웠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이스라엘 자녀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였으므로 저들에게 몹시 괴로움을 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사람의 감정에 대한 하나의 실례가 된다. 저들은 범죄자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그 영광의 침투하는 빛을 제거해 버리기 원하지만 충성하는 사람에게 그 영광의 빛은 거룩하고 공의로우며 선하게 보일 뿐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위한 올바른 관심을 가진 사람들만이 하늘 아버지의 율법을 범함으로 필요하게 된 그리스도의 구속을 올바로 평가할 수 있다.

고대의 제도 가운데 구세주가 없다는 견해를 가진 자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한 유대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저들의 이해력이 너울로 가려진 것처럼 어두울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예표한 희생 제물을 바치러 나올 때에 믿음으로 메시야의 강림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께서 약속된 메시야에 관한 모든 예언들을 성취하시는 가운데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심을 입증할 만한 일들을 행하실 때에 저들은 주님을 거부하였고 주님의 참된 품성에 대한 가장 밝은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시에 그리스도께 대한 최대의 신앙을 공언하며 유대 나라의 제도를 경멸히여기는 그리스도 교회가 전체적인 유대 민족의 제도를 창시하신 그리스도를 실질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233 나는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율법에 관하여 질문을 받았다. 어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인가? 나는 의문의 율법과 십계명인 도덕적인 율법, 이 두 가지가 다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한다고 대답하는 바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민족의 전체적인 제도의 기초이셨다. 아벨의 죽음은, 가인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희생 제물로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순종의 학교에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결과였다. 가인은 이 세상을 위하여 흘려야 할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피흘림의 제사를 거부하였다. 이 모든 의식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전체적인 제도의 기초가 되셨다. 그리스도께서 온 유대 민족의 제도의 기초가 되신다는 점을 범죄한 인류로 깨닫도록 하는 것이, 의문의 율법이 몽학 선생처럼 해야 할 사업의 시작이었다.

성소에 관련된 봉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중재에 관하여 계속적으로 교육을 받아야만 하였다. 성소 봉사의 근본 목적은 하늘 왕국의 율법인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을 모든 인간의 심령 가운데 넣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희생 제물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실물 교훈이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받으셨고 죽어가는 희생 제물이 되셨으며 인간이 지은 죄를 친히 담당하셨고 무죄 하신 분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죄가 되셨다.

234 구원의 대주제(大主題)에 대한 문제를 깊이 명상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업을 깨닫게 된다. 약속된 생애의 은사뿐만 아니라 이 희생 제도와 중재의 본질과 특성은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율법-모든 인간에게 구속력이 있는-에 대한 고결하고 거룩하며 높은 이념을 불어넣어 주는 주제가 된다. 금단의 열매를 먹는 작은 행동으로 인한 그 율법에 대한 범법이 인류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스도의 중재의 본질은 사람들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하여 가장 작은 불순종의 행동까지라도 행하기를 두려워하게 해야 한다.

무엇이 죄를 구성하게 하는지에 대하여 밝히 깨달아야 하며, 우리들은 순종에서 불순종에 이르는 경계선을 단 한 발자국이라도 넘지 않도록 피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치신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위대한 사업을 이해하기를 바라신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하시고 공평한 사랑과 자비가 구현된 것을 보게 될 때에 죄인의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곳으로 따라가고 싶은 고마운 마음이 생기게 된다(1900년, 원고 87).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이 성경절 가운데 성령께서는 사도를 통하여 특별히 도덕적인 율법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드러내며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느끼게 하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활용함으로 용서와 화평을 얻기 위하여 주님께 피하게 한다.

선입 관념을 굽히고 이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는 마음은 주로 미네아폴리스 총회에서 [E.J.와그너]와[ A.T.죤즈] 두 형제를 통하여 주님께서 보내신 기별을 반대한 정신에 다분히 그 근거를 두고 있다. 235 사단은 반대하는 정신을 자극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주시고자 하신 특별하신 능력을 우리 신자들에게서 빼앗는 데 성공하였다. 원수는 사도들이 오순절 이후에 진리를 선포한 것처럼 저들이 온 세상에 진리를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얻지 못하게 길을 막아 버렸다. 진리의 영광으로 온 땅을 환하게 비출 빛이 거절당하였으며 우리 형제들 스스로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 세상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 * * * 십계명의 율법은 금제(禁制)의 면에서보다도 자비의 면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율법의 금제성(禁制性)은 순종에 따르는 행복의 확실한 보장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일 때에 율법은 영원한 세대를 통하여 우리에게 기쁨을 줄 품성의 순결성을 이루도록 역사할 것이다. 순종하는 이들에게 율법은 보호의 장벽이 된다. 우리는 이 율법 안에서 인간에게 의의 불변의 원칙을 나타내시고 범죄의 열매인 악에서 인간을 보호하시려고 노력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죄인을 벌하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죄인이 자기 스스로 벌을 자초(自招)하는 것이다. 죄인 자신의 행동들이 분명한 결과를 가져오는 연속적인 사건들을 돌발시킨다. 범죄의 모든 행위는 죄인 자신에게 반응을 보이며 품성의 변화를 일으키고 그가 더욱 쉽게 또다시 죄를 짓게 만든다. 죄를 짓기로 선택함으로 인간은 저들 스스로가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며 축복의 통로에서 저들 자신을 차단시키며, 그 분명한 결과는 패망과 사망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사상의 표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받아들일 때에 율법은 곧 우리의 사상이 되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로 육신적인 욕망과 성벽을 따르는 세력을 초월하게 하며 죄로 이끄는 유혹들을 멀리하게 한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시 119:165).

불의한 가운데는 화평이 없으며 악한 자는 하나님과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의를 받아들이는 이는 하늘 나라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 85:10). ― 서신 96, 1896년.

236 바울이 당면했던 가장 심각한 난관은 유대교를 가르치는 교사들의 감화로 말미암아 발생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이 고린도교회에 분열을 일으킴으로 바울은 많은 곤난을 당하였다. 저들은 계속적으로 의문의 율법의 효력을 역설하였으며 이 의문의 율법을 그리스도의 복음보다도 높이 평가하였고 바울이 새로 개심한 사람들에게 의문의 율법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하여 그를 정죄하였다.

바울은 저들 자신의 입장에서 저들과 대결하였다. 바울은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후 3:7-9) 고 말하였다.

시내산에서 두려운 위엄 가운데 반포하신 하나님의 율법은 죄인에게 주는 정죄의 발표이다. 정죄하는 것은 율법의 직분이며 율법에는 용서하거나 구원하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237 율법은 생애를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그 교훈에 일치하게 행하는 사람들은 순종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율법은 율법의 정죄 아래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속박과 사망을 가져다준다.

율법은 말할 수 없이 거룩하고 매우 영광스러웠으므로 모세가 손에 돌비를 받아들고 하나님과 같이 있었던 거룩한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은 영광의 광채를 반사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느끼지 않고 바라볼 수 없었으며 모세는 불가불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울 수밖에 없었다.

모세의 얼굴에 비쳤던 영광은 율법 가운데 나타난 그리스도의 의의 반영이었다. 율법 자체에는 영광이 없으며 그리스도께서 율법 가운데 구현될 때에만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율법에는 구원하는 능력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의와 진리의 충만하신 형상으로 나타나실 때만을 제외하고는 율법에는 아무런 영광의 광채가 없다.

희생 제물을 바치는 봉사의 예표와 그림자와 모든 예언들은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세상에 이르게 될 자비와 은혜에 대해서 어둡고 희미한 견해를 주었다. 모세에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표와 그림자의 깊은 의미가 공개되었다. 모세는 예표가 원형(原型)을 만날 때 즉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폐지되어야 할 그 의식의 종국적 목적을 보았다. 따라서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류가 도덕적인 율법을 지킬 수 있음을 보았다. 이 율법을 범함으로 인간이 이 세상에 죄를 가져왔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이르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이 되셨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을 대신하여 당신의 완전하신 품성을 제공하셨다. 주님께서 친히 불순종의 저주를 짊어지셨다. 희생 제물과 헌물들은 그가 치르셔야 했던 희생을 미리 예표하였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세상 죄를 지고 갈 어린 양이신 주님을 예표하였다.

폐지되어야 할 그 의식의 실물을 바라보는 것은 율법에 나타나신 바 되고 모세의 얼굴에 광채를 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돌비에 기록되고 새겨진 율법의 직무는 사망의 직무였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범죄자는 아무런 용서의 희망도 없이 율법의 저주 아래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율법의 직무에는 아무런 영광이 없으며 의문의 율법의 예표와 그림자 가운데 나타나신 약속된 구세주께서 도덕적인 율법을 영광스럽게 하셨다.

바울은 그의 형제들이 온 유대 민족의 제도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신 죄를 사유해 주시는 구세주의 큰 영광을 바라볼 수 있기를 원했다. 238 또한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희생 제물로 돌아가셨을 때 예표가 원형과 마주쳤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랐다.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의문의 율법은 아무런 효력을 발생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의문의 율법은 도덕적인 율법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영광스러웠다. 그 전체가 신성(神性)의 표적을 지니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과 의로우심을 나타냈다. 폐지되어야 할 율법의 직무가 그처럼 영광스러웠거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고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시고 성화케 하시는 성령을 주실 때 그 실체(實體)는 얼마나 더욱 영광스러웠겠는가?

십계명의 율법의 선포는 하나님의 영광과 존엄하심에 대한 놀라운 전시였다. 이 능력의 나타나심이 백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저들은 매우 두려워하였다. 저들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보았을 때 저들은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8, 19)라고 말하였다. 저들은 모세가 저희 중보자가 되기를 원했다.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임명되신 중보자이심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그리스도의 중보가 없었다면 저들은 분명히 소멸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출 20:20, 21).

죄의 용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 저들의 잃어버린 상태 곧 저들의 범죄와 죄악 때문에 중보자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이러한 진리들에 대하여 백성들은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저들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에 대한 지식을 대부분 상실하였다. 저들은 무엇이 죄를 구성하며 무엇이 의를 구성하는지에 대하여 모든 감각을 거의 상실하였다. 저들이 바친 예물이 상징한 약속된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의 용서를 받는 이치를 희미하게 깨달았을 뿐이었다.

239 바울은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후 3:12-16)고 말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으며 저들의 의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었고 저들의 희생 제물과 예물들이 그 중대성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완고한 불신으로 말미암아 저들 스스로 가리운 수건은 아직도 저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있다. 만약 저들이 율법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 수건은 벗겨질 것이다.

그리스도 교계의 많은 영혼들도 저희 눈과 마음을 어둡게 하는 수건을 쓰고 있다. 저들은 폐지되어야 할 그 의식의 종국을 바라보지 못한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사망시에 폐지된 것은 오로지 의문의 율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도덕적인 율법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주장한다. 저들의 이해력을 어둡게 하는 수건은 너무나 두껍다. 많은 사람들의 심령은 하나님과 전쟁을 하고 있다. 저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지 않는다. 저들이 하나님의 정부의 법칙에 일치하지 않는 한 저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아무 쓸모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저들이 그리스도를 저희 구세주라고 말할는지 모르나 주님께서는 마침내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그대들은 거룩한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존귀케 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었으므로 그대들은 나에게 대한 순수한 신앙도 가질 수 없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바울은 우리 시대의 목사들이 대담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도덕적인 율법이나 의문의 율법을 그렇게 나타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혐오심을 품고 공공연히 비난하며 오명(汚名)을 씌우는 고의적인 행위를 한다. 이처럼 저들은 하나님의 존엄하심과 영광을 멸시하며 모욕한다.

도덕적인 율법은 예표나 그림자가 된 적이 결코 없다. 도덕적인 율법은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존재하였으며 하나님의 보좌가 없어지지 않는 한, 그 율법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240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율법 중 단 한 가지 계명도 변화시키거나 고칠 수 없으시다. 그 이유는 율법이 당신의 정부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율법은 변할 수 없는 것이며 고칠 수도 없고 무한하고 영원한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또한 율법의 명예를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서 당신 자신을 바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죄를 아시지 못하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갈바리에서 돌아가셨다. 주님의 죽으심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당신의 율법의 불변성을 나타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산상보훈의 말씀 가운데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 18)고 선언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저주를 지셨으며 그 율법의 징벌을 받으셨고 당신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었던 위치에 인간을 두시기 위하여 또한 구세주의 공로를 통하여 인간이 용납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모든 계획을 수행하셨다. 당신의 희생에 의해서 영광이 율법 위에 비치었다. 그 때에 폐지되어서는 안 될 율법, 의의 표준인 하나님의 율법, 즉 십계명의 영광은 폐지되어야 할 율법의 종국을 바라본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밝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의 대언자이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 따라서 저들은 율법에 대한 주님의 사명의 관련성을 깨닫게 되고 구세주께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당신의 품성의 사본인 율법 가운데 나타났으며 인간이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화할 때까지 주님의 변화케 하시는 능력이 영혼을 감동시킬 것이다. 저들은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들이 되며 더욱 더 저희 구세주처럼 닮게 되고 저들이 완전한 표준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기 위하여 착실하게 발전해 나갈 것이다.

율법과 복음은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서로 받들어 준다. 율법은 그 모든 존엄성을 가지고 양심과 대결하며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를 죄인에게 느끼게 한다. 241 복음은 율법의 능력과 불변성을 인정한다.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롬 7:7)다고 하였다. 율법에 의해서 간곡히 호소된 죄에 대한 감각은 죄인을 구세주께로 인도한다. 곤경에 처한 인간은 갈바리의 십자가에 의해서 제공된 강력한 논증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든 회개한 죄인들에게 공여(供與)하신 그리스도의 의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고 말씀하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242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인간에게 추리력을 부여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 학교에서 구속 사업에 대하여 신중히 연구되지 않고 있다. 학생들의 대부분이 구속의 경륜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위하여 보증으로 주신 것이다.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는 말씀으로 우리들을 초청하신다.

학생들이여 그대들은 오직 완전한 복종과 순종의 정신으로 그대들 자신을 그리스도와 연결할 때에만 안전하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짐을 지심으로 그 멍에는 쉽다. 그대들이 십자가의 무거운 짐을 들 때에 그 짐은 가벼울 것이다. 그 십자가는 그대에게 영생의 보증이 된다. 그리스도의 뒤를 기꺼이 따르며 매 발걸음마다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삼하 22:36)라고 크게 외칠 수 있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우리가 하늘로 향하는 길을 걸어가려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교과서로 삼아야만 한다. 243 영감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날마다 교훈이 되는 말씀을 찾아 읽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빌 2:5-10) 신다고 말하였다.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겸비는 인간의 정신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이들은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주님의 신성(神性)과 그분의 존재하심이 실존(實存)했다는 것을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본체로서 영광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우리의 중보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 중보자는 모든 하늘 천군의 사령관이시며 당신의 신성에 인성을 옷 입으신 주님께서는 스스로 종의 형체를 쓰셨다. 이사야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사 9:6, 7)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시기로 동의하시는 가운데 나타내신 겸비의 정신은 온 하늘의 지적 존재자들이 기이하게 여기는 바 되었다. 그리스도의 숭고한 선재성(先在性)에 대한 사실이 없었다면 인간이 되기로 동의하신 행위가 겸비한 것이 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이해력을 넓혀 인간이 위치해 있는 곳에서 인간을 만나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이 될 수 있는 도덕적인 능력을 인간 가족에게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왕의 제복과 왕관과 높은 지위를 내놓으셨고 당신의 신성에 인성을 옷 입히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244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며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연결시키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금고리이다. 이 문제는 우리의 연구 과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적인 인간이셨다. 또한 그분께서는 인간이 되심으로 당신의 겸비에 대한 증거를 주셨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육신으로 계신 하나님이셨다. 우리가 이 문제를 연구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떨기나무의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고 하신 말씀을 주의깊이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참회하는 정신으로 배우는 자의 겸비한 태도를 가지고 이 문제를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에 대한 연구는 숨은 진리를 깊이 탐구하는 연구자에게 보상을 주는 풍성한 결실의 밭이다.

성경은 영생으로 인도하는 안전한 길에 있는 우리의 안내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를 증거하여 이끄시며, 만일 진리를 받은 사람이 실천에 옮길 때에 가장 고상한 교육을 받은 사람과 맞먹는 도덕적인 능력을 얻게 할 말씀을 기록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키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 과제로 삼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은 확대될 것이다. 어떤 연구 분야보다도 성경은 이해력을 증가시키며 모든 기능에 새로운 활력을 부여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인간이 광범위하고 고상한 진리의 원칙과 접촉하게 한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가 온 하늘과 밀접한 연결을 이루게 하며 우리에게 지혜와 지식과 이해력을 나누어준다.

저속한 작품들을 다루며 영감을 받지 못한 인간의 저서들을 읽을 때 정신은 위축되며 비천하여진다. 이러한 저서들은 심오하고 광범위한 영원한 진리의 원칙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해력이 무의식적으로 이미 익숙하여진 사물들을 이해하는 데 적용되고 이러한 사물들을 생각하는 데 활용될 때 그 이해력은 약화되고 위축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모든 인간적인 이론을 초월한 학문의 근본으로서 연구하도록 계획하셨다. 245 또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광맥을 깊이 파서 그 가운데 있는 가치 있는 보화를 찾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너무나도 빈번하게 인간적인 이론들과 지혜가 성경에 대한 학문 대신에 자리를 차지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개조(改造)하는 작업에 종사하며 저들은 성경의 책들을 식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저들의 발명을 통해서 성경 말씀을 거짓된 것으로 증거하려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추리력에 의해서 복음이 받아들여지도록 하시지 않으셨다. 복음은 인간의 영적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신령한 음식으로 적용되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은 신령한 양식이다. 우리 학교의 학생들에게 많은 저작자들의 저서들을 연구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야말로 성경의 위대한 주제(主題)들에 대하여 가장 무식한 사람들이다. 교사들 자신이 가장 위대한 서적을 펴서 복음이, 겸손하고 참회하는 사람에게 성경 자체의 신성을 증거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다. 이 지상에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품성은 신성을 나타내었으며 교사들과 어린이들과 청년들이 오직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 안에서 저희 믿음과 사랑과 숭배의 목적을 식별하게 될 때까지 저들의 모든 교육 분야에서 주님께서 주신 복음이 주님의 인간적인 유업에 대한 연구 과제가 되어야 한다. 말씀은 존경을 받아야 하며 순종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애, 그분의 사업, 그분의 교훈, 그분의 고난과 최후의 승리에 대한 기록이 포함된 성경은 우리의 힘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인생 학교에서 더욱 고상한 생애를 위한 자격을 얻을 수 있는 특권을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는 최고의 학교의 최고 학급에서 우리들의 연구는 끊임없는 영원한 시대를 통해서 지속될 것이다.

246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 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5, 14).

이 장(章)은 그리스도의 사업의 특성과 중요성을 묘사하고 있다. 요한은 자신의 주제(主題)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모든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고 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존엄하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요한은 고귀한 진리의 거룩한 광선을 마치 태양이 비취는 빛처럼 빛나게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단 한 분밖에 없는 중보자로 증거하였다.

인간의 육체를 쓰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교리는 신비에 속한 것이며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골 1:26)이다. 이것은 매우 크고 심원한 경전의 비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요 1:14)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본성에 비하여 열등한 인성을 당신 스스로 취하셨다. 247 이처럼 나타내 보이신 하나님의 겸비하심 만큼 놀라운 겸손은 다시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요 3:16)다. 요한은 모든 사람들이 밝혀진 사상을 깨닫고 감화를 받을 수 있도록 단순한 표현으로 이 놀라운 문제를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취하신 것처럼 믿게 하신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인성을 쓰셨다. 주님께서는 실제로 인성을 소유하셨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히 2:14)셨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아들이었고 인간의 혈통을 따라서 다윗의 후손이었다. 주님께서는 인간 예수 그리스도로 그 신분을 밝히셨다. 바울은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히 3:3)고 말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증거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선재성에 관하여서도 결정적인 증언을 하고 있다. 말씀은 거룩하신 존재자이시며 하늘 아버지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존재하셨다. 주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언약의 중보자이셨으며 유대인들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이 지상의 모든 민족이 그분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한 분이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요 1:1). 인류와 천사들이 창조되기 이전에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며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요 1:3)다.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만물이 있기 이전에 존재하신 것이 틀림없다. 이 문제에 관하여 하신 모든 말씀들은 너무나 결정적인 것이어서 아무도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본질적으로 또한 가장 고상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이셨다. 주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께서는 만유를 주관하시며 영원토록 찬양을 받을 분이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뚜렷한 하나님의 개성을 가지시고 존재하셨으며 하늘 아버지와 하나이셨다. 주님께서는 하늘의 탁월한 영광이셨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하늘의 모든 지적 존재자들을 호령하시는 사령관이셨고 천사들의 숭배와 존경을 당신의 권리로서 받으셨다. 248 이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찬탈(贊奪)의 행위가 아니었다. 주님께서는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잠 8:22-27)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버지와 하나이셨다는 진리 가운데는 빛과 영광이 있다. 이 빛이야말로 흑암 속에서 비취는 빛이며 거룩하고 근본적인 영광으로 그 빛을 찬란하게 한다. 이 진리 자체에 무한한 신비가 깃들여 있으며 다른 신비들과 그 밖의 설명할 수 없는 진리들을 설명해 주고 이와 동시에 이 진리는 접근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빛 가운데 소중히 간직되어 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2).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 4:16). 이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주님께서 우리 세상에 나타나신 목적이 영원한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살아 있는 빛의 광선처럼 증거 되었다.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지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미 5:1, 2).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 24).

249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셔야만 했다는 사실은 실로 신비에 속하는 것이며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들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어렵다. 인간이 배워야 할 가장 겸비의 교훈은 인간의 지혜가 아무런 쓸모가 없으며 자기 혼자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애쓰는 것이 어리석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아무리 최대한의 지적 능력을 발휘하고 소위 세상 사람들이 일컫는 탁월한 교육을 받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그는 아직도 무지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고대의 철학자들이 저들의 지혜를 자랑하였으나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볼 때에 그 무게가 어떻게 나타났는가? 솔로몬에게는 위대한 학문이 있었으나 죄와 상관이 없는 도덕적인 독립성을 유지하는 방법과 거룩한 성품을 본받아 형성된 품성의 힘을 유지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그의 지혜는 한갖 어리석은 것이었다. 솔로몬은 그의 연구와 각고의 노력과 끈질긴 탐구의 결과를 우리에게 말해 주었다. 그는 자기의 지혜가 전반적으로 헛되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거룩한 성품에 대한 저들의 평가와 당신의 속성에 대한 저들의 불완전한 지식은 저들의 정신적인 구상을 확대하거나 넓히지 못하였다. 저들의 정신은 거룩한 성품에 일치하도록 고결하게 되지 못하였으며 가장 야비한 우상 숭배에 몰입하게 되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 23). 바로 이러한 것이 그리스도를 떠난 모든 요구와 지식에 따르는 대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권세를 받으셨다. 주님께서는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고 말씀하셨다”(요 6:57, 63).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의 교리를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개성 곧 당신의 품성의 신성(神性)을 가르치신 것이었다. 250 주님께서는 또다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 5:25-27) 고 하셨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배도와 배도자의 기만적인 세력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타락할 것에 대하여 태초부터 알고 계셨다. 구속의 경륜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저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중보자의 직분에 임명되었으며 영원 전부터 우리들의 대리자요 담보(擔保)로 설정되셨다. 이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을 쓰시도록 결정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 10:5)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때가 차서 만료되기까지는 인간의 형체로 오시지 않으셨다. 그 후 때가 이르러서 주님께서는 베들레헴의 갓난 아기로 우리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의 자녀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그 어느 누구도 베들레헴에서 갓난 아기로 태어나신 주님을 맞이할 때처럼 놀라운 환희의 시위(示威)를 받은 이가 없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베들레헴의 계곡과 광야에서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저들은 노래하였다. 아, 오늘날 인간 가족들이 이 노래를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때 선포된 선언과 그 때 음률을 타고 시작된 노래는 세상 끝날까지 울려퍼질 것이며 땅 끝까지 전파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이다. 의의 태양이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때 베들레헴의 계곡에서 시작된 그 노래는 많은 물소리와 같은 허다한 무리의 음성으로 메아리쳐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 19:6)라고 외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당신의 순종의 생애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성취하셨다. 구속 사업은 당신의 본체를 버리시고 다른 형체를 취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본체에 인성을 쓰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251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본체에서 나온 한 실체를 인성에게 주셨다. 그리스도 안에 인성을 이루며 타락한 인류를 신성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구속 사업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가 마치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버지와 하나이신 것처럼 당신과 하나가 될 수 있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사랑하신 것처럼 인간을 사랑할 수 있으며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들이 될 수 있고 주님 안에서 온전하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인성을 쓰셨다.

하나님의 독생자에게서 기인하신 성령께서는 인간의 몸과 혼과 영을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신인성(神人性)에 붙들어 매신다. 이 연합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가 붙어 있는 것으로 상징되었다. 유한한 인간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연결된다. 믿음을 통하여 인성이 그리스도의 본성에 흡수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252 인간이 타락한 후에 사단은, 인류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고 선언하였으며 그는 이 신념을 온 우주에 전달하려고 노력하였다. 사단의 말들은 사실인 것처럼 들렸으며 그리스도께서는 기만자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하여 오셨다. 천국의 대주재이신 주님께서는 인간의 사건을 책임지셨으며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동일한 조건들을 가지시고 인간이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사단의 시험들을 이기셨다. 이렇게 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이 거룩한 성품에 참여자가 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취하심으로 인간의 시련과 슬픔 및 인간이 당해야 할 모든 시험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셨다. 죄에 대하여 낯설은 천사들은 특이한 시련 가운데 있는 인간을 동정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쓰시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셨으며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심으로 시험을 받게 될 모든 영혼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취하심으로 모든 인간의 일부를 취하셨다. 주님께서는 인류의 머리가 되셨다. 신성과 인성을 취하신 존재로서 당신의 긴 인간의 팔로 온 인류를 감쌀 수 있으셨으며 동시에 당신의 거룩한 팔로 무한하신 분의 보좌를 붙잡을 수 있으셨다.

253 천국이 이 광경을 바라보았을 때 과연 어떠했을까! 죄와 부정을 추호도 알지 못하신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상태에 놓여 있는 인성을 쓰셨다. 이것은 유한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굴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으며 당신 자신을 스스로 낮추셨다. 이 얼마나 깊고도 진지한 사색과 명상을 요하는 문제인가! 무한히 위대하신 주님께서는 천국의 대주재이셨으나 당신의 위엄과 영광을 추호도 상실하지 않으신 채 자신을 낮게 굽히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주님께서는 인간들 사이에서 궁핍을 맛보시고 가장 심한 굴욕을 당하시기까지 자신을 굽히셨다. 주님의 가난하심을 인하여 우리로 부요케 하시려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 주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모욕, 조롱, 멸시 및 조소를 감수하셨다. 또한 주님께서는 사랑과 선하심과 자비로 충만한 당신의 기별을 허위 진술하며 약용하는 말을 들으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하신 아들이심을 스스로 증거하셨다고 해서 당신을 가리켜 귀신의 왕이라고 부르는 말을 들으셨다. 주님의 탄생은 초자연적인 것이었으나 신령한 사물에 대하여 눈이 어두워진 당신의 친 백성들은 그것을 오점과 흠으로 여겼다. 주님께서 맛보지 않으신 인간의 쓰라린 슬픔이란 단 한 점도 없었으며 주님께서 견디지 않으신 인간의 저주란 단 한 부분도 없었는데 이는 주님께서 하나님께 많은 아들들과 딸들을 인도할 수 있기 위함이었다.

타락한 인류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슬픔의 인간으로 이 땅에 계셨고 비애를 맛보셨으며 당신의 천국 가정을 떠나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모든 교만을 묻어버리게 하고 우리의 모든 허영심을 부끄럽게 하며 자부심에 대한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도 남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죄인들의 결핍, 시련, 비애 및 고통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삼으신 주님을 바라보라.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러한 고난을 받으시고 영혼의 상처를 입으셨다는 것을 우리 마음에 깊은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까?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쓰시고 인간의 대표자의 입장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하늘 아버지와 아들과 연결될 때에 사단과의 투쟁 속에서도 모든 거룩한 요구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시기 위함이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통하여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분리시킨 것은 죄였으며 이러한 분리된 상태를 계속시키는 것 역시 죄이다.

254 에덴에서 하신 예언 가운데 원수라고 언급하신 것은 단순히 사단과 생명의 왕에게만 국한해서 말씀하신 뜻이 아니었다. 이것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될 것이었다. 사단과 그의 천사들은 모든 인류의 증오심을 느낄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창 3:15).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생긴 증오심은 초자연적인 것이었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이 증오심은 일면 자연적인 것이었고 다른 면에서 볼 때 인성과 신성을 겸하신 주님께 초자연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의 거주자로 나타나셨을 때처럼 증오의 감정이 극도로 악화됐던 적은 결코 없었다. 이 지상에 산 인간으로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과 같이 그처럼 완전한 증오심을 가지고 죄를 미워한 자가 과거에 전혀 없었다. 주님께서는 거룩한 천사들에게 작용했던 죄의 기만적이며 미혹적인 세력을 이미 보셨으며 당신의 모든 능력을 다하여 죄를 대적하셨다.

그리스도의 순결성과 거룩하심 및 죄를 짓지 않으신 주님의 의는 육욕과 죄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들에 대하여 영속적인 견책이 되었다. 주님의 생애 가운데 나타난 진리의 빛은 사단이 세상을 감싸고 있는 도덕적인 암흑 속에서 밝은 빛을 비추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거짓됨과 기만적인 성품을 노출시켰으며 많은 영혼들의 심령 가운데 있는 부패케하는 감화력을 진멸하셨다. 사단이 그처럼 극렬한 증오심으로 발악한 원인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사단은 그의 타락한 무리들을 거느리고 가장 치열한 전쟁을 벌이기로 결심하였는데 이는 하늘 아버지의 완전하신 대표자이시며 당신의 품성과 실행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사단의 오전(誤傳)을 논박하신 주님께서 세상에 계셨기 때문이었다. 사단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속성을 마치 하나님의 속성처럼 비난하였다. 그러나 지금 사단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도 멸망받지 않고 회개함으로 당신께 나오는 모든 자들이 영생하기를 바라시는 동정과 자비심이 많으신 하늘 아버지의 품성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보았다.

극도의 세속화(世俗化)는 사단의 가장 성공적인 유혹들 중의 하나였다. 255 사단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이 세속적인 매력에 이끌려 하늘의 사물들을 생각할 여지가 없도록 계획하고 있다. 사단은 세상을 사랑하는 저들의 정신을 지배한다. 세속적인 사물들은 하늘의 사물들을 어둡게 하고 저들의 안목과 지식에서 주님을 내쫓는다. 참된 것 대신에 거짓 이론들과 거짓 신들을 섬기고 있다. 사람들은 세상의 화려한 광채와 장식에 완전히 매혹되고 있다. 저들은 세속적인 사물에 너무나 밀착되어 약간의 세속적인 이득을 얻기 위하여서도 어떤 죄라도 지을 것이다.

사단은 바로 이런 점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정복하려고 하였다. 그는 인성을 쓰신 주님을 쉽사리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8, 9)고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동요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이 유혹이 얼마나 강하다는 것을 느끼셨으나 우리를 위하여 그 시험과 싸워 이기셨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마땅히 사용할 수 있는 무기 곧 강한 권고의 힘이 되시는 당신의 말씀인 “기록하였으되”(마 4:4, 10)만을 사용하셨다.

율법의 명예가 옹호되고 있을 때 하늘의 천사들과 타락하지 않은 세계의 거민들은 실로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 이 투쟁을 주목하였다. 단순히 이 인간 세계만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온 우주를 위해서 이 쟁투는 영원히 판가름나야만 하였다. 흑암의 동맹 세력도 신인성(神人性)을 쓰신 인간의 대리자이신 주님을 정복하고 배도자로 “승리했다!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주민들은 영원히 나의 왕국에 속한 것이 되었다!”라고 외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기 위하여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사단은 발꿈치 밖에는 상하지 못하였고 머리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을 때 사단은 자신이 패배한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참된 성격이 온 하늘에 드러난 것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의 존재자들과 세계들이 하나님 편에 서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그는 저들에게 미칠 수 있는 자신의 영향력의 장래 전망이 완전히 막힌 것을 보았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대쟁투를 종결시킨 문제를 세세토록 증명할 것이다.

256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성을 당신 스스로 취하셨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추호도 인간의 죄에 참여하시지 않으셨다. 주님께서 인간을 에워싼 연약함과 약점을 맛보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마 8:17)고 하신 때문이었다. 주님께서는 연약한 우리의 사정을 몰라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신 분이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죄를 아시지 못하였고 “흠없고 점이 없는”(벧전 1:19)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다. 만약 사단이 그리스도로 가장 작은 죄 한 가지라도 범하도록 유혹할 수 있었다면 그는 구세주의 머리를 상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말했듯이 그는 주님의 발꿈치를 상하였을 뿐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머리를 상하게 할 수 있었다면 인류의 소망은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아담에게 이른 것같이 그리스도에게도 임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교회는 완전히 소망을 잃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완전한 죄 없으심에 관하여 의혹을 품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신앙은 지적인 신앙이어야 하며 대속 제물이신 주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심과 전적인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영혼이 흑암에 둘러싸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요긴한 일이다. 거룩하신 대리자께서는 의아해 하는 우주의 거민들에게 당신의 인성에 나타난 완전하고 전적인 겸비와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보이셨으므로 가장 미천한 인간까지라도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 거룩한 능력을 인간에게 주셔서 인간이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가 되게 하셨으며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게 하셨다. 이러한 이유에서 회개하고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 여기신 바 될 수 있다.

257 하늘의 가장 높은 천사라 할지라도 단 한 영혼을 대속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그룹 천사들과 스랍 천사들은 다만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주께서 주신 영광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며 인간을 하나님께 화목시키는 일은 오직 하나님과 동등하셨고 인간을 고귀하게 하는 속성을 소유하셨으며, 인간을 대신하여 나선, 무한하신 하나님이라 일컬을 수 있고 타락한 세계에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중보자를 통하여서만 성취할 수 있었다. 인간의 대리자로 담보가 되려면 인성을 가져야만 하며 대표할 인간 가족과의 연결이 있어야 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대사(大使)로서 거룩한 품성을 가지고 세상에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하여 무한하신 분과의 연결을 가져야 하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격들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 당신의 신성에 인성을 옷입히신 주님께서는 인간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 위에 오셨다. 주님께서는 인류를 위한 담보물이었고 하나님의 대사였는데 인류를 위한 담보물이라고 한 것은 당신의 의로써 인류를 대신하여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킨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대사라고 한 것은 타락한 인류에게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셨다는 뜻이다.

258 이 세상의 구세주께서는 인류를 당신께로 이끄시며 저들의 공포심을 가라앉히며 저들의 어두운 감정을 몰아내시고 소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며 저들로 하나님께서 거룩한 대리자의 공로를 통하여 기꺼이 저들을 받으실 것을 믿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충성하는 신하로서 우리는 중보자이시며 대언자이시고 간구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버지 앞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하늘 법정에서 탄원하고 계신 사실에 대하여 무한히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심으로 영감을 받기 위하여 간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다. 세상의 궁전에서 왕이 자신의 진실성을 사람들에게 보증하기 위하여 가장 믿음직한 서약을 할 때, 그가 약속을 이행 할 때 도로 찾는 조건으로 자기 자식을 볼모로 내놓는다. 하늘 아버지의 진실성에 대한 서약이 어떠한가 보라! 하나님께서 하늘 총회의 불변성을 보증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께서 인성을 쓰시고 이 세상에 오시도록 허락하셨으며 이 지상에서의 짧은 기간만이 아니라 하늘 법정에서도 인성으로 남아 있게 하여 하나님의 진실성에 대한 영원한 서약의 표로 삼으셨다.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의 부요하심이 얼마나 심오한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왕국의 일원이 되고 하나님의 후사가 되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 우리가 갈바리의 광경을 바라보고 인성을 쓰신 수난자(受難者)께서 인류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신 것을 볼 때 모든 민족적인 차별과 모든 파벌의 차이는 말살될 것이며 모든 계급의 명예와 모든 계급 제도의 교만은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와 갈바리의 십자가에 비친 광명한 빛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계급과 인종의 차별을 영원히 폐지할 것이다. 모든 계급의 사람들은, 세속적인 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많은 아들과 딸들로 영광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으로 빈궁한 생애와 고통과 굴욕과 수치와 고뇌의 죽음까지 맛보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한 가족의 일원이 되며 하늘 임금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께서 높이 평가하시는 것은 어떤 지위나 유한한 지혜가 아니며 인간적인 자격과 재능도 아니다. 259 인간의 지능과 이성과 재능은 하나님의 영광과 당신의 영원한 왕국의 건설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천국의 안목에서 볼 때 가치가 있는 것은 신령하고 도덕적인 성품이며 그러한 성품은 끝없는 영원한 세대를 위해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불멸의 영광스러운 몸을 이루게 할 것이다. 인간이 그처럼 추앙하는 세상의 왕위가 아무리 높을지라도 그가 들어간 무덤에서 다시 밖으로 나오게 하지 못할 것이다. 대적 마귀의 목적을 섬긴 인간의 재물과 명예와 지혜는 앞으로 올 세상에서 저들에게 아무런 유업이나 명예나 책임 있는 지위를 가져다 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후사가 되게 하며 예수님과 함께 하는 후사가 되게 하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히 여기는 자들 만이 구세주의 형상을 지니고 무덤에서 일어날 것이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정받을 가치가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인정할 것이다. 저들은 저들이 받는 능력과 사유하심이 같은 근원 곧 저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저들은 성도의 광명한 집회에 참여하고 의의 흰 두루마기를 입기 위하여 저희 품성의 두루마기를 주님의 피로 씻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늘 아버지의 가납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계급 제도, 사회적인 차별, 피부색, 인종, 지위, 재물, 가문 및 영달을 근거로 하여 사람들이 차별하는 것을 어떻게 보실 것인가? 연합의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의 평등 사상에 있다. 모든 분열, 불화 및 차별의 근본 원인은 그리스도에게서 이탈되는 데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신자들의 매력이 이끌려야 할 핵심이시며 우리가 그 핵심에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우리는 감정, 동정심, 사랑 및 예수님의 품성과 형상으로 자라는 일에 서로 공감(共感)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차별 대우하는 일이 없으시다.

예수님께서는 세속적인 허식의 무가치함을 아셨고 그러한 허식적인 과장에 대하여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다. 260 영혼의 존엄성, 품성의 고상하심 및 원칙의 고결함을 갖추신 주님께서는 세상의 헛된 풍조를 훨씬 초월하고 계셨다. 비록 선지자는 주님을 가리켜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곤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사 53:3)고 묘사하였으나 주님께서는 세상의 고귀한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고귀하신 분으로 존경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저들의 호의를 받으시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셨다면 인간 사회의 가장 우아한 계급의 인사(人士)들이 주님을 모셨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칭찬을 원치 않으셨으며 모든 인간적인 영향에 관계없이 행동하셨다. 천국의 명예와 영광을 버리시고 세속적인 화려함을 소유한 일이 없으시며 사치에 방종하지 않으셨고 아무런 화려한 장식을 달지 않으셨으며 다만 겸비의 생애만을 유지하신 주님께 있어서 재물, 지위, 온갖 세속적인 계급및 인간적인 위대성의 구별 등은 모두 다 너무나도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가난에 쪼들리고 생활 염려에 억눌리며 수고에 지친 비천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저들의 시련을 이해하지 못하시며 저들이 받는 환경의 압력을 알지 못하시며 저들의 궁핍과 슬픔을 동정하실 수 없는 분처럼 생각해야 할 만한 아무런 이유와 모본을 주님의 생애에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의 겸비하신 일상적 생애의 낮은 수준은 주님 자신의 비천한 출신과 환경에 조화되는 것이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생명과 영광의 주님께서 가장 비천한 생애를 맛보시기 위하여 굴욕적인 생애를 사셨으므로 아무도 자기 자신이 주님의 돌보심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에게 모든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게 하셨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편애하여 사귀며 다른 모든 사람들을 도외시하기 위하여 소수의 사람을 선택하여 접근하지 않으셨다. 보수주의적 사상이 자기 동료들과의 접촉을 차단해 버릴 때 특히 이러한 일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스스로 공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될때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시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연합하게 될 때에 어떠한 완전한 인성을 이룰 수 있는지 그 모본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비와 동정심과 사랑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위대성의 새로운 국면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해 보이셨다. 또한 그분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해석을 주셨다. 주님께서는 인류의 머리로서 자비와 공의를 화목시킨 의를 드러낸 거룩한 정부의 원리 가운데 있는 교훈들을 인간에게 가르치셨다. 자비와 공의를 화목시키는 일에 있어서 죄와의 어떤 타협도 없었으며 공의의 어떤 주장도 무시되지 않았다. 261 자비와 공의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으로서 각기 제정된 위치가 있는데 자비는 그 자체의 온화하고 관대한 기질을 소멸함이 없이, 또는 그 자체의 동정적인 특성을 상실함이 없이 회개하지 않는 완고한 죄인을 벌하는 데 그 기능을 행사할 수 있으며 공의는 그 자체의 성실성을 범하지 않고 회개한 죄인을 용서하는 일에 그 기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쓰시고 거룩한 속성을 취하셨으며 인성과 신성 사이에 십자가를 세워 하나님에게서 죄인을 분리시킨 깊은 구덩이를 메꿈으로써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6-1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1-9).

262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노력에 도덕적인 능력을 결합시키기 위하여 오셨으며,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범사에 저들의 모본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저들의 시야에서 떠나게 하는 일을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진리를 바라보고 또한 바라봄으로 변화될 수 있으며 당신의 은혜로 말미암아 범죄에서 순종으로, 불순결에서 순결로 또한 죄에서 마음의 거룩함과 의로운 생애로 변화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저들에게 진리를 증거하셨다.

구원받은 사람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생애의 마지막 시간에 이르러서 그리스도를 붙잡게 될 것이며 저들이 죽기 이전에 구속의 경륜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서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생명 강가로 인도하실 것이며 저들이 세상에 있을 때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저들에게 가르치실 것이다. ― 원고 150, (일자 불명).

263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이 행한 것처럼 예수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를 전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믿고 자비와 선하심과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구세주의 사랑을 증거해야 하며 많은 사람들의 심령에서 흑암을 몰아내는 매개물들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아들과 딸이 성취해야 할 위대한 사업이 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요 14:15, 16)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때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신과 함께 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만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요 17:20)하여 기도하셨다고 하였다. 또다시 주님께서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28)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당신의 동역자들로서 저들에게 성공을 보장해 주시기 위하여 풍성한 허락의 말씀을 해주셨음을 우리는 안다. 264 주님께서는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고 말씀하셨다.

아,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과 행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특권이 얼마나 놀라운가! 그리스도를 죄를 담당하신 분이요 우리 죄악을 위한 화목제물이심을 아는 지식이 우리로 거룩한 생애를 살게 하는 힘이 된다. 이 지식은 인류의 행복을 위한 안전한 보호자이다. 사단은 이 지식이 없이는 우리가 반드시 혼란에 빠지게 되고 우리의 힘을 상실하게 될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은 사라질 것이며 원수의 모든 교활한 술책에 희생을 당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사단은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정교한 계획들을 세워 놓았다. 우리로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하여 사랑과 자비의 봉사를 잊어버리게 하고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능력에 대한 지식을 끊어버리며 하늘에서 비치는 모든 광선을 가로막기 위하여 마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드리운 사망의 장막처럼 지옥과 같은 그늘을 던지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다.

그리스도께서만이 홀로 신성을 대표할 수 있으셨다. 태초로부터 하늘 아버지의 면전에 있었고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나타난 형상이셨던 주님께서만이 이 사업을 성취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으셨다. 언어의 묘사만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낼 수 없었다. 순결한 생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신뢰와 복종의 생애, 하늘에 있는 가장 높은 천사까지라도 피하였을지 모를 굴욕적인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당신을 인류에게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일을 행하시기 위하여 우리 구세주께서는 당신의 신성에 인성을 옷 입으셨다. 인류에게 이해를 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주님께서는 인간의 기능들을 사용하셨다. 오직 인성을 통해서만 인류를 접근하실 수 있으셨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예비하신 인간의 몸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행동으로 실천해 보이실 수 있으셨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육체 가운데서 하나님의 생명을 보존하심으로 이 세상을 축복하셨으며 이렇게 하여 당신께서 인성을 신성과 연합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실 수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고 말씀하셨다. 265 아, 하나님의 아들의 고귀한 사업에 대하여 얼마나 이해성이 부족한가! 주님께서는 손에 이 세상의 구원을 쥐고 계셨다. 사도들에게 하신 명령은 오늘날 이 시대에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꼭 같이 주신 명령이다.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눅 24:47)되어야 한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마 28:18) 갖고 계시며 이 권세를 우리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비록 교회가 가난하고 교육이 없는 무명의 인사들로 구성되었다고 할지라도 만일 저들이 믿고 기도하는 성도가 된다면 저들의 감화력은 이 때와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감동을 줄 것이며 저들이 단순한 믿음으로 나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의 허락들을 신뢰한다면 저들은 큰 사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이 빛을 발한다면 저들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하늘 왕국의 사업은 발전할 것이다. 저희가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자각한다면 저들은 활동할 기회들을 찾을 것이며 세상을 위한 빛으로서 저희 빛을 발할 것이다. 따라서 저들은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함에 있어서 성실성과 열정의 모본을 보이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비록 가난하고 무식할지라도 만일 저들이 선택하기만 한다면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우는 학생들이 될 것이며 주님께서는 저들에게 참된 지혜를 가르치실 것이다. 온유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심과 참된 경전과 참된 신앙을 가진 이의 생애는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감화력이 효과적일 것이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보다도 저들의 책에서 얻은 지식을 더욱 의뢰하는 경향이 있다. 때때로 저들은 은밀한 기도로써 하나님과 더불어 열심히 씨름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려하지 않으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허락의 말씀들을 붙잡지 않는다. 신령한 종교적 열정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찾을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저를 아는 것이 영생이 되게 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기회를 엿볼 것이다. 저들은 산 편지들이 될 것이며 인류에게 세상의 빛이 되시는 주님을 증거할 것이다.

266 그리스도께서는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막 13:34) 셨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각기 자신의 일을 충성되게 행하기를 기대하신다.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가 주님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이 있다. 모든 사람들은 활동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만일 그대들이 주의 음성을 순종하지 않고 그대들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견고히 신뢰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맡기신 사업을 수행하지 않으며 또한 주님의 모본을 따르지 않는다면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그대들의 이름이 적혀질 것이다. 받은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지 않고 그대들의 빛을 발하지 않는다면 그 빛이 꺼져 캄캄하게 될 것이며 그대들의 영혼은 두려운 위험에 싸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말씀하신다. 진리에 대한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라. 이것이 세상을 빛으로 환하게 밝히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시다. 만일 그대들이 주어진 위치를 지키지 않고 그대들의 빛을 발하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결국 어두움에 싸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가족의 모든 아들 딸들이 완전히 준비하고 있다가 언제든지 행동이 요구될 때에 그 대열에 뛰어들 수 있기를 요구하신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부드러워지고 동정심으로 가득차게 된 심령은 주 예수님의 보석 상자에 담을 귀중한 보석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68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유혹을 이겨냄에 있어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유혹을 받았을 때처럼 유리한 입장에서 황막한 광야에 처하여 계시지 못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인류가 에덴동산을 떠나 4천년 동안 유리방황하며 본래의 순결과 정직에서 떠난 그 인성을 친히 쓰셨다. 죄는 여러 세대를 통해서 인류에게 무서운 형적(形迹)을 남겨 놓았으며 신체적·정신적 및 도덕적인 타락이 전인류 세계에 편만하게 되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마귀의 유혹을 받을 때에 그는 죄에 오염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그의 모든 생리기관과 기능들은 알맞게 계발되어 있었으며 잘 조화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시험의 광야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실패한 그 경험을 견디시기 위하여 아담의 위치에 서 계셨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에덴 본향의 빛을 등진 지 4천년이 된 그 때에 죄인들을 대신하여 시험을 이기셨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분리된 인류는 계속되는 세대마다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아담이 에덴에서 소유했던 본래의 순결과 지혜와 지식에서 현격하게 이탈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도우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을 그 때에 존재했던 인류의 죄들과 유약성을 지닌 몸을 가지고 계셨다. 인류를 대신하여 타락한 인류의 약점들을 취하신 채 인간이 당해야 할 모든 점에 있어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셔야만 하였다.

아담은 자기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들로 둘려 싸여 있었다. 또한 모든 욕구는 충족되었다. 영광스러운 에덴동산에는 죄가 없었으며 퇴화의 혼적조차 없었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거룩한 한 쌍의 인간과 더불어 자유스럽고 애정이 어린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행복한 새들은 저희 창조주를 향해 자유롭고 즐거운 찬송의 노래를 힘껏 불렀다. 행복하고 천진 난만한 분위기 가운데서 자라는 평화스러운 짐승들은 아담과 하와의 주위에서 뛰어 놀았으며 저희 말에 순종하였다. 아담은 완전한 인격을 갖추고 있었으며 창조주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존재였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천사들보다는 조금 못하였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단과 대결하시기 위하여 혈혈 단신으로 음침한 광야로 들어가신 것은 얼마나 놀라운 대조인가! 타락한 이래로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나타나신 그 때까지 인류는 점점 그 몸집과 체력에 있어서 쇠퇴하였으며 도덕적 가치의 저울이 점점 밑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타락한 인류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인류가 처하여 있던 그 위치에 이르러야만 하였다. 주님께서는 인성을 쓰셨으며 인간의 유약성과 타락한 상태를 취하셨다. 죄를 알지 못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인간적인 비애의 가장 깊은 맛을 맛보시기 위하여 당신 스스로 굴욕을 당하심으로 인간에게 이를 자격을 얻으셨고 인간을 죄 가운데 빠지게 한 타락의 상태에서 건질 수 있게 되셨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 히 5:9, 2:17, 18절도 인용됨.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사단은 그가 처음으로 배도한 이래로 하나님의 정부와 전쟁을 하여왔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세상에 죄를 이끌어들인 교활한 원수의 성공은 그 자신을 하늘 천사들 앞에서 거만하게 자랑하도록 만들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나타나실 때에 자기보다 약하게 되실것이므로 자기의 능력으로 능히 주님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269 사단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저들의 식욕에 호소한 자신의 교묘한 암시를 저항할 수 없었던 것을 보고 미칠 듯이 기뻐하였다. 사단은 정욕적인 식욕과 부패한 정욕의 방종을 통하여 같은 방법으로 고대 세계의 거민들을 정복할 수 있었다. 사단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욕을 만족시켜 주므로 저들을 전복시켰다.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모세와 여호수아와 함께 계셨으나 사단의 능력을 저항할 수 없었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은총을 입은 백성들을 광야에서 거의 죽이고 가나안으로 인도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자랑하였다. 따라서 사단은 겸손한 모세를 유혹하여 하나님께서만이 주장하실 수 있는 영광을 모세 자신이 취하도록 유혹할 수 있었다. 특히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다윗과 솔로몬을 유혹하여 식욕과 정욕의 방종으로 하나님의 불쾌하심을 사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좌절 시킬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가운데 그리스도께서는 40일 동안 음식을 잡수시지 않으셨다. 모세 역시 특별한 경우에서 그처럼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러나 모세는 굶주림의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비열하고 세력이 강한 원수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았으며 굴복당하지 않았다. 모세는 인간의 수준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향상되어 있었다. 또한 그는 자기를 둘러싼 하나님의 영광으로 특별히 자신의 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단은 하나님의 천사들을 속이는 일과 고상한 아담을 타락시키는 일에 무난히 성공하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쓰신 상태라면 성공적으로 주님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4천년에 걸쳐서 하나님의 율법을 계속적으로 범함으로 나타날 유혹의 결과와 죄의 증가를 미칠 듯이 기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사단은 우리 인류의 시조가 멸망하도록 일을 꾀하였으며 이 세상에 죄와 사망을 끌어들였고 모든 시대, 모든 나라, 모든 계급의 허다한 인간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였다. 사단은 이간의 죄악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불, 물, 지진, 칼, 기근, 염병으로 멸망을 당하기까지 자신의 악한 권세로 모든 도시들과 국가들을 지배하였다. 270 사단은 그의 교활하고 끈질긴 노력으로 인간의 식욕을 지배하였으며 가공(可恐)할 정도로 정욕을 자극하고 증가시켜 인간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형상을 흉하게 만들었으며 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살해 버렸다. 인간의 신체적·도덕적 존엄성은 크게 훼손되어 에덴동산에 있었던 아담의 고귀한 품성과 고상하고 완전한 형태를 닮은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초림 시에 사단은 인간을 본래의 고상한 순결성에서 타락시켜 정금(精金)의 찬란한 빛을 죄로 흐리게 만들었다. 사단은 에덴동산에서 지구의 주권자가 되도록 창조된 인간을 죄의 저주 밑에서 신음하는 이 지상의 노예의 신세로 변형케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아담에게 두루마기처럼 입히셨던 영광의 빛으로 된 옷은 그가 범죄한 후로 벗겨지고 말았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불순종과 죄를 덮어 줄 수 없다. 아담의 후손들에게 주어진 분깃은 건강과 풍성한 축복 대신에 곤궁함과 질병과 오갖 형태의 고통뿐이었다.

사단은 자신의 매혹적인 세력을 통하여 인간이 허망한 철학으로 거룩한 계시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들었으며 마침내는 불신하도록 유인하였다. 또한 사단은 허다한 인간의 생애를 흑암으로 이끌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도록 유인하는데 크게 성공하였으므로 극악 무도한 승리의 쾌감으로 도덕적으로 추하여진 세상과 죄를 보복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에 노출된 인간을 널리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인류를 기만하는 사단의 가장 성공적인 음모는 자신을 인간의 친구로서 혹은 인간에게 혜택을 베푸는 자로 나타내어 자신의 근본적인 목적과 참된 근성을 은폐하는 것이었다. 그는 배도한 원수가 없다는 유쾌한 우화(寓話)를 꾸며 인간에게 아첨하고 저들이 경계해야 할 무서운 원수는 없고 마귀의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전혀 꾸며낸 이야기인 것처럼 인간을 기롱하고 있다. 사단은 자기의 존재를 은폐함으로 허다한 인류를 자신의 지배 밑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사단은 그리스도를 속이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자기 자신이 마치 인류를 위하여 선한 사업을 하는 하늘의 천사처럼 인간을 기만하고 있다. 대다수의 인간들은 죄로 말미암아 눈이 몹시 어두워져 사단의 계략들을 식별할 수 없으며 사단이 인간의 영원한 멸망을 위해서 활동하고 있건만 인간은 그를 마치 하늘의 천사처럼 떠받들고 있다.

271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을 파멸시키시는 분으로서 또한 사단의 세력에 묶인 포로들을 구원하시는 분으로서 이 세상에 들어오셨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따를 수 있고 사단의 시험들을 이길 수 있는 승리의 생애를 당신 자신의 생애 가운데 한 모본으로 남겨 놓으시기 원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시험의 광야에 들어서시자마자 용모가 변하셨다. 하늘이 그분의 앞에 활짝 열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들로서 그리스도를 인정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을 때 주님의 얼굴에 비치었던,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영광과 찬란한 광채는 사라지고 말았다. 세상 죄의 무거운 짐은 주님의 영혼을 압박하였으며 주님의 용모에는 타락한 인류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큰 슬픔과 깊은 번뇌가 떠오르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범람하는 재난의 압도적인 조류를 깊이 느끼셨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세상을 지배하는 식욕의 방종과 더러운 정욕적인 세력이 인간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온 것을 인식하셨다.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이 너무나 연약하여 저들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될 때까지 아담의 범죄 이후로 식욕의 방종은 증가되어 왔고 계속되는 매 세대마다 방종의 도수(度數)가 점차로 높아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대신하여 식욕에 대한 가장 강한 시험을 견디심으로 식욕의 욕망을 정복하여야만 하셨다. 272 주님께서는 홀로 시험의 길을 걸으셔야만 하셨고 아무도 그를 도와주어서도 안 되며 아무도 그분을 위로하거나 붙들어 주어도 안 되었다. 주님께서는 흑암의 권세와 더불어 치열한 싸움을 싸워야만 하셨다.

인간이 자신의 인간적 능력으로 사단의 시험의 권세를 저장할 수 없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원하여 이 일을 맡으셨고 인간을 위하여 짐을 지셨으며 인간을 대신하여 식욕의 권세를 이기셨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창자를 끊는 듯한 굶주림의 아픔을 이겨내게 할 자제력과 견인성과 원칙에 확고한 태도를 보여주셔야만 하셨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식욕에 대한 자제력이 굶주림과 죽음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셔야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식욕에 대한 시험을 받으셨을 때 아담이 하나님의 빛과 사랑이 만물에 나타난 그런 환경 가운데 있었던 것처럼 아름다운 에덴동산에 서 계신 것이 아니셨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불모지이며 황량한 광야에서 사나운 들짐승들에게 둘러싸여 계셨다. 주님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어떤 기질의 인간도 꺼려하는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는 것뿐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주님께서 40주야 동안 금식하셨으며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눅 4:2)셨다. 오랜 금식으로 주님께서는 쇠약해지셨으며 가장 통렬한 배고픔을 느끼셨다. 주님의 용모는 실로 모든 인간들보다도 수척해지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강한 원수를 이기시기 위하여 투쟁의 생애에 돌입하셨으며 아담이 실패한 바로 그 시험을 맞아 성공적인 투쟁을 하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분쇄할 수 있으셨고 타락의 치욕에서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으셨다.

아담이 식욕의 권세에 굴복했을 때 모든 것을 상실하였다. 인성과 신성이 그 안에 함께 연합해 있는 구세주께서는 아담의 위치에 서 계셨고 거의 6주일이나 되는 오랜 금식을 마치셨다. 이 금식의 오랜 기간이야말로 인간에게 미친 타락한 식욕의 죄악적인 세력이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가를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인간이 당하는 불행의 깊은 비애를 맛보셨으며 그분의 신성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붙잡고 있으면서 인성의 연약성과 필요성을 스스로 확인하였다. 273 인간이 범한 죄를 짊어지신 주님의 사업은 하나님의 율법을 계속적으로 범하도록 스스로 방종케 하여서는 안 되며 그러한 범죄는 인간이 율법에 대한 채무자가 되게 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그 채무를 친히 갚고 계셨다. 그리스도의 시련과 고난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인간으로 그 율법에 대하여 회개하게 하며 순종하게 하고 또한 그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가납하심을 받게 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의를 인간에게 전가(轉嫁)하여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도덕적인 수준으로 향상시키심으로 거룩한 율법을 지키려는 인간의 노력이 가납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사업은 당신의 인성을 통해서 인간을 하나님에게, 또한 당신의 신성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인간에게, 화목시키는 일이었다.

광야에서 그리스도의 오랜 금식 생활이 끝나자마자 사단은 그의 시험 거리를 가지고 그 즉시로 나타났다. 그는 빛의 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리스도께 왔으며 주님을 동정하기 위하여 또는 주님을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건지기 위하여 하늘 보좌로부터 자비의 사자로 파견된 천사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실제로는 그리스도께서 예기하셨던 것과 같은 그런 극기와 고난을 겪도록 요구하시지 않았다고 그리스도로 믿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사단은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자원해서 견디겠다는 표시만을 그리스도께서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신다는 기별을 전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힘썼다.

사단은 그리스도께 당신의 발을 피묻은 길에 딛고만 있으면 되고 그 길을 걸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였다. 마치 아브라함처럼 완전한 순종을 나타내보이는 시험을 받은 것처럼 생각케 하였다. 그는 또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높이 쳐들었을 때에 그 손을 붙잡았던 천사가 바로 자기였으며 그는 지금 그리스도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왔으므로 금식으로 고통스러운 굶주림과 죽음의 고난을 참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며 자기가 그리스도를 도와 구원의 경륜을 이루도록 사업의 일부를 담당하겠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러한 모든 교활한 시험들을 물리치셨으며 타락한 인류의 구원을 위한 계획을 수행하시는 당신의 목적에 있어서 정신적으로나 형식적으로 확고부동한 태도를 취하셨다. 그러나 사단은 그리스도를 유혹하여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하여 준비된 여러 가지 시험들을 다방면으로 전개하였다. 만일 그가 한 가지 시험에 실패한다면 또 다른 시험으로 시도하려 하였다. 사단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처럼 당신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능히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274 그는 자신이 하늘의 천사처럼 가장한 특성이 발각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또한 그는 주님의 수척해진 모습과 불쾌한 환경을 빙자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심하는 것처럼 자신의 언행을 꾸며 보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쓰심으로 당신의 모습이 하늘의 천사들보나 못할 것을 미리 아셨다. 사단은 만약 주님께서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그분의 고상한 성품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 보이라고 강권하였다. 그는 식욕에 대한 시험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접근하였다. 사단은 이 점으로 아담을 정복하였고 그의 후손들을 지배하여 왔으며 식욕의 방종으로 인간의 범죄가 극도에 달하여 하나님께서 홍수로 인간을 지구에서 쓸어버리기까지 불법한 행위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하였다.

사단의 직접적인 시험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식욕이 이성(理性)을 지배하도록 허용하였으며 방종하는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킨 가증한 죄들을 범하게 되었고 광야에서 생명을 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사단은 동일한 시험으로 쉽사리 그리스도를 정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 고상한 천사들 중의 하나가 이 세상으로 추방되었는데 그리스도의 용모를 보아 하늘의 임금이 아니요 타락한 천사이며 그리스도의 여위고 고통스러운 모습이 그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 때에 사단은 빛의 옷을 입고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의 매력적인 용모에 그리스도의 관심이 이끌리도록 하였다. 그는 하늘 보좌로부터 직접 파견된 사자이며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에 대한 증거들을 요구할 권리가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단은 할 수만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침례받으실 때에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이 들려온 것을 믿지 않으려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정복하기로 결심하였으며 가능한 일이라면 그의 왕국과 생명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리스도에게 시도한 사단의 첫 유혹은 식욕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바로 이 문제를 가지고 이 세상을 거의 완전하게 장악하였으며 그의 유혹들은 그리스도께서 당면하신 주위 환경과 형편에 적합한 것이었으며 식욕에 대한 그의 시험은 거의 저항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275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이적을 행하실 수 있으셨으나 그렇게 하는 것은 구속의 경륜에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나타난 많은 이적들은 고통당하는 인류의 유익을 위한 이적들을 행하신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주님께서는 자비의 이적을 통하여 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셨다. 그러므로 구주께서는 이적을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으며 자신의 굶주림을 스스로 채우실 수도 있으셨다. 사단은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로부터 들려온 말씀을 그리스도 자신이 의심하게 할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을 그리스도 자신이 의심하게 하고 하늘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의 진리를 불신하도록 유혹할 수 있었다면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사단은 그리스도께서 동반자가 없이, 음식도 잡수시지 않은 채 실제적인 고통 가운데서 황량한 광야에 계신 것을 발견하였다. 주님께서 둘러싸여 계신 환경은 가장 침울하고 가장 불쾌한 것이었다. 사단은 그리스도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결코 이러한 궁핍과 실질적인 고통의 상태에 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라고 암시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발이 과거에 밟아 본 적이 없는 사막에서 극단적인 고통을 당하는 상태에 놓이도록 허락하신 하늘 아버지에 대한 신뢰심이 흔들리기를 바랐다.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의혹을 불러일으켜 낙담과 극도의 굶주림 가운데서 당신 자신을 위하여 기적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하늘 아버지의 보호하시는 손길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벗어나기를 바랐다. 바로 이러한 것이 그리스도께 이른 시험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유혹을 한 순간도 마음에 품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당신이 말할 수 없는 번민 가운데서 풀이 죽어있는 듯이 보였으나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으셨다. 사단의 시험이 아무리 기묘하게 꾸며진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성실성을 흔들리게 할 수는 없었다. 하늘 아버지께 대한 그리스도의 영구적인 신뢰심은 요동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원수에게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며 어떤 태도로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굽히지 않으셨다. 사단은 모욕적이며 조롱이 섞인 태도로 그리스도의 당면한 허약성과 불운한 모습을 자기의 세력과 영광에 비교하여 언급하였다. 276 사단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가련한 천사들의 대리자이며 하늘 궁전의 왕으로 인정받으시는 천사들의 사령관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한 존재라고 조롱하였다. 그리스도의 당장의 모습은 하나님과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임을 가리켜 주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만약 그리스도께서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천국의 군주이시며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를 가졌던 분이라면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는 이적을 행함으로써 당신의 굶주림을 채워 하나님의 아들된 증거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사단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행한다면 즉시로 자신의 우월성을 포기할 것이며 자기 자신과 그리스도 사이에 경쟁을 영원히 종결 지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욕설이 담긴 조롱을 모르는 척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에 대한 확증을 사단에게 보일 만큼 시험에 자극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보복의 정신이 없이 사단의 모욕을 온유하신 태도로 받으셨다. 주님께서 침례받으실 때에 하늘로부터 들린 음성은 매우 고귀한 것으로서 하늘 아버지께서 인간의 대리자요 담보물로 구속의 경륜을 이루려는 당신의 절차를 인정해 주시는 증거의 말씀이었다.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비둘기가 내려온 것은 사단의 통치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지상에 있는 아들의 능력과 연합하였다는 보증이었으며 땅을 하늘에 연결하고 유한한 인간을 무한하신 하나님께 연결지으려는 그리스도의 노력을 하나님께서 수락하셨다는 또 하나의 보증이었다.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이러한 증거들은 주님께서 당하신 모든 혹독한 고난과 배도한 마귀와의 두려운 투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보배로운 것이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시험을 견디실 때나 주님의 전 봉사의 생애를 통해서 당신 자신의 능력과 세상의 구세주가 되시는 자격에 대하여 사단을 설득하기 위한 아무 일도 행치 않으셨다. 사단은 주님의 고상한 신분에 대하여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는 주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예를 예수님께 돌리기를 원치 않았으며 하나님께 반역하여 하늘에서 쫓겨난 부하로서 복종의 태도를 나타내기를 원치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거룩한 능력을 행사하거나 고난에서 당신 자신을 건지는 일은 그리스도의 사명 가운데 주어진 일이 아니었다. 277 주님께서는 자원하여 이 고난을 지시기로 결정하셨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인성을 쓰시기 위하여 스스로 낮추셨으며 모든 불편과 인간이 당하는 질병과 고통을 겪으셔야만 하셨다. 그러나 결코 당신 자신을 위하여 이적을 행하여서는 안 되셨다. 주님께서는 다른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주님께서 지신 사명의 목적은 고통 당하는 사람들과 압제를 받는 사람들에게 축복과 소망과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고통당하는 인류의 무거운 부담과 슬픔을 짊어지셔야만 하였다.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극심한 굶주림의 고통을 겪으셨으나 모든 시험들을 참아 내셨다. 주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으로 사단에게 반박하셨으며 그 말씀은 반역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들에게 제한되었던 음식물을 마다하고 육식을 먹도록 해 달라고 강요할 때 주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모세에게 반복하여 하신 말씀이었다. 이 말씀과 당신 자신의 모본을 통해서 일시적인 음식을 위한 굶주림이 인간에게 닥치는 가장 큰 재난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려고 하셨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금하신 생명나무*의 열매를 우리 시조가 먹음으로써 좋은 결과를 가져왔고 저들이 죽지 않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였으나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선언하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만일 아담이 순종하였더라면 그는 결코 궁핍이나 슬픔이나 사망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더라면 저들은 홍수로 멸망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특별한 축복을 부어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식욕과 정욕의 방종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타락한 식욕의 방종은 저들로 온갖 추악한 죄들을 짓게 하였다. 278 만일 저들이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하여 택해 주신 합당한 음식을 먹음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첫째로 생각하고 저들의 육체적인 욕구를 둘째로 생각하였다면 아무도 광야에서 멸망 당하는 운명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들은 비옥한 가나안 땅에 거룩하고 건전한 백성으로 살 수 있었을 것이며 저희 모든 지파들 중에는 단 한 사람도 허약한 사람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의 구세주께서는 인류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인간의 대리자가 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를 나타내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인간의 아들로 자처하셨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련의 환경 속에서도 하나의 인간으로서, 인간을 위해서 시험의 시련을 담당하셔야만 하였으며 하늘 아버지께 대한 믿음의 모본과 완전한 신뢰를 나타내 보이셔야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을 흡족하게 해주실 필요가 있을 때에 당신께 음식을 공급해 주실 것을 알고 계셨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혹독한 시련 가운데서도 굶주림이 당신 자신을 굉장히 괴롭힐 때에 당신의 거룩한 능력을 행사하여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시련의 단 일부분이라도 미리 덜어버리려는 수단을 취하시지 않을 것이었다.

타락한 인간이 바른 길로 인도되기 위하여 시련을 받을 때에 자신을 고통과 번민에서 건지며 또는 원수에게 승리를 거두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자기 자신을 위한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없었다. 인류를 시험하고 확증케 하며 종종 저들을 시련의 위치에 두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저들의 신앙과 신뢰심을 시험함으로 품성을 계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셨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하나의 완전한 표본이었다. 주님깨서는 당신의 모본과 교훈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의존자이시며 하나님께 당신의 신앙과 확고한 신뢰를 두었다는 사실을 인간에게 가르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이 태초부터 거짓말장이였으며 이 모독적인 기만자의 제안을 듣기 위하여 또는 사단의 담대한 억설을 즉각적으로 비난하지 않기 위하여는 실로 강한 자제력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을 자극하여 자기 자신과의 투쟁에 말려들기를 기대하였으며 주님께서 극단적으로 허약하시고 깊은 정신적 번뇌에 빠졌을 때에 그가 주님을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악용하려고 일을 꾸몄으며 우월성을 주장하고 그리스도를 이기고 정복하기 위하여 자신의 타락한 부하들이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여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279 이 세상의 구세주께서는, 하늘에 둘 가치가 없어 천국에서 쫓겨난 사단과 더불어 싸우실 일이 없으셨다. 하나님의 천사들로 저희 최고의 통치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저들의 사랑하는 사령관이셨던 주님께 대항하도록 하나님의 천사들을 유인하며 저들의 동정심을 자기에게 쏠리도록 할 수 있었던 사단은 어떤 속임수도 능히 펼 수 있었다. 그는 4천년 동안 하나님의 정부에 대항하여 싸워왔으며 남을 유혹하고 속이는 자신의 재간과 능력은 전혀 잃지 아니하였다.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만을 가지고 사단을 이길 수 없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인성과 신성의 힘이 결합한 자격을 가지시고 인간을 도우시기 위하여 하늘 궁전에서 내려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이 자신의 탁월한 이점(利點)들을 살려서 사단의 시험들을 능히 이기고 사단을 정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한 이래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하나님의 빛과 사랑에서 분리된 인간이 자신의 힘만 가지고 도저히 사단의 시험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계셨다. 인간에게 소망을 주고 완전한 파멸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성을 취하시려고 당신 자신을 굽히셨다. 인성과 결합한 당신의 거룩한 능력을 가지시고 인간이 처하여 있는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주님께서는 아담의 타락한 후손들이 저들 스스로 얻을 수 없는 능력을 얻으심으로써 저들이 당신의 이름으로 사단의 시험들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신분이 고귀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인성을 쓰심으로써 죄인의 대리자가 되셔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더욱 가까이 접근시키셨다. 주님께서는 친히 인간의 고난과 고통을 맛보셨다. 주님께서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심으로써 시험당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아실 수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위해서 승리하셨다.

야곱은 밤에 본 계시 가운데서 이 땅이 하나님의 보좌에 닿는 사다리에 의해서 연결되어 있음을 보았다. 그는 하늘의 광채로 빛나는 두루마기를 입은 하늘의 천사들이 빛나는 사다리를 타고 하늘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다. 이 사다리의 밑은 땅에 닿아 있었으며 그 꼭대기는 가장 높은 하늘에 닿아 있어 여호와의 보좌에 닿아 있었다. 280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이 사다리를 통하여 흘러내리는 광명한 빛은 이 땅 위에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의 빛을 반사하였다.

이 사다리는 지구와 하늘 사이의 연락을 개통시킨 그리스도를 대표한 것이었다. 타락한 인류를 위한 동정과 연민을 가지시고 인간이 맛볼 수 있는 재난의 깊은 저변에까지 내려오신 주님의 겸비한 정신은 사다리 한 끝이 땅에 닿았고 다른 한 끝은 하늘에 닿은 것으로 야곱에게 표상되었으며 이 사다리는 무한하신 분의 능력을 붙잡고 그 능력으로 땅과 하늘을 연결시켜 유한한 인간을 무한하신 하나님과 결합시킨 그리스도의 거룩한 능력을 표상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연락이 개통되었다. 천사들은 타락한 인류에게 전할 사랑의 기별을 가지고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며 구원의 후사가 될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할 것이다. 하늘의 사자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인간에게 봉사할 수 있다.

에덴동산에 있던 아담과 하와는 가장 유리한 환경 가운데 놓여 있었다. 하나님과 천사들과 더불어 교통할 수 있는 것은 저들의 특권이었다. 저들에게는 죄의 정죄함이 없었다. 하나님과 천사들의 빛이 저들과 함께 있었고 저들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저들을 만드신 창조주께서 저들의 교사가 되셨다. 그러나 저들은 교활한 원수의 세력과 시험에 굴복하고 말았다. 4천년 동안 사단은 하나님의 정부에 대항하여 활동하였으며 그는 단호한 실천을 통하여 세력과 경험을 쌓게 되었다. 타락한 인간의 후손들은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가지고 있던 이점(利點)들을 갖지 못하였다. 저들은 4천년 동안이나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었다. 사단의 시험들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와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은 점차적으로 쇠퇴하여 사단이 이 지상에서 거의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식욕과 정욕, 세상에 대한 사랑과 외람된 죄들은 온갖 범죄와 폭동과 타락의 열매가 자라는 큰 악의 가지들이었다.

281 식욕을 위주로 하여 그리스도를 정복하려던 사단의 목적은 패배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이곳 광야에서 인류를 위하여 식욕에 승리하셨고 인간이 장차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기 자신에게 미친 식욕의 세력을 정복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사단은 세상의 구주를 정복하기 위한 모든 방법들을 시도하기까지 자신의 노력을 중단하려 하지 않았다. 사단은 이 경쟁에서 그가 이기든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시든 간에 자기 자신이 큰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우월한 능력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두렵게 하기 위하여 주님을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갔으며 성전 꼭대기에 올려 놓고 계속하여 주님을 시험하였다.

사단은 또 다시 그리스도에게 명령하기를 주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그가 올려 놓은 어지러운 높은 지점에서 뛰어내리심으로 그 증거를 보이라고 하였다. 그는 성전에서 스스로 뛰어내리심으로 하늘 아버지의 보호하심에 대한 당신의 신뢰심을 증거해 보이라고 그리스도에게 강요하였다. 식욕에 대한 첫 시험에 있어서 그는 주님의 당면한 주위 환경과 굶주림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지 못하고 있는 증거라고 내세우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을 의심케 하는 암시를 주려고 노력하였다. 282 그는 첫시험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 다음으로 그가 노린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하늘 아버지께 보이신 믿음과 완전한 신뢰심을 미끼로 하여 주님께서 참람된 죄를 짓도록 강요하였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 4:6). 수수께기는 즉각적으로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마 4:7)는 말씀으로 답변하셨다.

참람의 죄는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믿음과 신뢰심을 보이는 품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미끼로 하여 신뢰의 도(度)를 넘어 참람된 선에 이르도록 강요할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바로 이 문제에 있어서 많은 영혼들이 파멸에 이르게 되었다. 사단은 아첨의 감언이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기만하려고 노력하였다. 사단은 가장 극심한 시련의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주님의 믿음과 신뢰심에 있어서 광야에서 취하신 그리스도의 태도가 옮았다고 인정해 주었다. 그 때에 사단은 하나님께 대한 주님의 전적인 의존심을 또 한 번 밝히고 주님께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당신의 믿음을 또 다시 자기에게 증거해 보이라고 강요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천사들이 즉시 주님을 붙들어 줄 것이라고 말하였다. 사단은 성경절들을 인용하는 실력을 과시해 보임으로 자신이 성경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이 세상의 구세주께서는 당신의 성실성에 동요함이 없으며 하늘 아버지의 약속된 돌보심에 대하여 완전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주님께서는 비록 원수의 손에 맡겨진 바 되고 지극히 어려운 난관과 위기에 놓여 있었으나 하늘 아버지에 대한 충성과 사랑을 불필요한 일에 시험삼아 이용해 보려고 하지 않으셨다. 사단의 암시에 자극을 받아 하나님의 섭리를 참람되게 실험해 봄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려 하지 않았다. 사단은 이런 경우에 적절한듯이 보이는 성경절을 인용하였으며 이 특별한 시기에 우리 구세주에게 적용함으로 자신의 계획들을 성취하게 되기를 바랐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당신 자신이 성전에서 꼭 뛰어내려야 할 경우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당신을 붙들어 주실 것을 알았다. 283 그러나 사단이 그렇게 하도록 도전했다고 해서 이 일을 자발적으로 하기 위하여 또한 하늘 아버지의 보호하시는 돌보심과 사랑을 실험해 보기 위하여 당신 자신의 믿음의 실력을 과시해 보이려고 하지 않으셨다. 사단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명하시지도 않은 일을 행하기 위하여, 하늘 아버지의 보호하시는 돌보심에 대한 당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림으로 이 시험에 실패한다면 바로 그 행동 자체가 당신의 인성의 허약성을 드러내는 결과가 될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번째 시험에도 승리자가 되셨다. 주님께서는 강한 원수와의 극심한 투쟁 가운데서 하늘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신뢰심과 믿음을 나타내 보이셨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여기서 얻은 승리로써 인간의 유일한 안전은 모든 시련과 위기 가운데서 확고한 신임과 견실한 신뢰심을 갖는 것임을 인간에게 보임으로써 완전한 모본을 남기셨다. 또한 주님께서는 당신의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을 위험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거룩한 능력을 발휘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위기를 자초(自招)하심으로 하늘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주제넘게 바라는 생각을 거부하셨다. 이러한 행위는 당신 자신만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강요하는 것이 될 것이며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확고한 신임에 대한 완전한 모본을 보여 주는 것이 못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사단의 목적은 주님께서 과감하게 참람된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며 당신의 백성을 위한 완전한 모본을 남기지 못하도록 인간의 허약성을 나타내 보이게 하는 데 있었다. 사단은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유혹하는 시험을 감당하지 못하고 실패하게 될 때에 인류의 구원이 성취될 수 없고 인간을 지배하는 자신의 권세가 완벽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시험의 광야에서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굴욕과 괴로운 수난(受難)은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 아담은 범죄함으로 모든 것을 상실하였다.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할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였다.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과 멀리 분리되었으며 자신의 추악한 죄에 비례될 만큼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범죄자의 흉악한 죄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셨으며 죄 없는 품성을 가지신 당신께서만이 하늘 아버지의 불쾌하심에 대한 고통스러운 감각을 느끼심으로 인류를 위한 합당한 대속(代贖)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 깨닫고 계셨다. 284 세상의 죄를 위한 하나님의 아들의 슬픔과 번민은 주님의 거룩한 탁월성과 순결성에 비례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에 우리들의 모본이 되셨다. 우리들을 위하여 식욕의 시험을 정복하시려고 광야에서 오랫동안 시련을 당하시고 금식하신 주님의 굴욕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들이 당하는 시험 가운데서 이 교훈을 마음속 깊이 간직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인간에게 미친 식욕의 세력이 그처럼 강하고 식욕의 방종이 그처럼 두려운 것이어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당신 자신을 그러한 시험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면 우리의 식욕을 이성(理性)의 지배 하에 둘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우리 구세주께서는 거의 6주일 동안 금식하심으로 인간을 위하여 식욕에 관한 시험에 승리를 거두셨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일깨워진 양심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저들의 모본으로 삼는다면 감히 어떻게 정신과 심령의 기력(氣力)을 약화시키는 식욕의 방종에 굴복할 수 있을 것인가? 건강을 해하며 도덕력을 약화시키는 자기 만족의 습성들은 오늘날 그리스도교계의 허다한 사람들을 노예의 속박에 억눌러 두고 있다.

경건함을 자처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오랜 기간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고 고난 당하신 이유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 않는다. 주님의 고뇌는 굶주림의 고통을 참는 데서 오는 것보다도 식욕과 정욕의 방종이 인류에게 미치는 두려운 결과에 대한 감각에서 오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식욕이 인간의 우상이 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며 인간 자신의 구원의 길을 직접적으로 막아 버릴 것을 아셨다.

285 우리 구세주께서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신뢰심을 보이셨으므로 당신께서 감당하실 수 있는 정도 이상으로 시험받기 위하여 자신을 괴롭히시려고 하지 않았으며 당신이 마땅히 받으셔야만 할 시험을 참을성있게 이겨내기만 한다면 정복자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뜻대로 자신을 위험한 자리에 두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잠시 동안 당신의 아들을 주관할 권세를 용납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극도의 시련을 당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성실성을 끝까지 보존하시다가 만일 시험을 이길 다른 방도가 없다면 하나님의 천사가 당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파견될 것을 아셨다. 주님께서는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류를 대표하셨다.

사단은 자기가 던진 두번째의 큰 시험에서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패배하였음을 깨달았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눅 4:5-7).

사단은 처음과 두번째의 시험에서 자신의 근본 목적이나 근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286 그는 자신을 가리켜 하늘 궁전에서 내려온 거룩한 사자라고 주장하였으나 세번째 시험에서는 자기 자신의 위장을 완전히 벗어버린다. 그는 가장 매력적인 광경으로 세상 왕국의 전경(全景)을 그리스도 앞에 공개해 보여주었으며 자신을 세상의 임금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마지막 시험은 세 가지 시험 중에서도 가장 매혹적인 것이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생애가 슬픔과 역경과 투쟁의 생애가 되어야만 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사단은 이것을 미끼로 하여 주님의 성실성을 굴복시키기 위하여 매수하려고 하였다. 사단은 이 마지막 시험에 누가 승리자가 될 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해 주며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것이므로 이 마지막 시험에 자신의 전력을 기울였다. 사단은 이 세상을 자신의 영토로 주장하였으며 그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임금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매우 높은 산꼭대기로 이끌고가서 오랫동안 자신의 통치 밑에 있던 세상의 모든 왕국의 전경을 그리스도의 앞에 전개하여 보여 주었으며 그 모든 왕국들을 하나의 큰 선물처럼 주님께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고통과 위기를 맛보지 않고 세상의 왕국들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사단은 자기의 홀과 통치권을 내줄 것을 약속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 찬성하심으로 이 세상의 정당한 주권자가 되실 것이었다. 그날에 사단이 그리스도께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바치는 대가로 요구하는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상관(上官)의 경의만을 표하면 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눈은 한 순간 자기 앞에 펼쳐진 영광스러운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즉시로 눈길을 돌리셨으며 황홀한 장관(壯觀)을 외면하셨다. 주님께서는 유혹자와 희롱함으로 자신의 확고한 성실성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일을 하실 수 없으셨다. 사단이 경의를 표해 달라고 간청하였을 때 마침내 그리스도의 거룩한 의분은 더 참을 길이 없었고 신성을 모독하는 사단의 억설을 그 이상 더 허용할 수 없었으며 당신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조차 허락지 않으셨다. 여기서 비로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권위를 행사하셨으며 사단에게 물러가라는 명령을 하셨다.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교만과 횡포로 가득찬 사단은 자기 자신이 이 세상의 정당하고도 영구적인 통치자이며 세상의 모든 재물과 영광을 소유한 자라고 선언하였으며 마치 자기가 세상과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만든 창조주인 양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87 그는 그리스도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 4:6)고 말하였다. 사단은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섬기기만 한다면 그의 모든 주장을 주님께 넘겨주기 위하여 특별한 계약을 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창조주에 대한 이 모욕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의 의분을 불러일으켜 사단을 견책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사단은 첫째 시험을 시도하는 중에 자신의 근성과 목적을 완벽하게 은폐하여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하늘에서 패배하여 내어쫓긴 타락한 천사장으로 알아보지 못하리라고 스스로 장담하였다. “사단아 물러가라”는 그리스도의 철회 명령은 주님께서 처음부터 그의 정체를 알고 계셨다는 증거였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시도해 본 모든 기만적인 술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단은 만일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돌아가셔야만 한다면 얼마 후에 자기의 권세가 끝장을 보게 될 것이며 종국에는 자신이 멸망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시작하신 이 위대한 사업이 완성되는 것을 저지시키기 위하여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막아보려던 것이 그의 연구한 계획이었다. 인류를 위한 구원의 계획이 실패하는 경우 그가 주장해 오던 이 왕국은 자기의 것으로 보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만일 그가 성공할 수만 있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대적하여 이 세상을 통치할 수 있으리라고 스스로 장담하였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떠나셨을 때 당신의 권능과 영광마저 그곳에 버려두고 오신 것을 보고 사단은 기뻐 날뛰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의 손아귀 안에 놓이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에덴 동산에서 거룩한 한 쌍의 인간을 유혹하는 일에 너무나도 쉽사리 성공하였으므로 그의 흉악하고 교활한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정복할 수 있고 자신의 생명과 왕국을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랐다. 사단이 예수를 유혹하여 아담과 하와에게서 성공을 거둔 것처럼 하늘 아버지의 뜻을 떠날 수 있게 할 수 있었다면 그의 목적은 성취되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심으로 사단에게 속하였던 것을 구원하시고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이 주님께 복종해야 할 때가 와야만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확고 부동하셨다. 288 주님께서는 고난의 생애와 굴욕적인 죽음을 택하셨으며 이 지상 왕국의 합법적인 통치자가 되시고 이 왕국들을 영원한 당신의 소유로 삼을 수 있는 길 곧 하늘 아버지께서 지정하신 길을 택하기로 하셨다. 사단 역시 그분의 손에 영원한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며 예수님과 영광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음흉한 원수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고 말씀하셨다. 사단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를 자기에게 보이라고 그리스도께 요청하였는데 이 경우에 사단은 이미 자기가 요청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명령을 받은 사단은 순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격퇴당하였고 잠잠하게 되었다. 사단에게는 단호한 철수 명령을 거역할 힘이 없었다. 그는 한 마디의 말도 못하고 단념할 수 밖에 없었으며 세상의 구세주에게서 떠나야만 하였다.

가증스러운 존재 사단은 물러갔다. 대결은 그 종막을 내렸다. 아담의 실패가 완전하였던 것처럼 광야에서 극심한 고통을 통하여 얻으신 그리스도의 승리도 완전하였다. 주님께서는 한동안 강력한 대적과의 대결에서 해방될 수 있었으며 악한 천사들도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

사단이 그의 시험들을 마친 후에 잠시 동안 예수님에게서 떠나갔다. 원수는 정복되었으나 그 투쟁은 장기간에 걸친 것이었고 지극히 괴로운 것이었다. 사단의 시험이 그친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기진맥진하여 기절하셨다. 주님께서는 마치 죽어가는 사람처럼 땅에 쓰러지셨다. 하늘 궁전에서 그분께 경배하던 천국의 천사들은 열렬하고도 고통스러운 관심을 가지고 저들의 사랑하는 사령관을 주목하여 왔고 경탄과 감격으로 주님께서 사단과 겨루신 이 무서운 대결을 목격하였으며 저들은 지금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나타났다. 주님께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쓰러져 계셨으므로 저들은 주님께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기운을 차리시도록 보살펴 드렸다. 천사들이 세상의 구세주께서 인류의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놀라움과 두려운 심정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하늘 궁전에서 하나님과 동등하셨던 주님께서 6주일 동안 금식하신 후 수척해지신 모습으로 저들 앞에 쓰러져 계셨다. 289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추방된 배도한 천사장과 더불어 홀로 고독하게 싸우셔야만 했다. 그분께서는 과거의 어떤 인간보다도 더욱 밀접하고 혹독한 시험을 견디셔야만 하셨다. 흑암의 세력과의 전쟁은 주님의 연약하시고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이 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오래고 격심한 전쟁이었다. 천사들은 하늘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보내시는 사랑과 위로의 기별을 가지고 왔으며 온 하늘이 주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얻으신 완전한 승리의 개가를 올렸다는 보증을 주었다.

구원받은 인류가 구세주와 더불어 하나님의 보좌 곁에 서게 될 때까지 인류의 구원의 대가에 대하여 충분히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이 영원한 생명의 가치와 영원한 보상이 무엇임을 알게 될 때에 이르러서 승리와 영원한 개가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또 요한은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라고 묘사하였다.

비록 자신의 가장 강력한 노력과 가장 유력한 시험에 패배를 맛보았을지라도 사단은 장차 어떤 기회에 더욱 성공적인 결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를 대항하여 자신의 세력과 술책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봉사 기간을 내다보았다. 사단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유대 민족의 이해력을 어둡게 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서 저들이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세주로 식별할 수 없게 하였다. 사단은 저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심과 증오심을 채워줌으로 저들이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 지상에서 주님의 생애를 가급적 가장 쓰라린 생애로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290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타락하기 이전에 우리 시조의 정신에는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명확한 식별력을 흐리게 하는 한 점의 구름도 끼어 있지 않았다. 저들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응하였다. 저들에게는 가리우는 아름다운 빛 곧 하나님의 빛이 둘러싸여 있었다. 주님께서는 거룩한 부부를 방문하셨으며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피조물들을 통하여 저들을 가르치셨다. 천연계는 저들의 교과서였다. 에덴동산에 있을 때에 저들을 둘러싼 천연계의 실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존재를 명확히 증거해 보였다. 동산의 모든 나무들이 저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창조된 사물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사물들을 밝히 볼 수 있었고 깨달을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에 대하여서도 식별할 수 있었다.

천연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아담과 그의 후손에게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천연계를 통해서 나타났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천연계는 그 자체의 결백성을 가지고 인간에게 어떤 교훈들을 주고 있으나 범죄의 결과는 자연계에 시들어 죽게 하는 무서운 재해를 가져왔고 천연계와 천연계를 창조하신 하나님 사이에 훼방하는 요소들을 개입시켰다. 291 만일 아담과 하와가 결코 저들의 창조주를 불순종하는 일이 없었고 완전한 정도(正道)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깊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유혹하는 자의 음성을 따르고 하나님께 범죄하였을 때 하늘의 결백한 두루마기 빛이 저들을 떠났으며 깨끗한 빛의 두루마기를 벗게 되었고 저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무지한 흑암의 옷을 두르게 되었다. 그 때까지 저들을 둘러쌌던 맑고 완전한 빛은 저들이 가까이 한 모든 사물들을 밝혀주었으나 그 하늘의 빛을 빼앗김으로 아담의 후손들은 피조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품성을 발견할 수 있는 흔적을 그 이상 더 찾아볼 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천연계의 사물들은 에덴동산의 아름다움과 영광에 대한 막연한 개념조차도 우리에게 줄 수 없으나 아직도 천연계는 분명한 음성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다. 비록 천연계의 사물들이 죄의 시들어 죽게 하는 영향을 입어 크게 상처를 입었으나 아직도 많은 부분들이 아름다움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전능하신 능력의 소유자이시며 선하심과 자비하심과 사랑이 크신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셨으므로 비록 죽어가는 상태에서나마 재능이 많고 뛰어난 예술가이신 하나님에 관한 진리들을 끈기있게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 앞에 천연계의 책은 펼쳐져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름답고 향기를 풍기는 꽃들과 그 꽃들의 다양하고 섬세한 채색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뚜렷한 표현을 보여주신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하나님께서 모든 싹트는 봉오리와 활짝 핀 꽃들을 모두 소멸할 수 있었으며 감각을 흐뭇하게 해주는 꽃의 향기들을 거두어가실 수 있으셨을 것이다. 저주로 말미암아 시들고 매말랐으며 크게 흠이 생긴 이 지상에서 찔레와 엉겅퀴와 가시와 가라지들은 우리에게 정죄의 법칙을 가르쳐 주고 있으나 섬세한 채색과 꽃들의 향기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아직도 당신의 자비가 완전히 이 지상에서 거두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천연계 가운데는 인류를 위한 영적 교훈들이 가득차 있다. 꽃들은 오직 새 생명을 움트게 하기 위하여 죽으며 이러한 현상은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인간은 하늘의 에덴동산에서 또 다시 꽃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천연계만으로는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놀라우신 사랑에 대한 교훈을 가르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 이후에 천연계만이 인간의 교사는 아니었다. 이 세상을 영원한 영적 심야(深夜)로 남겨두지 않기 위하여 천연계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셨다. 292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요 1:9)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고후 4:6) 바라보아야 한다.

하늘의 하나님이시며 하늘 아버지의 독생자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천하게 낮추시고 인성을 쓰셨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의 질문에 대하여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6-11)고 대답하셨다.

인간이 배워야 할 가장 힘들고도 굴욕적인 교훈은 인간의 지혜를 의존하는 인간 자신의 무능함과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천연계를 파악하려는 일은 분명한 실패라는 점이다. 죄는 인간의 시야를 흐리게 하였으며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천연계를 하나님보다 더 높이 평가함 없이 천연계를 해석할 수 없다. 인간은 천연계 가운데에서 하나님 혹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식별할 수 없다. 인간은 마치 천연계를 숭배하기 위하여 제단을 쌓은 아덴 사람들과 꼭 같은 위치에 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아덴 사람들에게 저들의 우상 숭배에 비교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엄성을 증거하였다.

293 그는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 17:22-29) 고 말하였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물질의 법칙에 대하여 어리석게 매혹되지 않을 것이고 천연계의 운행에 관하여 함부로 넘겨보지도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천연계 가운데 계속적으로 역사하고 계신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지도 않을 것이다. 천연계의 음성은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으나 천연계가 하나님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천연계는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증언을 할 따름이다. 천연계의 창조주는 신성이시다. 천연계 자체는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능력 이외에 아무 힘도 갖고 있지 못하다. 개성이 있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고 개성이 있으신 아들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그리고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1-3).

시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시 19:1-3)다고 말하였다. 294 어떤 사람들은 천연계의 거대한 물체들이 하나님이라고 상상할는지 모른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이 아니다. 하늘에 있는 이러한 모든 기이한 것들은 다만 저들에게 지정된 일을 행하고 있을 뿐이다. 저들은 주님의 대리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감독자가 되신다. 거룩하신 분께서는 만드신 만물을 붙드는 일에 종사하고 계시다. 산들을 붙드시며 제 위치에서 있게 하신 같은 손이 온 세계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하여 신비한 궤도를 따라 행진하도록 인도하고 계시다.

천연계의 운행에 관하여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그 해를 …비취게 하시며 비를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저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예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눈을 양털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부스러기같이 뿌리시나니 …그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시 147:8, 16-18). “저가 안개를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시 135:7)라고 선포하고 있다.

성경 말씀 가운데는 천연계의 독립적인 법칙에 관하여는 아무런 말씀도 하신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물질과 도구를 준비하신다. 그분께서는 식물이 번식할 수 있기 위하여 당신의 대리자들을 채용하신다. 그분께서는 이슬과 비와 햇빛을 보내시며 푸른 초목이 새싹을 내게 하고 온 지면에 덮여 푸른 융단이 깔리게 하며 관목(관목)들과 열매 맺는 직무들이 새싹을 돋게 하며 꽃봉오리가 피게 한다. 그러나 씨앗 자체가 활동을 하며 잎이 저절로 나타나도록 작용하게끔 법칙이 제정되어있는 것이라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제정하신 법칙들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 법칙들은 다만 당신께서 결과를 미치도록 영향을 주는 종들에 불과하다. 모든 작은 씨들이 움터 땅을 뚫고 나와 생명의 싹이트는 것은 하나님의 즉각적인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잎사귀가 자라고 꽃이 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이다.

인간의 신체적인 기관은 하나님의 감독을 받도록 되어 있는 것이며 괘종시계처럼 태엽을 감아 놓으면 저 혼자 가는 그런 식의 것이 아니다. 물론 심장이 뛰고 맥박이 이어져 나가며 계속 호흡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몸 전체가 하나님의 감독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295 우리는 하나님의 힘으로 살고 움직이며 우리의 몸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한 번의 심장의 고동이나 한 번의 호흡까지라도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그 영감은 자존하시며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감이다.

고대의 철학자들은 저들의 탁월한 지식을 스스로 자랑하였다. 감동을 받은 사도가 물질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피력한 것을 읽어 보자.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롬 1:22-25) 라고 바울은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만 가지고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소위 세상의 철인들은 피조물들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을 수집하며 저들은 어리석은 정신으로 천연계를 높이며 천연계의 하나님보다도 천연계의 법칙을 더 존중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께서 스스로 나타내신 계시를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천연계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을 얻게 될 뿐이며, 이러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고상한 개념을 보여주지 못하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순응하지도 못하고 다만 저들로 우상 숭배자들이 되게 할 뿐이다. 저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공언하나 실제에 있어 어리석은 사람들이 될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히 1:3)이라고 하신 당신의 대표자 그리스도를 제외하고서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저들 자신이 지혜롭게 되기 이전에 저들 스스로 어리석은 자들 이라고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천연계만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천연계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천연계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타낼 수 없으며 그러한 지식은 도덕적인 완전성의 측면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증거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개인적인 구세주로서 오셨으며 개성을 가지신 하나님을 증거하셨다. 주님께서는 개성적인 구세주로서 하늘로 승천하셨고 하늘로 올리우신 그대로 개성적인 구세주로서 재림하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본체의 형상이시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골 2:9)신다.

296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1-5). 이 세상은 나사렛의 겸손한 부에게서 신성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이 세상에 계셨으나 주님의 참된 성품을 알지 못하였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여기에 기록된 말씀은 육신적인 생명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만 소유하고 계신 영원 불멸의 생명을 의미한 것이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고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을 갖고 계셨다. 육체적인 생명은 인간 각자가 받는 어떤 것이다. 육체적인 생명은 생명의 시여자이신 하나님께서 다시 취하여 가시는 것이므로 영원하거나 불멸하는 생명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지배할 힘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은 딴 데서 빌리신 것이 아니다. 아무도 그에게서 생명을 취하여 갈 수 없다. 주님께서는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안에 있던 생명은 근본적인 것이었고 딴 데서 빌린 것이 아니었으며 딴 기원에서 유래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이러한 생명을 타고나지 못하였다. 297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인간은 수고의 값을 치루고 그 생명을 얻을 수 없으며 다만 그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개인적 구세주로 믿을 때에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바로 이것이 세상을 위하여 개방되어 있는 생명의 샘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분부의 말을 하는 가운데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받을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딤전 6:11-16) 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또다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하려 하심이니라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딤전 1:15-17)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딤후 1:10)셨다. 아무도 주님을 떠나서는 독립적인 영적 생명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께서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고 말씀하셨으므로 죄인은 불멸의 생명을 갖지 못하였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뜻은 분명하다. 이 죽음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맞는 죽음보다도 더욱 완전한 죽음이다. 298 이 죽음은 곧 둘째 사망을 의미한다. 바로 이 점에서 사람들은 반박하기를 “그러면 인간이 짐승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는 말인가?”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품위를 타락시키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면 하나님의 목전에서 인간을 고상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이 돈을 축적하는 것일까?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인간이 자신에게 위탁된 재물을 남용할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모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빨리 흩으실 수 있으시다. 인간이 총명한 지능을 가질 수 있으며 천부(天賦)의 재능을 풍부히 타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그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느부갓네살처럼 타락하여 들짐승의 수준에 이르게 될 때에 이성(理性)의 은사를 그에게서 떠나게 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까닭은 인간이 마치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하나님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얻은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자기 자신이 지혜롭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한 그 인간은 여전히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지적 세계에서 놀라운 일들을 성취하였으나 저들에게 그러한 일들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이 누구일까?-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만일 인간이 저들 자신의 능력과 저들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려는 목적으로 최고의 능력을 뽐내며 홍수 이전 세상의 모본을 따른다면 저들은 정녕 멸망할 것이다. 장수한 인간들의 상상력은 오직 악으로 가득찬 것이었으며 그러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저들은 악을 행하기에 슬기로웠으며 그러한 주민들이 세상에 가득하였으므로 완전히 부패하여지고 말았다. 만일 저들이 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과 연합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냥쭝을 가지고 놀라운 일들을 성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등지고 사단의 지도를 따르기로 선택하였으며 주님께서는 저들이 자랑하던 모든 지식과 함께 이 지상에서 저들을 쓸어버리셨다.

인류는 자기가 성취한 업적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존대를 받을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정당히 사용할 경우 자신을 향상케 할 수 있는 위탁된 재능들을 그릇 적용하고 남용할 때에 하나님의 목전에서 급진적으로 자신을 타락시킬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며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반면에 결코 죄인을 죄 없다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모두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자. 29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지게 하느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 2:29, 30).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순종하는 사람을 존대하신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율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시 18:20-22)고 하셨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다.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심으로써만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들이 될 수 있다는 보증을 얻게 된다.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하여 냉담한 태도를 보이며 우리가 정직하기만 하다면 무엇을 믿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어떤 진리의 생명 있는 씨를 버리고 안전할 수 없다. 십자가를 피하려고 애쓰지 말라. 만일 우리가 의의 태양이신 주님에게서 아무런 빛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든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접촉할 수 없으며 이 생명과 빛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당신의 목적이 사단으로 말미암아 좌절되지 않도록 모든 준비를 마련해 놓으셨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으로 세상에 죽음을 초래케 한 이후에 인류를 위하여 값진 희생 제물이 준비되었다. 저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것보다도 더욱 가치 있는 것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속량하기 위한 대가로 당신의 독생자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하늘의 모든 것을 주셨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일은 인간에게 크게 가치 있는 것이다. 주님의 희생은 그리스도를 저들의 개인적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빛을 가져다 준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 아버지의 율법의 생명력과 함께 당신에게 속한 모든 영혼의 마음에 깊이 스며든다. 300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거하실 수 있으며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도 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고 선언하였다.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면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심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사랑하신 것처럼 죄인을 사랑하실 수 있으실까? 물론 있으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그리스도께서 그같이 말씀하셨으며 주님의 말씀에는 추호의 꾸밈이나 거짓이 없으시다. 만일 우리가 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허락들을 붙잡으며 주님을 신뢰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계획들을 존중하실 것이다. 주님을 바라보며 살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든 영혼들을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버지께 드린 기도 가운데 포용(包容)된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가?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깊은 진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3-58).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선언하신다.

30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 10:17)고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당신 안에 있던 생명을 찾으시기 위하여 무덤에서 나오셨다. 인성은 죽었으나 신성은 죽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성으로서 사망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 안에 자기의 원하는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생명을 갖고 계시다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으로 모든 피조물들이 생존한다.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받는 자들이다. 아무리 능하고 재능이 많으며 아무리 능력이 큰 자일지라도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생명력을 재공급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샘이시요 원천이시다. 오직 불멸의 생명을 가지시고 빛과 생명 가운데 거하시는 분만이 “나는(나의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요 10:18)다고 말씀하실수 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로마의 파수병들의 귀에 똑똑하게 들렸다. 사단의 모든 군사들도 그 말씀을 들었다. 우리도 그 말씀을 듣게 될 때에 그 뜻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영혼들을 속량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다. 선하신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셨다. 벌을 가하심으로 당신의 율법을 보존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였다. 302 오직 이 방법만이 율법을 보존할 수 있으며 거룩하고 공의롭고 선한 율법이라고 선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따라서 이 길만이 죄를 그 흉악한 진상(眞相)그대로 나타낼 수 있으며 거룩하신 권위의 명예와 존엄성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나님의 정부의 율법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죽음으로써 높임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의 짐을 지시게 되셨다. 우리의 충만한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成肉身)과 사망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신성의 버티게 하는 힘으로 고난을 견딜 수 있으셨다. 또한 주님께서는 불충성의 오점이나 죄가 전혀 없으셨으므로 죄에서 승리할 수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징벌의 공의를 지심으로 인류을 위하여 승리하셨다. 주님께서는 율법을 존귀하게 하시며 존대 하심으로 인류에게 생명을 안겨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에게 불멸의 영생을 줄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으셨다. 인성을 위해서 당신께서 친히 내놓으셨던 생명을 다시 취하셨으며 그 생명을 인간에게 주셨다. 주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말씀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주님을 믿으므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모든 사람들은 영생에 이르는 생애의 체험을 얻게 될 것이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7). 그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9).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정신적으로나 생활에 있어서 당신과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인간과 하나가 되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이 연합의 덕택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생명이 저들의 생명이 되었다. 주님께서는 회개한 사람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요 11:25)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마치 잠잠하고 어두움 가운데서 잠자고 있는 것으로 여기셨다. 또한 주님께서는 죽음이 마치 짧은 순간처럼 말씀하셨다. 303 주님께서는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요 11:26)라고 하셨다.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 8:51). 믿는 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한갖 사소한 문제이다. 믿는 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잠자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여인들이 부활하신 구세주에 대한 목격자로서 기별을 전하고 있을 때, 또한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준비하고 계시는 동안 또 다른 하나의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출생시에 승리의 노래를 부른 강한 천사를 볼 수 있었던 로마의 파수꾼들은 지금 구원하시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천사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파수꾼들은 기절하여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하늘의 수행원들이 저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로마 군병들은 일어나서 떨리는 팔다리로 있는 힘을 다해서 동산 문으로 빨리 달려갔다. 마치 눈먼 사람이나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면서 죽은 사람과 같은 창백한 얼굴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하였다. 기별을 전하는 사령(使令)들은 급히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에게 얼마 전에 벌어진 놀라운 사건에 대하여 저들이 아는 모든 것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로마의 군병들은 빌라도에게로 가고 있었으나 그 보고가 유대의 관원들에게 전해져서,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먼저 저희 앞에 나오도록 하였다. 표정이 굳어진 군병들은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주께서 부활시킨 한 무리에 대하여 저들이 목격한 그대로 증언하였다. 저들은 무덤에서 목격한 그대로 대제사장들에게 이야기하였다. 사실 이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말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였다. 이 보고를 듣고 유대의 지도자들은 매우 불쾌하였다. 저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재판을 유월절에 집행하였으므로 그 사실이 널리 선전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어두움이 온 하늘을 덮었으며 무서운 지진이 있었고 그러한 일들이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으므로 저들은 백성들을 기만하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뇌물로 로마 군병들을 매수하여 거짓 보고를 올리도록 하였다.

304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십자가 상에서 외치시자 강한 지진이 있었으며 그 때에 진실하고 충성된 분들의 많은 무덤들이 열렸는데 저들은 모든 악한 일에 대하여 바른 증언을 하고 만군의 여호와를 크게 높인 분들이었다. 생명의 시여자로서 “나는 부활이요”(요 11:25)라고 선포하셨을 때 주님께서는 무덤에서 잠자는 이 성도들을 부르셨다. 저들은 살아 있을 때에 과감하게 진리를 증거한 사람들이었으며 저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주님에 대한 증인들이 되어야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이상 저들은 사단의 포로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저들을 구원하였으며 내 능력의 첫 열매들로서 무덤에서 저들을 불러내었으며 저들은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될 것이며 다시는 죽음을 맛보거나 슬픔을 체험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봉사하시는 기간 동안에, 죽은 사람들을 살리셨다. 주님께서는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과 야이로의 딸과 나사로를 부활시키셨으나 이들은 모두 불멸의 옷을 입지는 못하였다. 살아난 후에도 저들은 역시 계속적으로 죽음에 복종할 수 밖에 없었다. 305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때에 무덤에서 나온 사람들은 영생으로 일으킴을 받았다. 저들은 죽음과 무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전 기념으로서 주님과 함께 승천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당신의 추종자들 외에는 아무에게도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으나 당신의 부활에 관한 증언은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셨고 우리도 그와 같이 부활했다고 선언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나 보였다”(마 27:53). 저들은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사 26:19)라는 성경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 도성에 들어가서 증거하였다. 이 성도들은 밤에 제자들이 와서 주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려야 할 로마의 파수꾼들의 거짓말과 정반대되는 일을 행하였다. 이 증언이야말로 잠잠케 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는 잠자는 이들의 첫 열매이셨다. 생명의 왕께서 요제(搖祭)의 원형인 첫 열매가 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였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롬 8:29)었다. 죽음에서 일어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바로 이 광경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상징적으로 의식이 거행되었다. 추수 밭에서 처음 익은 곡식의 이삭들이 모아졌고, 유월절에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에 처음 익은 곡식단은 여호와 앞에 감사의 예물로 바쳐졌다. 백성들은 추수의 여호와로서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뜻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익은 열매를 흔들었다. 이 의식을 올린 후에야 낫으로 곡식을 베어 추수를 거둘 수 있었다.

이처럼 부활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저들의 개인의 구주로 믿고 죽었다가 부활할 모든 영혼들에 대한 약속의 표로서 온 우주 앞에 제시되어야 하였다.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킨 그 같은 능력이 당신의 교회를 일으킬 것이며 당신의 신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할 것이며 금세 뿐 아니라 내세에서도 모든 주권과 모든 권세와 모든 이름 위에 그것을 당신과 함께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잠자는 성도들의 승리는 부활의 아침에 영광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306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존귀 가운데 승리의 개가를 부르실 때에 사단의 개선(凱旋)은 그 종막을 고하게 될 것이다. 생명의 시여자께서는 무덤에서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멸의 생명으로 영화롭게 해 주실 것이다.

이 지상에서의 구세주의 사업은 완성되었다. 주님께서 하늘 본향으로 돌아가셔야 할 때가 이르렀다. “예수께서 저희(제자들)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하늘로 올리우]”(눅 24:50, 51)셨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축복의 행위를 하시면서 승천하시자 천군 천사들이 구름처럼 주님을 에워싼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로잡은 한 무리를 이끄시고 당신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신다. 주님께서는 사망과 무덤의 정복자이심을 증거하시기 위하여 잠자고 있던 사람들의 첫 열매를 하늘 아버지에게 가져 가신다. 하늘 도성의 입구에서는 셀 수 없는 천사들의 무리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 지상에서 올라간 사람들이 성문에 가까이 접근하였을 때에 저들을 호송하던 천사들이 성문에 서서 기다리는 천사의 무리들에게 의기 양양한 음조로 외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라고 묻는다.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또다시 기다리던 천사들은 “영광의 왕이 뉘시뇨”라고 묻는다. 호송하는 천사들은 선률적인 아름다운 음조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시 24:7-10) 그 때에 하나님의 도성의 문들이 활짝 열리며 천사들의 무리가 그 안으로 몰려 들어간다.

그곳에는 보좌가 있으며 그 보좌의 주위에는 약속의 무지개가 있다. 또한 그곳에는 스랍 천사들과 그룹 천사들이 있다. 천사들은 주님을 에워싸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을 돌아보시며 손을 흔드신다. 307 주님께서는 하늘 아버지의 임재하시는 곳으로 들어가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상징인 요제로서 당신과 함께 부활한 사람들을 승리의 예표로 가리키시는데 이들은 나팔 소리를 듣고 무덤에서 나올 포로된 사자(死者)들을 대표한 사람들이다. 주님께서는 하늘 아버지께 접근하신다. 만일 회개한 죄인 하나에 대하여 온 하늘에 기쁨이 있고 하늘 아버지께서 죄인 하나를 기뻐하셔서 노래하신다면 과연 이 장면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아버지시여, 다 이루었나이다. 오, 나의 하나님, 저는 당신의 뜻을 행하였나이다. 저는 구속 사업을 완성하였나이다. 만일 당신의 공의가 충족되었다면,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요 17:24)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신다. 그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공의는 충족되고 사단은 완전히 패배한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시 85:10)춘다. “하늘 아버지의 팔이 아들을 껴안으며 당신의 음성으로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히 1:6)라고 말씀 하시는 것을 듣게 된다.

308 아담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타락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은 파손되었다. 거룩한 정부는 불명예스럽게 되었으며 공의는 범죄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였다.

인류를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불순종에 대한 징벌을 친히 짊어지시기를 자원하셨다. 오직 하늘 임금께서 굴욕을 당하심으로써만 불명예를 씻을 수 있고 공의를 충족시킬 수 있으며 인간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빼앗겼던 것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 그 외에는 아무런 다른 방법이 없었다. 천사가 이 지상에 내려와서 아담이 범하여 타락한 기반을 거쳐 지나간다 하여도 아무것도 총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한 천사의 희생은 단 한 점의 죄도 씻을 수 없으며 단 한 시간도 집행 유예를 줄 수 없었다.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하늘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히 1:3)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성에 인성을 입히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며 죽으시기 위하여 이 지상에 오셨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사 십자가의 죽음을 맛보시게 되셨다. 당신의 몸에 죄의 저주를 지심으로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미칠 수 있는 곳에 행복과 불멸의 생명을 두셨다.

309 온 하늘의 존귀한 대우를 받으시는 분께서는 인류의 머리로서 인성을 쓰시고 타락한 천사들과 타락하지 않은 세계의 주민들에게 누구든지 신령한 도움을 힘입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요구할 아무런 자격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 주님께서는 사단이 당신을 대적하여 가져올 수 있는 모든 괴로움을 우리들을 위하여 당하셨다.

과거 모든 희생 제물들과 상징적인 성소의 모든 봉사 의식들이 우리 인류를 위한 구세주의 희생을 예표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너무나도 기이하고 놀라운 것이다. 바로 이 희생이 요구되었다. 인간의 영원한 복리를 확보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고난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될 때에 우리의 심령은 감동된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요구를 만족시키며 당신의 율법의 고결한 신성성에 일치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성취하실 것을 친히 약조하셨다.

하늘 아버지의 독생자보다 덜 거룩한 이로서는 아무도 구세주를 저희 대속자로 받아들이며 천국의 율법에 복종하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가장 죄악적이며 타락한 사람들까지도 깨끗하게 하기에 충분한 효력이 있는 희생 제물을 바칠 수 없다. 거룩하신 주님보다 덜한 자격으로서는 아무것도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원상 그대로 회복시켜 줄 수 없다.

원수의 손에서 포로들을 빼앗을 어떤 권리를 그리스도께서는 갖고 계셨는가? 그 권리는 바로 하늘 왕국이 통치되고 있는 공의의 원칙들을 만족시킨 희생을 치루신 권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인류의 구세주로서 이 지상에 오셨으며 교활한 원수를 정복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바른 원칙에 대한 주님의 확고한 충성으로써 당신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주님께서는 갈바리의 십자가상에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 대가를 치루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주님께서는 큰 기만자의 손아귀에서 포로 된 사람들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셨는데 이 큰 기만자야말로 하나님의 정부를 대항하여 꾸민 거짓말을 가지고 인류를 타락하게 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영원한 왕국의 충성된 신하로 부름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주장(主張)을 상실케 한 자였다.

우리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한 속전을 지불하셨다. 아무도 사단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위한 전능하신 조력자로서 우리 앞에 서 계시다. 310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7, 18).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1-16).

양자로 하나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화함을 받게된다. 방종과 자신을 사랑하는 정신은 극기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정신으로 변화하게 된다. 인간은 아무도 타고난 권리처럼 거룩함을 물려받을 수 없으며 어떤 방법을 구상하더라도 하나님께 대하여 충성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요 15:5)다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의란 마치 “더러운 옷”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구주의 능력을 힘입어 연약하고 쉽사리 죄를 짓는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악을 넉넉히 정복할 수 있다.

311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죄인들을 위하여 죽도록 주실 때에 타락한 인간에게 비할 데 없는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다.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는 성경 말씀에 대하여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도 많은 수의 사람들이 수치스럽게도 이 말씀의 뜻을 더럽혔으며 그 의미에 대하여 거짓된 해석을 함으로 위험한 과오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만이 우리가 신령한 애정을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표준이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우리의 표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표준을 세우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에 대한 고귀한 허락들을 주셨으나 우리는 여호와를 범죄를 간과(看過)하시고 죄악에 대하여 눈감아주시는 자애로움을 가지신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창조주께서는 당신의 피조물들을 사랑하시지만, 우리 세상에 재앙을 가져온 범죄를 영속(永續)시키며 의보다 죄를, 진리보다 오류를 더욱 사랑하는 자에게는 진리의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시지 않으실 것이다. 진리와 의의 길에는 십자가가 놓여 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요구들 곧 당신의 거룩하신 계명들을 그릇 해석하며 저들의 양심을 건드리지 않은 범위에서 혹은 저희 사업 관계에 불편을 받지 않는 한도에서 저들 멋대로 해석한다. 그러나 오직 진리만이 성화(聖化)케 하는 매개물이다.

312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참된 개념을 갖게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창에 찔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면서 당신의 은총 가운데 머물러 있게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우리는 죄인들로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붙잡고 죄 짓는 일을 그쳐야 한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올바른 견해를 갖게 되자마자 그 사랑을 모욕하는 기질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율법의 불변성을 확증하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거한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오셨다.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알맞도록 하나님의 도덕적인 표준이 일점 일획이라도 변개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죄인에게 당신 자신의 의를 주시고 인간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돌아가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한 것이기는 하나 하나님의 아들의 수치, 치욕, 사망이 포함된 구속의 경륜을 의지하지 않고는 죄인이 용서받을 수 없다. 이 사실은 추리적인 인간의 정신에서 그리스도의 사망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복종을 폐기시켰다고 하며 성화를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발전된 사상을 쫓아내게 할 것이다.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위대한 구속의 경륜에 대하여 연구하여야 한다. 우리가 배우기를 그칠 때에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우는 학생의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거룩하신 스승 밑에서 배우는 사람들이 된다면 우리의 이해력은 깨우침을 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놀라운 사실들을 배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신중히 행하여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굳은 서약을 깼으며 얼마나 무참히 우리의 최선의 결의를 자주 망쳐놓았고 얼마나 자주 큰 빛을 맞이하고서도 하나님을 외면하면서 우리 자신의 우상을 찾아 헤매었는가 생각해 보자. 우리는 마땅히 겸비하여 하나님의 능력 있으신 손에 자신을 맡겨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실상보다도 스스로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비록 우리 자신의 실상을 알게 된다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긴 하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그대로 우리들 자신의 실상을 나타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자신에 대한 계시를 요청했다고 해서 기도를 그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우리는 예수님께서 죄를 사유하시는 구세주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313 우리들이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게 될 때에 우리들 마음 가운데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일어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우리의 체험이 될 때 우리는 상호간에 선을 행할 것이며 우리의 능력이 미치는 모든 방법을 활용하여 경건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육신과 정신의 모든 부정(不淨)에서 우리 영혼을 정결케 해야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거룩함을 완성해야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은혜의 시기와 시련기 동안에 우리를 위하여 온 우주를 감동시킬 수 있는 놀라운 원칙이다. 그러나 우리의 은혜의 기간이 끝난 이후에 우리 자신이 사랑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사람으로 발견된다면 그 사랑은 복수의 사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타협하지 않으신다. 불순종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갈바리의 십자가상에 매달리시게 될 때에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임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 통회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오는 가장 비천하고 가장 악독한 죄인을 감싸기 위하여 그 손을 내밀 것이다. 그 사랑은 죄인을 회개케 하여 순종하는 성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손을 내밀 것이다. 그러나 계속하여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단 한 영혼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죄는 불법이며 지금 구원하기에 강하신 팔은 죄인이 거룩한 관용의 한계를 벗어날 때에 징벌을 가하는 데도 강한 팔이 될 것이다. 죄의 습성 가운데서 정죄함을 받지 않기 위하여 생명을 추구하며 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성경을 연구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 그는 정신적인 무지(無知)가운데 남게 될 것이며 사단의 기만에 끌려가는 희생자가 될 것이다. 회개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보호를 받는 정도만큼, 회개하지 않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음으로 저들 자신의 무지와 완고한 마음의 결실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공언하면서도 결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저들은 인간이 타락하여 인간의 모든 기능들이 약화되고 도덕적인 성장을 완성하기에 부적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모든 부담과 모든 고난과 모든 극기를 감당하셨으므로 주님께 그 모든 것들을 맡기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저들은 믿는 것 이외에 저들이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314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셨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회복시켜 주셨다고 해서 넷째 계명을 범하셨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눅 6:9-11).

이 이적은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신시키는 대신에 오히려 그 이적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기 때문에 분노로 가득 찼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자비의 행동이 안식일에 합당한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일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우리는 어느 편을 믿어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요 15:10)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따르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 확실히 안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협력하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들 자신의 구원을 이루도록 계속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능들을 주시며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므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 2:13 참조).

우리는 결코 만족한 상태에서 휴식을 취하며 “나는 구원 받았다”고 말하면서 발전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사상이 움트기 시작하면 깨어 기도하는 정신과 고상한 표준을 향하여 향상하려는 열렬한 노력이 그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도성으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할 때까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성화된 사람들 가운데는 없을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가장 성숙한 예의를 갖추어 영원한 구원을 찬양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인간이 연약함으로 가득 차 있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는 한, 그는 결코 “나는 구원 받았다”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315 전신 갑주를 입었다고 해서 승리를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싸워야 할 전쟁이 있으며 쟁취해야 할 승리가 있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 10:38)고 말씀하셨다. 만일 우리가 승리에서 승리로 전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혼은 뒤로 물러가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품성을 평가하기 위하여 어떤 인간적인 표준을 세워서는 안 된다. 우리는 소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완전함에 대하여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따르느냐 혹은 따르지 않느냐를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표준이다. 우리가 불순종한다면 우리들의 품성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체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할것이며 “나는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한갖 거짓된 말이 될 것이다. 하늘과 땅에 있는 하나님 정부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자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원수의 편에 합세하여 저희 종교적 지도자들이 설교단에서 가르친 말들에 공명하며 하나님의 율법이 이 이상 더 인간에게 구속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일지라도 만일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저들 자신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는 빛을 갖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낮의 구름기둥과 밤의 불기둥으로 에워싸인 천사장이셨으며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도록 특별한 지시를 하셨다. 본래 그 율법은 땅의 기초가 놓일 때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을 때에 주신 것이었다.

이 동일한 율법은 그분의 친 음성으로 시내산에서 장엄하게 선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신 6:6-8)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자들은 율법이 언급될 때에 몹시 조급함을 나타내며 저들은 율법에 대한 말씀을 들을 때에 자극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허위와 인간의 유전으로 말미암아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사단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세상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었으며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라는 분명한 말씀을 물리치고 세상 사람들은 사단의 해석을 받아들였다. 316 하나님의 율법을 놓고 하늘에서 투쟁이 시작되었으며 사단이 하늘에서 추방된 이래로 그 투쟁은 이 지상에서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 구세주의 사명을 이해하고 또한 주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하여 우리의 큰 필요를 언제나 배워야만 한다. 우리는 깊이 빠져 있는 우리를 끌어올리기 위하여 내려뜨린 사슬의 길이에 의해서만 지은 죄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죄가 가져온 두려운 파멸에 대하여 이해하는 일에 정신적 능력을 기울여야 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힘입게 하는 거룩한 계획을 깨달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께서 우리가 싸워야 할 전쟁을 대신 싸워 주시므로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정복할 능력을 갖도록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다는 사실은 언제나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낮추게 하는 요소가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갈바리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모든 자랑하는 말들이 우리 입에서 사라질 것이며 우리는 “그처럼 크신 고난에 대하여 너무도 부정하고 무가치한 나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너무나 큰 대가를 치루셨도다”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무지와 자족(自足)의 정신은 서로 협력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의 행위를 규제(規制)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며 그 원칙이 미치는 영향은 심원(深遠)하다. 율법의 정죄를 피할 수 있는 죄가 없으며 율법의 정죄를 모면할 수 있는 불의한 역사(役事)가 없다. 위대한 율법책은 진리이며 또한 유일한 진리인데 이는 오직 진리만이 사단의 기만에 대한 역사와 사단의 추종자들의 파멸에 대하여 정확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율법과 심판보다 더욱 우수한 율법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는 하늘에서 추방되었다. 사단은 이와 꼭 같은 일을 이 지구상에서 시도해 보았다. 그는 하늘에서 패배를 당하고 쫓겨났으므로 자신이 타락한 이래로 줄곧 세상을 기만하고 인류를 파멸로 이끌므로써 하나님께 보복할 수 있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계책을 대치(代置)시키려던 그의 노력은 매우 끈기있고 영속적인 것이었다. 사단은 세상을 자기 올무 속에 사로잡아 놓았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계책에 대하여 모르고있다. 저들은 영혼을 파멸시키려는 사단의 요구에 모든 기회를 제공하고있다. 따라서 저들은 예수님을 높이면서 멸망해 가는 허다한 영혼들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선포하기 위한 불타는 열정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다.

산 위에서 상세히 설명해 주신 하나님의 정부의 율법들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의 진리를 잘 알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다. 317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원대한 원칙을 나타내 보이셨다. 주님께서는 모든 계명을 자세히 해석해 주셨으며 당신의 모본을 통하여 계명의 모든 요구를 나타내 보이셨다. 율법에 나타난 그대로의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의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있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한다면 그의 생애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안에 숨겨지게 될 것이다.

율법의 주장들에 대한 지식은 인류를 위한 구세주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영혼에게서 희망의 마지막 한 가닥을 꺾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의 진리는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된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께서 돌아가신 것은 당신 자신의 의를 인간에게 입혀주시기 위함이셨으며 사단이 인간에게 믿도록 강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마음대로 폐기(廢棄)시키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악을 물리칠 수 있는 도덕적인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

성화의 작업은 평생의 과업이다. 이 작업은 지속적이어야 하지만 진리의 어떤 부분에 대하여 빛을 거부하거나 등한히 할 때 성화의 작업이 심령 가운데 이루어질 수 없다. 성화된 영혼은 무지한 가운데 처하여 있는 것을 만족지 않을 것이며 빛 가운데서 행하기를 열망하여 더욱 큰 빛을 얻기 위하여 추구할 것이다. 광부가 금과 은을 캐듯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마치 숨은 보화를 찾듯이 진리를 탐구할 것이며 받은 빛에서 더욱 큰 빛을 찾아내며 항상 지식의 증가를 보일 것이다. 그는 계속적으로 은혜와 진리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게 될 것이다. 자아를 극복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큰 거울을 바라봄으로 품성의 모든 결함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는 혹시 품성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에 의해서 정죄를 받고 있지나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만일 그대들이 정죄를 받는다면 거기에는 그대들이 추구해야 할 한 가지 길밖에 없는데 그대들은 율법을 범한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여야 하며 죄에서 깨끗케 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천국을 얻으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들에 순종해야만 한다. 법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헛되게 애쓰지 않을 것이다. 오직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의 진리를 믿음으로써만 그대들은 흑암의 권세들과 싸우는 전쟁을 위하여 힘을 얻게 될 것이다. 318 고대의 전사(戰士)들은 썩을 면류관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사단의 모든 기교와 계책은 우리 인류의 멸망을 성취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그대들이 안락을 추구하는 자들과 함께 편안히 앉아서 “나는 구원 받았다”는 말을 그대의 입술에 가볍게 담으면서 하나님의 계명들을 무시한다면 그대들은 영원히 멸망을 받게 될 것이다. 안락을 추구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을 주는 진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로하는 기쁨으로 충만한 진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 이 기쁨은 성령의 희락이다. 그처럼 진리에 설득되어 마음과 정신을 활짝 연다면 그대들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비취는 모든 빛의 광선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바야흐로 이 때에 냉담하거나 부주의하며 쾌락을 사랑할 시간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권능과 크신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그대들은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대들은 모든 죄들을 버렸는가?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기도에 응답하는 뜻으로 진리로 말미암아 성화되어 가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 관하여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기도하셨다.

부모들은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저희 자녀들을 양육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뜻 행하는 것을 사랑하도록 저들을 교육하여야 한다. 우리는 청소년들의 경건성에 대한 유익을 과대 평가한다고 생각지 말 것이다. 청소년 시절에 받은 감명은 많은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영구적인 것들이 된다.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들이 영혼의 돌비에 가장 쉽게 아로새겨지는 때는 어린 시절이다. 어린이들의 교육이 너무나도 등한시되어 왔으며 마땅히 가르쳤어야 할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교훈을 저들에게 가르치지 못하였다.

우리에게 은혜의 시기를 주신 것은 우리들로 영원한 시대를 위하여 품성을 완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부모들이여, 자녀들이 그대들의 슬하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아 하나님께서 찬성하실 품성을 계발시킬 수도 있고 혹은 사단과 그의 부하들이 저들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품성을 계발시킬 수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엄숙한 문제인가! 예수님께서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말씀하셨으며 당신의 백성들이 저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에 관하여 부지런히 가르치도록 권고하셨다. 누가 이 교훈에 순종하고 있는가? 누가 저희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찬성하실 수 있도록 양육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가? 319 과연 누가 저희 자녀들의 모든 냥쭝과 재능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전적으로 바쳐져야 할 것임을 마음에 명심하고 있는가?

한나는 주님께 사무엘을 바쳤으며 부모들은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친히 당신 자신을 나타내셨다. 부모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로 외국에 있는 영혼들과 오류와 미신의 흑암 속에 사는 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침으로 당신의 이름으로 위대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로 받으시게 하기 위하여 어린 자녀들과 청소년들을 위하여 더욱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만일 그대들이 자녀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만족시킴으로 방종하게 하고 또한 저들에게 의복을 사랑하는 기질을 키워주며 허영심과 교만심을 계발시킨다면 그대들은 저희 구원을 위하여 무한한 대가를 치루신 예수님을 실망시키는 일을 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자녀들이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당신을 섬기기를 바라신다.

부모들이여, 그대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해 주신 예수님을 위하여 그대들이 해야 할 큰 사업이 있다. 주님을 그대들의 안내자요 조력자로 삼으라.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에게 줄 수밖에 없었던 가장 고귀한 은사 곧 당신의 독생자를 그대에게 아끼지 않으셨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일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사단은 마치 강철로 된 줄로 묶듯이 어린이들을 자기 자신에게 단단히 묶으려고 노력함으로 그대들은 오직 단호한 개인적 노력을 통해서만 자녀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어린이들과 칭소년들은 교회의 소망이므로 저들은 더욱 열렬한 지도와 교육을 받아야 한다. 요셉,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 사무엘, 다윗, 요한 및 디모데와 같은 인물들이야말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잠 9:10)라는 사실을 증거해 주는 빛나는 모범적 인물들이다.

만일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상담자와 돕는 분으로 우리와 함께 거하시게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좀더 열렬하고 결정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갈바리 산상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비취는 빛은 모든 방랑자를 가정으로 인도할 것이다. 주님 안에는 품성을 순결케 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비할 데 없는 사랑스러우심을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나타내 보임으로써 저들을 위하여 활동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세상의 매력과 환상들은 빛을 잃게 될 것이며 저들은 불순종의 길에서 아무런 유익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320 하나님의 계명들은 그 내용이 포괄적(包括的)이며 그 뜻이 심원하다. 몇자 안되는 간단한 표현으로 인간의 전체적인 의무를 밝혀주고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0, 31). 이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율법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및 그 높이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고 선언하였다.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定義)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선을 행하는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라고 선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저희 심령의 상태에 관하여 속고 있다. 저들은 육신에 속한 마음이 만물보다도 거짓되며 몹시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저희 자신의 의로 스스로 감싸고 있으며 저들 자신의 인간적인 품성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저들이 거룩한 표준에 이르지 못하고 저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때에 저들의 절망이 얼마나 처절할 것인가!

321 우리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헤아려 볼 수 있으며 우리끼리 서로 비교해보고 우리는 이 사람만큼 혹은 저 사람만큼 잘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문제는 우리가 어떤 심판에 응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높은 하늘의 주장들을 감당하고 있는가? 거룩한 표준에 도달하고 있는가? 우리의 심령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전부 범하였으며 율법을 범한 자들로서 인간은 절망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로 전락하였으며 단 한 가지 선도 행할 힘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아니라 할 수도 없”(롬 8:7)다. 도덕적인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바라볼 때에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자기 자신의 악한 상태와 율법의 공의로운 형벌 밑에서 절망적인 파멸에 이르게 된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깊이 빠지게 된 죄의 절망적인 비탄 가운데 버려지지 않았으며 죄인을 파멸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과 동등하셨던 분께서 갈바리에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대주재이셨으며 천사들의 사랑하는 사령관이셨고 당신의 기뻐하시는 바를 즐거이 행하시는 분이셨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분이셨으며 “아버지의 품 속에”(요 1:18) 계셨으나 인간이 죄와 불행 가운데서 멸망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바라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보좌에서 내려오셨으며 당신의 면류관과 왕의 흘(忽)을 버리셨고 당신의 신성을 인성으로 옷 입히셨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높여 당신과 더불어 보좌에 앉히시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셨으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하셨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완전한 제물과 무한한 희생을 발견하게 되며 당신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영혼들과 가장 미천한 자들까지도 구원하실 수 있는 강하신 구세주를 발견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사랑으로써 하늘 아버지를 나타내며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시키고 인간을 창조하신 당신의 형상을 따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대속제물이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대속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이미 이루어진 대속을 받아들일 수는 있다. 322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너희가 알거니와 …구속된 것은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 19). 구원이 우리 모든 인간에게 이르게 된 것은 우리 구세주께서 무한하신 희생을 치르시고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신 때문이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존대를 받지 못하셨고 알려지지 않으셨다. 당신의 놀라우신 겸비와 굴욕적인 생애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인간을 높여 하늘 궁전에서 맛볼 수 있는 영원한 명예와 불멸의 기쁨을 맛보게 하실 수 있으셨다. 주님께서는 30여 년 동안의 지상 생활 기간에 상상 조차할 수 없는 번민으로 그 심령이 매우 상하셨었다. 말구유로부터 갈바리에 이르기까지의 행로는 비애와 슬픔으로 그늘져 있었다. 주님께서는 슬픔의 인간이셨으며 인간의 비애를 잘 아셨던 분으로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아픔을 견디셨다. 주님께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애 1:12)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다. 완전한 증오심으로 죄를 미워하심으로 주님께서는 온 세상의 죄들을 당신의 영혼으로 끌어들이셨다.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죄의 형벌을 짊어지셨다. 결백하신 분으로서 죄인들의 대치물(代置物)로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 모든 죄에 대한 범죄 의식이 그 놀라운 무게를 가지고 세상의 구세주의 거룩하신 영혼을 압박하였다. 아담의 모든 아들과 딸들이 가진 악한 생각, 악한 말, 악한 행동은 당신 자신께 징벌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주님께서 인간의 대치물이 되신 까닭이다. 비록 죄의 범죄 의식이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나 주님의 심령은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찢어지고 멍이 들게 되었으며 우리로 당신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죄를 모르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우리의 거룩하신 대치물이 되신 주님께서 자원하여 공의의 칼 앞에 당신의 영혼을 벌거벗기심으로 우리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요 10:17, 18)다고 말씀하셨다. 이 지상의 어떤 인간이나 하늘의 어떤 천사도 죄의 값을 치를 수 없었다. 반역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셨다. 주님 안에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어 있었으며 바로 이 점이 갈바리의 십자가에서 바친 제물에 효력을 줄 수 있었다. 323 십자가에서 자비와 진리가 서로 만났으며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다.

죄인이 갈바리에서 죽어가는 구세주를 바라보고 고난 당하시는 분이 거룩하신 분이심을 깨닫게 될 때에 그는 왜 이러한 큰 희생을 치루어야 했는지 묻게 된다. 그 때에 십자가는 범한 바 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불변성과 의에 대하여 결정적인 논증이 된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는 가운데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율법)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려 하셨”(사 42:21)다고 말하였다. 율법은 행악자를 용서할 권세가 없다. 율법은 다만 죄인의 결점을 지적해 주어 죄인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필요를 깨닫게 하며 자기의 대치물이 되고 담보물이 되며 의가 되실 주님에 대한 필요를 깨닫게 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죄들을 당신이 친히 짊어지셨으므로 죄인들의 필요를 충당해 주신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주님께서는 죄인들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실 수 있었으며 철저히 멸망시키실 수 있었으나 보다 값비싼 계획이 선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써 절망적인 인간에게 희망을 마련해 주셨고 세상 죄를 지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하나 밖에 없는 풍성한 은사로서 온 하늘에 부어 주셨으므로 인간이 구원의 잔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후사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어떤 필요한 도움도 아끼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내셔서 모든 인간의 심령을 당신에게로 이끄시기 위하여 오셨다. 주님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고 말씀하셨다. 구원을 향한 첫 단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이끄심에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회개의 탄원을 하시며 또한 저들을 용서해 주실 수 있고 저들의 이름 위에 적힌 죄에 대하여 사유의 표를 찍을 수 있기 위하여 거듭거듭 인간에게 기별을 보내신다. 그런데 회개함이 없어서야 될 말인가? 주님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될 것인가? 주님의 자비의 제의를 어찌 모른 척하며 주님의 사랑을 어찌 냉정하게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인간이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거부한다면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매개물에서 스스로 절연하게 되는데 오직 하나님께서만 회개한 죄인을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32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시며 당신의 성령의 탄원을 통하여 인간에게 회개를 호소하신다.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당신께서 용서하시는 사람을 먼저 회개케 하신다.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하여 전정한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를 죄인의 구원자이며 대언자로 믿을 때에 가장 큰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랑의 표현을 통해서 저들을 이끄실 때 비로소 용서의 기쁨과 하나님의 화평을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저들이 주님의 이끄심에 반응을 보이고 주님의 은혜에 대하여 저희 심령을 복종시킨다면 주님께서는 저들을 단계적으로 이끌어 당신에 대한 충만한 지식을 얻게 하실 것이며 바로 이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에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나타내심으로써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죄의 사유함을 받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죄인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죄인의 범죄의 고통을 맛보시며 죄의 형벌을 받으시는 것을 바라볼 때, 십자가의 죽음의 두려운 표현으로써 악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심과 타락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게 될 때,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율법을 범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향하여 회개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의 생애의 중심이 되시는 거룩하신 구세주께서 자기의 대치물이 되셨고 담보물이 되셨으며 대언자가 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활용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죄인에게 당신의 자비와 진리를 보여 주시며 당신의 사유하심과 사랑을 베풀어 주실 수 있으시다.

그러나 사단은 자기가 막을 수만 있다면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라도 단 한 영혼도 죄의 포로가 된 신세를 피할 수 없게 할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주심으로 하나의 풍성한 은사로서 온 하늘을 부어주셨고 하늘의 가장 고귀한 은사를 주셨으며 하늘의 보화들을 모두 우리에게 허락하셨으나 원수는 회개한 죄인에게 마치 하나님이 엄격하고 냉혹하며 죄인을 용서해 주기 싫어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때때로 자신의 죄로 절망 가운데 빠진 사람들이 나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 저들은 한결같이 “저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상실한 것만 같아서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저와 같은 인간에게도 희망이 있을까요?” 라고 물어왔다. 이러한 불쌍한 영혼들에게 다음과 같은 기별을 보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하늘 아버지께서는 풍성하게 나누어줄 양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325 일어나서 그대들의 하늘 아버지께로 가십시오.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대들이 아직 먼 거리에 있을 때에 그대들에게 달려가 맞이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동정심을 베푸실 것입니다.”

원수가 홍수처럼 밀려와 죄에 대한 생각으로 그대들을 삼키려 할 때에 그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나 자신이 죄인임을 잘 알고 있다. 만일 내가 그 사실을 몰랐다면 구세주께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고 말씀하셨다.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나아갈 자격을 얻게 되었다. 나는 죄가 많으며 더러워진 인간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굴욕과 죽음을 맛보셨으며 마땅히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주님께서 없이해 주셨다. 나는 주님께 나왔다. 나는 주님을 믿는다. 나는 주님의 분명한 약속을 주장한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신다.(요 3:16)

통회하는 영혼의 그러한 탄원의 기도가 거절을 당할 것인가?-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인류에게 향한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확증되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사람들, 비록 가장 미천한 인간까지라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며 또한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

그 때에, 그대들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나아갈 것이며 주님의 발 아래 꿇어 엎드려 탄원자로서 그들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내려오시게 하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으며 주님을 올라오시게 하기 위하여 땅 속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하셨다. 만일 우리가 허락만 한다면 주님께서는 얼마나 기꺼이 영혼의 성전을 당신의 소유로 삼으시려고 하실 것인가! 주님께서는 마음문 밖에 서서 기다리시며 문을 두드리는 분으로 당신 자신을 상징하셨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들어오시지 않고 계신가? 그 까닭은 죄에 대한 사랑이 마음 문을 닫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완전히 포기하기로 마음 먹자마자, 우리의 범죄를 인정하는 순간에, 인간의 영혼과 구세주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장벽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 것이다.

326 그러나 우리들은 죄를 회개하기 위하여 골방에 들어갈 필요가 없으며 마치 루터가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행한 것처럼 우리 자신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하여 우리들 자신에게 고행을 치르게 할 필요가 없다. 다음과 같은 문답의 말씀이 있다.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7, 8).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라고 말하였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요일 1:9)신다고 말하였다. 우리가 죄의 사유하심을 받지 못하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우리의 범죄로 상함을 받으시고 우리의 허물로 찔림을 받으신 주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며 우리에게 죄가 있다는 것과 주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의 깊은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자복은 무한하신 동정심에 이르는 길을 찾게 될 것이며 주님께서는 상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통회하는 자의 영혼을 구원하신다.

죄의 자복이 저희 인격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며 저희 동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감소되리라고 상상하는 자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327 이러한 모순된 생각을 고집하므로 허물을 발견하고도 자복하지 않으며 오히려 저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행한 잘못된 행실을 묵과해 버린다면 저들은 자신의 생애에 고통을 가중(加重)시키는 것이 되며 다른 사람들의 생애에 어두운 그늘을 던지는 것이 된다. 죄를 자복하는 일은 그대들의 위신을 손상시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거짓된 위신을 떨쳐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거룩하신 바위이신 주님께 떨어져 부서질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대들에게 참되고 신령한 위신을 주실 것이다. 교만, 자존심 및 독선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자복하지 못하고 허락의 말씀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하나님께 아무것도 숨기지 말 것이며 그대들의 형제들에게 범한 죄를 자복하는 일을 등한히 여기지 말라.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 5:16). 아직도 많은 죄들이 자복하지 않은 채 마지막 심판의 날을 위하여 죄인에게 맞서고 있다. 오히려 지금 거룩한 희생자께서 그대들을 위하여 대속의 탄원을 하고 계실 때에 그대들에게 맞서고 있는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드시 배우도록 해야 한다. 그대들의 영혼의 건강과 다른 사람들의 구원은 그대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따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6, 7). 겸비하고 상한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갈바리의 십자가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참여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이행하는 자들은 풍성한 축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우리들의 심령을 항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새롭게 하시고 성화하게 하시며 하늘 궁전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들은 어떤 특별한 시기를 위해서 기다릴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들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죄의 종이 되기를 거부해야 할 것이다. 그대들은 여러 번에 걸쳐서 매번 조금씩 죄를 버려야 할 것이라고 상상하는가? 아, 그 가증한 죄를 당장 버리도록 하라. 그리스도께서 미워하시는 것들을 미워하고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것들을 사랑하라. 주님께서 그대들을 죄에서 정결케 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죽으심과 고난으로써 이미 섭리를 베풀어놓지 않으셨는가? 우리들이 죄인이며 신령하신 바위에 떨어져 부서진다는 의미를 깨닫기 시작할 때에 영원하신 팔이 우리들을 안아 주시며 우리들을 예수님의 마음에 가까이 이끌어주실 것이다. 328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들은 주님의 사랑에 매혹될 것이며 우리들 자신의 의에 대하여 지긋지긋하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들은 십자가의 바로 밑까지 가까이 갈 필요가 있다. 그곳에서 우리들 자신이 겸비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고상하게 드러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온전하다고 느끼며 상당히 선하며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만족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는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거룩한 빛과 도우심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의 마음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실 자리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은혜가 있으시며 우리들은 당신의 영과 권능을 큰 분량으로 받을 수 있다. 독선의 찌꺼기를 주워먹지 말고 주님께로 가라. 주님께서는 그대들에게 입힐 가장 좋은 예복을 가지고 계시며 그대들을 받으시기 위하여 팔을 넓게 벌리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더러운 두루마기를 그에게서 벗겨버리고 새옷으로 갈아입히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정결함을 입었다는 느낌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인가?-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것”(요일 1:9)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확증을 받게 된다. 그대들은 하나님께서 그대들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믿기 이전에 어떤 놀라운 감정의 변화가 있기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 감정이란 구름처럼 변하기 쉬운 것이어서 감정을 그대들의 표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대들은 신앙의 기초로서 확고한 무엇을 가져야만 한다. 주님의 말씀은 그대들이 의뢰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의 말씀이며 주님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갈바리를 바라보라. 주님께서 그대들의 대언자가 되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무엇이든지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면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그대들은 결코 그대들 자신의 선이나 선행을 의존해서는 안 된다. 그대들은 의의 태양이신 주님께 의탁하기 위하여 나와야 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그대들의 죄를 씻겨 주셨고 당신의 의를 그대들에게 전가(轉嫁)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대들은 거룩하신 대언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회개한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나와야 하며 자비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늘 아버지에게 나올 때에 당신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행하실 것을 믿어야 한다. 329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자들은 문을 두드리고 자비의 보좌에서 기다리며 확고한 보장을 가지고 “아, 주님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나이다”라고 말하라.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당신을 믿으므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갖기 원하신다.

주님께서는 가장 통속적이며 보편적인 사건을 인용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요구를 얼마나 기꺼이 들으시며 응답해 주시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하여 나타내 보여주시려고 애쓰셨다.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나타내는 육신적인 애정을 설명하심으로써 인간을 도우시려는 하나님의 자발적인 심령에 관하여 우리들에게 호소하셨다. 과연 어떤 아버지가 떡을 달라는 자기 아들의 요청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인가? 그 누구도 하나님을 마치 당신의 자녀들의 요청에 반응을 보이지 않으시는 분처럼 상상하므로 하나님께 욕을 돌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들은 과연 부모를 마치 자기 자녀에게 잔뜩 기대만을 안겨 주었다가 실망시킴으로써 자기 자녀를 희롱하며 애태우는 자로 생각해도 좋을 것인가? 어떤 아버지가 맛좋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그의 자녀에게 주기로 약속했다가 돌을 줄 것이란 말인가? 만약 그대들이 비록 악한 인간들일지라도 자기 자식들에게 좋은 선물들을 주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께 구하는 자들에게 더욱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을 것인가? 주님께서는 당신께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실 것을 보장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고 믿는 죄인의 자복을 당신 자신의 의와 혼합하시며 타락한 인간의 기도가 하늘 아버지 앞에 이르는 분향처럼 상달케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믿는 영혼에게 전가(轉嫁)되게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떨며 회개하는 영혼에게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사 27: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고 말씀하신다. 330 주님께서 그대들을 설득하도록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가? 그대들은 진실하신 창조주에게 그대들의 영혼을 보호해 달라고 주님께 맡기지 않을 것인가? 우리들은 다같이 나아가 주님의 얼굴의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할 것이며 마치 다윗처럼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 하고 기도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그대들을 눈보다 더 희게 해줄 수 있으므로 믿음으로써 그대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피를 바르라. 그러나 그대들은 “이처럼 나의 모든 우상들을 깨끗이 포기한다면 나의 마음은 찢어질 것이다”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마음의 자세를 신령하신 반석 위에 떨어져 부서지는 것으로 상징하였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라. 그대들이 부서지지 않는 한 그대들은 무가치한 자들이 될 것이다.

그대들이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렘 2:13)에서 돌아설 때, 그대들의 대언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나아와 그대들이 필요한 것들을 간구할 때, 그리스도의 의는 그대들의 의로 나타날 것이며 그리스도의 공로는 그대들의 공로로 나타날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그대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며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품성의 완전하심이 나타나 있고 주님의 생애 가운데 신성의 원칙들의 작용하심이 나타나 있다. 죄인은 그리스도의 대속하시는 피를 힘입음으로써만 속박과 신죄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오직 죄가 없으신 대치물과 담보물이 되시는 주님의 완전성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경주(競走)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인간은 언제나 율법의 정죄 밑에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서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

331 인간이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이 문제에 관하여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을는지 모르나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인간의 구원을 가능케 할 수 있으며 이 의는 하나님의 은사이다. 이 의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환영받을 손님으로서 나타날 때 입어야 할 예복이다. 지체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을 때에 그대들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이며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렘 23:6)시며 믿음을 통하여 각자는 “여호와는 나의 의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으로 이 하나님의 은사를 굳게 붙잡을 때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우리 입술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며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에 우리들은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구원의 계획에 관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세상이 죄의 저주 밑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는 타락하고 소망이 없는 죄인들에게 자비의 조건들을 제시하셨으며 당신의 은혜의 가치와 의미를 나타내 보이셨다. 은혜란 공로가 없이 받는 호의(好意)이다. 죄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천사들은 저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할지라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며 다만 우리들의 범죄한 상태만이 자비한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의 역사하심을 요구하게 된다. 332 우리 구세주께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들을 찾아나서시고 양우리로 다시 데려오신 것은 은혜로운 행위였다.

그대들의 영혼 속에 어떤 부족감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그대들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지 않은가? 만약 그러한 느낌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대들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필요성을 느끼게 하셨다는 증거이며 주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까닭은 그대들 스스로 할 수 없는 것들을 당신의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그대들을 위하여 행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내시기 위함이었다. 주님께서는 그대들이 주님의 자비를 갈급하고 주님의 권고를 바라며 주님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 외에 아무런 까다로운 조건을 명세(明細)하지 않으셨다. “구하라!” 구하는 태도는 그대들이 필요성을 깨닫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만약 그대들이 믿음으로 구한다면 구하는 바를 얻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약속하셨으며 그 약속은 어김이 없는 약속이다. 그대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아는 것만으로도 주님의 자비와 동정을 구할 수 있는 충분한 논증이 된다. 그대들이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조건은 그대들이 거룩하게 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대들이 모든 죄에서 정결함을 받고 모든 악에서 순결함을 입는 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더 기다릴 것인가? 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는가?

“오 주여, 당신께 이 몸을 바치나이다.

이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이옵니다.”

만약 사단이 와서 그대들과 하나님 사이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그대들의 죄를 비난하며 하나님과 그분의 자비를 불신하고 의심하도록 유혹한다면 그대들은 이렇게 말하라. “나는 나의 허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나 사이가 벌어지는 일을 용납할 수 없다. 하나님은 나의 능력이시다. 비록 나의 죄들이 많지마는 나의 거룩한 대치물이시며 희생 제물이신 예수님께 이 모든 죄들이 지워졌다.”

“내 손으로 가져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다만 나는 십자가에 매달릴 뿐이옵니다.”

인간은 아무도 자기 안에 있는 것이나 품성 가운데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자랑스럽게 천거할 수 있거나 하나님의 가납하심을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낼 수 없다. 오직 하늘 아버지께서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주신 바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통로를 발견할 수 있다. 오직 예수님께서만이 우리들의 구원자이시며 우리들의 대언자이시다. 중보자이신 주님 안에 사유하심과 화평과 의를 바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있다. 333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의 공로에 의해서 죄의 상처를 입은 영혼이 온전하게 회복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향기이시며 그대들의 탄원을 하늘 아버지께서 받으시게 하는 것은 거룩한 분향이다. 그 때에 그대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단 한 번의 탄원도 없이, 내 모습 그대로 나왔나이다.

그러나 주님의 피가 나를 위하여 흘려진 바 되었으니, 그리고 나를 당신께로 오라고 부르시므로, 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여, 나는 왔나이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일은 엄격한 정신적 노력이나 번민이 요구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에 밝히신 구원의 조건들을 수락하는 것이다. 축복은 모든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보내신 초청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1, 2)는 말씀이다.

그러면 와서 구하고 찾으라. 능력의 저장소는 공개되어 있으며 가득차 있고 값없이 얻을 수 있다. 겸비한 마음으로 나아오되 그대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한 공로를 세우기 위하여 어떤 선행을 쌓아야 한다거나 혹은 그리스도에게 나아오기 이전에 그대들 자신이 나아져야 하리라고 생각지 말 것이다. 그대들에게는 선을 행할 힘이 없으며 그대들의 상태를 개선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에게는 아무런 공로도 없으며 의도 없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흠 없으신 의를 옷 입지 않는 한 우리들의 죄상, 우리들의 연약성, 우리들의 인간적인 불완전성은 우리들로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가지고 주님 안에 거하여야 한다. 그리할 때에 모든 이름보다도 뛰어나고 인간에게 주신 이름 중에서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허락들을 주장하면서 “주님,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는 당신의 도움을 얻기 위하여 당신의 손을 붙잡나이다. 당신의 손을 붙잡지 않으면 저는 멸망할 것이옵니다. 저는 지금 믿사옵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334 구세주께서는 회개한 죄인에게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나는 네 구원이라”(시 35:3)고 말씀하신다.

그대들이 그리스도의 이끄심에 호응하고 그대들 자신을 주님께 연합할 때 그대들은 구원하는 믿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종교적인 사물들에 대하여 부주의한 태도로 말하고 진정한 영혼의 굶주림과 산 믿음이 없이 신령한 축복을 받기 위하여 기도한다면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할 것이다. 호기심에 찬 군중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접근해 있었으나 저들은 접촉에서 오는 아무런 강한 능력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나 12년 동안 병 중에 있던 불쌍하고 괴로워하는 여인이 간절한 필요를 느끼고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그 여인은 치유의 능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여인이 만진 것은 믿음의 접촉이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손을 댄 자가 있는 것을 아셨다. 주님께서는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셨으며 따르는 무리를 돌아보시고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눅 8:45)고 물으셨다. 그 질문에 놀란 제자들은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눅 8:45-48). 그리스도와 더불어 산 접촉을 가지므로 유익을 얻게 하는 믿음은 우리들에게 지상(至上)의 선택과 완전한 신뢰와 전적인 헌신을 나타내게 한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이 믿음이야말로 영혼을 순결케 한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참된 순종을 보이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의 생애 가운데서 역사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게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와 산 연합을 이루는 결과로서 생기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롬 8:9)다.

예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요 15:5)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내포된 뜻보다 더욱 밀접한 관계를 생각할 수 있을까? 가지의 섬유질은 포도나무의 섬유질과 동질의 것이다. 원줄기에서 가지에 이르는 생명과 힘과 영양의 유통은 막을 수 없는 것이며 지속적인 것이다. 335 뿌리에서 공급하는 영양소는 모든 가지에 이른다. 만약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주님에게서 영양소를 공급 받는다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가져야 할 신자의 마땅한 관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영혼 사이의 영적 관계는 오직 개인적 신앙을 통해서만 성립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히 11:6)한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만이 우리들을 하늘의 능력과 연결케하며 흑암의 권세 잡은 자들과 대항하여 싸우는 싸움을 위하여 능력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임재하심에 관하여 영혼으로 쉽게 깨닫게 하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여 그의 생애를 유지하게 한다. 따라서 믿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의 품성의 아름다움과 은혜의 탁월성을 밝히 식별하게 한다. 믿음이 있는 영혼은 천국의 분위기에서 호흡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우편에 계시므로 우리들이 요동치 않게 될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들은 세속에서 벗어나게 되며 만유의 으뜸이 되시며 온전히 사랑스러우신 주님을 바라보게 되며 주님을 바라보는 생애를 통하여 우리들은 당신의 형상으로 화하게 된다.

336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인간의 마음을 거듭나게 하고 영혼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젖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거룩한 능력밖에 없으며 그 능력은 주님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영혼들에게 언제나 사랑을 나타낸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회개할 때에 그에게 새로운 도덕적인 감각이 생기게 되고 새로운 동기의 힘이 주어지며 그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물들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의 생애는 예수님의 생명에 이르는 불변의 약속들의 금사슬로 묶이게 될 것이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형언할 수 없는 감사함이 그의 영혼 안에 충만하게 될 것이며 축복을 받은 자의 언어는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시 18:35)라고 찬양할 것이다.

그러나 죄를 이기려는 저들 자신의 결정적인 노력이 없이 요행을 따라 품성이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자들은 실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이 예수님만 바라본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주님께 나오는 모든 영혼들을 모두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337 우리들이 끊임없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로지 우리들의 옛 성품이 다시 지배권을 얻어 사단이 우리들을 그의 포로가 될 올무들을 펴는 일이다. 우리들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며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므로(빌 2:13 참고) 우리들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들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역 안에서 거룩하심같이 우리들 자신의 영역 안에서 우리들의 제한된 능력으로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들의 능력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우리들은 진리와 사랑과 거룩한 품성의 탁월성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밀초로 인장을 찍는 것처럼 영혼은 하나님의 영의 인을 받게 되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게 된다.

우리들은 매일 영적 사랑스러움 안에서 자라나야 한다. 우리들은 때때로 거룩하신 모본을 닮는 노력에 있어서 실패하게 될 것이다. 또한 때때로 우리들의 허물들과 실수로 인하여 예수님의 발 아래 꿇어 엎드려 눈물을 흘릴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실망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전보다 더욱 열심히 기도하여야 하며 더욱 든든히 믿어야 하고 우리 주님을 닮는 일에 성장하기 위하여 더욱 강한 견인성을 가지고 또다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이 자신의 능력을 불신하게 될 때에 우리 구세주의 능력을 의존하게 될 것이며 우리 힘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구세주를 찬양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사랑이 있다. 우리들이 아무리 다른 열매들을 많이 맺는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 열매들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리 신앙의 근본적인 본질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는 자는 그분의 자녀들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때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갖게 된다. 순결함과 사랑이 품성을 빛나게 할 것이며 온유함과 진리가 생애를 주관하게 될 것이다. 얼굴의 표정 자체도 변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영혼 안에 거하실 때에 변화케 하시는 능력을 발휘할 것이며 그의 외모에도 마음 속에 있는 화평과 기쁨을 증거하는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우리들은 마치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영양소를 흡수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시게 된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게 되고 산 포도나무가 되시는 주심과 연합함으로 섬유질로 이어질 때 우리들은 풍성한 산 열매로서 그 사실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빛과 연결될 때 우리들은 빛의 통로가 될 것이며 우리들의 말과 행실로써 세상의 빛을 반사하게 될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땅을 하늘에 잇는 사랑의 줄로 묶이게 될 것이며 유한한 인간을 무한하신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사랑의 줄로 결박될 것이다. 338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취는 빛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마음에도 비췰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들은 바라봄으로 변하게 된다. 거룩한 모본이신 주님의 완전하심을 명상할 때에 우리들은 완전한 변화를 입으려는 욕망을 품게 될 것이며 주님의 순결하신 형상을 따라 새로 지음을 입게 될 것이다. 품성의 변화가 이루어지며 진노의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때문인 것이다.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나가게 되며 신령하게 되어 신령한 사물들을 분별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의 정신을 일깨워 주며 하나님의 율법의 기이한 이치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사람이 진리로 말미암아 회개하게 될 때에 품성이 변화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또한 그에게는 이해력이 크게 증가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며 그리스도의 정신을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삼게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성령의 지도하심에 전적으로 맡길 때에 그의 정신이 확장되고 계발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 가운데서 편벽되지 않고 결함이 없는 교육을 받게 될 것이며 오직 균형과 완전을 추구하는 계발된 품성을 갖게 될 것이다. 흔들리는 의지와 무기력한 품성에 나타나는 유약성은 극복하게 되고 계속적인 헌신과 경건의 생애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하므로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게 한다.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건전한 정신과 원칙적인 사상을 갖게 된다. 그의 식별력은 투철하고 하나님에게서 오는 지혜를 나타내게 된다. 야고보는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 3:13).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 18)고 말하였다. 이러한 지혜야말로 구원의 잔을 받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지혜일 것이다. 339 죄를 범한 자에게 사유하심을 주는 이 구원은 그에게 전능하신 주님의 엄밀한 검사를 받게 될 의를 나타낼 것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강한 원수를 이기는 승리를 안겨 주고 구원을 받는 자를 위하여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주며 따라서 이 구원은 기별을 듣고 기뻐하는 겸손한 자에게 즐거움의 주제가 될 것이다.

목자가 아흔 아흡 마리를 버려두고 잃어버린 단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하여 나선 잃어버린 양에 대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비유는 그리스도의 사업과 죄인의 상태와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온 우주가 기뻐하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목자는 양 무리에 대하여 방관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으며, “나에게 아흔 아흡 마리가 있는데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하여 나선다는 것은 너무나 골치 아픈 일이다. 내버려두면 혼자 돌아올 터이므로 양 우리의 문만 열어 두면 언젠가는 들어올 테지 …그러나 내가 나서서 그 놈을 찾을 수는 없어”라고 말하지 않았다. 목자는 결코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없었다.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린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목자의 얼굴에는 슬픔과 근심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는 양의 수를 세고 또 세보며 확실히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될 때에 그는 편히 쉴 수 없다. 그는 아흔 아홉 마리를 양우리에 남겨두고 아무리 그 밤이 캄캄하고 격렬한 광풍이 불지라도, 그의 갈 길이 아무리 위험하고 사나울지라도, 그의 수고가 아무리 지루하고 고달픈 것일지라도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그는 지칠 줄 모르고 뒤로 물어서지 않는다. 그가 잃었던 양을 찾게 되었을 때에 지치고 기진맥진한 양을 자기 어깨에 메고 그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몹시 기뻐하고 감사하며 즐거운 노래를 부르며 돌아와서 그의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눅 15:6)고 말할 것이다. 이처럼 위대하신 목자께서 죄 가운데서 방황하는 죄인을 찾게 되었을 때에 하늘의 천사들은 목자의 즐거운 노래에 화답할 것이다. 잃어버린 자를 찾았을 때에 하늘과 땅은 감사와 기쁨으로 연합하게 된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340 공의는 단순히 사유함을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형언도를 집행하도록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은사로 허락하심으로 이 두 가지 요구에 대처하셨다.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형벌을 그치게 하셨고 용서의 길을 터놓으셨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끓어졌다. 인간의 영혼은 죄의 창시자인 사단의 음모로 인하여 마비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만 가지고서는 죄를 깨달을 힘조차 없으며 거룩한 성품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삼는 길을 찾을 수 없다. 비록 자신이 미칠 수 있는 범위 내에 거룩한 성품이 있을지라도 그의 육신에 속한 마음은 거룩한 성품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사단의 매혹적인 세력이 그를 지배하게 된다. 마귀는 모든 정교한 속임수를 꾸며내어 인간의 모든 선한 동기를 저지시키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바 모든 재능과 능력은 거룩한 혜택자이신 하나님을 대항하는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비록 인간을 사랑하실지라도 당신께서 주시기 원하시는 모든 은사와 축복을 마음놓고 베풀어 주실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패배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인간의 형체와 성품을 취하게 하셨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결합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도덕적인 가치를 다루시는 저울에 인간을 높이 올려 놓으시려고 하셨다.

341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다른 방도는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요 15:5)다고 말씀하셨다.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통하여서 생명의 샘이 인간의 성품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으며 그의 체험들을 새롭게 해주고 그의 애정이 하늘로 향하여 흐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신성이 인성과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지식을 밝혀 주실 수 있었으며 죄와 허물로 죽은 영혼에게 생명을 주시는 특성을 불어넣어 주실 수 있다.

인간의 정신이 갈바리의 십자가에 이끌리게 될 때에 불완전한 안목으로 보면 그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과연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실 수 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죄의 결과 때문이었다. 그러면 죄란 무엇인가?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칠 때에 인간의 눈은 죄의 특성을 밝히 보게 된다. 비록 율법은 깨어진 바 되나 죄를 범한자를 용서할 수는 없다. 율법은 우리들의 몽학 선생이며 형벌을 받도록 정죄한다. 그러면 이에 대한 구제책은 어디에 있는가? 율법은 타락하고 죄지은 인간에게 당신의 의를 나누어주시며 당신의 의로운 품성을 통하여 하늘 아버지를 인간에게 나타내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게로 우리를 인도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과 먼저 회개케 하신 자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하나님께 회개하도록 이끄실 뿐만 아니라 공의를 만족시키셨으며 당신 자신을 대속물로 바치셨다. 주님의 흘리신 피와 상처를 입으신 몸은 깨어진 바 된 율법의 요구들을 만족시킴으로써 죄가 만들어 놓은 웅덩이를 메꾸어 놓으셨다. 주님께서는 무방비 상태의 죄인을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육신으로 고난을 받으셨고 당신의 몸에 상처를 입게 되었으며 그 몸이 부서졌다. 갈바리에서 당신의 죽으심으로 얻으신 승리는 온 우주에 미친 사단의 비난하는 세력을 영원히 박멸하였으며 하나님께는 자제함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인간에게도 본질적으로 자제력이 없다고 한 사단의 비난들을 잠잠케 하였다.

천국에서의 사단의 지위는 하나님의 아들의 다음가는 것이었다. 그는 천사들 중에 으뜸이었다. 사단의 세력은 자신의 품위를 저하시켰으나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세력의 정체를 나타내실 수 없었으며 따라서 사단과 그의 악한 감화력들을 제거함으로써 온 하늘의 조화를 유지할 수도 없으셨다. 사단의 세력은 점점 증가하였으나 그 악한 본질은 아직도 노출되지 않았다. 그의 세력은 온 우주에 있어서 치명적인 것이었으며 세계들과 하늘 정부의 안전을 위협하는 세력이었으므로 그 전체가 점점 노출되어 그 진상이 드러날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342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입히고 그 몸이 부서지게 하고 갈바리의 십자가에 매달리게까지 자신의 적의(敵意)를 그리스도에게 행사함으로써 사단은 자기 자신을 우주의 애정으로부터 완전히 근절시켜 버렸다.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극기하신 것과 인류를 사랑하셨으므로 세상의 죄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주셨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일 수 있게 되었다. 창조주께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 안에 나타내신 바 되었다. “하나님의 극기하심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이 질문에 대하여 영원한 답변이 제공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셨으며 육신을 쓰시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셨고 무한한 희생을 치루시기 위하여 인성을 취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비록 사단은 온갖 시험으로 주님을 유혹하려고 노력을 기울였을지라도 인간으로서 치를 수 있는 희생은 어떤 것이든지 참고 치르셨다. 유혹이 강하면 강할수록 주님의 희생 역시 더욱더 완전한 것이었다. 사단과의 투쟁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인성과 신성이 합한 능력으로 이길 수 있었던 모든 것이 인간에게도 가능하였다. 순종적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죄가 없으셨던 주님은 인간이 거룩한 품성의 참여자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대치물과 담보물로서 인간을 위해 죽으셨고 인간이 기만하는 유혹자에게서 받아야 할 모든 시험을 이기셨다.

진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하며 그리스도처럼 생명까지라도 바치기를 서슴치 않는 자에게 있어서 순결한 진리는 거짓된 것과 완전한 대조가 되며 정직성과 성실성은 교활성과 음모에 필적하는 것임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사단의 욕망을 물리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투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한 성품을 고수하는 일이 요구되며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사단을 물리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바리의 십자가상에서 당신 자신의 죽으심으로 쟁취하신 승리를 통하여 인류를 위한 길을 트셨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셨다. 그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리스도의 의는 죄인이 받아들일 때에 거저 주시는 은사로서 상징되었다. 인간은 순결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몹시 불쾌감을 주는 더럽고 타락한 것과 죄로 오염된 것 외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품성을 통해서만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343 그리스도께서는 휘장 안에 계신 대제사장으로서 갈바리를 영원하게 하시므로 당신 자신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사시고 죄에 대하여는 계속적으로 죽으신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면 하늘 아버지께 대하여 대변해 주실 분을 갖게 된다.

주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기이한 권능과 영광 가운데서 허다한 천사들에게 옹위되어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주님께서는 사단이 자신의 합법적인 영토로 주장하고 있는 이 세상을 당신의 손에 쥐셨으며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신 놀라운 사업을 통해서 온 인류가 하나님의 은총을 얻도록 회복하셨다. … 아무도 인간의 어떤 공적이 자신이 지은 죄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제한되고 편협한 견해를 주장하지 말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치명적인 기만이다. 만약 그대들이 이 뜻을 이해하려면 그대들은 반드시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언쟁하는 일을 그쳐야 할 것이며 겸손한 마음으로 대속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문제를 밝히 깨닫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수천 수만의 영혼들이 저들 자신의 행함을 의존함으로 마귀의 자녀들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선한 행실을 요구하셨고 율법 역시 선한 행실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스스로 자신의 선행이 전혀 무가치한 죄 가운데 처하므로 오직 예수님의 의만이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중보하시기 위하여 항상 살아 계시므로 모든 영혼을 구원하실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오로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는 초청을 수락하는 일뿐이다. 인간이 범하는 어떤 죄든지 갈바리에서 만족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열렬한 호소로서 계속적으로 죄인에게 철저한 속죄를 제공하고 있다.

그대들이 갈바리의 십자가에 가까이 나아갈 때에 그곳에서 비할 데 없는 사랑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들이 믿음을 가지고 희생의 의미를 깨닫게 될 때에 그대들 자신이 깨어진 바 된 율법으로 정죄를 받은 죄인임을 알게 된다. 바로 이것이 회개이다. 그대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갈 때에 사유하심을 얻게 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속적으로 단 앞에 서 계셔서 간단없이 세상의 죄를 위하여 희생 제물을 바치는 자로 상징되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치지 않고 주님께서 치신 참 성전에서 봉사하시는 분이시다. 344 유대인의 성막의 상징적인 그림자는 지금에 와서 아무런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하다. 날마다 드리는 것과 해마다 드리는 상징적인 속죄는 이 이상 더 드릴 필요가 없으나 끊임없는 범죄로 말미암아 중재자를 통하여 속죄 제물을 바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의식을 집행하고 계시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셨던 것처럼 당신의 흘리신 피를 바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모든 범죄와 모든 사소한 실수를 위해서 희생 제물을 바치고 계신다.

우리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중재하고 계시는데 성령께서는 태초로부터 흘리신 당신의 피를 바치는 그리스도처럼 우리들을 위하여 탄원하시지 않으시며 우리들의 심령에 역사하셔서 우리들의 기도와 참회를 자아내며 찬송과 감사를 불러일으키신다. 우리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감사의 표현은 성령께서 거룩하신 기억력으로 영혼의 심금을 울려 마음의 음악을 상기시킨 결과이다.

참된 신자가 드리는 종교적 의식, 기도, 찬송 및 죄의 자복은 분향처럼 하늘 성전으로 올라가기는 하나 그것들이 인간의 타락한 통로를 통과하므로 피로 정결함을 입지 않는 한 더러워져서 결코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이 되지 못한다. 흠없는 순결성으로 드리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며 모든 것을 당신의 의로써 나타내시고 순결케 하시는 중보자가 없이는 하나님께 받으시는 바 되지 못한다. 이 지상 성막에서 피우는 모든 분향은 그리스도의 깨끗케 하시는 핏방울에 젖어야 한다. 하늘 아버지 앞에서 당신 자신의 공로를 담은 향로를 들고 계시는데 그 가운데는 세상의 썩어질 것으로 더러워진 것은 하나도 없다. 주님께서는 이 향로 안에 성도의 기도와 찬송과 자복을 모아 담으시며 이 가운데 당신 자신의 흠없는 의를 담으신다. 그렇게 할 때에 그리스도의 화목 제물의 공로로서 향기를 풍기며 하나님 앞에 분향할 때에 전체적으로 완전히 받으시는 바 된다. 또한 그 때에 은혜로운 응답이 내리게 된다.

아, 순종과 회개와 찬송과 감사로 드리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의의 달아오른 불 앞에 놓여져야 한다는 것을 모든 영혼이 깨닫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이 의의 향기는 자비의 보좌를 둘러싼 구름처럼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345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교훈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그리스도의 교훈과 완전히 일치한다. 사도들이 신약 시대에 주님의 기별을 전한 것만큼 선지자들도 구약 시대에 그리스도의 사자들을 통하여 말하였으며 저들의 교훈 가운데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사단은 지금껏 활동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무력하게 하기 위하여 불의한 모든 속임수로 아직도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그는 단순하고 분명한 것을 마치 신비한 것처럼 꾸며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일에 노련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고 있으며 그의 교활한 계책으로 세상을 사로잡고 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력하게 만듦으로써였다. 아담은 사단의 거짓말을 믿었으며 하나님의 품성을 그릇되게 나타내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감으로 아담의 생애는 변화되었고 망쳐진 바 되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였으며 주님께서 그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바로 그 일을 행하였다. 아담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타락하였다. 그러나 만약 그가 시험을 견디고 하나님께 충성하였다면 이 세상에 재앙의 수문(水門)이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346 하나님에 대한 사단의 오전(誤傳)을 믿으므로 말미암아 인간의 품성과 운명이 변화되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저들은 정신과 품성이 변화될 것이며 영생을 얻기에 합당한 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말씀을 믿는 것은 곧 마음을 변화케 하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재현시킬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바울도(회개 이전에) 유전적인 경건성에 매우 독선적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자부심이 거짓된 것임이 드러났다. 그것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믿음이었으며 그는 형식과 의식을 신뢰하였다. 율법을 위한 그의 열정은 그리스도에게서 분리시켰으며 그 열정은 전혀 무가치한 것이었다. 그는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볼 때에 아무런 흠이 없었다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율법을 가치 있게 만드신 그리스도를 부인하였다. 그는 자기가 옳았다고 자신 만만해 하였다. 바울은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행 26:9, 10)다고 말하였다. 바울은 한동안 매우 잔인한 일을 하면서 자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는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딤전 1:13)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의 성실성이 그의 행실을 정당화하지 못하였으며 오류를 진리로 만들지 못하였다.

믿음은 진리나 혹은 오류가 마음 속에서 거처를 잡을 수 있게 해 주는 매개물이다. 진리나 혹은 오류를 받아들이는 정신적인 작용은 동일한 것이지만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지 혹은 인간의 유전들을 믿는지에 따라 결정적인 차이가 생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바울에게 나타내셨을 때 그는 자기가 주님의 성도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핍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는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받아들였다. 변화케 하시는 한 능력이 그의 정신과 품성에 나타났으며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 바울은 진리를 완전히 받았으므로 이 세상이나 지옥도 그의 믿음을 흔들 수 없었다.

347 “믿어라 다만 믿기만 하면 된다”고 부르짖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대들이 무엇을 믿어야 할는지 저들에게 물어보라. 그대들이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율법에 대하여 사단이 꾸며낸 거짓말들을 믿어야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율법을 무력하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위대하고 보배로운 은혜를 사용치 않으시며 오히려 당신의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하여 그 은혜를 사용하신다. 과연 바울은 어떠한 결정을 내렸는가? 그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그러면 계명이 폐하였는가?-결코 그렇지 않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나의 자유와 평화를 직접적으로 가로막는 것이 되는가?-결코 아니다.]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7-12)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율법 가운데 율법을 범한 자를 용서할 권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 4).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타락한 상태를 아셨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을 아셨으며 우리 영혼들을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셨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와 버림받은 자에게 베푸는 진정한 호의(好意)를 뜻한다. 우리들이 죄인이어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버리는 대신에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행사하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구원을 받음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요 15:16) 였다고 말씀하셨다.

아담이 타락하였을 때에 그의 회복을 위한 섭리가 마련되었다. 때가 이르러 생명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흑암의 권세와 싸우시기 위하여 우리들의 세상에 오셨다. 이 세상에서 사단은 모든 율법과 그리스도에게서 떠난 자기의 원칙을 수행한 결과가 어떠함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며,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아버지의 계명에 대한 변치 않는 당신의 순종심을 보이시므로 의의 원칙을 실행한 결과가 어떠함을 나타내 보이셨다. 348 사단은 악의 원칙을 따라서 극렬한 시험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을 괴롭혔으며 드디어 주님을 법정으로 끌고가 정당한 이유가 없이 사망의 선고를 받게 하였다. 악의 동맹한 세력은 악의 원칙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을 선동시켰다. 군중들 앞에 그리스도와 바나바를 내세웠다. 바나바는 유명한 절도자요 살인자였으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빌라도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으며 그는 쉽사리 예수를 선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예수님의 용모에는 고결하심과 지능과 순결하신 표적이 밝히 드러나 있었으며, 현저한 대조로서 바나바의 모습은 야비한 표정을 나타내 보였다. 빌라도는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마 27:21)라고 물어보았다. 그 때에 격분한 군중들의 사나운 울부짖음이 들렸는데 “바나바로소이다”라고 외쳤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마 27:22, 23).

이 선택 가운데서 사단의 사상이 노출되었다. 하늘의 천군 천사들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들은 사단을 형제를 비난하는 자, 거짓말장이 또는 살인자로서 판단하였다. 천국과 타락하지 않은 세계에서는 사단의 기만적인 세력과 그의 악독한 원칙들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었으며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시험과 시련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결과 거룩하심이 영원히 증명되었다. 사단의 품성과 사상이 발전함에 따라 그는 타락하지 않은 세계 주민들의 애정에서 영원히 근절되었으며 사단의 주장과 그리스도의 주장에 관한 투쟁은 하늘에서 영원히 종결되었다. 그리스도의 품성에 나타난 의는 영원토록 세상 사람들의 닻이 되며 구원의 소망이 되었다.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모든 영혼은 믿음으로 “여호와는 나의 의”라고 말할 수 있다.

349 그리스도께서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3-5).

그리스도의 의와 하나님의 율법은 분리할 수 없다. 예수님 안에서 자비와 진리는 서로 만나며 의와 화평은 서로 입맞춘다. 주님의 생애와 품성으로서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을 알려주고 있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을 대표하신 분이었으며 인류의 모본이시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믿음과 신성이 연합할 때에 인간이 어떻게 될 수 있는가를 온 세상에 증거해 보이셨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친히 인간의 성품을 취하셨고 이세상과 하늘 사이에 당신의 십자가를 세우셨다. 이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십자가에서 공의가 만족함을 입었으므로 공의는 그 높고 두려운 위치에서 내려왔으며 하늘의 천군 천사들과 거룩한 무리들은 십자가에 가까이 이르러 경건하게 머리를 숙였다.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죄인은 죄의 본거지로부터 떠날 수 있으며 악의 동맹한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고 매번 십자가에 접근할 때마다 그의 심령은 순화(純花)되고 그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나의 죄였다”고 외치게 될 것이다. 그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죄들을 버리게 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그의 품성이 변화된다. 구세주께서는 죄인을 티끌에서 일으키사 성령의 지도 밑에 두신다. 죄인이 구세주를 바라볼 때 그는 소망과 보장과 기쁨을 찾게 된다. 믿음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는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영혼을 순결케 한다.

350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죄를 자백하고 당신 앞에서 우리들의 심령을 겸비하게 가지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저버리지 않을 친절하신 하늘 아버지처럼 주님을 신뢰하여야 한다. 우리들의 대부분은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며 믿음으로 행치 않는다.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은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우리들에게 주신 귀중한 허락들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불신하며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진심을 보이시는지 아니면 우리들을 속이시는지, 의심하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하나님께 더 욕돌리는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죄로 인해서 우리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들이 혹 실수를 범하고 성령을 슬프시게 할 수 있으나 우리들이 회개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당신께 나아갈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물리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버려야 할 장애물들이 있다. 그릇된 감정들을 품고 있었으며 교만, 자만심, 조급함 및 불평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우리들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한다. 죄들은 자복해야만 하며 심령 가운데 은혜의 깊은 역사하심이 있어야 한다. 351 스스로 연약하다고 느끼고 실망했던 자들이 하나님의 강한 사람들이 될 것이며 주님을 위하여 고귀한 사업을 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고상한 표준을 세우고 일해야 하며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워야 한다. 주님의 의 외에 다른 아무것도, 은혜의 축복 가운데 있는 단 한 가지도 우리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이러한 축복들을 얻으려고 바랐으며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러한 축복들로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도모하려는 사상을 품고 있으므로 축복들을 받지 못하였다. 우리들은 예수께서 살아계신 구세주이심을 믿음으로 우리들 자신만을 돌보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은혜와 공로가 우리들을 구원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들의 유일한 구원의 소망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를 통하여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고 약속하셨다. 우리들은 적나라(赤裸裸)한 허락들을 믿어야 하며 감정을 믿음으로 잘못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구세주로서 예수님의 공로를 의뢰할 때 우리들은 우리가 소망하는 모든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마치 우리들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나 있듯이 자신을 바라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자기 자신을 구원할 아무 능력이 없으므로 우리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우리들의 소망과 우리들의 공의와 우리들의 의는 모두 주님 안에 있다. 우리들은 마치 우리들에게 구세주가 계시지 않거나 또한 우리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지 않으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낙담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한 당신의 사업을 수행하고 계시며 우리들의 무식한 상태 그대로 당신께 나아와 구원받도록 초청하신다. 우리들은 불신으로 인해서 주님께 욕돌리게 된다. 모든 영혼들을 구원하실 수 있으시고 우리들에게 당신의 위대하신 사랑에 대한 모든 증거를 주신 주님께 대하여 우리들의 믿음이 얼마나 적으며 우리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시는 주님을 취급하는 우리들의 태도를 볼 때에 얼마나 놀라운지 알 수 없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공로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하는 길잡이가 되기를 바라면서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믿기도 전에 죄에서 해방되기를 기대하는가? 만약 그대들의 마음 가운데 이러한 투쟁이 있다면 그대들은 아무런 힘도 얻지 못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실망하게 되고 말 것이다.

352 광야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 배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독사에게 물리는 것을 허락하셨으며 모세에게 구리 뱀을 높은 장대에 매달아 뱀에 물린 사람들이 그 구리 뱀을 바라보고 살도록 지시하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하늘이 제정해 준 이 치료제에서 아무런 도움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미 죽은 자들과 죽어가고 있는 자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으며 저들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저들의 운명이 틀림없이 종말을 고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들은 저희 힘이 다 빠지고 눈이 완전히 흐려질 때까지 금방 나을 수 있는 치유제가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상처만을 비탄하며 고통과 확실한 죽음에 대하여 슬퍼하고만 있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 15). 만약 그대들이 자신의 죄들을 의식한다면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일에만 모든 기력을 다 바칠 것이 아니라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주님의 공로를 의지하는 자는 단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으련만 치유를 받아야 할 수백 수천에 달하는 인류는 주님께서 주신 자비를 거부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우리들이 얼마나 무력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지를 인식할지라도 우리들은 실망하지 말 것이며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구세주에게 의뢰해야만 한다. 불쌍하고 죄로 병들었으며 실망한 영혼들이여, 바라보고 살라.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나오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약속하셨다.

예수님께 나아와 휴식과 평안을 얻으라. 그대들은 바로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단은 그대들이 무력한 존재이며 축복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유혹한다. 그대들이 무력한 존재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단의 앞에서 예수님만을 쳐다보며 “나에게는 부활하신 구세주가 계시다. 주님께서는 결코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 고난을 주지 않으실 것이다. 나는 주님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 예수님은 나의 의시며 나의 기쁨의 면류관이시다” 라고 말하라. 이 세상의 아무도 절망 가운데 있지 않으므로 자신의 경우만은 소망이 없다는 생각을 하지 말 것이다. 그대들은 자신이 죄인이며 타락한 인간임을 깨닫게 될지라도 이것은 다만 그대들에게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줄 뿐이다. 만약 그대들에게 자복할 죄가 있다면 시간을 놓치지 말라. 이러한 순간들은 황금과 같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의에 주린 자는 배불림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다. 353 아, 얼마나 고귀한 구세주이신가? 주님의 크신 팔은 우리들을 영접하시기 위하여 활짝 벌려 있으며 주님의 위대하신 사랑의 마음은 우리들은 축복하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신다.

어떤 사람들은, 저들은 반드시 집행 유예 기간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요구할 수 있기 이전에 저들 자신이 개심했다는 사실을 주님께 증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스러운 영혼들은 바로 지금 축복을 주장할 수 있다. 저들은 주님의 은혜 곧 저들의 연약함을 보충해 주실 수 있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져야만 하며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 저들은 그리스도의 품성을 형성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죄 있고 무력하며 의존해야 할 상태 그대로를 가지고 당신께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회개는 용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들이 죄를 깨닫게 하고 용서의 필요를 느끼게 하는 것은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는 것이다. 통회하는 자만이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에 회개를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연약함과 약점들을 잘 알고 계시므로 우리들을 분명히 도우실 것이다.

회개와 자복으로 하나님께 나오고 저희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아직 하나님의 허락들을 마땅히 주장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예수님께서 항상 존재하여 계시는 구세주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저들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지 않으며 저희 마음 가운데 완전케하는 은혜의 역사가 시작되도록 의탁하지 않는다. 비록 저들은 생각으로는 자신들을 하나님께 맡겼다고 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자기를 신뢰하는 경향이 많다.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또 다른 부분으로는 저들 자신을 신뢰하는 양심적인 영혼들이 있다. 저들은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받기 위하여 바라보지 않고 다만 시험 거리만을 살피며 주님의 가납하심을 받기 위한 의무 수행만을 의존한다. 이러한 종류의 믿음에는 승리가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자들은 목적이 없는 고달픈 수고만을 할 뿐이다. 저들의 영혼은 계속적으로 속박 가운데 있으며 저들의 무거운 짐을 예수님의 발 앞에 내려놓을 때까지 쉼을 얻지 못한다.

끊임없는 징계와 열렬하고 사랑스러운 헌신을 할 필요가 있기는 하나 이것들은 영혼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을 받게 될 때에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힘으로 거룩한 은총을 얻기 위하여 결단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들은 전혀 우리들 자신이나 우리들의 선한 행실을 의존해서는 안 된다. 354 그러나 우리들이 실수를 저지르고 죄 있는 존재로서 그리스도께 나올 때 우리들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쉼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의 공로를 전적으로 믿고 당신께 나오는 모든 자들을 받으실 것이다. 저들의 마음에는 사랑이 용솟음칠 것이다. 거기에는 환상적인 감각이 없을 것이며 다만 영속적이며 평화스러운 신뢰심이 있을 따름이다. 모든 멍에는 가벼우며 그리스도께서 메워주시는 멍에는 쉽다. 의무는 즐거움이 되고 희생은 유쾌한 것이 될 것이다. 흑암에 싸인 듯이 보였던 길은 의의 태양이신 주님께서 비취는 빛으로 말미암아 밝아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빛 가운데서 행하는 생애이다.

355 캔사스 주에서 열린 집회에서 하나님께 올린 나의 기도는 원수의 세력이 깨어져 흑암에 있던 백성들이 저희 마음과 정신을 활짝 열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주시는 기별을 받아들일 때에 새로운 체계 가운데 있는 옛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며 많은 자들에게 새로운 진리처럼 들리도록 간구하는 것이었다. 사단이 하나님의 품성을 오전(誤傳) 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의 이해력은 흐려지게 되었다. 우리들의 선하시고 은혜스러우신 주님께서 마치 사단의 속성들을 지니신 분처럼 백성들 앞에 증거되었으며 진리를 탐구해오던 남녀들은 오랫동안 거짓된 빛 가운데서 하나님을 생각하여 왔으므로 저들의 시야에서 주님의 영광을 가리운 구름을 쫓아버리기 힘들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의혹의 분위기에서 살아왔으며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서 저들 앞에 놓여진 소망을 굳게 붙잡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안식일에, 그 집회에 참석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진리들이 증거되었다. 새로운 것들과 옛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보물 창고에서 출하되었다. 356 그 당시 백성으로서 거의 이해할 수 없고 적절히 적용할 수 없는 진리들이 증거되었다. 율법과 복음에 관련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의가 되신다는 뜻에 관련된 빛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취일 때 진리에 굶주린 영혼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보배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안식일에 기울인 수고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일요일 아침에 하나님의 영께서 그곳에 모인 자들의 도덕적 및 영적 상태에 큰 변화를 일으키시는 역사를 하신다는 뚜렷한 증거가 나타났다. 하나님께 마음과 정성을 굴복시키고 오랫동안 흑암 속에 있던 자들이 귀중한 간증들을 하는 일이 있었다. 한 형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복음을 받아들이기 이전에 그가 마음에 체험한 심적 투쟁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 투쟁은 매우 극렬한 것이었으나 주님께서 그와 함께 일하셨으므로 그의 마음은 변화되었고 그의 능력은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분명한 윤곽으로 그에게 진리를 나타내 보여 주셨으며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모든 소망과 구원의 근본이 되신다는 사실을 증거해 보이셨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4, 14).

목회하는 우리 젊은 형제 중의 하나는 이번 집회를 통해서 자기가 이전에 받은 축복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또 다른 형제는 과거에 자기가 정신적으로 겪어야 할 시련들과 혼란과 투쟁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극심한 것이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얻지 못하고서는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처럼 느꼈으며 이번 집회를 통해서 마음의 변화를 체험했으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하여 좀더 밝은 지식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자신의 특권이었음을 깨달았으며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함을 얻었고 자기의 영혼에게 부어 주신 위로와 축복이 얼마나 컸다는 사실을 눈물을 흘리며 자복하였다. 사교적인 집회가 있을 때마다 많은 간증들이 있었으며 신자들은 빛을 받음으로 화평과 위로와 기쁨을 찾을 수 있었다.

357 우리들은 백성들 앞에 증거할 수 있는 귀중한 빛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전심으로 주님께 감사하였으며 이 시대를 위하여 현대 진리인 기별을 가지고 있는 사실을 기뻐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의가 되신다는 기별은 실로 많은 영혼들에게 안도감을 주었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전진하라”고 말씀하셨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기별은 우리들의 현 실태에 적절한 것이다. 이에 묘사된 말씀이야말로 저들의 생애에 거룩케 하는 능력을 맛보지 못한 자들이 모든 진리를 가졌노라고 자긍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저들의 지식을 자랑하는 교만한 태도를 밝히 나타내주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이 저의 마음에 결핍되고 있는 바 이 사랑의 열정이야말로 세상의 빛이 되게 하는 것이다.

충성된 증인은 냉담하고 생기가 없으며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5, 16)고 하셨다. 다음의 말씀을 유의하여 보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바로 여기에 영적 지식과 우월성을 가졌노라고 자랑하는 한 백성이 상징되었다. 그런데 저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베풀어주신 과분한 축복에 대하여 전혀 반응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저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거역하는 정신과 감사치않는 마음과 망각하는 태도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마치 사랑스럽고 용서하는 아버지가 배은 망덕하고 불순종하는 아들을 다루는 것처럼 저들을 취급하시는 것이었다. 저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였고 거룩한 특권들을 남용하였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기회들을 멸시하였고 만족한 정신으로 침체된 생활을 하며 인색한 정신으로 배은 망덕하고 공허한 형식주의와 위선적인 불성실에 빠져 있는 것을 만족하여 왔다. 저들은 바리새인적 교만심을 가지고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견책의 말씀을 들을 때까지 허풍을 떨어왔다.

주 예수께서 자기 만족에 빠진 자들에게 견책과 경고와 탄원의 기별을 거듭거듭 보내지 않으셨던가? 358 주님의 권고들이 멸시를 당하고 거부를 당하지 않았던가? 주님께서 보내신 사자들을 조롱하였으며 저들이 전하는 기별들을 한갖 어리석은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신다. 또한 주님께서는 만약 회개치 않을 때에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완전히 소모시킬 죄들을 보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만족에 빠진 자들의 이름을 올려 주실 수 없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하늘 아버지께 간청하실 수 없으시다.

위대하신 구세주께서는 당신 자신을 많은 보화들을 짊어지고 집집마다 다니며 값진 물건들을 파는 하늘의 상인으로 상장하시고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18-20)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실태를 생각해 보자. 충성된 증인의 권고에 귀를 기울이자. 우리들 중에 아무도 유대인처럼 편견에 사로잡혀 빛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도다”(요 5:40)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들에게 말씀하실 필요가 없도록 해야 한다.

대총회 총회 이래로 집회가 있을 때마다 영혼들은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고귀한 기별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들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지 못한 어떤 것 즉 그들이 믿음과 사랑의 금과 그리스도의 의인 흰옷과 영적 식별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자들이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만약 그대들이 이처럼 고귀한 은사들을 소유하고 있다면 영혼의 성전은 더러운 사당(祠堂)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나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에서 일하도록 그대들을 부르고 싶다. 지금 이때야말로 은혜스러운 기회와 특권의 시기이다.

359 현대의 기별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기별이다. 이 기별의 열매는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 것이므로 거룩한 신임장을 가지고 있다. 저들에게 증거된 고귀한 진리를 크게 필요로 하면서도 그 기별의 혜택을 받지 못한 자들이 있다. 저들은 저희 마음문을 활짝 열어 예수님을 하늘의 손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큰 손실을 당하게 되었다. 사실상 우리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좁은 길이며 매 발자욱마다 십자가가 나타나 있다. 우리들은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의의 태양이신 주님의 복스러운 빛으로 말미암아 가장 암담한 시간들이 환하게 밝아질 것이다.

우리들은 매일 빛과 지식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상고하는 일을 게을리할 때에 안전하지 못하다. 수고함이 없이는 세속적인 재물들을 얻지 못한다. 하물며 우리들 자신의 열렬한 노력이 없이 어떻게 신령한 하늘의 축복들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360 진리의 광산은 파고 들어가야만 한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 라고 말하였다. 우리들의 생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마음에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며 마음으로 환영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며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들에게도 더욱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하며 구속의 경륜에 관하여 밝히 깨달을 필요가 있다. 우리들의 현재와 영원한 복리에 긴요한 이 문제에 관하여 성경 진리를 스스로 깨닫는 자가 백분의 일도 되지 못한다. 백성들에게 구속의 경륜을 밝히 깨닫게 하기 위하여 빛이 비취기 시작할 때에 영혼의 원수는 사람들의 마음에 빛이 이르지 못하도록 전력을 다하여 활동한다. 만약 우리들이 배우고자 하는 정신과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한다면 오류의 찌꺼기들은 깨끗이 씻겨 내려갈 것이며 우리 눈에 가리워졌던 진리의 보석들이 발견될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유일한 소망이시며 구원이 되심을 중점적으로 설교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교리를 로마에서 열린 집회에서 증거하였을 때에 그 진리는 마치 목마른 나그네에게 주는 시원한 냉수처럼 진리에 갈급한 많은 영혼들에게 복된 소식이 되었다. 우리들에게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들에게 전가(傳家)시켜 주셨다는 생각은 실로 보배로운 사상이었다(리뷰 앤 헤랄드, 1889년 9월 3일).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게 될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들과 함께 일하실 것이므로 죄에 대한 흥미가 없어진다. 우리들이 실수를 하게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에게 고난을 안겨준 죄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오랫동안 오류의 쓰레기 속에 감취어 있던 것으로서 백성들에게 증거해야 될 놀라운 진리들이 있다. 셋째 천사의 기별을 믿노라고 공언하는 많은 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교리를 잊어버렸다. 361 신성파(神性派)의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극단적인 이론을 주장하였다. 저들은 놀라운 열정을 가지고 “그리스도만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생각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교훈은 성경의 교훈과 일치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그러한 신앙의 근거가 없다. 이러한 교훈은 이 시대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진리의 고귀한 구슬이 아니다. 이러한 교리는 정직한 영혼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빛은 율법을 선포해야 한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를 높여야 하는데 이는 범한 자를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악과 죄를 용서해 주시는 구세주이시며 그분께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모든 죄와 회개하지 않은 영혼들을 제거할 것이기 때문이다(리뷰 앤 헤랄드, 1889년 8월 13일).

우리들은 가장 놀라운 집회들을 가지고 있다. 이번 집회에서는 미네아폴리스 집회에서 볼 수 있었던 그러한 정신은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원만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많은 수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새벽 5시에 열리는 집회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으며 집회의 성과는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내가 들은 바 모든 간증들은 고상한 성격의 것이었다. 저들은 지난 일 년 동안의 생애가 저희 평생에 가장 아름다운 해였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쳐준 빛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라는 진리의 빛이 뚜렷하고 분명한 것이었다고 말하였다. 가진 바 모든 체험들은 매우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두 날만을 제외하고는 나는 모든 아침 집회에 참석하였다. 8시에 죤즈 형제는 믿음으로 말이암는 의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설교하였으며 깊은 관심이 표명되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크게 증가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회중 가운데는 이 문제에 관하여 이전에 전혀 듣지 못한 자들의 수도 상당히 많았는데 저들은 거침없이 기별을 받아들였으며 주님의 식탁에서 큰 떡 조각을 배불리 얻어먹었다. 362 그 집회에서 말한 전반적인 간증은 우리 백성들에게 이른바 빛과 진리의 이 기별은 바로 이 시대를 위한 진리이며 저들이 가는 교회마다 빛과 안위와 하나님의 축복이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기름진 음식으로 가득 찬 잔치에서 배부르게 먹었으며 빛을 붙잡는 영혼들을 볼 때마다 우리들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며 기뻐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위대하신 모본이시다. 주님의 품성은 우리들의 품성이 되어야 한다. 모든 탁월한 진리들이 주님 안에 있다. 인간이나 다른 모든 모본에서 눈을 돌려 정직한 얼굴로 당신의 영광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저들의 마음은 주님의 탁월성에 대한 웅장하고 압도적인 개념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며 모든 다른 대상들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주님의 형상을 닮게 하지 못하는 어떤 도덕적인 훈련이든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나는 우리들이 도달해야 할 표준의 높이와 깊이를 보았으며 빛의 모든 광선을 받아들여야 하고 보다 더 큰 빛을 향하여 전진해야 할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지막 때는 가깝다. 우리들은 이때에 결코 졸아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우리 목회하는 형제들에게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는 마음이 있음을 알고 매우 감사한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며 마음속에 진리의 보석을 저장하는 일을 크게 등한시 해왔다. 우리는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깨닫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기를 열심히 기도함으로 성경을 연구하도록 우리의 정신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손실을 당하고 있는가!

나는 우리 목회하는 형제들이 발전이 있을 것과 셋째 천사의 기별과 보조를 같이하기 위하여 더욱 열렬한 노력이 있을 것을 믿어 마지 않는다(원고 10, 1889년).

주님께서 속히 재림하실 것을 믿노라고 주장하는 모든 신자들은 전에 없었던 열성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데 이는 사단이 영혼들을 흑암에 가두고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위기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도록 온갖 책략을 시도하려고 굳게 결심하고 있다. 모든 신자들은 열렬한 기도로써 성경을 연구함으로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성령의 깨우치심을 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과 또한 당신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욱 많은 지식을 얻게 될 것이다. 숨은 보화를 찾듯이 진리를 탐구하라. 그리고 원수를 실망시키라. 363 시련의 시기가 우리에게 임박하였는데 이는 죄를 사유하시는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계시를 보여주심으로 셋째 천사의 큰 외침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온 땅을 영광으로 환하게 할 천사의 빛의 시작이다. 경고의 기별을 받은 모든 자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며 표상으로 나타내고 상징으로 나타냈으며 선지자들의 계시 가운데 표현되고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교훈들과 사람들의 아들들을 위하여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 가운데 밝히신 그 주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일이다. 성경의 말씀은 주님에 대하여 증거한 것임을 알고 연구하라.

만약 그대들이 환란의 때를 견디기 원한다면 그대들은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며 회개한 죄인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주님의 의의 선물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리뷰 앤 헤랄드, 1892년 11월 22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위한 화목뿐만 아니라 회복의 계획이 마련되었다. 죄로 말미암아 생긴 넓은 웅덩이가 갈바리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메워지게 되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충분하고 완전한 속전이 지불되었으며 그 공로로 말미암아 죄인이 용서함을 받게 되고 율법의 공의가 유지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시는 희생 제물이 되심을 믿는 모든 자들은 나아가 저희 죄의 용서함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당신의 자녀로 받으실 수 있고 또한 나는 주님을 요구할 수 있으며 나의 사랑하는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할 수 있다. 우리들은 천국에 대한 소망을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집중시켜야 할 것인데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대치물이 되시고 담보물이 되시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였으면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 인간이 자신이 범한 거룩하고 공의로운 율법의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 기울일지라도 그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는 모든 것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의를 주장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인성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다. 주님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율법의 저주를 짊어지셨고 죄인을 위하여 대속하시므로써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하셨다. 순수한 신앙은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며 죄인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승리자가 되게 한다. 364 그 까닭은 인간이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가 되며 신성과 인성이 그의 안에서 결합되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기 자신의 행위로 천국에 이르려고 노력하는 자는 온전히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순종함이 없이는 구원 받을 수 없다. 자신의 모든 수고가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행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행하셔야만 한다. 만약 인간이 자기 자신의 행위만을 가지고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면 그는 자기 안에 기뻐할 수 있는 어떤 요소를 갖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능력만을 가지고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은 가인의 제물로 상징되었다. 그리스도가 없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기심으로 부패하여진 것과 죄 뿐이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행하여진 것만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천국을 얻으려고 노력할 때에 그 영혼은 향상하게 된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우리들은 힘에서 힘을 얻게 되며 승리에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의 완전한 구원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산 믿음은 그 믿음을 가진 자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굳게 붙잡게 하며 구속의 경륜에서 큰 위로와 만족을 찾아낼 것이다(1890년 7월 1일, 리뷰 앤 헤랄드).

365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 15).

회개는 믿음과 관련되어 있으며 복음서 가운데 회개는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긴요한 것으로 강조되었다. 바울은 회개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그는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 20:20, 21)고 말하였다. 회개함이 없이는 구원함이 없다. 뉘우침이 없는 죄인은 그 마음으로 의를 믿을 수 없다. 바울은 회개를 묘사하여 죄를 위한 경건한 슬픔이라고 하였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고후 7:10)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회개 자체에는 공로의 성격을 띤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다만 잃어버린 죄인의 유일한 소망이시며 유일한 구세주로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 마음을 준비시킬 따름이다.

죄인이 율법을 바라볼 때에 그가 범한 죄들이 자기 자신에게 밝히 드러나며 양심을 깨우치게 되며 정죄함을 받는다. 그의 유일의 안위와 소망은 갈바리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데 있다. 366 그가 과감하게 허락들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신을 붙잡을 때에 그의 영혼에게 위로와 화평이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는 “오, 하나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이름으로 당신께 나오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나이다. 저는 멸망할 수밖에 없으며 무기력하고 소망이 없는 영혼이로소이다. 오, 하나님,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는 멸망할 수밖에 없나이다”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무리 공의로우시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죄인을 의롭게 하실 수 있다 할지라도 어떤 인간이든지 자신이 알고 있는 죄를 여전히 행하며 알고 있는 의무들을 등한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로 자신의 영혼을 가리울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의롭다 하심을 얻기 이전에 그 심령의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신다. 인간이 의롭다 하심을 보유(保有)하기 위하여서는 계속적인 순종을 하여야 하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활동적이며 살아 있는 믿음을 통하여 그 영혼을 순결케 하여야 한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1-24) 고 하였다. 인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하여는 그의 믿음이 마음의 모든 애정과 충동들을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해야 한다. 또한 믿음 자체가 완전함에 이르게 되는 것은 오직 순종에 의해서이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는 죄인은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게 되며 그를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거룩한 은혜를 힘입을 때에 초자연적인 능력이 인간에게 부여되며 그 능력이 인간의 정신과 마음과 품성에 역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어 받음으로써만 죄의 가증한 정체를 분별하게 되며 마침내 죄를 영혼의 성전에서 쫓아낼 수 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사귀게 되고 구원의 사업을 위하여 주님과 더불어 연합하게 되는 것도 오직 은혜를 통하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사유하심을 약속할 만한지를 다루어 보시는 조건이다. 그것은 믿음 안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어떤 공덕이 있어서가 아니라 죄의 치유제로 마련된 그리스도의 공로를 그의 믿음이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367 믿음은 죄인의 범죄와 결함 대신에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순종을 제시할 수 있다. 죄인이 그리스도가 자신의 개인적인 구세주이심을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변함이 없으신 약속을 따라서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값없이 의롭게 하신다. 회개한 영혼은 자기의 대치물이시며 담보물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고 그의 대속이 이루어지고 그의 의가 됨으로써 자신의 의롭다 하심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3-5). 의란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율법은 의를 요구하는데 바로 이것을 죄인이 율법에게 빚지고 있다. 그러나 죄인은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 그가 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얻는 것뿐이다. 그는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순종하심을 죄인의 계정에 두신다. 인간이 실패한 자리에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시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믿는 영혼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그를 마치 의인인 것처럼 취급하시고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를 사랑하신다. 믿음이 의로 간주되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에서이며 용서받은 영혼은 은혜에서 은혜에 이르게 되며 빛에서 더 큰 빛으로 나가게 된다. 그는 기뻐하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고 말할 수 있다.

또다시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 13)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말씀하셨다. 368 우리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므로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것이 결코 낮은 표준이 아니다. 우리들은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아야 하며 시험과 시련의 날에 우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개인적인 신자들로 구원을 받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해야만 한다는 뜻에서 하늘을 기어오르려고 생각함으로써 바른 길을 잃고 있다. 저들은 혼자의 힘으로 하는 노력으로 저들 자신을 개선해 보려고 애쓴다. 저들은 결코 이런 방법으로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의 희생 제물로서 죽으셨고 우리들의 모본으로 생애하셨으며 우리들의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그 길을 마련해 놓으셨다. 주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우리들 자신의 어떤 노력에 의해서 단 한 계단이라도 사다리를 오를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진실한 것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될 때에 선한 행실은 우리들이 생명의 길에 있다는 효과적인 증거가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길이 되셔서 우리가 하늘로 가는 참된 길을 걷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정신을 살피시며 우리들이 믿음으로 우리들의 멍에를 지고 가는 것을 보실 때에 주님의 완전하신 신성이 우리들의 허물들을 대속해 주신다. 우리들이 최선을 다할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의가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보내시는 빛의 모든 광선이 우리로 세상의 빛이 되게 한다(서신 33, 1889년).

369 나는 계시록 2장 4절과 5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오트세고에 있는 신자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 5). 이런 권고의 말씀을 들은 백성들에게는 충성된 증인께서 인정하신 바 여러 가지 탁월한 자질들이 있었다. 충성된 증인께서는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 점이 저들이 보충해야만 할 결점이었다. 다른 모든 은사를 가지고도 이 부족을 메꿀 수는 없는 것이었다. 또 그 교회에서 권고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 2:5-7) 고 말씀하셨다.

370 여기에 하신 이 말씀은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을 갖고 계신 충성된 증인께서 하시는 경고, 견책, 위협 및 허락의 말씀이 된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20).

성소의 저울로 이 교회를 달아보았을 때에 저희 첫사랑을 버렸으므로 부족함이 드러났다. 충성된 증인께서는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2, 3)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모든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 결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면 그 치명적인 결함이란 무엇이었는가?-”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우리들이 바로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들의 교리가 정확한 것일는지 모른다. 또한 우리들이 거짓된 교리를 증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원칙에 진실하지 않은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끈질긴 노력으로 열심히 수고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모든 것이 충분한 것은 아니다. 과연 우리들의 동기는 무엇인가? 우리들이 회개하라고 부르심을 입은 목적이 무엇인가?-”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교회의 모든 신자들은 이 중대한 경고와 견책에 대하여 연구하여야 한다. 각자는 진리를 위하여 논쟁하며 교리에 대하여 토론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에 대한 부드러운 사랑을 상실하지 않았는지 살필 것이다. 혹시 설교 가운데서 또는 우리 심령에서 그리스도를 제외해 버린 적은 없었는가? 비록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대하여 공언하면서 전진하고 선교 사업에 종사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들의 수고 가운데 전혀 섞여 있지 않은 그러한 위험은 없었는가? 충성된 증인께서 주신 엄숙한 경고 가운데는 의미 심장한 뜻이 있다. 이 경고의 말씀은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요구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 충성된 증인께서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고 말씀하셨다. 아, 교회가 처음 사랑의 열성에 대한 필요를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사랑이 결핍될 때에 다른 모든 은사들이 있을지라도 불충분한 것이 된다. 회개하라는 부르심은 위험을 감수함 없이는 무시해 버릴 수 없다. 진리에 대한 이론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이러한 이론을 불신자들에게 증거하는 것이 그대들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증인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371 그대들이 기별을 처음으로 받아들였을 때에 그대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던 그 빛이 그대들의 신앙적인 경험과 수고의 본질적인 요소가 되어야 하는데 바로 이것이 그대들의 심령과 생애 가운데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대들의 열성의 결핍을 주시하시며 그대들이 타락하여 위험한 위치에 놓여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많은 사람들은 율법이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을 묘사하는 일에 실패한다. 그처럼 위대한 진리를 가졌고 중대한 개혁 문제들을 백성들에게 증거해야 할 자들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의 표현인 대속 제물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였다.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은 자들의 신앙적 체험 가운데서 예수님을 위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으며 인류의 구원자를 높이는 대신에 자신만을 높여 왔다. 율법을 범한 자들에게 율법을 증거할 때에 그 율법이 마치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상과 품성에 대한 해석자로서 증거할 것이다. 태양 광선이 태양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율법 역시 거룩한 법의 제정자를 제쳐 놓고는 바르게 증거 될 수 없다. 기별을 전하는 자는 “율법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대들 자신이 와서 바울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선포한 율법이 과연 그러한지 살펴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율법은 죄를 견책하며 죄인을 정죄하고 자비와 선하심과 진리가 충만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필요를 깨닫게 한다. 비록 율법은 죄의 형벌을 감해 주지 못하고 죄인에게 그의 모든 부채를 청구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고 당신의 자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회개하고 믿는 영혼에게 풍성하게 미친다. 영혼에게 찍힌 죄의 낙인은 오직 대속 제물의 피를 통해서만 지워 버릴 수 있다. 하늘 아버지와 동등하셨던 주님의 희생보다 덜한 제물로서는 그 요구에 응할 수 없었다. 주님의 생애, 겸비, 죽으심 및 멸망받은 인류를 위한 중재 등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사업은 율법을 높이고 존귀케 하는 것이었다.

율법의 주장에 관한 많은 설교들이 그리스도를 제외한 것이었으며 이 결함은 진리가 영혼들을 회개시키는 데 무능한 것이 되게 하였다. 372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일에 단 한 발자욱도 전진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죄인이 자기의 구원자이시며 영원한 친구가 되시는 주님의 사랑과 권능에 대하여 얼마나 자주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그리스도의 대사(大使)가 율법의 주장에 관하여 밝히 증거할 때에 아무도 그리스도의 대속하시는 희생이 없이 의롭다 하심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을 밝히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거기에는 다만 정죄가 있을 뿐이며 격한 분노의 두려운 광경과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기 위하여 그 마음의 눈이 열린 자는 사랑과 동정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폭군과 같은 존재로 혹은 냉혹하신 분으로 나타나지 않으실 것이며 오히려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을 품에 안기 위하여 간절히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나타나실 것이다. 그 죄인은 시편 기자와 함께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 103:13)실 것이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참된 품성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모든 절망이 그의 영혼에서 사라질 것이다.

어떤 형제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우리들이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적이 염려하고 있으나 나는 아무도 이 일로 인해서 놀랄 필요가 없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이 교리를 성경에 밝혀진 그대로 증거함에 있어서 아무런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과거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철저히 가르치는 일에 태만과 부주의함이 없었다면 오늘날에 와서 특별한 관심을 집중시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모든 의의 원수인 마귀가 꼭 그렇게 되도록 계획한 것처럼 성경 가운데 우리들에게 주신 바 굉장히 위대하고 고귀한 허락들을 대부분 잊어버리고 말았다. 마귀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참된 성품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도록 우리들과 우리 하나님 사이에 자기의 어두운 그림자를 늘어뜨린다. 여호와께서는 당신 자신이 친히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출 34:6)이라고 선포하셨다.

여러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기별이 셋째 천사의 기별이냐고 편지로 나에게 물어 왔으며 나는 “그것은 참된 셋째 천사의 기별이다”라고 했다(리뷰 앤드 헤랄드, 1890년 4월 1일).

373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4-26).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대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믿는 것이 실로 중요한 일이기는 하나 많은 사람들이 “나는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하면서 취하는 태도 가운데 따르는 위험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대들은 선행을 해야만 한다. 그러면 살리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도 착한 행실을 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믿으라 믿기만 하면 살 수 있다”라고 말한다. 믿음과 행함은 병행해야 하며 믿는 일과 행하는 일은 잘 혼합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요구하신 바 완전한 순종과 결백한 의 이하(以下) 의 것을 현대의 인간들에게 요구하시지 않으신다. 은혜 아래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요구는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하신 요구만큼 광범위한 것으로써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는 것이다. 복음은 율법의 주장을 약화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율법을 높이고 존귀케 한다. 새 언약 아래서 요구되는 것은 옛 언약 아래서 요구된 것에 비하여 조금도 덜한 것이 없다. 375 아무도 육신적인 안일한 생각으로, 믿음이야 어떻든지, 생애가 아무리 불완전하든지 성실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리라는 즐거운 망상을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율법의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아야 하며 그 의를 우리들의 의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의를 받아들임으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업을 행할 수 있는 자격과 그리스도와 동역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들이 영원한 의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대들의 가정과 교회에서 죄를 억제하는 가운데 하늘의 대리자들과 협력하지 않고 악의 조류에 기꺼이 휩쓸려 가기를 바란다면 그대들은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영혼을 순결케 한다. 성령께서는 믿음을 통하여 그 영혼 안에 거룩한 형상을 이루시기 위하여 심령속에 역사하신다. 그러나 인간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일하지 않는 한 이 일은 성취될 수 없다. 우리들은 오직 성령께서 마음에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만약 우리들이 하늘 아버지께 나아갈 통로를 찾으려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들의 신임장으로 가져야만 할 것이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얻기 위하여는 매일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아 변화함을 입고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가 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취미를 고상하게 하고 심령을 성화시키며 인간 전체를 고결하게 하는 것은 성령께서하시는 일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해야 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아무도 그리스도를 억지로 바라보도록 강요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쳐다보면 살리라”는 초청의 음성은 간절한 탄원의 호소로 들려온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가운데 우리들은 주님의 사랑이 비할 데 없이 귀한 것이며 주님께서 범죄한 죄인의 자리를 택하셨고 죄인에게 당신의 흠없는 의를 입히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죄인이 자기의 구세주께서 자기를 대신하여 죄의 저주 아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는 것을 볼 때에 주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바라보게 되고 그의 마음에 사랑이 일깨워질 것이다. 죄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를 사랑하신 까닭이며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76 회개하는 영혼은 하나님께서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믿는 자의 영혼 속에서 역사하시며 한 가지 순종에서 또 다른 순종에 발전하도록 힘을 주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에서 더 큰 능력을 얻게 하시며 은혜에서 은혜에 이르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저들의 개인의 구주로 삼지 않는 모든 자들을 공정하게 정죄하신다. 그러나 믿음으로 당신께 나오는 모든 영혼을 용서하시며 하나님의 사업을 행하도록 능력을 주시고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영혼들에 대하여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이 연합은 품성의 완성을 이루게 함)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충분하고도 값없이 주시는 구원을 얻어 주님 안에서 온전하게 되게 하기 위하여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의의 태양의 밝은 빛을 받아 모든 영혼이 진리의 빛을 가질 수 있도록 계획해 놓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선물로 주시는 무한한 대가를 치르시면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을 준비하셨다. 사도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라고 질문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편에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들 편에 잘못이 있기 때문이며 우리들이 신령한 대리자들에세 협력하는 일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구세주께서는 인류에게 접근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신성 위에 인성을 옷 입으셨다. 타락한 인간에게 요구되는 구원을 이 세상에 끌어들이기 위하여 신성과 인성이 함께 필요하였다. 신성이 인성을 필요로 한 것은 인성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제의 통로를 제공해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기 위하여 자기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하늘 위로부터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신령한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인간적인 활동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편에서는 믿음이 요구되었는데 이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영혼을 순결케 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굳게 붙잡는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능력이 마비되도록 계획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하나님과 협력함으로써 인간의 능력이 영원토록 유능한 것이 될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의지가 파멸되도록 계획하지 않으셨는 바 이는 바로 이 속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나라(미국)와 외국에서 이룩하기를 바라시는 사업을 우리들이 성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각기 해야 할 일을 주셨으며 그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위대한 사업을 위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천국의 천사들과 연합하였으므로 모든 참된 일꾼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는 거룩한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업을 행하는 가운데 더욱 총명한 지식을 얻게 될 것이다. 거룩한 은혜가 마음 속에 역사하는 바를 성취함으로써 신자는 영적으로 위대한 인물이 된다. 자기에게 위탁된 재능을 따라서 열심히 노력하는 자는 주님을 위한 지혜로운 건축가가 될 것인데 이는 그가 그리스도에게서 견습(見習)을 하며 하나님의 사업을 행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는 책임의 부담을 회피하지 않을 것이며 각자가 자기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의 사업을 받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업의 곤경을 당하는 처지에 이르게 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자원하여 순종하는 당신의 종이 짓눌려 쓰러지도록 버려두시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업 가운데서 무거운 책임을 지고 나가는 자는 그대들의 동정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협력하는 일에 충성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노력과 인간의 노력이 연합할 때 비로소 사업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책임을 회피하고 자기 자신이 부르심을 입은 특권에 대하여 깨달음이 없는 자야말로 동정의 대상이 될 자이다.

377 1893년 4월 9일 A.T.죤즈 형제에게: 저는 한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그 집회에 다수의 회중이 참석하였습니다. 꿈속에서 볼 때 죤즈 형제는 믿음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전가(轉嫁)된 의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죤즈 형제는 결국 아무런 효과도 없는 일을 가지고 여러번 반복했을 따름이며 제시된 이론 가운데는 아무런 조건들이 없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형제가 제시한 방법은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케 하였고 저들은 믿음과 행함에 관하여 올바른 감명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형제에게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형제는 이 문제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는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과 거룩하게 됨과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데는 엄연한 조건들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형제가 제시한 의미들을 알고 있습니다만 실제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릇된 감명을 주었습니다. 선한 행실로 말미암아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반면에 어떤 영혼도 선한 행실이 전혀 없이 구원 받기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 아래 있던 우리를 구원하셨으므로 우리들은 받기 원할 때에 간구해야 하며 발견하고 싶을 때에 찾아야 하며 우리들에게 문이 열리기를 바랄 때에 두드려야 할 것입니다.

378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나오는 모든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꺼이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께 나오도록 초청하십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사실에 있어서 죤즈 형제는 이 문제들에 관하여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생각하고 있으나 형제의 표현 방법으로 말미암아 이 문제들을 사람들의 정신이 혼돈되게끔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죤즈 형제가 행함에 관하여 자신의 주장을 과격하게 표현한 이후에 바로 그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될 때 형제의 머리 속에 그 문제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정확한 원칙들을 분명히 설명해 줄 수 없으며 때로는 형제 자신의 원칙과 신앙에도 일치하지 않는 말들을 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 10:17)라고 물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그 젊은이는 “어느 계명이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계명들을 말씀하셨고 또 그 젊은이는 그리스도에게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조건들이 있습니다. 성경 가운데는 조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17, 20, 21, 22)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죤즈 형제는 조건들이 없다고 말하면서 어떤 표현들을 너무 광범위한 뜻으로 말해 버리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부담을 주고 형제의 표현 가운데서 일치성을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저들은 형제가 표현한 말들과 하나님의 말씀의 단순한 표현들이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들을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행함에 관한 강력한 주장들이 결코 우리의 교리에 대한 신조를 견고하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죤즈 형제를 극단주의자로 생각할 것이므로 그러한 표현들이 오히려 우리들의 입장을 약화시킬 따름이며 저들이 반드시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는 문제들의 귀중한 교훈들을 손상케 할 것입니다. 죤즈 형제여, 사람들이 이 문제를 이해하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며 성경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견해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정신을 혼란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나. 379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제자들도 딱할 정도로 무지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약속하신 성령께서 저들에게 임하였을 때에 우유 부단했던 베드로가 신앙의 승리자가 되게 되었고 그의 품성 가운데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과도한 증거나 표현들을 사용하므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걸려 넘어지게 될 조약돌 하나라도 놓아두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일관성을 가지고 정중하며 신중하고 확고한 태도를 보이십시오. 어떤 일에도 극단적인 면을 보이지 말 것이며 든든한 반석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우리들의 구세주께서는 너무나 보배롭고 귀하신 구세주이십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행하는 바로 이것이 참된 시금석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는 자야말로 자신이 나타내는 순종과 순결과 품성의 거룩함으로 열매의 실제적인 증거를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일 것입니다. … 사랑하는 죤즈 형제여, 신중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형제만을 골똘히 주목하며 형제가 경계선을 지나쳐 넘어지게 되고 타락하기를 바라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형제가 겸비한 마음으로 주님께 가까이 할 때에 모든 일이 무난하게 될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학교에는 졸업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덧셈 방식으로 일할 때에 주님께서는 곱셈 방식으로 일하실 것입니다. 꾸준한 근면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들은 덧셈의 계획으로 살게 될 것이며 우리들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실하게 할 것입니다.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10, 11)고 하셨습니다(서신 44, 1883년).

나의 형제들이여, 믿음과 행함의 문제들을 신자들에게 증거할 때에 매우 조심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 사람들은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380 신자들은 열심히 선행을 하도록 권고를 받을 필요가 있다. 저들은 믿음으로 성공하는 방법, 순결하게 되는 방법 및 저들의 헌물이 하나님께 향기가 되는 방법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모든 방법들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명확한 성격을 띤 기별들을 신자들에게 증거해야 한다. 사람들은 모든 악의 모양을 책망하고 견책하기 위하여 나아가야 할 것이다.

만약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주셨던 기별과 같은 사명을 어떤 교회의 사자가 받았다면 그 기별은 인간 대리자들을 통하여 부주의함과 패역함과 죄를 책망하여 백성들로 회개하고 죄를 자복하기에 이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결코 죄를 숨기려 하지 말 것이다. 견책의 기별 가운데 처음과 나중이시며 만유이시고 만유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승리할 자들의 요구를 기다리고 있다. 견책하는 자는 견책을 받는 자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줌으로써, 저들은 승리하기 위하여 투쟁할 것이다. 비록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오른쪽 눈을 빼어 버리는 것과 같고 몸에서 오른팔을 찍어 버리는 것과 같을지라도 그는 모든 죄악적인 행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또한 모든 타락한 습관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싸워나가도록 격려를 받아야 한다. 악의 습관이나 죄악적인 행위에 대하여 양보하거나 타협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원고 26a, 1892년).

인간은 자기가 받은 천부의 재능을 따라 모든 능력을 기울여 하나님과 협력하여야 한다. 그는 먹는 일, 마시는 일 및 모든 생활 습관에 있어서 올바른 관습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모르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인간 대리자들이 모든 면에 있어서 이성적이며 책임 있는 행동을 하는 존재들이 되도록 계획하셨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바 빛의 단 한 가닥의 광선이라도 무시할 수 없다. 부지런히 해야 할 일들에 대하여 우리들의 행동이 태만한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인간 대리자들은 하나님과 협력해야 하며 복종시켜야 할 모든 감정들을 지배해야 한다. 이 일을 위하여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하며 그의 정신과 기질과 행동을 제어하기 위하여 은혜를 얻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공여(供與)하시는 은혜를 따라서 그는 능히 이길 수 있다. 381 승리자가 된다는 뜻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 이상의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모든 참회하는 심령의 부르짖음을 응답하실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임으로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을 당신께 가까이 이끄신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스도가 없이 용서를 받을 수 없는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가 없이는 회개할 수 없다. 인간적인 감정이나 자존심으로 볼 때 예수님께 곧바로 나간다는 것, 또한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위해서 주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것이 굴욕적인 체험일 수 있다. …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인간의 협력이 없이 인간을 위하여 아무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자기를 이기는 위대한 일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는 견해를 나타내지 말 것이다. 또한 그대들이 인간적인 최선을 다한 이후에 예수님께서 그대들을 도우실 것이라고 말하지도 말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말씀하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은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 성령께서 인간의 심령에 역사하시지 않는 한, 우리들은 매 발자욱마다 걸려 넘어질 것이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으며 무가치한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와의 협력만이 승리를 의미한다. 우리들이 신령한 도움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구세주를 향하여 단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주님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계 21:6)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므로 모든 사람에게 끈질긴 근면의 정신을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우리들은 노력해야 하며 씨름해야 하고 깨어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 우리들은 교활한 원수에게 정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투쟁을 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며 그 동안 우리들은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영혼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주님을 신뢰하여야 한다. 인간의 편에서 별로 할 일이 없다거나 전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인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성공적으로 승리하기 위하여 인간이 하나님과 협력해야 할 것을 가르치라.

아무도 그대들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갖게 될 그대들의 계급과 지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하지 말 것이다. 심판 때에 무엇을 했는지 혹은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에 따라서 판결이 내려질 것이다(마 25:34-40).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의 편에 노력과 수고가 요구되는데 이는 맺힌 열매로 그 나무의 특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382 비록 인간의 선행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을 때에 가인의 제물만큼이나 무가치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을 때, 인간의 선행은 영생을 유업으로 받기 위하여 행하는 자의 가치에 대하여 증거한다. 이 세상에서 소위 도덕적이라고 인정되는 것이 거룩한 표준에 미치지 못하며 천국에서는 가인의 제물만큼 아무런 공로가 없는 것으로 인정된다(원고 26a, 1892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은 깨달음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약하게 하고 더럽히는 모든 것에서 스스로 순결케 할 것이다. 그의 생애의 모든 습관들은 진리의 말씀의 요구에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며 그는 다만 믿을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자기를 빚어 주시는 대로 맡기면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힘쓸 것이다(리뷰 앤 헤랄드, 1883년 3월 6일).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 목적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일 때 예수님께서는 이 의향과 노력을 인간의 최선의 봉사로 받아들이시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의 공로로써 그의 결함들을 메꾸어 주신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노라고 주장하면서도 하늘 아버지의 계명에 대하여 불충성하는 자들은 받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들은 믿음에 대한 말을 많이 듣고 있는데 실상 우리들은 행함에 대한 말을 더욱 많이 들을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안락하고 태평하며 십자가가 없는 신앙 생활을 살면서 저들 자신의 영혼을 속이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셨다(영문 시조, 1890년 6월 16일).

383 세째 천사의 기별은 네째 계명의 안식일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며 이 진리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그러나 매력의 가장 큰 핵심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셋째 천사의 기별에서 제외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시대를 위한 사업에 종사하는 많은 자들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 둘째 자리로 밀려났으며 이론과 논쟁이 첫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거룩한 성품에 관하여 모세에게 나타내신 바 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출 33:19)신다고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출 34:6, 7)으리라고 하셨다.

사업을 위해서 수고하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수건이 가리워진 듯하여 저들이 율법을 증거할 때에 예수님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많다는 사실을 선포하지 못하였다. 384 자비와 진리가 서로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춘 곳은 바로 갈바리의 십자가에서였다. 죄인은 언제나 갈바리를 향하여 바라보아야 하며 어린아이의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공로 안에서 쉬어야 하며 주님의 의를 받아들이고 주님의 자비를 믿어야 한다. 진리의 사업을 위하여 수고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증거하되 새로운 빛으로 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한동안 잊어버렸던 고귀한 빛으로서 증거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개인의 구세주로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하며 주님께서는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옷 입혀 주신다. 우리들은 요한이 묘사한 진리를 반복하고 높이 드러내야 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고귀한 진리의 가장 신비한 특성이 나타나 있으며 교회와 세상 앞에 그리스도의 은혜의 보화가 펼쳐져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요 3:16)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죽으시기까지 한 그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야말로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 사랑인가! 율법의 강력한 주장들을 이해는 하면서도 무한히 풍성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손실인가! 하나님의 율법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로써 증거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사실이다. 이 범죄한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의 선물은 모든 설교 가운데서 크게 다루어져야만 한다. 진리를 냉담하고 생기가 없는 태도로 증거할 때에 진리로 말미암아 심령들이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주님의 관계 가운데서 예수님을 증거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허락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게 된다. 저들은 얼마나 자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라는 말씀으로 신자들에게 보증의 말씀을 전해 주었는가?

사단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인간을 회개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멸망받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이 깨닫지 못하게 하리라고 굳게 결심하였다. 385 아, 우리들이 어떻게 깊고도 고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성공적으로 제시할 수 있을까?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라고 외치는 것 외에 우리가 달리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길이 없다. 우리들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죄인들에게 호소하자. 예수님을 하늘 아버지의 대리자로 증거하므로써 우리들은 사단이 우리 길에 던진 어두운 그늘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극하신 자비와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갈바리의 십자가를 바라보라. 십자가는 하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측량할 길이 없는 자비의 영구적인 보증이다. 아, 모든 영혼들이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 교회들이 이와 같이 할 때에 저들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할 것이며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이다. 에브라임은 유다를 시기하지 않을 것이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 때에 분열은 없어질 것이며 이스라엘의 경내에서는 사납게 싸우는 소리들이 더 이상 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를 통하여 주님께서 기도하신 바 하늘 아버지와 주님께서 하나이신 것처럼 당신의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하신 그 기도의 응답을 구할 것이다. 화평, 사랑, 자비 및 자선의 정신이 그 영혼의 영구적인 원칙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영혼의 주제가 될 것이며 충성된 증인께서는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는 말씀을 그 이상 더 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될 것이며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고 성령께서는 모든 심령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실 것이며 중생에 이르게 하고 모든 영혼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새로워져서 모든 영혼을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참 포도나무의 산 가지들로서 모두가 살아 있는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영혼의 심령 가운데 거하셔서 지도하시고 위로하시며 거룩케 하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연합된 정신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하므로 남은 교회에게 거룩한 신임장을 수여하였다는 사실을 증거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가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신 사실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386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의 연합케 하시는 섭리 가운데 하나가 될 때에 유대 백성의 죄였던 모든 바리새인적 사상과 스스로 의롭다 하는 모든 거짓된 신앙이 저들의 심령에서 추방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당신의 지체가 되는 각 신자에게 새겨질 것이며 당신의 백성은 새 포도즙을 담을 수 있는 새 가죽부대가 될 것이며 새 포도즙은 가죽부대를 찢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세대 동안 숨겨져 있던 신비를 알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골 1:27)실 것이다(28절과 29절도 인용되었음).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게 할 수 있는 성령을 인간의 영혼에게 부어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러나 저들의 마음이 틀에 박히고 변함이 없는 교리에 사로잡히고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유전과 인간의 계명을 따라 행하는 자들에게는 성령을 부어주는 일이 불가능하다. 저들은 교회의 의식들을 준수하는 일에 매우 철저하였으며 형식을 따르는 데 있어서는 엄격하였으나 활력과 신앙적인 헌신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을 가죽부대로 사용하는 마른 가죽으로 상징하셨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런 가죽부대에 담을 수 없으므로 저들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없었다. 또한 저들은 주님의 새 포도즙을 담을 수 있는 새 가죽부대가 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진리와 생명의 교리를 담을 가죽부대를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아닌 다른 데서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주님께서는 중생의 체험을 기꺼이 바라는 사람들을 찾으셔야만 하였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새 마음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주님께서는 “새 마음을 너희에게”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시대에 있어서나 오늘날에 있어서 스스로 의롭다 하는 정신은 새 마음을 가질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이 구세주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으므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간과해 버리셨다. 저들은 형식과 종교적인 의식에만 집착되어 있었다. 본래 의식적인 봉사 제도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으로서 생명력과 신령한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저들의 종교적 의식에서 영적 생명력을 상실하였으며 저들은 영적 생명이 완전히 멸절된 이후에 죽은 형식에만 집착되어 있었다. 저들이 하나님의 요구와 계명에서 탈선하였을때 저들이 잃어버린 그 자리를 메꾸기 위하여 저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요구들을 증가시켰으며 하나님께서 본래 요구하신 것보다 더욱 엄격한 요구들을 할 수밖에 없었다. 387 저들이 엄격하면 할수록 그 가운데는 사랑이 결핍되었고 하나님의 영께서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백성들에게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7, 23)고 말씀하셨다.

남은 교회는 유대인들이 경험한 바와 같은 흡사한 경험을 치르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일곱 금 촛대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하시는 충성된 증인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전할 엄숙한 기별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 5)고 말씀하셨다. 교회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점점 식어지고 그 대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끈 솟아 새로운 활동을 일으켜 왔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상실함과 동시에 이웃에 대한 사랑도 아울러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비록 교회가 에베소 교회가 들은 바 모든 칭찬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 할지라도 중대한 경건성이 부족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2-4) 고 말씀하셨다.

388 율법주의적 신앙이 이 시대를 위하여 꽤 올바른 신앙처럼 여겨왔다.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이다.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하신 견책은 저희 첫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적절한 것이다. 냉담하고 율법주의적인 신앙은 사랑이 결여되고 그리스도가 없는 신앙이므로 결코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없다. 자신을 정당화시키려는 정신으로 행한 금식과 기도는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 되었다. 예배를 위한 엄숙한 집회, 관습적으로 항상 행하는 종교적 의식, 외식적인 겸비, 부과되는 희생제물 등 이러한 모든 것들은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이 각기 자신을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를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한다. 이러한 일들은 목격자들에게 엄격한 의무들을 주목하게 하며 이런 사람은 하늘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기만에 속하는 일이다. 어떤 행위가 우리들을 천국에 들어갈 입장권을 얻어주는 것이 아니다. 한분의 크신 희생 제물이 되시는 주님께서 믿는 모든 자들을 위하여 충분한 대속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신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생명의 샘에서 물을 마시는 자는 왕국의 새 포도즙으로 배부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신자에게 올바른 정신과 동기를 자극시킬 방법이 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자에게서 모든 선함과 천국에 뜻을 둔 사상이 우러나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의 모든 연약한 것들을 친히 참으심으로 감당하시고 용서하시며 바로잡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늘 아버지이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다.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그대들은 변화하게 될 것이며 그대들이 전에 품고 있던 교만심, 허영심, 자존심, 스스로 의롭다 하는 정신 및 불신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대들은 이러한 죄들을 무가치한 멍에처럼 버리게 될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고 온유하며 진실하게 행할 것이다. 그대들은 사랑, 인내, 온유, 양선, 자비 및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야 할 모든 은혜스러운 일들을 행할 것이며 마침내 성화되고 거룩한 백성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 하게 될 것이다.

389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감해 주시며 그가 전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취급하실 때에 당신의 거룩한 은총 가운데로 그 영혼을 받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를 통하여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죄인은 오직 범죄한 세상의 죄를 위하여 희생 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대속을 믿음으로써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 아무도 자기 자신의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받을 자가 없다. 죄인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망과 부활의 공로를 통해서만 죄와 율법의 정죄와 범죄의 형벌에서 구원 받을 수 있다. 믿음이야말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며 신앙이란 믿는 것뿐만 아니라 신뢰하는 것을 포함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명목상의 신앙을 가지고는 있으나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구세주의 공로를 차지하시기에 합당하신 주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이러한 명목상의 신앙에 관하여 야고보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약 2:19, 20)고 말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인정은 하면서도 동시에 저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멀리하고 저희 죄를 회개하지 않으며 예수님을 저들의 개인적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390 저들의 신앙은 단순히 정신적인 동의에 그치며 진리를 판단하는 것으로 전부를 삼는다. 그러나 진리를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그 영혼을 성결케 하지 못하고 그 품성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롬 8:29, 30)던 것이다.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부르심은 죄인을 그리스도에게 이끄는 것이며 성령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사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구속 사업의 첫단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혼돈하고 있다. 회개란 죄인 자신이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나올 수 있는 한 가지 일로 여겨왔다. 또한 저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을 얻기 위하여 죄인이 반드시 합당한 자격을 얻어야 하는 줄로 생각하였다. 물론 회개가 용서의 선행 조건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 가납하심을 받는 유일한 조건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며 죄인은 스스로 회개할 수도 없고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나오기 위하여 준비할 수도 없다. 죄인은 회개하지 않는 한 용서함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회개가 죄인 자신이 하는 일이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선물이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어야 한다. 죄인이 그리스도에게 나오기 이전에 그의 마음 속에 자신의 죄에 대한 가책으로 가득 차야만 하는가?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제일 첫단계는 하나님의 영의 이끄심을 받는 것이다. 사람이 이 이끄심에 응할 때에 그가 회개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는 것이다.

죄인은 잃어버린 양으로 상징되었으며 잃어버린 양은 목자가 친히 나아가 찾아가지고 돌아오지 않는 한 결코 제 우리로 찾아 돌아올 수 없다. 사람은 아무도 자기 스스로 회개할 수 없으며 의롭다 하심의 축복을 받을 가치가 없다. 주 예수께서는 계속적으로 죄인의 마음을 감동케 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당신 자신을 바라보도록 주의를 환기시키신다. 391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영혼을 이끄시고 힘을 주시며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는 회개의 체험을 얻도록 인도하지 않으신다면 단 한 발자국도 신령한 생애로 나아갈 수 없다.

베드로는 제사장들과 사두개 교인들 앞에서 명확하게 회개가 하나님의 선물인 사실을 증거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고 말하였다. 회개도 사유하심과 의롭다 하심에 못지않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에게 은사를 주시지 않는 한 회개의 체험을 맛볼 수 없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에게 이끌리게 되는 것은 그분의 권능과 공덕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통회케 하시는 은혜는 주님께로 말미암아 이르는 것이며 의롭다 하심 역시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바울은 기록하기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6-10)고 하였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부주의한 신앙이 아니며 단순한 지적 찬동이 아니다. 믿음이란 마음에 깊이 뿌리가 박히고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삼으며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자들을 주님께서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시면서 그대는 구원하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순수한 신앙이 아니다. 다만 그 영혼이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의 소망으로 붙잡을 때 순수한 믿음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그 신앙을 가진 자로 영혼의 모든 애정을 그리스도에게 두게 하며 자신의 지식이 성령의 지배를 받게 하고 자신의 품성이 거룩한 품성을 따라 형성되게 한다. 392 그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 아니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바라보게 하고 거룩하신 품성과 동화하게 한다(신 30:11-14 인용되었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신 30:6)이라고 하였다.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적인 사업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멸망하여 가는 죄인이 “저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러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갈바리의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저는 이 이상 더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또한 지금 저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용서를 받아들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구세주이시다. 주님께서는 한때 죽으셨으나 다시 부활하셨으며 항상 살아 계시사 우리들을 위하여 중보하고 계신다. 우리들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시인할 것이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죄로 더럽혀지고 악으로 물든 죄인을 위하여 이루어진 큰 사업은 의롭다 하심의 사업이다. 진리를 말씀하시는 주님께서 그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신자에게 전가시키시며 온 우주 앞에서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그는 자신의 죄를 죄인의 대리자이시며 대치물이 되시고 담보물이 되시는 예수님께 맡겨 버린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믿는 모든 영혼들의 죄악을 떠맡으신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죄를 위하여 배상하셨으며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받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벧전 2:24)게 되었다. 393 우리들의 죄는 속죄 되었으며 제거되었고 바다 깊숙히 던져진 바 되었다. 우리들은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죄를 벗어나게 되었으며 우리들의 의가 되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고난을 당하셨으며 의로운 자께서 불의한 자를 위하여 희생하셨다.

비록 우리들은 죄인들로서 율법의 정죄 아래 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에 대하여 당신의 순종을 바치심으로 당신 자신의 의의 공로로서 회개한 영혼들을 주장하신다. 그리스도의 의를 얻기 위하여는 마음과 정신과 행동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회개가 무엇임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변화의 과정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인간의 모든 기능을 통하여 그 변화의 능력을 나타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와 같은 회개를 자발적으로 할 능력이 없으며 오직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엡 4:8)신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회개의 체험을 맛볼 수 있다.

누가 과연 참된 회개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믿어야 하며 허락을 믿고 구하면 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기도하고 싶은 성실한 욕구가 사람들에게 생길 때에 저들의 기도는 헛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실 것이며 성령께서 하나님께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향한 믿음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깨어 기도할 것이며 자신의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기 위한 자신의 노력을 열렬히 나타냄으로 그는 믿음이 섞인 기도를 올릴 것이며 믿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교훈들을 순종할 것이다. 그는 당면 문제에 대하여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편에 있음을 밝힐 것이다. 또한 그는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습관들과 교제를 포기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는 자는 회개와 용서는 오직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서만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보장을 가지고 죄인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이루어진 사업과 일치하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끈질긴 탄원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울며 매달림으로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자신의 영혼에 임하도록 해야 한다. 394 그리스도께서는 참회하는 자만을 용서하시며 당신께서 용서하시는 자는 먼저 회개에 이르게 하신다. 준비하신 섭리는 완전하며 모든 믿는 영혼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를 입혀 주신다. 하늘의 베틀로 짠 값지고 흠없는 두루마기는 회개하고 믿는 죄인을 위하여 준비되었으며 그는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사 61:10) 실 것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믿는 영혼으로 죄에서 자유하게 하시기 위하여 풍성한 은혜가 마련되었으며 온 하늘과 하늘의 무한한 자원을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하셨다. 우리들은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우리들은 우리 자신 안에서는 죄인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인들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히시므로 우리들을 의롭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셨으며 의인들처럼 취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로서 바라보신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많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권세를 대항하여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 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 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4-26).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 (요 1:14-16 인용).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확고한 신앙을 가지기를 바라시며 저들을 위하여 풍성하게 예비하신 놀라운 구원에 대하여 모르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저들은 장차 저들을 위하여 어떤 놀라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앞날만을 바라보아서는 안 되는데 사업은 지금에 완성되어야하기 때문이다. 395 신자는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결코 화해하지 않았으며 이것을 할 수도 없다. 그는 자신의 화평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되시고 당신께서 친히 평강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끝나게 하셨으며 나무 위에서 당신 자신의 몸으로 무거운 짐을 지셨고 당신을 개인적인 구세주로 믿는 모든 자들에게서 죄의 저주를 제거해 버리셨다. 또한 주님께서는 마음에서 죄의 지배하는 권세를 끝나게 하셨으며 신자의 생애와 품성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순수한 특성을 증거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간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데 이는 모든 신자들이 율법의 저주와 정죄에서 해방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죄의 다락에서 구원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며 당신의 의를 우리들에게 옷입혀주시므로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신자가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가 된다. 이러한 성화의 과정이 없이는 아무도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한다. 우리들은 성령의 감화와 그리스도의 의로 거룩한 분위기 가운데 거할 수 있는 자격을 얻지 못하는 한 천국에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천국에 지망하기 위하여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 10:27)는 율법의 요구에 응해야만 한다. 우리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을 때에만 이 일을 할 수 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마음에 생기 있고 발전하는 원칙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성령께서 계속 역사하시고 신자들은 은혜에서 은혜로, 능력에서 능력으로, 품성에서 품성으로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영적 성장을 이룩함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저주를 끝내게 하시며 신자로 하여금 죄에 속한 행동이나 영향에서 완전히 해방되게 하신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이 일을 가능케 하시는데 이는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히 2:17, 18)기 때문이다. 396 화목이란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고 죄인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무엇임을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치르신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아들이는 범죄자를 정당하게 용서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심령으로부터 죄인의 심령에 흘러내리는 자비와 사랑과 의의 통로가 되셨다.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요일 1:9)이다.

다니엘의 예언서 가운데 그리스도를 대하여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단 9:24)난다고 기록되었다. 모든 영혼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완전하신 순종으로서 주님께서는 율법의 모든 주장들을 만족시키셨으며 나의 유일한 소망은 나를 위하여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신 나의 대치물이 되시고 담보물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데 있다. 주님의 공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율법의 정죄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모든 요구에 응답이 되는 당신의 의로써 나를 옷 입혀 주신다. 나는 영원한 의를 가져다 주시는 주님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짜지 않은 흠없는 두루마기를 나에게 입히시고 하나님께 나를 제시해 보이신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며 모든 영광과 명예와 존귀함을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에게 돌려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저들이 그리스도에게 나오기 위하여는 어떤 특별한 충동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실한 목적만을 가지고 나올 필요가 있으며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신 자비와 은혜를 받아들일 결심만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셨다. 주님께서는 내가 구원 받기를 바라시며 나는 지체함이 없이 내 모양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갈 것이다. 나는 허락의 말씀들을 과감히 믿어 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이끄실 때에 나는 응답할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사도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롬 10:10)른다고 말하였다.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이 금한 것들을 계속 행하며 알고 있는 의무들을 등한히 하면서 마음으로 의에 이르도록 믿을 수 없으며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

397 순수한 신앙은 착한 행실을 나타낼 것인데 착한 행실은 곧 믿음의 열매인 까닭이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역사하시고 사람이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께 복종시키며 하나님과 협력할 때 그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바를 자신의 생애에서 실현해 보일 것이며 마음의 목적과 생애의 실천 사이에 조화가 있게 될 것이다. 모든 죄는 생명과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가증한 것으로서 포기해야 하며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사업을 계속적으로 행함으로 진보적인 체험을 얻어야 한다. 의지의 지속적인 복종과 끊임없는 순종에 의해서 의롭다 하심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은 주님의 법도를 지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람의 행실이 그가 고백하는 신앙과 일치하지 않을 때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 증거이다. 야고보는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고 말하였다.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앙은 영혼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약 2:24)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되었”(롬 4:3)다.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는다는 것은 의롭다 하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이것이 곧 바울이 열렬히 주장하는 바 의롭다 하심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 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20-25, 31)고 말하였다.

398 은혜란 공로가 없는 호의(好意)이며 믿는 자는 자기 자신의 아무 공로가 없이, 하나님께 올릴 아무 주장도 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다.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며 주님께서는 죄인의 대치물과 담보물로서 하늘 법정에 서 계신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기는 하였으나 불의를 행할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영혼을 순결하게 한다. 믿음은 싹이 나게 하고 꽃을 피우며 보배로운 열매의 수확을 거두게 한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선한 열매가 맺힌다. 병자를 방문하며 가난한 자를 돌보고 고아와 과부들을 도와주며 벌거벗은 자를 옷 입히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셨으며 사람들이 주님과 연합하게 될 때에 저들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게 되고 온유함과 진리가 저들의 발자취를 인도할 것이다. 얼굴의 표정은 저들의 경험을 나타내고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어서 예수님에 대하여 배운 자들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는 하나가 되고 주님의 품성의 아름다움이 능력과 사랑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과 굳게 연결되어 있는 자들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의롭다 하심의 의와 거룩케 하시는 은혜의 위대한 보관자이시다.

주님께 나오는 모든 자들은 주님의 충만하심을 받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왜 모든 불신을 내던져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가? 그대들은 휴식을 원하며 평강을 갈망하고 있다. 그대들이 과연 그렇다면 마음으로부터 이렇게 말하라. “주 예수님, 당신께서 저를 초청하셨으므로 제가 왔나이다.” 확고 부동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믿으라. 그러면 주님께서 그대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대들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는가? 과연 그대들은 진리와 은혜가 충만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는가? 그대들은 그리스도께서만이 주실 수 있는 화평을 받아들였는가? 만약 그대들이 아직 받지 못하였다면 주님께 복종하고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고결한 품성을 간구하라. 변함이 없고 단호하며 유쾌한 정신을 구하라.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으라. 그렇게 할 때에 그대들은 주님의 사랑스러우신 품성과 정신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39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주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고 동일한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의는 깨끗한 백진주처럼 흠이 없고 더러운 점이 없으며 죄가 없다. 이 의는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피로 사신 고귀한 보화인 구원은 값진 진주이다. 이 진주는 찾아 헤매이면 발견할 수 있다. 이 값진 진주를 발견하는 모든 자들은 그것을 사기 위하여 저들의 모든 소유를 팔 것이다.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버지와 하나이신 것처럼 저들도 주님과 하나가 된 증거를 나타내 보일 것이다. 비유 가운데 장사꾼은 값진 진주 하나를 얻기 위하여 자기의 소유를 다 판 자로 상징되었다. 이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의 비유는 고귀한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소유하기 위하여 저들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자들에 대한 아름다운 상징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치르신 희생으로 저들을 위하여 마련된 구원을 믿음으로 붙잡을 것이다.

언제나 값진 진주를 찾아 헤매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저들은 저들이 가진 바 그릇된 습관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다. 또한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저들 안에 사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지 않는다. 그런고로 저들은 보배로운 진주를 발견하지 못한다. 400 또한 저들은 부정한 야심과 세속적인 매력에 대한 저들의 애착을 버리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저들은 십자가를 높이지 않으며 극기와 자아 희생의 생애로써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다. 완전한 복종이 없이는 진정한 안식과 기쁨이 없으므로 저들은 영혼 안에 화평과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 무엇임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저들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였으나 아직 완전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며 저들은 하늘 왕국에 접근한 듯이 보이나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완전히 구원받지 못하고 거의 구원받을 뻔했다는 말은 거의 구원받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완전히 구원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매일의 헌신은 화평과 안식을 가져다 준다. 그 장사꾼은 값진 진주를 소유하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았다. 구원을 탐구하는 자들이 패배와 실망을 거부할 때 저들은 주님 안에서 화평과 안식을 찾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의로 저들을 옷 입히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저들에게 깨끗한 마음과 새로운 정신을 주실 것이다. 이러한 축복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의 대가로 마련된 것이며, 위하여 희생된 저들에게 값없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거저 주시는 이 선물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저들은 그 선물을 외면하고 오히려 이생의 쾌락을 선택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에 대하여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라고 말씀하셨다.

죄인들은 두려운 기만 속에 억눌려 있다. 저들은 구세주를 멸시하며 거부한다. 저들은 받은 바 값진 진주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내버리며 저희 구세주에게 모욕과 비방을 돌릴 뿐이다. 많은 여성들은 반지와 팔찌로 저들의 미모를 단장하며 찬탄의 대상이 되려고 생각하면서도 저들에게 성화와 명예와 영원한 재물을 얻게 해줄 값진 진주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정신 가운데 허영에 들뜬 감정이 도사리고 있는가? 저들은 하나님께서 충성된 자들에게 상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보다도 번쩍거리며 빛나는 세속적인 영화에 대하여 더욱 매력을 느끼고 있다. “처녀가 어찌 그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 고운 옷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계수할 수 없거늘”(렘 2:32).

40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 1:1-9).

나는 여러 번에 걸쳐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우리들에게 더욱 많은 빛을 주시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아왔다. 나는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실 새 빛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 빛은 진리의 말씀에서 비취는 보배로운 옛 빛이라고 대답하였다.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이를 빛의 가냘픈 광선만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은 주님께서 이미 우리들에게 주신 빛을 최선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증가된 빛을 받지 못한다. 402 우리는 우리들에게 이미 비추어진 빛 가운데 행하고 있지 못하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을 가리켜 계명을 지키는 백성들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의 심원한 원칙의 광대한 넓이를 깨닫고 있지 못하며 율법의 거룩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진리의 교사들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산 지식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침에 있어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우리들이 루터나 낙스나 및 다른 유명한 개혁자들에 대한 전기를 읽을 때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이 가졌던 능력과 불굴의 정신과 용기에 감탄하게 되며 저들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준 기본 사상을 포착할 것이다. 우리들은 저들을 연약한 데서 강하게 이끌어 준 힘의 근원이 무엇이었음을 알고 싶을 것이다. 비록 이러한 위인들이 하나님의 그릇으로 사용되었으나 저들에게 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저들은 실수를 범하는 사람들이었고 또한 큰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우리들은 저들의 미덕을 닮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지만 저들을 우리들의 표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인물들은 개혁 사업을 수행함에 있어 보기 드문 재능들을 가지고 있었다. 저들은 저들의 능력을 초월한 하늘의 능력으로 활동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기구로 사용하신 그 인간을 높이고 존경할 것이 아니라 저들에게 빛과 능력을 주신 주 예수님을 높이고 존경해야 할 것이다. 진리와 의를 사랑하고 이러한 진리의 기수들에게 주신 바 대대로 물려받은 위탁물들을 수집하는 자들은 모든 빛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만약 하늘 천사들이 하늘 사물에 관한 지식의 보화를 사람들에게 공개해 준다는 것을 널리 광고한다면 기독교계에 얼마나 큰 소동이 일어날 것인가! 천국의 분위기가 천사들의 주위를 둘러쌀 것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사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열심히 들을 것인가. 사람들은 천사들의 말에 주의를 집중시킬 책들을 저술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 천사들보다 더욱 위대하셨던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셨었다. 주님 자신이 하늘의 빛을 사람들에게 반사하시기 위하여 오셨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하늘 아버지와 하나가 되시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며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으로 발표하셨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주 예수님께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의 생명을 주셨다. 아,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주신 그 빛과 그 권능이 얼마나 놀라우신가! 403 주님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하심이 몸소 그 육체 가운데 거하신다. 이 진리야말로 신비 중에 신비이다. 그리스도의 존엄성을 깨닫기 힘든 그 이유로 말미암아 구원의 신비를 이해하기 어렵다. 수치스러운 십자가가 높이 세워지게 되고 주님의 두 손과 발에 못이 박히며 무자비한 창이 주님의 가슴을 찔렀을 때 인류를 위한 구원의 대가가 지불되었다.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께서 나무 위에 당신 자신의 몸을 매다심으로써 우리들의 죄를 지셨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슬픔을 거두어 가셨다.

구속은 우리들의 가장 면밀한 사색의 가치가 있는 영원한 주제이다. 따라서 구속은 가장 발랄한 상상력의 가장 깊은 생각과 범위가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이해력 밖에 있다. 과연 누가 하나님을 찾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지혜와 지식의 보화들은 만민에게 공개되어 있다. 그러므로 가장 재능이 탁월한 허다한 인물들이 저들의 전생애를 바쳐 항상 예수님을 저들의 앞에 모시고 주님의 비할 데 없는 매력을 묘사하기 위하여 연구하였을 것 같으면 저들은 그 과제를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비록 위대하고 재능이 탁월한 저술가들이 놀라운 진리들을 밝혀주었으며 백성들에게 증가된 빛을 나타내 보여주었으나, 아직도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사상들을 발견할 수 있고 연구해야 할 광범위한 분야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구원의 주제가 영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세대를 거쳐 사업은 진전되어 왔으며 그리스도의 생애와 품성이 묘사되어 왔으며 대속의 희생 제물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게 되었다. 구원의 주제는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구원 받은 자들의 마음으로 깊이 연구해야 할 것이다.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구속의 경륜 가운데 새롭고 풍부한 사실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날 우리들과 함께 계신다면 옛날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오묘하고도 생생한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를 원했으나 저들의 세속적인 사상과 흐리고 부족한 이해력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저들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엄숙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축복을 받지 못하였다. 404 영적 성장의 결핍은 그리스도에게서 비취는 빛의 풍부한 광선이 들어올 문을 닫아 버린다. 우리들은 결코 우리들을 위한 증가된 빛이 없는 그런 단계에 다다르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들은 항상 심원한 취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선입 관념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그 말씀에 내포된 의미를 깨달을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근원이시며 창시자이셨다.

구약의 위대한 주제들은 오해되었고 그릇 해석되었으며 진리를 설명해야 할 그리스도의 사업은 진리를 받은 백성들에 의해서 이해되지 못하였다. 선지자들은 기별을 받아 기록하였으나 백성들은 선지자들이 기록한 말씀의 신령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저들은 진리의 뜻을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깨달음에 더딘 것에 대하여 견책하셨다. 저들은 주님의 말씀의 신령한 위력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주님의 고귀한 교훈의 대부분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보혜사가 오셔서 진리의 영이 저들의 기억에서 상실한 말씀들을 회상시켜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주님께서는 저들이 깨닫지 못한 진리의 고귀한 보석들을 저들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려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이후에 주님의 제자들은 진리의 교훈들을 다시 듣게 될 때에 기이함과 경탄의 느낌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는 그 교훈들이 저들에게 새로운 사상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주님께서는 저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눅 24:44, 45)셨다고 말씀하셨다. 진리는 여러 사람들에게 새로운 요점들을 계속적으로 밝혀 주며 증거해 주고 있다. 진리의 광산을 깊이 파들어가는 모든 자들은 풍요하고 보배로운 보석들을 끊임없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 앞에 전개되어 있는 진리를 믿노라고 주장하는 모든 자들, 특히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자들이 저들 스스로 성경의 주제의 가장 중대한 의미에 대하여 명석한 개념을 갖게 되기를 갈망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옹호하는 입장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을 더욱 필요로 하는 위치에 있게 될 것이다. 405 만약 목회자들이 온유한 정신이 결핍되고 반대를 당할 때에 쉽사리 화를 낸다면 이것은 곧 저들이 신령한 교화를 필요로 한다는 증거이다. 사람들은 영혼들을 위하여 수고할 때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야 한다. 예수 안에 있는 진리는 불신자들의 마음에 진리를 하나의 이론으로서 혹은 논쟁적인 문제로서 소개되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화력을 끼칠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최선을 다하여 진리의 감동적인 특성을 그대로 살려서 진리를 증거하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사상에 엇갈리는 것을 나타낸다면 오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들은 그 진리를 반대되는 각도에서 나타내기 위하여 곡해하고 오용하며 허위로 진술할 것이다. 그대들이 진리로 인도한 자들 중에는 바벨론의 포도주를 마시지 않은 자들이 매우 적다. 저들이 진리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므로 예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 진리를 가르칠 필요가 있다.

진리를 사랑하노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위대하신 교사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온유하고 겸비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광산에서 부지런히 일하여 오고 여러 세기 동안 감추어진 거룩한 신비 속에 있는 풍부한 진리의 광맥에서 값진 광석을 발견한 자들은 저들이 믿는 진리로 말미암아 저희 품성 가운데 성화시키는 능력을 나타냄으로써 모든 진리의 근원이신 주 예수를 높일 것이다. 영혼의 깊은 성전 안에 예수님과 그의 은혜를 모셔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주님께서는 말과 기도와 권면과 거룩한 진리를 증거하는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인데 바로 이것이 신앙적 성공의 큰 비결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수고에 자기 중심 사상이 섞이게 될 때에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그 진리가 우리들 자신의 심령을 거룩케 하지 못하며 순화(純化)시키지 못하고 고결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자기 중심적 사상은 우리들이 주님께서 쓰실 그릇이 못됨을 증거할 것이다. 오직 열렬한 기도를 통하여서만 우리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즐거운 교제를 가질 수 있으며 이러한 복스러운 교제를 통해서만 말과 정신이 그리스도의 정신과 더불어 향기롭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교제 가운데는 살피지 않는 마음이 없을 것이다. 고귀한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는 깨어 살피도록 분부하셨다. 자신을 살피는 일을 단 한 순간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 있으므로 마음을 부지런히 지켜야 한다. 그대들이 입술로 범죄하지 않도록 마음의 생각을 살피고 단련하라.

406 우리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대하여 이해하고 싶어 한다. 우리들은 이 때에 대하여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 시대의 긴박성에 대하여 그 절반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나는, 우리들이 대적해야 될 원수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이며 우리들이 그를 대적하기 위하여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함을 생각할 때 나의 심령은 몹시 떨렸다.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체험하게 될 그 입장을 설명해 주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련과 그리스도의 초림 직전에 저들이 보인 태도에 대한 광경을 여러번 반복해서 나에게 보여주셨다. 원수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하여 모든 기회를 포착하려고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였는지. 오늘날에도 역시 사단은 하나님의 종들의 마음을 어둡게하여 저들이 고귀한 진리를 분별할 수 없게 하려고 힘쓰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세상에 오셨을 때에 사단은 이미 이 땅 위에 있었고 말구유에서 갈바리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 걸으신 행로의 매 발자국마다 그는 논박하였다. 사단은 천사들에게 극기의 정신을 요구하신 하나님을 비난하였다. 사단이 비난하는 요점은 하나님 자신이 극기에 대한 뜻을 모르며 당신 자신이 남들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시키는 일이 없으면서 어떻게 천사들에게 극기의 정신을 요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사단이 하늘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비난한 것은 바로 이런 점이었다. 407 그가 하늘에서 추방된 이후로 계속해서 주님께 비난한 점 역시 주님 자신이 스스로 희생하지 않으면서 가혹한 봉사를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거짓된 비난을 대처하고 하늘 아버지를 나타내 보이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들은 주님께서 스스로 인성을 취하시므로 견디셔야만 했던 그 굴욕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인간에게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 치욕 거리가 되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는 하늘의 대주재이셨고 영광의 왕이었으나 당신께서 친히 갓난 아기가 되고 인간의 궁핍과 재난을 당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시기 위하여 또는 재물과 권세를 가진 인물이 되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낮추신 것이 아니라 본래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들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것은 주님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로 부요케 하시려고 가난하게 되신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매 발자국마다 굴욕의 길을 걸으셨다.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세상의 빛을 받지 않으므로써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쫓겨 다니셨다. 사람들은 저들이 처해 있는 입장을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의 고귀한 보석들을 주셨으나 인간은 미신과 오류의 쓰레기 가운데 묻어 두었다. 주님께서는 저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베풀어 주셨으나 저들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유전으로 말미암아 묻히게 되므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을 예측하셨다. 주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시고 진리를 본래의 위치에 두시기 위하여 오셨다. 오직 예수님께서만 인류가 구원받기 위하여 알 필요가 있었던 진리를 나타내실 수 있었다. 오직 주님께서만이 진리를 본래의 체제 속에 넣으실 수 있었으며 진리를 오류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람들에게 하늘의 빛 가운데서 진리를 밝히는 일이 주님의 사업이었다.

사단은 주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분기하였으니 이는 인류가 타락한 이래로 사단이 빛을 흑암으로, 또한 흑암을 빛으로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여 온 것이 아니었던가?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에 대한 진리의 정당한 관계에서 백성들 앞에 진리를 나타내시려고 노력하고 계셨을 때에 사단은 유대의 지도자들을 통하여 역사하였고 저들에게 세상의 구세주에 대한 적개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아, 그리스도께서는 제사장들에게 진리의 위대한 보화들을 보여주시려고 얼마나 간절히 바랐으며 얼마나 주님의 심령을 애태우셨던가! 그러나 저들의 정신은 주님의 왕국에 관련된 진리를 깨닫기에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악에 기울어졌다. 408 성경 말씀은 올바로 읽혀지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강림을 고대하여 왔으나 주님의 재림시에 보일 모든 영광으로 오실 줄로 생각하였다. 주님께서 왕의 모든 위엄을 갖추시고 오시지 않았으므로 저들은 주님을 완전히 거부하였다. 저들이 주님을 거부한 것은 단순히 주님께서 웅장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들이 주님을 거부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순결의 화신(化身) 이었고 저들은 불순결하였기 때문이었다. 주님께서는 흠이 없으신 완전 무결한 인간으로서 이 지상에서 생애하셨다. 타락과 죄악 가운데서 나타내 보이신 그러한 성품은 타락한 인간의 욕망과 조화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주님께서는 모욕을 당하시고 멸시를 받으셨다. 주님의 순결한 생애는 인간의 심령에 빛을 던져 주었으며 저들에게 추악한 특성을 드러낸 죄악을 발견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흑암의 권세로 말미암아 모든 생애의 단계에서 공격을 받으셨다. 주님께서 침례를 받으신 이후에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가시게 되었으며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셨다. 나에게 수많은 편지들이 왔는데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꼭 같은 성정을 갖고 계시지 않았으며 만약 인간과 꼭 같은 성정을 가지셨다면 그와 같은 시험들을 받을 때에 패배하셨을 것이므로 과연 그리스도께서 어떤 성정을 갖고 계셨는지 확증해 달라는 편지였다. 만약 주님께서 인성을 취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모본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주님께서 인성의 참여자가 아니었다면 우리 인간이 시험을 당하는 것처럼 시험을 당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주님께서 시험에 굴복하는 일이 가능치 않았다면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분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자격으로 인간을 위하여 싸움을 싸우시려고 오셨다는 것은 하나의 엄숙한 진실이었다. 주님께서 당하신 시험과 쟁취하신 승리는 우리 인간이 모본이신 주님을 모방하여야 하며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었다. 신성의 품위가 인성의 수준으로 퇴화된 것이 아니다. 신성은 본래의 위치를 견지하였으며 인성이 신성과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의 격렬한 시험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오랫동안 금식하시고 굶주리므로 기진하셨을 때 이 세상의 임금이 주님께 와서 돌들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주님께 제의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계획된 것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굶주림과 가난이 무엇임을 알아야 했고 인간적인 경험의 모든 국면을 맛보시도록 대비하셨던 것이다. 409 주님께서는 인간이 요구하여 얻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힘입어 시험을 이겨내셨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를 굳게 붙잡았으며 누구든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것과 같은 동일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은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가 될 수 있으며 시험과 시련 가운데서 천국의 도움을 얻지 못할 영혼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능력의 근원을 나타내시므로 인간이 결코 인간 자신의 무력한 재능을 의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오셨다.

시험을 이기려는 자들은 저들 자신의 모든 능력을 기울여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저들은 거룩한 능력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번민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의 모본이 되시기 위하여 오셨으며 우리들이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리시려고 오셨다. 우리가 어떻게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을까?-”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벧후 1:4) 될 수 있다. 사단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는 구세주의 영혼을 발로 밟지 못하였다. 그는 머리를 상하게 하지 못하고 발꿈치를 상하게 하였을 뿐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모본을 통해서 인간이 완전 무결하게 죄를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해 보이셨다. 인간은 악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데 그 능력은 이 세상이나 사망이나 지옥이 지배할 수 없는 능력이며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저들을 승리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저들 인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될 수 있다.

복음 사업의 체계 가운데서 진리를 증거하고 타락한 인간에게 주신 교훈과 원칙을 나타내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업이었다. 주님께서 증거하신 모든 사상은 당신 자신의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아무에게서도 어떤 사상을 빌릴 필요가 없었는데 이는 주님 자신이 모든 진리의 창시자였기 때문이었다. 주님께서는 모든 지혜가 당신의 것이었고 모든 진리의 근원이 되시고 원천이셨으므로 선지자들과 철학자들의 사상을 증거하며 당신 자신의 독창력을 보존하실 수 있었다. 주님께서는 만물보다 먼저 계셨으며 당신의 교훈을 통하여 각 시대를 위한 영적 지도자가 되셨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였다. 멜기세덱은 그리스도가 아니었으며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하늘 아버지의 대리자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과거 모든 세대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셨고 세상의 빛이 되어 오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리의 대표자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 때 그를 그의 고향과 동족에게서 이끌어 내어 분리시키셨다. 410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형상을 따라 그를 꼴지으려고 하셨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계획에 일치되는 교훈을 그에게 주시기를 원하였다. 아브라함은 세속적인 교사들의 성품을 닮아서는 안 되었다. 그는 자기 자녀들과 자기에게 딸린 권속들에게 여호와의 법도를 지키는 법과 공의와 심판을 명하는 방법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아야 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행하기를 바라는 것도 역시 이러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우리들 자신의 가족을 다스리는 방법, 자녀들을 지도하는 방법 및 권속들을 명하여 여호와의 법도를 지키게 하는 방법을 이해하기를 바라고 계신다.

요한은 특별한 사업을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일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주님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것이었다(마 3:3). 주님께서는 요한을 선지자들이나 랍비들의 학교에 보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요한이 천연계와 천연계의 하나님에 대하여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그를 분리하여 사막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제사장들이나 관원들의 성품을 닮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는 특별한 사업을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입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기별을 맡기셨다. 요한이 제사장들과 관원들에게 나가서 혹시 그가 기별을 전파해도 좋으냐고 물어 보았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정신과 가르침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저들에게서 멀리 떼어놓으셨다. 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였으니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 40:3-5). 바로 이것이 우리 백성들에게 전해야 할 기별이다. 우리들은 마지막 때에 접근하고 있으며 우리가 전해야 할 기별은 “대로를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사 62:10)는 것이다. 백성들은 깨우침을 받아야 한다. 지금은 화평과 안전을 외칠 때가 아니다. 우리들은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사 58:1)는 권고를 받았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들의 대리자이신 주님께 비추었는데 이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들에게도 비추일 것을 말해 주고 있다. 41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령한 팔로는 무한하신 자의 보좌를 붙잡으셔서 인간을 하나님과, 세상을 하늘과 연결해 놓으셨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들에게 임해야 한다. 우리들에게는 하늘 위로부터 부어 주시는 거룩한 기름이 필요하다. 인간이 아무리 지능이 높고 아무리 많은 학식을 배웠다 할지라도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굳게 붙잡지 않는 한 가르칠 자격을 얻을 수 없다. 하늘과 연결되어 있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사업을 행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써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나설 것이다. 만약 거룩한 능력이 인간의 노력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가장 위대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모든 것도 일고(一考)의 가치가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들의 사업에 성령이 결핍되어 있다. 우리 형제들이 보여주는 불화의 정신을 보는 것 이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인들처럼 서로 만나서 논쟁점이 되는 교리들을 정중하게 검토할 수 없다면 우리들은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나는 성경의 교리들을 허심 탄회하고 솔직하게 검토할 수 없는 자들의 성품을 본받을까 두려워 그런 장소에서 도망가고 싶은 심정을 느끼게 된다.

견해를 달리하는 주장에 대한 증거들을 편견이 없는 정신으로 검토할 수 없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업의 어떤 분야에서도 가르칠 자격이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침례이다. 성령의 침례가 없이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직후에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그 이상으로 우리들은 세상에 나가 외치기에 더욱 합당치 못하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결핍한 상태를 아셨으며 하늘 위로부터 능력을 받게 될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교사는 먼저 배우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전진하는 진리에 대한 증거들을 바라보기 위하여 그의 눈에 안약을 발라야 할 것이다. 만약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나누어주기 원한다면 먼저 의의 태양이신 주님의 빛이 그의 마음속을 빛으로 환하게 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도 성경 말씀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그대들이 겸비하고 배우고자 하는 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들을 대할 때에 하나님의 천사들은 그대들의 곁에 서서 진리의 증거들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하나님의 영께서 그대들에게 임하시면 다른 사람의 주장들을 검토하는 일에 있어서 사단이 그리스도를 적대시한 유대 민족의 지도자들의 마음에 충동을 일으킨 것과 같은 비난과 비판의 정신이 없을 것이다. 412 마치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그대들에게 “거듭나야 하겠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7, 3)고 권고하는 바이다. 그대들은 진리의 거룩한 주장들을 분별하기에 앞서 거룩한 성품을 가져야 한다. 교사가 먼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우는 자가 되지 않는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에 합당치 못하다.

우리들은 모든 견해 차이가 녹아서 없어지는 그런 지경에 이르러야 한다. 만약 내가 빛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 빛을 증거하는 일에 나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가령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전하시려고 하는 기별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과 의논한 결과로 하나님께서 전하시려고 하신 자들에게 그 빛이 미치지 못하고 문이 닫히게 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눅 19:37-40)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예언된 기별의 전파를 중지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되어야만 하였다. 주님께서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말 4:5)라고 말씀하셨다. 누군가가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나타나야 하며 그가 나타날 때에 사람들이 “그대는 너무나 지나치게 열성을 보인다. 그대는 정당한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지 않다. 내가 그대에게 기별을 전하는 방법을 가르치리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사업과 인간의 사업을 식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그대로 진리를 말할 것이며 나는 지금 단호하게 만약 그대가 불화의 정신을 갖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허물을 찾는다면 그대는 결코 진리를 깨달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바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고 말씀하셨다. 413 저들은 거룩하고 영원한 사물을 깨달을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형제들이여 우리들은 인간을 의존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數)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 2:22).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의 무력한 영혼들을 예수님께 의탁하라. 산속 깊이 있는 샘에서 마시다가 낮은 계곡의 샘에서 마시면 우리 비위에 맞지 않는다. 밑에 있는 시냇물을 버려 두고 높은 곳에 있는 샘을 찾아가자. 만약 그대들이 이해할 수 없고 또한 찬성할 수도 없는 어떤 진리의 요점이 발견된다면 신중히 검토해 볼 것이며 말씀을 말씀으로 비교해 보고 하나님의 말씀의 광산 깊숙히 들어가 진리를 채굴해야 할 것이다.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과 그대들의 견해를 하나님의 제단 위에 올려 놓아야 하며 그대들의 선입 관념을 모두 버리고 하늘의 영께서 그대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도록 해야 한다.

나의 형제가 한때 말하기를, 믿게 될까 두려워 우리들이 주장하고 있는 어떤 교리에 관해서든지 듣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그는 집회에 참석하거나 설교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그는 마치 자기가 그 설교들을 들은 것처럼 죄책감을 느꼈노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며 그에게 주신 이 기회에 대하여 책임을 지우실 것이었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교리들에 대하여 편견을 갖고 있는 자들이 우리들 가운데 많이 있다. 저들은 들으러 오지 않으며 신중히 검토하지도 않고 다만 무지한 가운데 반대를 내세울 뿐이다. 저들은 저들이 취한 입장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하고 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7-19).

이 성경 말씀은 확고한 기별 밑에서 살면서도 그 기별을 들으러 오지 않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414 주님께서 당신의 진리에 대한 새로운 증거를 주시고 그 진리를 새로운 배경에 두셔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게 하셨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대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빛을 전달해 주기 위하여 어떤 계획들을 세우고 있는가? 또한 그대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세 빛을 보내시지 않으셨다는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모든 자만심과 이기주의와 의견을 주장하는 교만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발 앞에 꿇어 엎드려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랍비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많은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신비들을 증거하실 때에 와서 들었으나 저들은 배우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었고 주님을 비판하고 주님에게서 어떤 모순을 포착하여 백성들에게 편견을 품게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저들은 저들이 가진 지식으로 만족케 하였으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참된 목자의 음성을 알아야만 한다. 과연 지금 이때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고 기도해야 할 가장 적절한 때가 아닐까? 우리들은 불화의 위험에 처하여 있으며 논쟁점이 되는 교리들을 두고 파당을 지을 위험 속에 있다. 우리들은 진리가 무엇임을 깨닫기 위하여 열성과 겸비한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으려는가?

나다나엘은 침례 요한이 구세주를 가리키며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세계의 구원자이신 주님의 외모를 보고 실망하였다. 고생과 궁핍의 흔적을 가진 저가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을까? 예수님은 노동자였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셨다. 나다나엘은 더 생각할 필요가 없는 듯이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과연 어떤 성품의 소유자였는지에 대하여 결정적인 견해를 굳히지 않았다. 그는 무하과나무 밑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사실상 그분이 메시야였는지 하나님께 물어 보았다. 그가 아직 그곳에 있을 때에 빌립이 와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고 말하였다. 그러나 “나사렛”이란 말이 또다시 그의 불신을 자극시켰으며 그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하였다. 그는 편견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빌립은 그의 편견을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다. 빌립은 단순하게 “와 보라”고 하였다. 415 나다나엘이 예수님 앞에 왔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은 깜짝 놀랐다. 그는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5-48)고 하셨다.

우리들 역시 무화과나무 밑으로 가서 과연 무엇이 진리인지 알기 위하여 하나님께 탄원해야 옳을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다나엘을 내려다보신 것처럼 우리들을 내려다보실 것이 아닌가? 나다나엘은 주님을 믿게 되었으며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라고 부르짖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 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49-51).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면 바로 이러한 것을 우리들이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사람을 의존하지 않고 당신을 의존하기를 바라신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새 마음을 갖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빛의 계시를 우리들에게 주시려고 하신다. 우리들은 모든 난관과 더불어 씨름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논쟁점이 있는 교리들이 제시되었을 때에 그대들은 인간의 의견을 묻기 위하여 사람을 찾아가서 그의 의견을 듣고 그대의 결론을 얻으려고 하는가?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나아가라. 그대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고하고 그대의 성경을 들고 마치 숨은 보화를 찾듯이 말씀을 연구하라.

우리들은 진리를 연구함에 있어 깊이 탐구하는 습관을 기르지 못하였다. 현대 진리를 믿는 모든 영혼은 자기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답변해야 할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왕들, 귀족들, 통치자들 및 세상의 위인들 앞에 서도록 부름을 받게 될 것이며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알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확실히 회개한 남녀들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이 세상의 위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보다 당신의 성령에 의해서 한 순간에 더 많은 것들을 그대들에게 가르칠 수 있다. 온 우주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쟁투를 주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위하여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실 기회를 마련해 놓으셨다. 416 천사들은 누가 이 기회를 유용하게 이용할 것인지 보기 위하여 얼마나 열심히 바라보고 있는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기별이 증거되었을 때에 저들은 그 기별을 반대하기 위하여 일어서서는 안 되며 성경으로 돌아가 율법과 증거의 말씀으로 비교해 보아야 하며 그 기별이 말씀에 맞는지 혹은 맞지 않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정신이 확대되기를 바라신다. 또한 주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우리들에게 부어 주시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모든 보화들을 우리들에게 공개하실 수 있으므로 우리들은 매일 큰 잔치를 가질 수 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버지와 하나이신 것처럼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며 하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들을 사랑하실 것이다.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얻으셨던 꼭 같은 도움을 얻을 수 있으며 모든 위기에서 능력을 얻을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전위(前衛)가 되시고 또한 후위(後衛)가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들을 막아주실 것이며 우리들이 통치자들이나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 앞에 이끌려 나가게 될 때에 무엇을 말해야 할 것에 대하여 미리 곰곰이 생각해 둘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그날에 가르쳐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도우셔서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되려고 힘쓰기 이전에 예수님의 발 앞에 꿇어 엎드려 먼저 주님에게서 배우게 되기를 바란다.

성경이 우리들의 신경(信經)임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깨달으며 순종할 때에 밝은 빛을 세상 사람들에게 반사할 수 있고 새로운 진리를 받아 실천에 옮기게 되며 우리들을 강한 결속으로 예수님께 묶어 놓을 것이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들의 유일하신 경이 되고 연합의 유일한 증서이다. 거룩한 말씀에 굴복하는 자들은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우리들 자신의 견해와 사상이 우리들의 노력을 지배하여서는 안 된다. 인간은 오류에 빠지기 쉬우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없다. 서로 논쟁에 휘말리는 대신에 사람들은 주님을 높여야 한다. 우리들은 주님께서 “기록하였으되”라는 말씀으로 반대의 세력을 물리치신 것처럼 우리들도 말씀으로 모든 반대의 세력들을 대처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성경은 우리 신앙과 교훈의 표준이다”라고 기록된 깃발을 높이 쳐들어야 한다(리뷰 앤드 헤랄드, 1885년 12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