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뷰

[열정 36℃] 신학과 출신 독학파 테너, 팝페라 스타가 되다

2020.06.04 조회수 6,197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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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36℃] (5) 팝페라 그룹 ‘포르테 디 콰트로’ 이벼리(신학과 07학번) 동문
JTBC <팬텀싱어> 시즌1 우승해 데뷔
대학시절 ‘U2CAN’으로 성악 입문…독학으로 실력 키워
“내 선택 믿었다. 그리고 최선 다했다”

삼육대학교 홍보팀이 인터뷰 기획 <열정 36℃>를 연재합니다. ’36℃, 뜨거운 열정으로 도전하는 삼육 청년들의 이야기’라는 주제로, 사회 곳곳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젊은 동문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지난 2016년 11월, JTBC에서 남성 팝페라 그룹을 결성하는 오디션 프로그램 <팬텀싱어>가 첫 방송됐다. 당시 ‘이벼리’라는 이름의 한 청년이 무대에 올랐다. 이 청년은 “영혼으로 노래하겠습니다”라는 당찬 포부를 밝혔지만,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그에게 관심을 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노래가 시작되자 현장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다. 아마추어답지 않은 가창력과 진정성 있는 울림이 프로듀서들은 물론 방송을 지켜보던 시청자들까지 감동시켰다. 방송 직후 그의 이름은 주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을 달궜다.

이 반전 드라마의 주인공은 우리 대학 신학과 07학번 이벼리 동문이다. 그는 이후 몇 달간 이어진 치열한 서바이벌 과정을 거친 끝에 최종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팀 포르테 디 콰트로(이하 포디콰) 내에선 유일한 비성악인 출신이었다.

그를 다시 떠올린 건 얼마 전 팬텀싱어가 시즌3로 다시 돌아와서였다. 첫 시즌 우승팀인 포디콰의 성공이 없었다면 시즌3까지 나올 수 없었을 거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중론. 우승 후 3년이 지났지만, 포디콰는 방송 때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리며 국내 크로스오버 최정상 그룹으로 우뚝 섰다.

전국 투어 콘서트는 매회 전석 매진을 기록하고, 방송활동도 활발히 하며 벌써 3집까지 앨범을 냈다. 일본에서 클래식 음반차트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반짝인기를 끌다 잊혀져버린 여느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자들과는 달랐다.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개포동 연습실에서 이벼리 동문과 마주앉았다.

노래하는 사람

Q. 코로나19가 음악인의 일상도 바꿔놓았나.

“공연이 많이 줄었다. 예전 같았으면 꽉 찬 스케줄로 일주일이 정말 바빴을 거다. 어쩌다 쉬는 날이 생기면 몸이 버틸 수 있도록 정말 필사적으로 쉬고 그랬는데. 요즘은 지금 있는 연습실에 많이 오고 있다.”

Q. 얼마 전 포디콰 멤버들과 비대면 공연을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많은 분들이 힘들어하고 있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우리는 노래를 하는 사람이고, 무대에 서는 사람이다. 우리 노래를 기다려주고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니까 그분들을 위해서 온라인 공연을 해보자고 했다. 마침 세종문화회관이 ‘힘내라 콘서트’라는 무관중 공연을 기획해서 참여했다. 네이버TV로 관객들을 만났는데, 많이 좋아해 주셔서 참 감사했다.“

Q. 팬텀싱어 시즌3가 얼마 전부터 방송을 시작했다. 첫 시즌 우승자로서 어떻게 보고 있는지.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해본 사람은 트라우마 비슷한 게 있다. 치열한 서바이벌 과정에서 붙고 떨어지고 하는 장면에 감정이입이 일반 시청자들보다 훨씬 심하게 된다. 프로그램 자체를 즐기면서 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응원은 하지만, 막 집중해서 보려고 하진 않는다. 내 정신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웃음)”

Q. 팬텀싱어는 애초 기획 단계부터 우려가 컸다. 이미 서바이벌형 오디션 음악 예능이 식상해질 대로 식상해진 시기였고, 마이너 장르인 크로스오버를 전면에 내세웠다. 윤종신 프로듀서조차 “조기 종영만 안 됐으면 좋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예상외로 성공을 거뒀고, 시즌3까지 나올 정도로 롱런하고 있다. 그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크로스오버라는 장르 혹은 4중창이라는 포맷 자체가 사람들에게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간 게 아닐까. 대중음악을 소재로 한 오디션 프로그램은 계속 있었다. 그런데 클래시컬한 보컬리스트를 데려다 경쟁을 시키고, 그것도 제대로 잘 만들어서 보여주니까 화제가 된 거다.

또 우리나라에 클래식 음악을 잘하는 인재들이 정말 많다. 그런데 클래식은 관객층이 두텁지 않고 시장이 작아서 다 흡수할 수가 없다. 그래서 대부분 해외로 나가는데,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거다. 당장 독일이나 이탈리아만 가도 한국 유학생들이 차고 넘친다.

이렇게 일평생을 음악에 쏟아붓고 있었던 사람들이 설 곳이 없었는데, 팬텀싱어라는 프로그램이 나온 거다. 내공 있는 사람들이 방송에 쏟아져 나왔고, 실력이 발휘되면서 일반 대중들이 ‘우와’하고 관심을 갖게 된 게 아닌가 싶다.“

Q. 포디콰가 K팝 일색이던 국내 대중음악계에 다변화의 물꼬를 텄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 포디콰 이후 크로스오버가 하나의 장르로 굳건히 자리매김한듯하다. 그런 면에서 책임감 같은 건 없나.

“우리 이전에도 크로스오버 음악을 시도한 선배들이 많았다.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고. 우리는 그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책임감을 느끼거나, 우리가 시장을 선도한다거나 이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일에 열심히 할 뿐이다.”

▲ 팝페라 그룹 ‘포르테 디 콰트로’. 왼쪽에서 두번째가 이벼리 동문. 사진=아트앤아티스트 네이버 포스트

‘자네 성악 한번 해보지 않겠나’

이벼리 동문은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려는 꿈을 갖고 우리 대학 신학과에 입학했다. 조용하고 평범한 학생이었다. 학과 공부에 충실했고, 학내에서 열리는 강연이나 세미나, 비교과 프로그램에 종종 참여했다. 필리핀에 1년간 선교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대학시절을 “많은 것을 배우며 내면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때 참여했던 프로그램 중 ‘U2CAN’도 있었다. 우리 대학 인성교육원이 비전공생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음악 레슨 프로그램. 그게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줄은 몰랐다.

Q. U2CAN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캠퍼스를 걸어 다니다 우연히 게시판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보고 신청했다.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원래 바이올린이 정말 하고 싶었다. 그런데 악기가 필요했다. 물론 학교에서 무료로 대여해줬는데, 뭔가를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어서 어떻게든 구하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가난한 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나. 그래서 성악을 했다. (웃음)”

Q. 입문자로서 어떤 도움을 받았나.

“바리톤 이재웅 선생님께 배웠다. 자연스럽고 어떤 틀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스타일을 추구하는 분이셨다. 덕분에 뻔한 발성이 아니라 경계에 있는 듯한 나만의 발성과 소리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됐다. 하다 보니 어느 순간 깨우치는 순간이 왔다.”

Q. 처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나.

“맨 처음 가면 호흡을 먼저 배운다. 중학교 때 3년 정도 플룻을 해서 호흡이 어렵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플룻이 성악보다 호흡을 더 쓴다. 선생님은 그걸 모르니까 ‘이 친구 호흡이 왜 이렇게 좋지’ 하신 거다. 나중에는 소리도 짱짱하게 나오니까 한동안 ‘자네 성악 한번 해보지 않겠나’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나는 ‘저의 길이 있습니다’하고, 선생님은 ‘알~았~네~’ 하시고. (웃음)

사실 재능은 잘 모르겠고, 애정이 있는 만큼 깨우치고 배우는 속도가 판이하게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천재가 아닌 이상 시간을 때운다는 마음으로 하면 그만큼 더딘 거고. 스스로 연구하고 고민하고 열정이 있으면 확실히 빨라진다.“

Q. 졸업 후에는 U2CAN을 하지 못했을 텐데.

“U2CAN 덕분에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소리의 기본을 배웠다. 졸업 후에는 거의 독학이었다. 유튜브를 봤다. 동영상에 나오는 위대한 싱어들의 발성, 그리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디어와 힌트를 얻고 스스로 적용했다. 그 와중에 나만의 소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정말 많은 시간을 공부하는 데 쏟았다. 옥탑방에 살아서 마음 놓고 연습할 수 있었다. 온종일, 사계절 내내, 해가 바뀌어도, 계속 또 계속, 연습 또 연습이었다.”

Q. 독학을 고집한 이유는.

“물론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싶었다. 얼마나 받고 싶었겠나. 그런데 레슨비가 부담이어서 독학을 했다. 그래도 너무나 즐거웠다. 스스로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이 너무 행복했다.”

팬텀싱어

그즈음 신학과 동기들은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목사 혹은 전도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래에 푹 빠진 이 동문은 본격적으로 예능인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무대가 없었다. 비전공자에, 작품 경력도 없고, 외모까지 평범했던 그에게는 오디션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지원서를 내는 족족 떨어졌다. 비전공자의 한계였을까. 그러다 우연히 팬텀싱어 지원자 모집 공고를 보게 됐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원서를 넣었는데, 덜컥 합격해 방송까지 나가게 됐다.

Q. 어떤 가능성을 봤던 걸까.

“좀 특이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일반인인데 노래를 곧 잘하니까. 신기하다, 한번 써보자, 기회를 줘보자, 이런 게 아니었을까. 딱하기도 하고. (웃음) 지원할 때는 우승은커녕 본방에 나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전혀 안 했다. 오디션 기다리면서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자기들끼리 ‘어, 교수님 오셨어요?’ 이러면서 다 알더라. ‘대단하다, 난 당연히 떨어지겠지’ 했는데 붙여주더라.”

Q. 첫 방송이 기억난다. 아무도 관심을 안 가졌는데, 노래 듣고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날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을 달궜고. ‘반전’을 예상했나.

“반전은 있을 거로 생각했다. 프로필에 써낸 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프로듀서 분들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거의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 앞으로 수십 명을 심사했고, 뒤로도 또 있으니 다들 피곤함에 절어 있었다. 그런데 노래를 그렇게 해버리니까 나라도 놀랐을 것 같다. 그런 편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래 영상)

Q. 서바이벌 과정 중 언제쯤 본인에 대한 확신을 가졌나.

“솔직히 말하면 확신이 없었다. 그 과정이 너무 피로하고 힘들어서. ‘빨리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왜 안 떨어지지’, ‘오늘만 끝나면 좀 집에 가게 되지 않을까’ 이러면서 했는데, 이상하게 계속 올라갔다. 물론 그 와중에 죽어라고 열심히 했다. 그렇게 열심히 하니까 그만큼 힘이 들었던 거고.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꾸역꾸역 살아남았다.”

Q. 쟁쟁한 사람들이 정말 많았는데, 우승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배려’다. 중반 이후부터 2명, 3명, 4명 이런 식으로 팀을 계속 꾸려나가면서 경합을 했다. 그런데 중창의 경우 누구 하나가 돋보이고 싶어서 욕심을 내면 전체적인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진다. 그러면 꽹과리 같은 음악이 되고, 중창의 매력이 없어지는 거다. 그래서 멤버들 간에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포디콰는 다 그런 음악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성적이 좋았다. 우리는 이제 뭘 해도 항상 4명이 같이 움직인다. 서로 배려하고 밸런스를 맞추는 작업을 통해 가능했던 거다.“

▲ 포르테 디 콰트로 3집 발매 기념 전국투어 콘서트. 사진=아트앤아티스트 네이버 포스트

신학과 출신 테너

Q. 팬텀싱어 우승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포디콰가 3집까지 낼 거라고 예상을 했나.

“아니 전혀. 프로젝트 그룹이라서 우승 후 1년간 활동할 수 있도록 계약이 돼 있었다. 딱 1년 열심히 하고 내 삶으로 돌아가야지 생각했는데, 어느덧 3년이 지났다.”

Q. 같은 멤버 모두 성악을 전공했고,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혹시 본인도 신학이 아닌, 성악을 전공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

“전혀 없다.”

Q. 단 한 번도?

“물론 삶에서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서 끊임없이 달려가고, 노력해서 목표에 도달하는 것만큼 의미 있고 감동적인 것은 없을 거다. 정말 멋진 일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 자기가 뭘 잘하는지 모르고,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른다.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 거다. 나도 그랬다.

나는 오히려 조금 놨던 것 같다. 대학 때부터 다양한 경험을 하려고 했고, 그러면서 U2CAN을 만나고,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찾게 됐다. 나에게 온 현실을 받아들이고 의연하게 대처해나가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어깨에 힘을 빼고 나니 비로소 보였다. 움켜쥐고 있을 때는 두려움뿐이었다.“

Q. 혹시 신앙이 있나.

“물론이다. 나에게 신앙은 ‘잘 박힌 못’ 같은 거다. 절대로 뽑히지도, 꺾이지도 않는, 흔들리지 않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강력한 친구 같은 거다. 살아가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고, 절대 나를 쓰러지지 않게 하는 아주 강력한 원동력이다.”

Q. 결과적으로 성공을 했지만, 사실 하나하나의 선택들이 정말 무모해 보인다. 누구나 선택에 앞서 리스크를 고려하는데,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결코 그런 선택들은 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충분히 이해한다. 내가 봐도 내 선택들이 어이가 없으니까. 돈 아끼자고 악기 대신 성악을 했고, 신학과를 나온 애가 음악을 하겠다고 했다. 아무 경력도 없는데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갔다. 그런데 나는 당시 그 선택을 믿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했다.

보통 선택이 결과와 직결된다고 생각해서 선택마저 주저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하지만 선택은 과정일 뿐이다.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믿고 최선을 다하면 너무나 많은 기회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 기회에 맞설 힘이 생긴다.

선택 그 자체에 지나치게 무게를 두고, 그것에만 집중하고, 그다음 실행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냥 선택에서 끝나버린다. 자신을 믿고, 자신의 선택을 믿고, 최선을 다하면 분명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Q. 어떤 음악인이 되고 싶나.

“‘요나스 카우프만’이라는 테너 가수가 있다. 전 세계 오페라 극장 캐스팅 1순위고, 팬들의 인기투표에서도 부동의 1위다. 그런데 발성이 너무나 유니크해서 호불호가 굉장히 갈린다. 기존의 전통적인 음색을 좋아하는 분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당한 혹평을 한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너무 좋더라. 사람들의 비아냥거림이 있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끝까지 관철해나가고 자기만의 것을 갈고 닦는 그런 모습.

음악을 하면서 여러 딜레마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하나,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것을 해야 하나,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나를 갖다 맞춰야 하나,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내가 만들어내야 하나. 그런데 요나스 카우프만을 보면서 나다운 것이 결국 가장 대중적인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갇혀 있고 정형화되어 있는 것을 싫어한다. 그런데 내가 하고 있는 음악 장르가 그래서 그런지, 자꾸 스스로 갇히게 되더라. 클래식에 계속 나를 가두고 거기에 나를 맞추려고 하니 탈이 나는 것 같았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지 않나. 그러니까 더 자유롭게 생각하고 더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 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원고를 정리하면서 요나스 카우프만을 검색해 봤다. 그 역시 비전공자 출신의 늦깎이 성악가였다. 안정적인 삶을 살라는 아버지의 바람으로 수학과에 입학했다가 뒤늦게 성악으로 진로를 바꿨다. 경력 초기에는 발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한두 마디 노래하고 퇴장하는 단역 생활도 오래했다. 그렇게 밑바닥부터 올라가 21세기 최고의 스타 성악가로 발돋움했다. ‘비전공자 테너’ 이벼리가 롤모델로 삼은 것은 그의 삶 자체였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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